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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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예수를 죽였는가(신학적 관점에서)
(목회와 신학 04년 4월호에서 김동수 미국 나약대학교 교수 제공)
멜깁슨의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은 미국 각계각층의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 영화가 반유대주의 요소를 강 하게 지닌다는 이유로 제작 초기부터 반명예훼손 연맹(ADL : Anti- Defamation League) 같은 유대주의 운동기관의 거친 저항을 받았다. [타임]지의 리처드 콜리스 는 R등급(미성년자 관람불가)을 받은 이 영화가 가진 폭력성과 잔인성 그리고 무저항적 매저키즘으로 관객들에게도 외면 당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미국 위로크릭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와 하비스트 크루세이드의 그레그 로리 등 복음주 의 교회 지도자들은 천주교 신자에 의해 제작되고 제 2차 바티칸 공회 이전의 신학사상을 담고 있는 이 영화를 전폭적 으로 추천하는 아이러니컬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1960년대 초의 제 2차 바티칸 공회 이후 카톨릭 교회는 로마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서 미 사 때 더 이상 라틴어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성찬 때에도 안수 받지 않은 사람을 통해서 떡이 전달되도록 했고 그레고리의 성가 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더 친화적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들이 깁슨의 영화에서 번복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대사는 전적으로 라틴어와 아람어로 진행되었고, 예루살 렘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떠넘긴 복음서의 기록을 가감없이 그대로 영상에 띄워 유대인들의 원성을 야기한 점들이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인 지난 달 2월 25일에 맞추어 개봉된 이 영화는 상영되자마 자 매표소마다 표가 동이 났고 박스 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영화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앞으로 기독교 영화사에 있어 서 고전으로 남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이 영화를 보고 감동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 영 화만큼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사실적이고 감동적으로 표현한 영화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멜깁슨은 천주교 신자로서 어렸을 때에는 신부가 되려 했다. 그는 또 낙태나 동성연애에 반대하는 보수적 입장을 취해서 헐리우드 영화 관계자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뉴오커](The New Yorker)지와 가진 회견에서 깁슨은 13 년 전 35세 되던 해에 신앙의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 17세 때 예수님을 영접한 후 미온적인 신앙이 었던 지난 18년 동안의 방황의 귀결이었다. 그는 공허함, 후회, 절망,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 찼고, 자신이 무 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인생의 낭떠러지 끝에 서 있었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떠올렸다고 고백했 다. 그만큼 예수의 고난이 그의 인생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는 두 차례나 오스카상을 받았던 메가톤급 영화인이었지만 그의 마음 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시카고에서 5천여 명의 목회자들 앞에서 가진 이 영화 시사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필경 비평가들 의 혹독한 비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저는 헐리우드에서 제 자신의 세속적 유토피아를 꿈꿔왔지만 그것은 공허하기만 합니다. 이보 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으로 인해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며 여러분이 그 분을 믿든 믿지 않든 그 분의 죽으심이 지금 당 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사재 3천만 불을 쏟아 부어 이 영화를 제작했고 영화인으로서의 삶 과 경험 그리고 혼신의 힘을 쏟아 넣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크리스처너티 투데이]지의 데이비드 네프(David Neff)는 이 영화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 던 또 한 가지 요소를 지적했다. 그것이 멜 깁슨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기에 살았던 앤 캐더 린 에머릭의 [우리 주님의 비통한 고난] (Dolorous Passion of Our Lord)을 읽게 된 일이 다. 수녀 앤은 환상 속에 예수님의 수난을 체험하고 쓴 이 책에는 복음서에 나타나 있지 않는 내용들이 많지만 깁슨은 그 내용의 일 부를 도입해서 극적 효과를 더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는 것을 보다 못해 뒷마당으로 나와 흐느끼는 마리아에게 빌 라도의 부인 클로디아 프로클레스가 아마포를 준비해 와서 전해 준 장면, 그리고 고문장으로 돌아온 마리아가 그 아마포로 바닥에 흥건 한 예수님의 피를 닦아내는 장면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깁슨의 이 영화가 가진 놀라운 점은 그 내용이 성경적이며 신학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그것 은 그가 이해한 그리스도의 수난이 철저하게 창세기 3장 15절에서부터 시작된 영적 전투의 연장선에 있 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향해 기어오는, 사탄을 상징하는 뱀의 머리를 발로 밟 는 장면은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창세기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 예언이 십자가에서 성취 된 것으로 서술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그저 한 유대인이 정치적 풍랑에 휘말려 억울하게 십자가에 처형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자신이 어떤 고난을 겪게 될 것인가를 미리 아셨고 그것을 기도로 미리 준비하시고, 무지한 로마 군인 의 잔인한 채찍과 처형에 적극적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모습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이다. 이러한 우주적인 선과 악의 대립이 이 세상에 서 예수에 대한 폭력의 이면에 작용하고 있다든지 그리스도의 고난이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 말미암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다는 날카로운 신 학적 관점은 그리스도를 주제로 한 과거에 제작된 영화들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프랭코 제피렐리의 <나사렛 예수> 나 조지 스티븐스의 <위대한 이야기> 등은 신학적 관점에 초점을 두지 않고 복음서의 이야기를 자서전적 시각에서 제작 한 것이다.
