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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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받는 신앙(마 8:5-13)
도널드 맥컬로우가 “하찮아진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우리의 편의에 따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 인 믿음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훼퍼가 “나를 따르라”라는 책에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를 싸구려로 바꾸었다”라고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값싼 싸구려로 생각하는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히 11:6 상반 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참으로 소유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겨우 명목만을 유지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칭찬받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의 믿음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백부장은 겨우 명목만을 유지하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께 칭찬받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10절에서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까지 기이히 놀랄 정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기이히 여겨도 하나님에게는 별로 기이하지 않은 일들이(슥 8:4-6) 보통인데,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까지도 기이히 여인 믿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그래서 본문 13절에서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고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간구에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께로부터 칭찬받은 이 백부장은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선민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한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나안 여인 곧 수로보니게 여인도 이방인이었고, 이스라엘의 언약밖에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도 인종적으로는 이방인이었고, 이스라엘의 언약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동일하게 칭찬을 받았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응답을 받은 것이 이방인이고 언약 밖에 있었기 때문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비록 그들이 선민 이스라엘 백성은 아니었지만, 언약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응답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시고 있는 것입니까?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을 받은 언약 백성이라고 자랑만을 하였지, 주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오늘날 소위 ‘그리스도인’이라는 하는 자들의 모습 속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을 받은 언약 백성이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주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는 분이 있다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님께서는 본문 11-12절에서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당연히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한 것을 지적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즉 만일 유대인만이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도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눅 3:8에서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분명하게 경고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유대인이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지 못하면 하늘나라 바깥으로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구원은 산 믿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민족이나 인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요 316, 롬 10:12,13, 갈 3:9, 골 3:11, 벧전 2:9) 따라서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의 신앙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주님께로부터 칭찬받은 이 백부장은 자신의 문제 때문에 주님께로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 때문에 주님께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흉악한 귀신에 들린 자신의 딸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자신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수하에 있는 종의 병을 위해서 주님께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종이란 정말 하찮게 여겨지는 존재였습니다. 종의 인격은 물론이고 생명의 존엄성은 존중되지 아니하는 별볼일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바로 이러한 종을 위해서 친히 예수님께 나와서 부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충격에 가까운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이 백부장은 가버나움에 주둔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해변에 위치해 있는데 예수님은 이곳을 사역의 중심지로 삼으시고 활동하신 곳이었습니다. 로마 군단은 6천명의 군사로 결성되었고, 그 속에는 60여 개의 단위 부대가 편성되었는데 1단위 부대의 지휘관이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건은 누가복음(7:2-20)에도 기록이 되어 있는데 약간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에는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반해 누가복음에는 유대인 장로 몇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것은 곧 성경의 오류라고 헛된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기사를 축소하여 중개자(유대인 장로들)를 생략함으로써 사건을 간결하게 묘사하면서 백부장의 믿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이 곧 누가복음의 관점과 다른 차이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나라에 반역하는 세상으로 어두움과 혼돈 속에 잠겨 있습니다. 이러한 혼돈의 세계 속에서도 그리스도께로부터 생명의 빛을 받은 신자가 믿음을 발산하므로 신자의 멋을 보여주는 실례들이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백부장은 로마의 직업 군인으로서 비록 이스라엘의 언약밖에 있었던 사람이요, 인종적으로는 이방인이었지만 경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 그의 믿음을 보여줌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했다고 하는 칭찬과 함께 그 문제를 해결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본문의 백부장의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백부장은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예수님의 바른 신앙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칭찬받는 믿음이란 어떤 믿음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칭찬받는 믿음은 주님께 나아와 간구하는 믿음입니다.(5절)
