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1:1~9, 31~35 2002/02/10 

언제부턴지 저는 신문을 잘 안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보기도 싫거니와, 큰 맘먹고 보면 불쾌하고 울화통이 터져서 한동안 감정을 삭이지 못할 때가 가끔 있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라 꼴은 형편없이 돌아 가고, 뭔가 일이 터졌다 하면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끼리 해먹은 이야기가 나돌 뿐입니다. 또한 자고 깨면 무슨 게이트를 운운하면서 누가 누구에게 얼마를 주고, 서로가 야합해서 주가를 조작하는가 하면, 또 뒤를 봐주면서 벌어들인 몇 백억을 어디에 로비했다는 등 이런 소리들이 연일 연야 신문을 도배질하고 있으니 누가 이런 신문을 보고싶어 하겠습니까? 그래서 큰 제목만 보고는 자세히 읽지 않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얼마 전엔 보물찾기 소동이 난적이 있습니다. 아마 외국에 있는 많은 지성인들이 우리 나라의 토픽을 보고 웃었을 것입니다. 국가의 중요한 권력기관까지 동원해 보물을 찾느라고 아우성을 치는 이런 코미디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들을 신문에서 봐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부끄러운 부정부패의 뿌리를 파 들어가보면 거기에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탐욕이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문호 단테에 의하면 탐욕이란 '꺾을 수 없는 원수'라고 지적했습니다. 얼마나 강한지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원수가 바로 탐욕이라는 것입니다. 돈을 우상으로 생각하고 탐하는 탐욕은 사람과 나라를 망칩니다. 이런 의미에서 백만장자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의 말은 진리입니다. "세상에 돈이라는 우상보다 사람을 더 타락시키는 우상은 없다." 돈에 탐심을 갖기 시작하면 어떤 사람이라도 타락하고, 어떤 권력이라도 부패하며, 어떤 나라라도 망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탐욕이 우리나라의 권력을 잡고 있는 정치인들과 지성인들, 경제인들, 심지어 가정 주부들의 밑뿌리에까지 도사리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탐욕이 무엇입니까? 지나치게 집착하는 욕심입니다. 그러나 좀 더 솔직히 말해 더 갖고 싶다는 것이 왜 나쁩니까? '남보다 좀 앞서고 싶다. 그리고 좀 더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그렇게 잘못된 것입니까? 이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유일한 본능일 것입니다. 

가령 사자는 먹을 만큼만 사냥합니다. 쌓아 놓기 위해서 사냥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쌓아 놓기를 갈망합니다. 지금 갖고 있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조금만 더' 하는 마음이 항상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에너지가 될 수 있습니다. '좀 더'라는 이 욕구가 있기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피곤한지 모르고 뛰는 것입니다. 잘 살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문명이 발전합니다. 성취욕을 누리게 됩니다. 무언가 살맛이 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좀 더 갖고 싶다는 마음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대신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좀 더 가지려는 욕구에 제동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정선에서 자제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제력이 없는 욕구는 무서운 것이 됩니다. '좀 더' 하는 마음가짐에 제동이 걸리지 않으면 언젠가는 탐욕화됩니다. 그리고 탐욕화된 그것은 반드시 우리를 파멸로 몰고 갑니다. 

그러므로 적절하게 적정선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마지노선을 정해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손톱이 자라면 항상 적당하게 깎아 줍니다. 자라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또 그대로 내버려두면 보기 흉해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마음에 있는 '좀 더' 라는 욕구를 완전히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절하게 유지되도록 만들어 주면 그것은 우리를 살게 만드는 에너지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 나오는 10계명 가운데 마지막에 탐심에 대한 경고의 계명을 주신 것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출20:17) 십계명의 제 10번째 계명은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과는 다릅니다. 그런 것들은 행동으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그 계명을 지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행동이 아닌 마음가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욕심을 내고 그것이 탐욕화되면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탐욕은 절대로 용납하거나 방치해서는 안되며 적정선에서 그 욕구를 자제해야만 합니다. 설령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마음에 담고 있는 생각만으로도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속에 있는 욕구를 자제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제해야 합니다. 또한 경건 생활을 통해서 계속 관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욕심이 탐욕으로 변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탐욕을 얼마나 미워하시고 탐욕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얼마나 무섭게 해칠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옵니다. 이 본문의 내용은 하나의 드라마 같습니다. 여기에서 탐욕 때문에 망하는 사람을 봅니다. 탐욕 때문에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이 넘도록 노예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드디어 모세라는 지도자를 내세워 그들을 애굽에서 기적적으로 인도해 내십니다.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던 민족이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실로 기적이라 할 것입니다. 여태껏 세계 역사상 그런 사례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그들을 광야로 인도했습니다. 광야는 죽음의 계곡입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생물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양식도, 물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로 그런 곳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1년 동안 먹이고 마시게 하시며, 생존하게 하셨습니다. 