이 영화는 예수님의 수난의 시작인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부터 클로즈업된다. 예수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 이 되도록 기도하실 때 사탄이 나타나 예수님을 야유하며 회유한다. "네가 이 죄까지 지려느냐?" "네가 그에 대한 형벌도 받으려느 냐?" 사탄은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 의해 채찍에 맞으실 때도 나타나고, 십자가를 지시고 걸었던 슬픔의 길에도 나타나 예수님 을 괴롭힌다. 사탄이 군중들 틈에 나타날 때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은 슬픔의 늪에 빠진 마리아에 대한 희롱이거나 아니면 예수 그리 스도를 믿는 믿음의 자녀들을 앞으로 괴롭히게 될 사탄의 자식들을 묘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탄은 가룟 유다에게도 나타나는데 그가 예수님을 제사장들의 손에 넘긴 후 괴로워서 자살하는 그 배후에 작용한 세력으로 묘사 된다. 사실 가룟 유다가 귀신에 들린 것은 사도 요한에 의하면 그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떡을 받아먹은 직후이다. 깁슨 이 유다가 귀신들린 시점을 예수님을 팔아 넘긴 후로 묘사하면서 그의 자살과 연결시킨 점은 요한복음의 내용과 맞지 않는다. 깁슨 은 이와 같이 예수님의 고난을 사탄과의 영적 싸움의 연장으로 해석하는데 그것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사탄의 종말 적, 반 교회적 역할에 대한 날카로운 이해에 근거한 것이다.
[타임]지의 콜리스는 깁슨의 이전 영화들이 지배 세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었고 1995 년 10개 부문에서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던 <브레이브 하트>가 화려한 폭력 영화였던 것처럼 이번 영화 도 이 성향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예수께서 성전 수비대에 의해 끌려가실 때부터 심하게 맞으시는 장면이라든지 로마의 전문적 인 고문대에 의해 소름끼치는 80여대의 채찍을 맞는 모습을 조금도 가감없이 카메라에 담아 영화 초반부터 선혈이 낭자 한 장면으로 도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예수의 피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입장이다. 예수님의 흘리 신 피가 나의 죄를 씻기 위한 것이며 그분이 당하신 수욕이 곧 나를 위해 대신해서 받으신 형벌이라는 이해없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만 계신 예수님의 무저항적이고 체념적인 모습과 갈기갈기 찢기는 그 몸을 보았을 때 보는 이는 어안이 벙벙하게 되고 큰 충격을 받 을 수도 있다.
[타임]지의 스캇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실패는 예수의 낭자하게 흘린 피의 의미가 무엇인지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것이라 했 다. 모든 영화에서 무죄한 자에 대한 폭력은 반드시 정당한 응징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깁슨은 이 점에 있어 우리를 실망시켰다는 것 이다.
깁슨이 그렇게 생생하게 묘사한 예수님의 처절한 수난이 과연 그의 폭력 성향적 영화 제작의 자연적 결과였을까? 그것은 아니라 는 것이 복음주의 시각을 가진 평론가들의 결론이다. 깁슨은 이 영화에서 레위기 17장 11절, "육체 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 가 죄를 속하느니라"의 진리를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구약에서 피가 요구되었듯이 신약에서도 피가 요구됩니다. 예수께서는 그 손 가락에 피를 낼 수도 있으셨지만, 그 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참으셨습니다"고 깁슨은 말했다. 깁슨에게 가장 깊은 감동 을 준 것은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속죄제가 되도록 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예수께서 '완전하게 복종하셨다'는 것이다.