본문 5절에서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백부장은 주님께 나와서 친구 간구하였습니다. 칭찬받는 믿음은 주님께 나아와 간구하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하인을 위해서 주님께 나아와 간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본인을 위해서도 주님께 나와야 간구해야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나아와 간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나오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주님께 간구하는 자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여기의 "간구"라는 것은 기도의 한 형태입니다. 이것은 곧 기도의 애절함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요, 하나님의 자녀된 자가 누릴 권세입니다. 이 특권을 한 백부장은 마음껏 누리며 살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이방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메시야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이었던 한 백부장은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자신의 목적을 채우기 위한 정욕적인 기도하지 아니했습니다. 백부장은 기도의 대상을 바로 알고 간구하였습니다. 백부장은 하인을 위한 도고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백부장은 중풍병까지 걸려 누워 있는 아무 쓸데없는 하인을 사랑하여 예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사랑이 넘치는 도고의 기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이 나라는 소망이 있고 교회는 능력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병들어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지만, 나에게 전혀 도움도 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나에게 피해가 되는 사람이지만 백부장은 그를 위해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 나아와 간구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이것은 곧 주님의 능력을 아는 것이요, 주님을 주님 되게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세상에는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 앞에서 기도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이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시편 115:6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상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시 94:9에서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구하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시 116:2)
그런데 백부장은 이러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설계하시고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인간의 모든 고장 난 부분을 치료하실 수 있는 치료자입니다. 또한 그가 친히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기에(사53:4) 우리는 강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만인의 구원자요 치유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기도에 응답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백부장의 기도는 자신의 목적을 채우기 위한 정욕적인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인을 위한 도고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백부장과 같이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형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시대에는 더욱 그리워지기만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이 나라는 소망이 있고 교회는 능력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내 자신을 위한 기도도 필요하지만 고통을 받는 형제자매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요, 응답과 축복을 경험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특히 병들어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지만, 나에게 전혀 도움도 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나에게 피해가 되는 사람이지만 백부장은 그를 위해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칭찬받는 믿음은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역사를 가진 믿음입니다.(6절)
본문 6절에서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백부장은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역사를 가진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칭찬받는 믿음은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역사를 가진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백부장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겼습니다. 은혜받은 자의 마음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의 역사를 가진 신앙이었는가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7장 2절과 5절을 보면 백부장의 사랑의 역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복음 7장 2절과 5절을 말씀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2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 하시기를 청한지라(3절)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4절)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5절)”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눅 7:2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백부장은 정복자요, 로마의 장교로서 자기 수하에 있는 종을 함부로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아니했다는 점입니다. 여기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 수하에 있는 종을 사랑했습니다. 종에 대한 긍휼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백부장은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을 향하여 종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종이란 헬라말로 “아무 권한도 없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하인」이란 말은 "하인”이라는 말은 “아들”이란 뜻입니다. 이는 백부장이 평소에도 그를 아들처럼 사랑했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이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5:7에서 “긍휼이 여기는자는 긍휼이 여김을 받는다ꡓ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암 부스」도 ꡒ긍휼은 구원의 낙하신과 같다ꡓ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마땅히 우리 주변에 연약한 성도들에 대해서 사랑과 긍휼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말로만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말로만 긍휼함을 베풀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은 성도답게,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성도답게 백부장처럼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눅 7:3-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백부장은 정복자요, 로마의 장교요, 피정복국인 유대 민족을 사랑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더 놀라게 하는 것은 유대 나라의 정복자요, 로마의 장교인 그에 대해서 마땅히 적개심을 품어야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장로들은 그에 대해서 선한 증거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백부장은 동네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평소 인정을 받았습니다. 죽어 가는 보잘 것 없는 종도 귀하게 돌보았고, 적대적이기 쉬운 유대인에게 칭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백부장은 당시에 대단한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상당한 고급장교였습니다. 상당한 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풍 병에 걸린 하인을 위해서 주님께 직접 나와서 병고침을 위해서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인종과 계급을 뛰어 넘는 숭고한 참 사랑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인이라도 그의 인격과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며 그의 연약함을 안타까워하며 불쌍히 여기며 그의 질병이 치료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주님께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 특히 제자들에게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증거를 얻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① 스데반 집사님의 믿음이 그러했습니다.
행 6:3에서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스데반 집사님은 사람들에게 선한 증거를 얻었습니다.
② 고넬료의 믿음이 그러했습니다. 행 10:22에서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고넬료는 로마의 백부장이었지만 사람들에게 선한 증거를 얻었습니다.
③ 사도 바나나와 바울의 믿음이 그러했습니다. 행 15:25-26에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바나바와 바울은 사람들에게 선한 증거를 얻었습니다.
