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
글 수 616
믿음의 허와 실
(눅8: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하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누가복음 8장 두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8장에서 복음의 목적과 원리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문단을 따라 누가복음 8장을 읽어보시면 쉽게 알게 되시겠지만 8장 처음에는 비유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들이 하나님의 사람들 속에서 받아들여지는 과정과 그 결과 그리고 두번째 단락에서 말씀과 믿음의 관계를 설명하시고 세번째로 믿음의 형태와 구원의 과정을 설명하셨습니다.
주님은 앞에서 비유를 말씀하신후 비유를 묻는 제자들에게 씨뿌리는 비유에 숨긴 비밀들을 해석하여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서 성경의 해석의 원리를 공부할 수 있습니다만 마태복음 13장에서 더욱 잘 언급되었습니다. 성경해석에는 몇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먼저 성경해석은 그 문맥을 따라 해석되어야 하며 그 어원을 찾아서 적용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어원이란 원어적인 어휘와 또 성경 전체에 계시된 흐름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성경은 그 해석에 있어 성경 기록에서 최초로 언급된 부분의 어원적 속성을 따라야 합니다. 즉 성경에서 '창조'(bara)는 창세기 1장1절의 해석적 근거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무시하면 각 사람의 지식에 따라 또 각 사람의 환경과 감정에 때라 중구남방으로 달라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잘못된 복음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성경지식을 가진 사역자들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나타난 능력과 다른 문제입니다(마7:22절 참조)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면 그들이 어떤 학위를 갖고 있던 또 어떤 지위를 갖고 있던지간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막12:24)하였습니다.
주님은 "길가에 있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마태는 "천국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았나니"(마13:19)기록하였습니다. 마태의 기록을 함께 보건데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구원과도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공중의 새'를 해석함에 있어 누가는 '마귀'라고 하였고 마태는 '악한 자'로 해석하였으며 마가는 '사단'이라 기록한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그 모든 해석을 통합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새'와 '마귀'와 '악한 자' 그리고 '사단'은 동의어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성경에 기록된 '새'를 모두 사단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생각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기록의 문맥적 흐름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주님은 '씨'를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막4:14) 하셨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말씀을 들은 자'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이 길가에 뿌리우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길가'라는 것은 사람들의 목적이 포함되 있음을 전재하여야 합니다. 자기 가던 길을 멈추고 잠간 말을 들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만약 바리새인이 되고자 한 사람들이라면 그가 말씀을 들었다 해도 모두 새가 주어 먹는다는 말입니다.
저는 10년 동안 갈보리채플 사역을 해오면서 가슴 아픈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사가 되겠다고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동안 성경을 배우다가 갑자기 돌변하여 뛰쳐 나갑니다. 신학을 하지 않아도 목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들어 왔는데 실제로 와보니까 갈보리채플 목사 되기가 정말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이었지 성경의 가르침 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오직 쉽게 목사가 되는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부르신 제자들이라해도 3년을 주와 함께 하면서 가르침을 받았고 또 그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 때끼지 기다리며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일천척, 이천척, 삼천척이 지난 후에 가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주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러나 너희는 봄으로 너희는 귀로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6) 하셨습니다.
두번째로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을 하는 자요"(13절) 이 부분을 마태와 마가는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말씀으로 인하여 시험을 받는 다는 것은 참으로 희안한 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들이 말씀을 들을 때 '기쁨'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 갈보리채플 개척이래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나는 얼마전에도 아픈 경험을 하였습니다. 어떤 형제들 중 우리교회에 나오면서부터 말씀을 기쁨으로 받으며 천지가 개벽한 것처럼 감격된 생활을 하던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한때 모두 갈보리채플에 헌신자로 결심을 하던 자들인데 지금은 오히려 나와 우리 교회에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저는 목요 저녁 예배시간에 로마서와 고린도전서를 강해하면서 술취하고 음행하고 후욕하고 토색하며 남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을 받을 수 없다는 성경말씀을 가르치며 술을 마시며 또 담배를 물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생각은 아예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와 같이 기업을 함께 물려받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갈보리채플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아이들이 얼굴을 붉히며 은혜로 구원받았으면 그만이지 술이나 담배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 되느냐 하며 뛰쳐 나갔습니다.