깁슨의 속죄론은 성경 저자들의 속죄론에 대한 가르침을 잘 이해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기 700 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말하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 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3:5)라고 했다. 실로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서 질고를 당하시고 우리의 받을 징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구약의 예언에 의하면 누구든지 나무에 달진 자마다 하 나님께서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이 있듯이(신 21:22-23)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대신해서 십자가의 하나님 의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마신 것이다. 바울도 이 예수님의 대속적 형벌과 그로 인해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진 하나님과의 화목에 대 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 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이와 같이 이 영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론적 희생을 주제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 내에도 이 영화에 대한 비판 의 소리가 없지 않다. 깁슨은 이 영화에서 일방적으로 패배주의적 십자가의 형벌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서 자체가 예 수님의 고난의 자세한 항목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고 초대교회도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 분이 부활 승리하셨다는 점 과 균형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구속주가 되신 것은 그 분이 고난을 흡수할 수 있는 초인적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 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셨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의 효시 존 캘빈도 십자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십자가 의 형벌을 이미지화하는 것은 신자들의 주의를 하나님께로부터 빗나가게 해 우상이 될 수도 있다고 염려했다. 사실 깁슨 은 2시간 동안의 영상에서 예수님의 수난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전개되기까지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관객을 거칠게 몰아 가지만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이후 기독교의 더 큰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일 분도 안되는 영상으 로 처리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깁슨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 이후 하나님의 슬픔(하늘에서 떨어지는 큰 눈물), 하늘이 어두워 짐, 지진, 성전의 휘장이 갈라지는 장면 등을 통해 그 이후 전개될 십자가의 승리를 충분히 암시했다고 보여진다. 더욱이 사탄이 자 신의 망한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며 울부짖는 장면은 십자가가 사탄을 이기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음을 관객들에게 암시해 주기에 충분하 다.
[기독교 역사와 전기](Christian History & Biography)라는 잡지 의 크리스 암스트롱은 "마틴 루터는 스타우피츠에게 '예수님의 상처를 들여다 보라고' 채근하곤 했다. 그는 95개 조 반박문을 박고 나서, 신학자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분명한 것들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뿐이라고 말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골로새서 1장 24절의 바울의 고백을 생각나게 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 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자신이 받는 고난을 예수 그리스 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연장으로 이해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도들도 이 고난에 참여할 것을 권고한다. "그리스도를 위하 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으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 1:29). 참으로 핍박을 당하는 성도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다가오는 은혜보다 더 위로가 되는 것이 있었 을까 싶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고난이 가지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참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은 죄 사함의 원천이요 성도에게 위로 의 샘이 됨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에게 환희와 소망과 승리의 도취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 은 성도의 장래의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그 십자가에 못 박으셨기 때문에 완성될 수 있었다. 바울은 호령한다. "사망아 너 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아담의 원죄 이후 인류의 원수 는 육체적, 영적 사망에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와 사망을 대신 지신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제 우리는 더 이상 죄에 종노릇하지 않게 되었고 사망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되었다. 바로 이 점이 바울이 외친 복음의 핵심이었다(고 전 15:1, 롬 2:16).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한 방울 한 방울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 다. 이 눈물은 슬픔의 눈물, 고뇌의 눈물만이 아니라, 죄 씻음의 감격도 동반된 눈물이다. 깁슨이 묘사하는 고문과 십자가형의 영상 은 우리를 전율하게 하는 선혈의 낭자 그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하나님의 제단에 속죄의 피를 뿌리듯이 예수의 구 속의 피를 인류의 죄에 뿌리기 원했기 때문이다. 비평가들의 말대로 깁슨이 그의 영화에서 예수님의 생애와 부활의 모습을 더 많이 다 뤘어야 했다는 비평이 옳다고 할지라도 그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를 보여준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하나의 고전적인 작품 을 선사한 것이다.