아침마다 만나라 하여 깟씨와 같은, 요즘 말로 씨앗 같은 것을 보내 주셔서 백성들이 그것을 찧거나 삶고, 또 튀겨서 먹음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자연히 식탁 메뉴가 단조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점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불망 섞인 말까지 하고 맙니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음식을 싫어하노라.'(민21:5) 
그러던 어느 날 일부 사람들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야단치기 시작했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어 죽겠네." 하면서 나중에는 몇 명이 주저앉아 고기를 달라며 울고 불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러자 이런 분위기가 전염병이 되어 수십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녀노소 다 합해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장막에 앉아 고기를 내 놓으라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광경을 보고 얼마나 진노하셨는지 그토록 원하는 고기를 메추라기를 통해 하루 아침에 몰아서 안겨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고기가 잇사이에 아직 남아 있을 때, 고기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을 터뜨렸던 사람들 전부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일컫어 '기브롯 핫다아와', 곧 탐욕의 무덤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탐욕을 품다가 결국 다 무덤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고기 먹고 싶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왜 그것이 탐욕이 됩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을 조금만 눈여겨보고 생각해 보면, 이것은 분수에 지나친 탐욕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보면서 그들이 품었던 탐욕이 내 안에는 없는지, 그들이 하나님 앞에 탐욕으로 망한 것처럼 내 자신은 탐욕으로 망할 확률이 없는지 깊이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권력층에 있는 사람만 탐욕으로 인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시 탐욕에 이끌려 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고기를 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해 버린 탐욕이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을 보십시오. 노예생활에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자자손손 태어나자 마자 시작하게 되는 노예생활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 소망 없는 생활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계곡이라 할 수 있는 광야에 들어와서는 하나님께서 첫날부터 만나를 내려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주셨습니다. 걷는 걸음마다 지켜주셔서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시고, 입은 옷이 헤어지지 않도록 돌봐 주셨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해 주시고, 나쁜 짐승이나 해로운 해충들이 해치지 못하도록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살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기가 잘나서, 자기가 능력이 있어서 사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자체가 기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들판에 나가 만나를 한 알, 두 알 주우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살벌한 광야에서 먹을 것을 주시다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를 고백해도 모자랄 판국이 아닙니까? 반석에서 물이 터져 그 물을 손에 움켜쥐고 마시면서 "주여,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목마르지 않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두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송해도 모자랄 판국이 아닙니까? 그런데 고기를 달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들이 진짜 고기를 못 먹은 사람들입니까? 그들에게는 수백만 마리의 양떼와 소떼, 염소 떼가 따라다니고 있었으므로 가끔 한 마리씩 잡아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기 맛을 전혀 못 본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들은 재산이므로 마음대로 잡아 먹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기를 실컷 먹고 싶은 욕심에 고기를 내놓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형편에서 볼 때 고기 달라고 하는 것은 탐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울부짖는 탐욕이었습니다. 

이렇듯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면 탐욕이 생깁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탐욕이 초래할 수 있는 부작용 중 하나는 감사를 마비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좀 더' 하는 사람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탐욕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르는 두 발 가진 동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몇 년 전 루빈이라는 사람이 그린 재미있는 풍자만화가 하나 있습니다. 노아 홍수가 온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싹 쓸어버렸습니다. 방주에는 노아의 식구들과 둘씩 쌍을 이룬 짐승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한 1년 동안 배를 타고 다니다가 드디어 땅이 마르고 비가 그치자 방주 문을 열고 사람과 짐승이 나왔습니다. 두 마리의 기린이 두 마리의 코끼리 뒤를 따라 배에서 내려오고 있는데, 앞에 가던 코끼리 한 마리가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젠장, 계속해서 비만 왔잖아. 여행치곤 정말 형편없는 여행이야." 온 세상에 있는 생물이 다 자기 죄 값으로 심판받아 수장이 된 마당에, 죄가 있어도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서 방주에서 구원해 주셨는데 불평을 한다는 것은 탐욕 중의 탐욕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하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싶어하는 고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갖고 싶어하는 고기가 여러분의 마음에는 없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있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지금 자신이 받아 누리는 은혜를 헤아려 보십시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십시오. 내가 하루하루 사는 것이 내 힘으로 사는 것인지, 돈의 힘으로 사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인지 살펴보십시오. 모세혈관 하나만 터져도 모든 것이 끝장날 수 밖에 없는 나 자신이 오늘도 이렇게 살아있는 은혜가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은혜를 망각하고, '좀 더, 좀 더' 하는 것은 탐욕 중의 탐욕입니다. 이런 탐욕을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다 쓸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고기를 내놓아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탐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의 계곡이라 할 수 있는 광야로 끌어들이실 때에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셨습니다. 거기에 양식이 없다는 것, 물이 없다는 것, 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인도하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다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배고프면 먹일 수 있는 준비도 하시고, 목 마르면 마시게 할 준비도 하시고, 행여 만나가 질리면 고기라도 주실 준비까지 다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만 믿으라는 것입니다.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파도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어려움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꿋꿋이 자기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배고프면 "하나님이 이 광야에서 어떻게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겠는가?" 하고 하나님을 불신했습니다. 목이 마르면 "세상에 이 수백만 되는 사람들을 무슨 물로 다 마시게 하겠는가?"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했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자 "어디 보자. 고기 먹고 싶은데, 고기 좀 내놓아봐라." 하고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시편 78편 22절을 보면, 광야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을 영적으로 잘 해석해 놓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연고로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은 자기 손에 있는 것을 놓고 '하나님이 주셨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손에 없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필요하면 '하나님이 내게 없는 것을 주실 것이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이렇게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잘 안되니까 뭔가 다른 것에 의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엔 굉장히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정작 돈 문제를 놓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믿음이 없는 자가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은 진짜 하나님만 의지합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누가 더 권위자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돈입니까? 하나님이 내 생명의 주권자요, 내 가슴의 유일한 통치자인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돈에 마음을 주면 안됩니다. 돈 좀 모아야 노년에 평안하게 살 것 아니냐고 말하지만 사실 하나님이 안 믿어지기 때문에 돈을 모으는 것입니다. 다른 데 우리 마음을 바치면서 그것이 하나님인 것처럼 기대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목사, 장로, 집사라 할지라도 '돈, 돈' 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이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쌓아놓은 것을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어서 욕심을 내는 것은 무엇이든지 탐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세 번째로 고기를 내놓아라 하는 것은 악한 자들의 충동을 받은 탐욕이었습니다. 11장 4절을 보면 이상한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을 가진 사람들만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신분이 노예이면서도 집안에 노예를 데리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종들이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여러 가지 이해관계 때문에 얽히고 설킨 잡족들이 꽤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자 이 잡족들이 함께 짐을 싸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만 남자가 60만 명이라고 했으므로, 잡족들과 남녀노소꺼자 다 합하면 300만 명 이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입니다. 