그 아이들이 얼굴을 붉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말씀에 뿌리를 두지 못하여 말씀으로 인해 자신들의 행위가 판단을 받게되니 오히려 분노하여 스스로 넘어지고 배반케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그러한 기록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정죄하여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 내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이며 사랑인 것입니다. 사실 나는 과거 그들보다도 더 더러운 속에 있었지만 육신의 더러운 것을 벗어버리고 하늘의 의로운 것으로 덧입기를 갈망하고 사모하며 오직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이 진리에 이르기까지 나는 깊은 골짜기를 헤메기도 하였지만 주의 지팡이가 나를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은 14절에서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된자"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것이 크리스챤의 마지막 고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거룩한 생활을 꿈꾸며 또 한편으로는 세상의 재미를 쥐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언급된 모습은 우리의 믿음생활의 단면적인 모습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길가에 있었던 자들로서 복음을 들으면서도 악한 자들과 어울렸고 또 복음을 듣고 잠시 기쁨에 빠졌었지만 그 말씀들로 인하여 시험을 받을 때 교회를 배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러한 나를 버리지 않고 인내로 다시 믿음안으로 들어 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성도를 가리켜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을 하는 자니라"(15절) 말씀 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마태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며 열매를 맺기 위한 최선의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16절에서 주님은 말씀의 방향을 바꾸어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을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 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각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설명하셨는데 이제부터는 그 책임의 소재를 언급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뿌려지는 씨앗은 씨 뿌리는 사람들에 의해 뿌려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례요한을 가리켜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대하여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요5: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 말씀은 산상수훈을 가르치실 때 하셨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들에게 비취느니라"(마5:14-15) 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6:22) 말씀하시며 제자된 자들의 물질관을 가르치시며 사역자들이 타락하는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등불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7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사역과 관련하여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니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들을 세우신 후 제자의 도를 가르치시며 장차 그들이 받을 핍박과 관련하여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10:26)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종들이 무엇을 전하였는가에 대한 결과들이 분명하게 들어 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씨뿌리는 비유의 궁국적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18절). 이 말씀은 주의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대한 각자의 태도를 언급한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마가는 "너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막4:24)기록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가요? 우리가 무엇을 그리고 또 어떻게 들었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가 다 같은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하고 또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 교회의 모습들이 모두 각각 그 가르침의 형태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귀신론을 가르치는 교회는 성도들의 모습이 흡사 귀신들을 부리는 무당들처럼 바뀌고 있습니다. 회개의 사단계를 가르치는 교회는 마치 자기들만이 구원을 갖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 오중복음을 강조하는 교회는 구원의 원리가 오중복음 안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칼빈주의 오대강령을 따르는 교회는 구원은 인간의 의지와 책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 무서운 일은 많은 교회에서 음행과 관련한 육체의 일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을 바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로 육신은 죽으면 흙이되는 것이므로 구원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가 육으로 살면 반듯이 죽을 것이로되 기록되었습니다.
또 많은 교회들이 교회의 휴거와 이 땅에 임할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로인하여 성도들은 성결과 의로움의 절대성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 가운데서 얻어지는 축복에 연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역자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예언을 하고 큰 능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였다 하드라도 불법을 행한 자들은 모두 주께 들어 가지 못할 것입니다.
마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메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7:16-19)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나물에 그 밥이고 붕어빵은 붕어빵 틀에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주의 성도 여러분 당신이 아직 길가에 있다면 이 성경의 말씀을 깨닫기전 당신이 가려고 작정한 그 계획을 수정하십시요, 또 아직 바위 위에 있다면 배반의 유혹이 오기전에 인내로서 말씀을 지키십시요, 그러면 당신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의 일에서 당신의 마음을 끊어내는 것입니다.