④ 여제자 드로가 믿음이 그러했습니다. 행 9:39에서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여제자 드르가」는 사람들에게 선한 증거를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도르가」라는 여제자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의 수고와 봉사를 잊지 못했습니다. 이 여인은 경건한 믿음의 귀부인으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믿음도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아야 하겠지만 이웃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오늘 우리는 이웃이나 교회 앞에서 칭찬 받는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가장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 압제하고 무시할 사람들을 오히려 섬기고 봉사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사람이라는 소문을 듣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말로만 믿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의 믿음도 백부장처럼 말로만이 사랑의 역사를 가진 믿음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선한 증거를 얻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선한 증거를 얻지 못하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부끄러운 믿음이요, 연약한 믿음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백부장과 같이 가장 가까운 사람 곧 가족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부터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기 위해서는 백부장처럼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역사를 가진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3. 칭찬받는 믿음은 겸손한 믿음입니다.(8절 상)
본문 8절 상반 절에서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백부장은 겸손한 믿음이었습니다. 칭찬받는 믿음은 겸손한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의 “감당치 못하다”라는 말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몹시 부족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어떤 권위에 대한 인간의 무가치함을 느낄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는 분명 자신의 죄악 됨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절대 거룩성을 인지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높으심과 자신의 무가치성에 대한 자각하는 것이 곧 신앙의 본질입니다. 보통 군인의 기질은 거칠고 거만한 것입니다. 사람은 권세를 잡으면 교만해지기 쉽고, 재물을 얻으면 방탕하기 쉬운데 그는 믿음을 가졌기에 자신의 세상적 지위를 초월하여 주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백부장이면 얼마든지 자기 힘과 권력을 뽐낼 사람입니다. 군인으로서 인정을 받은 당당한 사람입니다. 직업 군인이 공연히 겸손한 척 할 직업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놀라울 정도로 겸손했습니다.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겸손입니까? 백부장은 세상에 빛나는 로마 군인의 훈장도 다 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아주 겸손한 모습으로 도움을 요청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은사가 있어도 겸손이 없으면 무익합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인은 유대인 집에 자유로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로마인 집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금하고 로마인의 집에는 우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의 집은 유대인의 집 보다 더 부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론 자격이 없습니다. 또,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면 예수님이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선한데 겸손한 믿음이 없는 이도 있습니다. 백부장은 선한 사람이면서 믿음이 있었습니다.
▶ 겸손(謙遜)이 없으면 어떠한 하나님의 은혜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 젊다는 그것 때문에 교만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조금 건강하다는 그것 때문에 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조금 있다고 하는 그것 때문에 거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조금 배웠다고 하는 그것 때문에 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래 믿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오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한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약 4:6과 벧전 55에서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지만 교만한 자는 대적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믿음은 겸손에서 나옵니다. 어거스틴은 "어떻게 하면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 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거듭해서 말하기를,"첫째도 겸손이고, 둘째도 겸손이고,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사람은 겸손 위에 위대한 믿음을 건축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한 사도 바울도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겸손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당당하게 소명을 받은 이사야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으로다"하고 자기 겸손에서 출발했습니다.(사 6:5) 이사야는 깨끗한 줄로만 알았던 자기 입술이 부정함을 먼저 알았습니다. 손을 들어 기도하면 기적을 나타냈던 모세도 애굽에 못 간다고 거듭해서 겸손하게 사양할 줄 안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들도 겸손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4. 칭찬받는 믿음은 말씀의 절대적 권위와 능력을 믿는 믿음입니다 .(8절 하)
본문 8절 하반 절에서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백부장은 말씀의 절대적 권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칭찬받는 믿음은 말씀의 절대적 권위를 믿는 믿음입니다.