그런데 이 잡족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광야에 나와 만나만 먹다가 질려서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치며 소리내어 울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까지 이 불평이 전염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히는 현실인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바로 의지하고, 선민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잡족들의 이 같은 행위를 가만 둘 리가 없습니다. "만나를 먹고 연명하는 것만 해도 하나님의 큰 은혜인데, 이것도 모르고 감히 고기를 달라고 소리치다니." 하고 호통을 쳐서 입을 다물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전염되어 함께 울고 난리법석을 떨었으니 동기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시험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섞여 사는 무리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포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밤낮없이 그들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따라서 잘못하면 내 주변에 있는 세상 사람들이 탐하고 좋아하니까 나도 덩달아 탐하고 좋아하는 시험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극을 받아야 되고, 거룩한 백성들을 통해서 좋은 영향력을 받아야 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살기 위해 잠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돈 벌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부지런히 돈을 벌 수 있으면 많이 버십시오. 하나님께서 쌓을 수 있도록 축복하시면 쌓으십시오. 이것은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남보다도 큰 집에 살 능력이 있으면 사는 것입니다. 남보다 깨끗한 옷을 입을 수 있으면 입는 것입니다. 주신 물질을 놓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써야 할 지 제대로 파악하여, 하나님 앞에 부요한 자가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쓸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쌓아도 됩니다. 얼마든지 벌어도 됩니다. 그것은 탐욕이 아닙니다. 
그러나 '좀 더 갖자. 좀 더 쌓자.'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탐욕에 빠질 확률이 대단히 많은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돈 좀 벌었다 하면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같이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을 훤히 보고 있습니다. 자기 배만 위해서 쌓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주님 앞에 가서 무서운 책망을 들을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세 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은혜를 망각하고 욕심을 내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탐욕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믿음이 적거나 하나님을 믿지 못해 욕심을 내는 것은 무엇이든지 탐욕입니다. 세상 사람들, 악한 사람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말에 자극 받아서 욕심을 내는 것이 탐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기브롯 핫다와', 탐욕의 무덤에 묻히기 전에 먼저 정신차려야 합니다. 모든 탐욕을 성령의 능력과 말씀의 권위로 쓸어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거룩한 백성답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엄히 말씀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의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바울도 말합니다.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엡5:3) 이만큼 성경이 탐욕에 대해 무서운 경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 받고, 경건생활을 통해 자신을 훈련시키면서 하나님 앞에 영광과 찬양을 돌릴 수 있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거울로 삼아 우리 자신을 그 거울에 비추어보면서 우리도 탐욕에 끌려 다니는 노예가 아닌가를 다시금 살필 수 있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가책을 받는 자가 있으면 성령께서 그 마음에 있는 나쁜 것을 제거해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가득 채워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중 한 사람이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탐욕에 젖어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없게 해 주시옵소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살게 해주시고, 오직 하나님만 전적으로 믿으면서 살게 해주시고, 세상 사람들의 말이 아닌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