깁슨은 말할 것이다. 나는 나의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일할 차례입니다. 이에 대해 응답이라도 하듯이, 영화 관 밖에는 뉴욕 성막교회의 성도들이 사람들에게 전도용 쪽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 쪽지에는 "당신은 사랑받은 자입니다" (You are loved)라는 붉은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질문 은 "왜 예수께서 그토록 무참히 핍박을 받고 한마디 저항도 없이 피를 흘리셔야 했었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 우리는 이렇게 대답하 면 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을 지금 주님으로 영접하세요. 그러면 당신도 그 분의 자 녀가 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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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 신학 04년 4월호에서 김동수 미국 나약대학교 교수 제공)
멜깁슨의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은 미국 각계각층의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 영화가 반유대주의 요소를 강 하게 지닌다는 이유로 제작 초기부터 반명예훼손 연맹(ADL : Anti- Defamation League) 같은 유대주의 운동기관의 거친 저항을 받았다. [타임]지의 리처드 콜리스 는 R등급(미성년자 관람불가)을 받은 이 영화가 가진 폭력성과 잔인성 그리고 무저항적 매저키즘으로 관객들에게도 외면 당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미국 위로크릭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와 하비스트 크루세이드의 그레그 로리 등 복음주 의 교회 지도자들은 천주교 신자에 의해 제작되고 제 2차 바티칸 공회 이전의 신학사상을 담고 있는 이 영화를 전폭적 으로 추천하는 아이러니컬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1960년대 초의 제 2차 바티칸 공회 이후 카톨릭 교회는 로마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서 미 사 때 더 이상 라틴어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성찬 때에도 안수 받지 않은 사람을 통해서 떡이 전달되도록 했고 그레고리의 성가 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더 친화적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들이 깁슨의 영화에서 번복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대사는 전적으로 라틴어와 아람어로 진행되었고, 예루살 렘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떠넘긴 복음서의 기록을 가감없이 그대로 영상에 띄워 유대인들의 원성을 야기한 점들이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인 지난 달 2월 25일에 맞추어 개봉된 이 영화는 상영되자마 자 매표소마다 표가 동이 났고 박스 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영화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앞으로 기독교 영화사에 있어 서 고전으로 남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이 영화를 보고 감동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 영 화만큼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사실적이고 감동적으로 표현한 영화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멜깁슨은 천주교 신자로서 어렸을 때에는 신부가 되려 했다. 그는 또 낙태나 동성연애에 반대하는 보수적 입장을 취해서 헐리우드 영화 관계자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뉴오커](The New Yorker)지와 가진 회견에서 깁슨은 13 년 전 35세 되던 해에 신앙의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 17세 때 예수님을 영접한 후 미온적인 신앙이 었던 지난 18년 동안의 방황의 귀결이었다. 그는 공허함, 후회, 절망,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 찼고, 자신이 무 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인생의 낭떠러지 끝에 서 있었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떠올렸다고 고백했 다. 그만큼 예수의 고난이 그의 인생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는 두 차례나 오스카상을 받았던 메가톤급 영화인이었지만 그의 마음 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시카고에서 5천여 명의 목회자들 앞에서 가진 이 영화 시사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필경 비평가들 의 혹독한 비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저는 헐리우드에서 제 자신의 세속적 유토피아를 꿈꿔왔지만 그것은 공허하기만 합니다. 이보 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으로 인해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며 여러분이 그 분을 믿든 믿지 않든 그 분의 죽으심이 지금 당 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사재 3천만 불을 쏟아 부어 이 영화를 제작했고 영화인으로서의 삶 과 경험 그리고 혼신의 힘을 쏟아 넣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크리스처너티 투데이]지의 데이비드 네프(David Neff)는 이 영화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 던 또 한 가지 요소를 지적했다. 그것이 멜 깁슨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기에 살았던 앤 캐더 린 에머릭의 [우리 주님의 비통한 고난] (Dolorous Passion of Our Lord)을 읽게 된 일이 다. 수녀 앤은 환상 속에 예수님의 수난을 체험하고 쓴 이 책에는 복음서에 나타나 있지 않는 내용들이 많지만 깁슨은 그 내용의 일 부를 도입해서 극적 효과를 더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는 것을 보다 못해 뒷마당으로 나와 흐느끼는 마리아에게 빌 라도의 부인 클로디아 프로클레스가 아마포를 준비해 와서 전해 준 장면, 그리고 고문장으로 돌아온 마리아가 그 아마포로 바닥에 흥건 한 예수님의 피를 닦아내는 장면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깁슨의 이 영화가 가진 놀라운 점은 그 내용이 성경적이며 신학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그것 은 그가 이해한 그리스도의 수난이 철저하게 창세기 3장 15절에서부터 시작된 영적 전투의 연장선에 있 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향해 기어오는, 사탄을 상징하는 뱀의 머리를 발로 밟 는 장면은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창세기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 예언이 십자가에서 성취 된 것으로 서술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그저 한 유대인이 정치적 풍랑에 휘말려 억울하게 십자가에 처형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자신이 어떤 고난을 겪게 될 것인가를 미리 아셨고 그것을 기도로 미리 준비하시고, 무지한 로마 군인 의 잔인한 채찍과 처형에 적극적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모습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이다. 이러한 우주적인 선과 악의 대립이 이 세상에 서 예수에 대한 폭력의 이면에 작용하고 있다든지 그리스도의 고난이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 말미암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다는 날카로운 신 학적 관점은 그리스도를 주제로 한 과거에 제작된 영화들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프랭코 제피렐리의 <나사렛 예수> 나 조지 스티븐스의 <위대한 이야기> 등은 신학적 관점에 초점을 두지 않고 복음서의 이야기를 자서전적 시각에서 제작 한 것이다.