로마 군대의 장교로서 수하(手下)의 군인에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즉 눈에 보이는 세계의 현상을 비유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영적 현상의 원리를 꿰뚫어 본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의 능력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당장 나타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말씀 속에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주님의 말씀 한마디면 어느 곳에 있든지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으로 말씀의 역사 속에서 되어지는 사건입니다. 마리아는 요 2:5에서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말씀이 가라하면 가고, 말씀이 서라하면 서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말씀으로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자체이십니다.(요1:1-3,14).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요, 영생의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요 6:68에서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고백하였던 것처럼 우리들도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요1:1-3), 말씀으로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바꾸어 놓았습니다(요21:15-19,행9:1-22). 말씀으로 병을 고치시고, 말씀으로 바다를 잔잔케 하셨습니다(마8:23-27). 또한 말씀으로 귀신을 내쫓았습니다(마8:28-3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장 37절에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과 원리가 이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만족하는 신앙은 성숙한 성도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말씀보다 경험이나 지식을 앞세우지 맙시다. 꿈이나 이상이나 안수 받는 행위보다 예수님의 말씀이 더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외면한 기적 중심, 체험 중심에서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성장하도록 하나 님의 말씀을 매일 매일 읽고 듣고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적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신앙이 약한 사람입니다. 기적은 믿음을 낳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낳게 하는 유일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17절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여 지고, 만져지고, 느껴지는 감각적인 신앙에서 이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이면 족하다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확신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5. 칭찬받는 믿음은 다른 사람까지 복을 받게 하는 믿음입니다.(8절 상)
본문 13절에서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백부장은 다른 사람까지 복을 받게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칭찬받는 믿음은 다른 사람까지 복을 받게 하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의 믿음 때문에 제3자인 부하의 병이 나왔으니 그는 자기가 잘 믿어 자기 혼자만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믿음으로 다른 사람까지 복을 받게 한 것입니다. 이는 가나안 여인 곧 수로보니게 여인의 경우와 흡사합니다. 마 15:28에서“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절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흉악한 귀신에 들린 딸이 고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중풍병자 마 9:2에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으되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지만 결코 낙심하지 아니하고 예수님께서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예수님께 달아 내릴 때에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육신적인 병뿐만 아니라 영적인 병까지도 고쳐주셨던 것입니다.(눅 2:4-5)
그렇습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분명히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들의 믿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 여리고 성의 전투에서 대승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아이성 전투에서 실패하였던 것은 바로 아간과 같은 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 경우입니다. 그러나 백부장과 수로보니게 여인 그리고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어서 그들로 말미암아 제3자가 복을 받은 경우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백부장과 같이 다른 사람까지 복을 받게 한 신앙입니까? 아니면 아간과 같이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화를 받게 하는 신앙입니까? 다시금 우리 자신의 믿음의 새롭게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백부장과 같이 나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복을 받게 하는 그런 믿음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백부장의 신앙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그의 신앙은 ① 주님께 나아와 간구하는 믿음이었습니다. ②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역사를 가진 믿음이었습니다. ③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④ 말씀의 절대적 권위와 능력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⑤ 다른 사람까지 복을 받게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바라기는 이와 같은 신앙의 모습이 과거에 있었던 한 백부장의 믿음이 아니라 오늘 나를 통해서도 이런 증거가 나타날 수 있도록 보다 성숙한 믿음을 가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철저한 믿음은 예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중에서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했다는 칭찬을 받았던 것처럼 주님이 우리를 향해 이 지구촌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했다는 칭찬을 듣고 응답을 받는 축복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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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맥컬로우가 “하찮아진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우리의 편의에 따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 인 믿음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훼퍼가 “나를 따르라”라는 책에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를 싸구려로 바꾸었다”라고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값싼 싸구려로 생각하는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히 11:6 상반 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참으로 소유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겨우 명목만을 유지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칭찬받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의 믿음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백부장은 겨우 명목만을 유지하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께 칭찬받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10절에서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까지 기이히 놀랄 정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기이히 여겨도 하나님에게는 별로 기이하지 않은 일들이(슥 8:4-6) 보통인데,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까지도 기이히 여인 믿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그래서 본문 13절에서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고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간구에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께로부터 칭찬받은 이 백부장은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선민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한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나안 여인 곧 수로보니게 여인도 이방인이었고, 이스라엘의 언약밖에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도 인종적으로는 이방인이었고, 이스라엘의 언약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동일하게 칭찬을 받았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응답을 받은 것이 이방인이고 언약 밖에 있었기 때문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비록 그들이 선민 이스라엘 백성은 아니었지만, 언약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응답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시고 있는 것입니까?