또 사역자로 부름받은 당신은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운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요, 만약 오늘 이 글을 본 당신에게 " 말씀을 들을 귀'가 있다면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까지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은 말씀의 본체이신 그리스도를 닮아 좋은 열매를 맺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Tweet
(눅8: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하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누가복음 8장 두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8장에서 복음의 목적과 원리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문단을 따라 누가복음 8장을 읽어보시면 쉽게 알게 되시겠지만 8장 처음에는 비유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들이 하나님의 사람들 속에서 받아들여지는 과정과 그 결과 그리고 두번째 단락에서 말씀과 믿음의 관계를 설명하시고 세번째로 믿음의 형태와 구원의 과정을 설명하셨습니다.
주님은 앞에서 비유를 말씀하신후 비유를 묻는 제자들에게 씨뿌리는 비유에 숨긴 비밀들을 해석하여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서 성경의 해석의 원리를 공부할 수 있습니다만 마태복음 13장에서 더욱 잘 언급되었습니다. 성경해석에는 몇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먼저 성경해석은 그 문맥을 따라 해석되어야 하며 그 어원을 찾아서 적용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어원이란 원어적인 어휘와 또 성경 전체에 계시된 흐름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성경은 그 해석에 있어 성경 기록에서 최초로 언급된 부분의 어원적 속성을 따라야 합니다. 즉 성경에서 '창조'(bara)는 창세기 1장1절의 해석적 근거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무시하면 각 사람의 지식에 따라 또 각 사람의 환경과 감정에 때라 중구남방으로 달라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잘못된 복음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성경지식을 가진 사역자들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나타난 능력과 다른 문제입니다(마7:22절 참조)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면 그들이 어떤 학위를 갖고 있던 또 어떤 지위를 갖고 있던지간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막12:24)하였습니다.
주님은 "길가에 있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마태는 "천국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았나니"(마13:19)기록하였습니다. 마태의 기록을 함께 보건데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구원과도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공중의 새'를 해석함에 있어 누가는 '마귀'라고 하였고 마태는 '악한 자'로 해석하였으며 마가는 '사단'이라 기록한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그 모든 해석을 통합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새'와 '마귀'와 '악한 자' 그리고 '사단'은 동의어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성경에 기록된 '새'를 모두 사단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생각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기록의 문맥적 흐름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주님은 '씨'를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막4:14) 하셨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말씀을 들은 자'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이 길가에 뿌리우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길가'라는 것은 사람들의 목적이 포함되 있음을 전재하여야 합니다. 자기 가던 길을 멈추고 잠간 말을 들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만약 바리새인이 되고자 한 사람들이라면 그가 말씀을 들었다 해도 모두 새가 주어 먹는다는 말입니다.
저는 10년 동안 갈보리채플 사역을 해오면서 가슴 아픈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사가 되겠다고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동안 성경을 배우다가 갑자기 돌변하여 뛰쳐 나갑니다. 신학을 하지 않아도 목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들어 왔는데 실제로 와보니까 갈보리채플 목사 되기가 정말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이었지 성경의 가르침 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오직 쉽게 목사가 되는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부르신 제자들이라해도 3년을 주와 함께 하면서 가르침을 받았고 또 그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 때끼지 기다리며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일천척, 이천척, 삼천척이 지난 후에 가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주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러나 너희는 봄으로 너희는 귀로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6) 하셨습니다.
두번째로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을 하는 자요"(13절) 이 부분을 마태와 마가는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말씀으로 인하여 시험을 받는 다는 것은 참으로 희안한 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들이 말씀을 들을 때 '기쁨'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 갈보리채플 개척이래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나는 얼마전에도 아픈 경험을 하였습니다. 어떤 형제들 중 우리교회에 나오면서부터 말씀을 기쁨으로 받으며 천지가 개벽한 것처럼 감격된 생활을 하던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한때 모두 갈보리채플에 헌신자로 결심을 하던 자들인데 지금은 오히려 나와 우리 교회에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저는 목요 저녁 예배시간에 로마서와 고린도전서를 강해하면서 술취하고 음행하고 후욕하고 토색하며 남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을 받을 수 없다는 성경말씀을 가르치며 술을 마시며 또 담배를 물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생각은 아예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와 같이 기업을 함께 물려받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갈보리채플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아이들이 얼굴을 붉히며 은혜로 구원받았으면 그만이지 술이나 담배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 되느냐 하며 뛰쳐 나갔습니다.