이 영화는 예수님의 수난의 시작인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부터 클로즈업된다. 예수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 이 되도록 기도하실 때 사탄이 나타나 예수님을 야유하며 회유한다. "네가 이 죄까지 지려느냐?" "네가 그에 대한 형벌도 받으려느 냐?" 사탄은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 의해 채찍에 맞으실 때도 나타나고, 십자가를 지시고 걸었던 슬픔의 길에도 나타나 예수님 을 괴롭힌다. 사탄이 군중들 틈에 나타날 때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은 슬픔의 늪에 빠진 마리아에 대한 희롱이거나 아니면 예수 그리 스도를 믿는 믿음의 자녀들을 앞으로 괴롭히게 될 사탄의 자식들을 묘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탄은 가룟 유다에게도 나타나는데 그가 예수님을 제사장들의 손에 넘긴 후 괴로워서 자살하는 그 배후에 작용한 세력으로 묘사 된다. 사실 가룟 유다가 귀신에 들린 것은 사도 요한에 의하면 그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떡을 받아먹은 직후이다. 깁슨 이 유다가 귀신들린 시점을 예수님을 팔아 넘긴 후로 묘사하면서 그의 자살과 연결시킨 점은 요한복음의 내용과 맞지 않는다. 깁슨 은 이와 같이 예수님의 고난을 사탄과의 영적 싸움의 연장으로 해석하는데 그것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사탄의 종말 적, 반 교회적 역할에 대한 날카로운 이해에 근거한 것이다.
[타임]지의 콜리스는 깁슨의 이전 영화들이 지배 세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었고 1995 년 10개 부문에서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던 <브레이브 하트>가 화려한 폭력 영화였던 것처럼 이번 영화 도 이 성향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예수께서 성전 수비대에 의해 끌려가실 때부터 심하게 맞으시는 장면이라든지 로마의 전문적 인 고문대에 의해 소름끼치는 80여대의 채찍을 맞는 모습을 조금도 가감없이 카메라에 담아 영화 초반부터 선혈이 낭자 한 장면으로 도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예수의 피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입장이다. 예수님의 흘리 신 피가 나의 죄를 씻기 위한 것이며 그분이 당하신 수욕이 곧 나를 위해 대신해서 받으신 형벌이라는 이해없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만 계신 예수님의 무저항적이고 체념적인 모습과 갈기갈기 찢기는 그 몸을 보았을 때 보는 이는 어안이 벙벙하게 되고 큰 충격을 받 을 수도 있다.
[타임]지의 스캇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실패는 예수의 낭자하게 흘린 피의 의미가 무엇인지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것이라 했 다. 모든 영화에서 무죄한 자에 대한 폭력은 반드시 정당한 응징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깁슨은 이 점에 있어 우리를 실망시켰다는 것 이다.
깁슨이 그렇게 생생하게 묘사한 예수님의 처절한 수난이 과연 그의 폭력 성향적 영화 제작의 자연적 결과였을까? 그것은 아니라 는 것이 복음주의 시각을 가진 평론가들의 결론이다. 깁슨은 이 영화에서 레위기 17장 11절, "육체 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 가 죄를 속하느니라"의 진리를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구약에서 피가 요구되었듯이 신약에서도 피가 요구됩니다. 예수께서는 그 손 가락에 피를 낼 수도 있으셨지만, 그 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참으셨습니다"고 깁슨은 말했다. 깁슨에게 가장 깊은 감동 을 준 것은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속죄제가 되도록 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예수께서 '완전하게 복종하셨다'는 것이다.
