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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적 인간인가, 기능적 인간인가?

2012.01.15 20:23

다니 조회 수:9151

성품적 인간인가, 기능적 인간인가?
믿음은 성품을 통해서 표현되어야 한다
소재열
▲ 소재열 목사
사람은 개인적으로 볼 때 모두 훌륭하다. 흠잡을 곳이 없다. 그러나 함께 어울리기만 하면 문제가 된다. 상대를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를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자꾸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나를 섬겨달라고 요구한다. 나를 행복하게 해 달라고 한다. 거름은 되기 싫어도 거름위에 피는 꽃은 되고자 한다. 인간적으로 보면 모두가 다 재능이 있고 조건들이 대단하다. 그런데 위기가 찾아오고 문제와 갈등이 찾아온다. 왜 이와 같은 문제와 갈등이 존재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품을 갖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성품윤리보다 기능윤리를 앞세운다. 이것이 현대 정신문화이다. 인간의 됨됨이나 내면적인 성품이나 윤리적인 자질보다 어떤 기능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만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요구하신 자질은 정직하고 진실한 성품을 갖춘 사람이다. 현대사회는 사람의 됨됨이나 인격적인 자질보다 경쟁력을 갖춘 사람을 더 중요하게 요구한다.

지식이 모자라면 채우면 된다. 그러나 성실이나 정직한 성품은 한 순간에 고쳐지거나 만들어지지 않는다. 성품이 이기적이거나 모질게 되면 제아무리 기능적 재능이 탁월하다 할지라도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유능함과 정직함 중에 어느 쪽에 더 가치를 두고 있는가에 대한 좋은 사례가 있다. 학생들에게 컨닝을 해서 좋은 성적을 얻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컨닝하겠는가? 아니면 그리할지라도 컨닝하지 않겠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답변은 86%가 좋은 성적을 얻는 길이라면 컨닝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사용하겠는가?

한번은 큰 딸이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이 컨닝을 하기 때문에 컨닝하지 않는 나만 손해를 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 아버지 된 입장에서 “너도 요렁껏 커닝하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더 열심히 공부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하나님은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을 인정하신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며, 정직하고 진실한 자이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위해 며느리를 구하는 장면이 기록된다. 아브라함은 늙은 종을 보내 며느리를 찾는데 가나안 여인 중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고향 친족 중에서 택하라고 한다. 이방여자가 며느리로 들어오면 아들이 믿음에서 떠날 것을 염려한 것이다. 그래서 며느리의 첫째 조건은 믿음이었다. 둘째조건은 믿음을 갖고 있되, 가나안으로 오지 않으면 며느리가 될 자격이 없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요, 축복의 땅이었다. 가나안에 머무를 때에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임한 것이다. 그래서 결단하고 가나안 땅으로 와야 한다. 이것이 면느리 될 두 번째 조건이었다.

이렇듯 우리들의 신앙과 믿음은 첫째, 관념적 지식이 있어야 하고, 둘째, 그 지식에 동의해야 한다. 즉 아멘해야 한다. 셋째, 신뢰가 있어야 한다. 신뢰는 실천적 행동으로 이어진다. 내가 신뢰한 그 지식에 몸을 던지게 되어 있다. 이것이 믿음이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아브라함의 고향까지 약대 10마리를 몰고 670킬로미터에 이르는 머나먼 길을 떠났다. 부산에서 평양까지의 거리다. 약대가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40킬로미터라고 한다. 그렇다면 최소한 17일 이상이 소요된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아브라함의 고향인 메소보다미아에 도착한 것이다.

어떤 처녀가 주인인 아브라함의 며느리로 합당한 것인지 그 기준을 정했다. 우물로 물을 길러 나온 처녀에게 물항아리를 내려 내게 물을 마시게 해 달라고 했을 때 마시게 할 뿐만 아니라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면 그 처녀가 하나님께서 며느리로 정해 주신 줄을 알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기준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성품을 보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조건 없이 친절함을 베풀 수 있는 그 순수하고 진실한 성품이 며느리 될 자격이요, 기준이 된 셈이다. 그 성품을 믿음의 사람으로 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가 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표현하게 되어 있다. 요즘 처녀들은 배필감의 조건으로 첫째, 믿는 사람, 둘째, 키큰 사람, 셋째, 성격좋은 사람, 넷째, 유머 있는 사람, 다섯째, 직장이 안정된 사람, 여섯째 장남이 아닌 차남이라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사람이 나를 위해 기다려주겠는가? 이런 사람은 다 임자가 있는 법이다.

믿음은 전제된다. 그 믿음은 성품을 통해서 표현되어야 한다. 제아무리 좋은 조건을 내세워서 충족되었다고 할지라도 성품에서 실패해 버렸다면 문제가 있다. 어려운 사람을 볼 때 걱정해 주는 성품,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성품, 희생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성품, 그 얼마나 아름답고 하나님께서 기뻐한 사람인가? 장남은 원치 않고 차남을 원하는 마음은 좋은 남자를 원하긴 원하는 데 부모를 모시며 희생하며 살지는 않겠는다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요즘은 다 장남이다. 아들 하나인 가정이 대부분이다.

교회는 희생하는 사람을 찾고 있다. 목사는 우리 성도를 섬겨주어야 하는 데 왜 안 섬겨주느냐고 불평한다. 이 불평은 끝내 목사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도 받지 않겠다는 고집으로 이어진다. 이같은 완고한 고집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이 취급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삼상 15:23).

목사는 교인들을 섬기고 장로 역시 교인들과 목사를 섬기고, 교인들은 목사와 장로를 섬기고 동료 교인들을 섬기면 행복이 온다. 서로 각자 섬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이란 바로 이런 마음, 곧 섬기며 희생하며 살아가는 마음이다. 아무런 조건 없이 친절함을 베풀 수 있는 그 순수하고 진실한 성품이 바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성품윤리의 인간이라고 한다.
기사입력: 2012/01/10 [17:10] 최종편집: ⓒ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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