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을 받은 언약 백성이라고 자랑만을 하였지, 주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오늘날 소위 ‘그리스도인’이라는 하는 자들의 모습 속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을 받은 언약 백성이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주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는 분이 있다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님께서는 본문 11-12절에서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당연히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한 것을 지적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즉 만일 유대인만이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도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눅 3:8에서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분명하게 경고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유대인이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지 못하면 하늘나라 바깥으로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구원은 산 믿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민족이나 인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요 316, 롬 10:12,13, 갈 3:9, 골 3:11, 벧전 2:9) 따라서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의 신앙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주님께로부터 칭찬받은 이 백부장은 자신의 문제 때문에 주님께로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 때문에 주님께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흉악한 귀신에 들린 자신의 딸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자신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수하에 있는 종의 병을 위해서 주님께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종이란 정말 하찮게 여겨지는 존재였습니다. 종의 인격은 물론이고 생명의 존엄성은 존중되지 아니하는 별볼일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바로 이러한 종을 위해서 친히 예수님께 나와서 부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충격에 가까운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이 백부장은 가버나움에 주둔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해변에 위치해 있는데 예수님은 이곳을 사역의 중심지로 삼으시고 활동하신 곳이었습니다. 로마 군단은 6천명의 군사로 결성되었고, 그 속에는 60여 개의 단위 부대가 편성되었는데 1단위 부대의 지휘관이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건은 누가복음(7:2-20)에도 기록이 되어 있는데 약간의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에는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반해 누가복음에는 유대인 장로 몇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것은 곧 성경의 오류라고 헛된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기사를 축소하여 중개자(유대인 장로들)를 생략함으로써 사건을 간결하게 묘사하면서 백부장의 믿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이 곧 누가복음의 관점과 다른 차이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나라에 반역하는 세상으로 어두움과 혼돈 속에 잠겨 있습니다. 이러한 혼돈의 세계 속에서도 그리스도께로부터 생명의 빛을 받은 신자가 믿음을 발산하므로 신자의 멋을 보여주는 실례들이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백부장은 로마의 직업 군인으로서 비록 이스라엘의 언약밖에 있었던 사람이요, 인종적으로는 이방인이었지만 경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 그의 믿음을 보여줌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했다고 하는 칭찬과 함께 그 문제를 해결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본문의 백부장의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백부장은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예수님의 바른 신앙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칭찬받는 믿음이란 어떤 믿음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칭찬받는 믿음은 주님께 나아와 간구하는 믿음입니다.(5절)
본문 5절에서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백부장은 주님께 나와서 친구 간구하였습니다. 칭찬받는 믿음은 주님께 나아와 간구하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하인을 위해서 주님께 나아와 간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본인을 위해서도 주님께 나와야 간구해야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나아와 간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나오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주님께 간구하는 자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여기의 "간구"라는 것은 기도의 한 형태입니다. 이것은 곧 기도의 애절함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요, 하나님의 자녀된 자가 누릴 권세입니다. 이 특권을 한 백부장은 마음껏 누리며 살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이방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메시야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이었던 한 백부장은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자신의 목적을 채우기 위한 정욕적인 기도하지 아니했습니다. 백부장은 기도의 대상을 바로 알고 간구하였습니다. 백부장은 하인을 위한 도고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백부장은 중풍병까지 걸려 누워 있는 아무 쓸데없는 하인을 사랑하여 예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사랑이 넘치는 도고의 기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이 나라는 소망이 있고 교회는 능력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병들어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지만, 나에게 전혀 도움도 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나에게 피해가 되는 사람이지만 백부장은 그를 위해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 나아와 간구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이것은 곧 주님의 능력을 아는 것이요, 주님을 주님 되게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세상에는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 앞에서 기도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이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시편 115:6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상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시 94:9에서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구하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시 116:2)
그런데 백부장은 이러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설계하시고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인간의 모든 고장 난 부분을 치료하실 수 있는 치료자입니다. 또한 그가 친히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기에(사53:4) 우리는 강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만인의 구원자요 치유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기도에 응답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백부장의 기도는 자신의 목적을 채우기 위한 정욕적인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인을 위한 도고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백부장과 같이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형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시대에는 더욱 그리워지기만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이 나라는 소망이 있고 교회는 능력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내 자신을 위한 기도도 필요하지만 고통을 받는 형제자매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요, 응답과 축복을 경험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특히 병들어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지만, 나에게 전혀 도움도 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나에게 피해가 되는 사람이지만 백부장은 그를 위해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칭찬받는 믿음은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역사를 가진 믿음입니다.(6절)