깁슨의 속죄론은 성경 저자들의 속죄론에 대한 가르침을 잘 이해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기 700 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말하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 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3:5)라고 했다. 실로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 서 질고를 당하시고 우리의 받을 징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구약의 예언에 의하면 누구든지 나무에 달진 자마다 하 나님께서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이 있듯이(신 21:22-23)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대신해서 십자가의 하나님 의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마신 것이다. 바울도 이 예수님의 대속적 형벌과 그로 인해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진 하나님과의 화목에 대 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 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이와 같이 이 영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론적 희생을 주제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 내에도 이 영화에 대한 비판 의 소리가 없지 않다. 깁슨은 이 영화에서 일방적으로 패배주의적 십자가의 형벌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서 자체가 예 수님의 고난의 자세한 항목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고 초대교회도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 분이 부활 승리하셨다는 점 과 균형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구속주가 되신 것은 그 분이 고난을 흡수할 수 있는 초인적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 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셨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의 효시 존 캘빈도 십자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십자가 의 형벌을 이미지화하는 것은 신자들의 주의를 하나님께로부터 빗나가게 해 우상이 될 수도 있다고 염려했다. 사실 깁슨 은 2시간 동안의 영상에서 예수님의 수난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전개되기까지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관객을 거칠게 몰아 가지만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이후 기독교의 더 큰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일 분도 안되는 영상으 로 처리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깁슨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 이후 하나님의 슬픔(하늘에서 떨어지는 큰 눈물), 하늘이 어두워 짐, 지진, 성전의 휘장이 갈라지는 장면 등을 통해 그 이후 전개될 십자가의 승리를 충분히 암시했다고 보여진다. 더욱이 사탄이 자 신의 망한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며 울부짖는 장면은 십자가가 사탄을 이기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음을 관객들에게 암시해 주기에 충분하 다.
[기독교 역사와 전기](Christian History & Biography)라는 잡지 의 크리스 암스트롱은 "마틴 루터는 스타우피츠에게 '예수님의 상처를 들여다 보라고' 채근하곤 했다. 그는 95개 조 반박문을 박고 나서, 신학자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분명한 것들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뿐이라고 말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골로새서 1장 24절의 바울의 고백을 생각나게 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 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자신이 받는 고난을 예수 그리스 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연장으로 이해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도들도 이 고난에 참여할 것을 권고한다. "그리스도를 위하 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으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 1:29). 참으로 핍박을 당하는 성도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다가오는 은혜보다 더 위로가 되는 것이 있었 을까 싶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고난이 가지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참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은 죄 사함의 원천이요 성도에게 위로 의 샘이 됨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에게 환희와 소망과 승리의 도취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 은 성도의 장래의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그 십자가에 못 박으셨기 때문에 완성될 수 있었다. 바울은 호령한다. "사망아 너 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아담의 원죄 이후 인류의 원수 는 육체적, 영적 사망에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와 사망을 대신 지신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제 우리는 더 이상 죄에 종노릇하지 않게 되었고 사망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되었다. 바로 이 점이 바울이 외친 복음의 핵심이었다(고 전 15:1, 롬 2:16).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한 방울 한 방울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 다. 이 눈물은 슬픔의 눈물, 고뇌의 눈물만이 아니라, 죄 씻음의 감격도 동반된 눈물이다. 깁슨이 묘사하는 고문과 십자가형의 영상 은 우리를 전율하게 하는 선혈의 낭자 그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하나님의 제단에 속죄의 피를 뿌리듯이 예수의 구 속의 피를 인류의 죄에 뿌리기 원했기 때문이다. 비평가들의 말대로 깁슨이 그의 영화에서 예수님의 생애와 부활의 모습을 더 많이 다 뤘어야 했다는 비평이 옳다고 할지라도 그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를 보여준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하나의 고전적인 작품 을 선사한 것이다.
깁슨은 말할 것이다. 나는 나의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일할 차례입니다. 이에 대해 응답이라도 하듯이, 영화 관 밖에는 뉴욕 성막교회의 성도들이 사람들에게 전도용 쪽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 쪽지에는 "당신은 사랑받은 자입니다" (You are loved)라는 붉은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질문 은 "왜 예수께서 그토록 무참히 핍박을 받고 한마디 저항도 없이 피를 흘리셔야 했었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 우리는 이렇게 대답하 면 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을 지금 주님으로 영접하세요. 그러면 당신도 그 분의 자 녀가 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