그 아이들이 얼굴을 붉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말씀에 뿌리를 두지 못하여 말씀으로 인해 자신들의 행위가 판단을 받게되니 오히려 분노하여 스스로 넘어지고 배반케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그러한 기록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정죄하여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 내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이며 사랑인 것입니다. 사실 나는 과거 그들보다도 더 더러운 속에 있었지만 육신의 더러운 것을 벗어버리고 하늘의 의로운 것으로 덧입기를 갈망하고 사모하며 오직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승리하였습니다. 이 진리에 이르기까지 나는 깊은 골짜기를 헤메기도 하였지만 주의 지팡이가 나를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은 14절에서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된자"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것이 크리스챤의 마지막 고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거룩한 생활을 꿈꾸며 또 한편으로는 세상의 재미를 쥐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언급된 모습은 우리의 믿음생활의 단면적인 모습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길가에 있었던 자들로서 복음을 들으면서도 악한 자들과 어울렸고 또 복음을 듣고 잠시 기쁨에 빠졌었지만 그 말씀들로 인하여 시험을 받을 때 교회를 배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러한 나를 버리지 않고 인내로 다시 믿음안으로 들어 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성도를 가리켜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을 하는 자니라"(15절) 말씀 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마태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며 열매를 맺기 위한 최선의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16절에서 주님은 말씀의 방향을 바꾸어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을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 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각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설명하셨는데 이제부터는 그 책임의 소재를 언급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뿌려지는 씨앗은 씨 뿌리는 사람들에 의해 뿌려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례요한을 가리켜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대하여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요5: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 말씀은 산상수훈을 가르치실 때 하셨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들에게 비취느니라"(마5:14-15) 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6:22) 말씀하시며 제자된 자들의 물질관을 가르치시며 사역자들이 타락하는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등불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7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사역과 관련하여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니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들을 세우신 후 제자의 도를 가르치시며 장차 그들이 받을 핍박과 관련하여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10:26)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종들이 무엇을 전하였는가에 대한 결과들이 분명하게 들어 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씨뿌리는 비유의 궁국적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18절). 이 말씀은 주의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대한 각자의 태도를 언급한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마가는 "너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막4:24)기록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가요? 우리가 무엇을 그리고 또 어떻게 들었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가 다 같은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하고 또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 교회의 모습들이 모두 각각 그 가르침의 형태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귀신론을 가르치는 교회는 성도들의 모습이 흡사 귀신들을 부리는 무당들처럼 바뀌고 있습니다. 회개의 사단계를 가르치는 교회는 마치 자기들만이 구원을 갖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 오중복음을 강조하는 교회는 구원의 원리가 오중복음 안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칼빈주의 오대강령을 따르는 교회는 구원은 인간의 의지와 책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 무서운 일은 많은 교회에서 음행과 관련한 육체의 일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을 바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로 육신은 죽으면 흙이되는 것이므로 구원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가 육으로 살면 반듯이 죽을 것이로되 기록되었습니다.
또 많은 교회들이 교회의 휴거와 이 땅에 임할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로인하여 성도들은 성결과 의로움의 절대성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 가운데서 얻어지는 축복에 연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역자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예언을 하고 큰 능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였다 하드라도 불법을 행한 자들은 모두 주께 들어 가지 못할 것입니다.
마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메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7:16-19)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나물에 그 밥이고 붕어빵은 붕어빵 틀에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주의 성도 여러분 당신이 아직 길가에 있다면 이 성경의 말씀을 깨닫기전 당신이 가려고 작정한 그 계획을 수정하십시요, 또 아직 바위 위에 있다면 배반의 유혹이 오기전에 인내로서 말씀을 지키십시요, 그러면 당신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의 일에서 당신의 마음을 끊어내는 것입니다.
또 사역자로 부름받은 당신은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운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요, 만약 오늘 이 글을 본 당신에게 " 말씀을 들을 귀'가 있다면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까지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은 말씀의 본체이신 그리스도를 닮아 좋은 열매를 맺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