본문 6절에서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백부장은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역사를 가진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칭찬받는 믿음은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역사를 가진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백부장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겼습니다. 은혜받은 자의 마음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의 역사를 가진 신앙이었는가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7장 2절과 5절을 보면 백부장의 사랑의 역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복음 7장 2절과 5절을 말씀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2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 하시기를 청한지라(3절)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4절)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5절)”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눅 7:2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백부장은 정복자요, 로마의 장교로서 자기 수하에 있는 종을 함부로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아니했다는 점입니다. 여기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 수하에 있는 종을 사랑했습니다. 종에 대한 긍휼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백부장은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을 향하여 종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종이란 헬라말로 “아무 권한도 없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하인」이란 말은 "하인”이라는 말은 “아들”이란 뜻입니다. 이는 백부장이 평소에도 그를 아들처럼 사랑했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이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5:7에서 “긍휼이 여기는자는 긍휼이 여김을 받는다ꡓ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암 부스」도 ꡒ긍휼은 구원의 낙하신과 같다ꡓ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마땅히 우리 주변에 연약한 성도들에 대해서 사랑과 긍휼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말로만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말로만 긍휼함을 베풀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은 성도답게,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성도답게 백부장처럼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눅 7:3-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백부장은 정복자요, 로마의 장교요, 피정복국인 유대 민족을 사랑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더 놀라게 하는 것은 유대 나라의 정복자요, 로마의 장교인 그에 대해서 마땅히 적개심을 품어야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장로들은 그에 대해서 선한 증거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백부장은 동네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평소 인정을 받았습니다. 죽어 가는 보잘 것 없는 종도 귀하게 돌보았고, 적대적이기 쉬운 유대인에게 칭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백부장은 당시에 대단한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상당한 고급장교였습니다. 상당한 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풍 병에 걸린 하인을 위해서 주님께 직접 나와서 병고침을 위해서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인종과 계급을 뛰어 넘는 숭고한 참 사랑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인이라도 그의 인격과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며 그의 연약함을 안타까워하며 불쌍히 여기며 그의 질병이 치료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주님께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 특히 제자들에게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증거를 얻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① 스데반 집사님의 믿음이 그러했습니다.
행 6:3에서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스데반 집사님은 사람들에게 선한 증거를 얻었습니다.
② 고넬료의 믿음이 그러했습니다. 행 10:22에서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고넬료는 로마의 백부장이었지만 사람들에게 선한 증거를 얻었습니다.
③ 사도 바나나와 바울의 믿음이 그러했습니다. 행 15:25-26에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바나바와 바울은 사람들에게 선한 증거를 얻었습니다.
④ 여제자 드로가 믿음이 그러했습니다. 행 9:39에서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여제자 드르가」는 사람들에게 선한 증거를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도르가」라는 여제자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의 수고와 봉사를 잊지 못했습니다. 이 여인은 경건한 믿음의 귀부인으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믿음도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아야 하겠지만 이웃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오늘 우리는 이웃이나 교회 앞에서 칭찬 받는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가장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 압제하고 무시할 사람들을 오히려 섬기고 봉사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사람이라는 소문을 듣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말로만 믿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의 믿음도 백부장처럼 말로만이 사랑의 역사를 가진 믿음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선한 증거를 얻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선한 증거를 얻지 못하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부끄러운 믿음이요, 연약한 믿음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백부장과 같이 가장 가까운 사람 곧 가족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부터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기 위해서는 백부장처럼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역사를 가진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3. 칭찬받는 믿음은 겸손한 믿음입니다.(8절 상)
본문 8절 상반 절에서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백부장은 겸손한 믿음이었습니다. 칭찬받는 믿음은 겸손한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의 “감당치 못하다”라는 말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몹시 부족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어떤 권위에 대한 인간의 무가치함을 느낄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는 분명 자신의 죄악 됨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절대 거룩성을 인지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높으심과 자신의 무가치성에 대한 자각하는 것이 곧 신앙의 본질입니다. 보통 군인의 기질은 거칠고 거만한 것입니다. 사람은 권세를 잡으면 교만해지기 쉽고, 재물을 얻으면 방탕하기 쉬운데 그는 믿음을 가졌기에 자신의 세상적 지위를 초월하여 주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백부장이면 얼마든지 자기 힘과 권력을 뽐낼 사람입니다. 군인으로서 인정을 받은 당당한 사람입니다. 직업 군인이 공연히 겸손한 척 할 직업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놀라울 정도로 겸손했습니다.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겸손입니까? 백부장은 세상에 빛나는 로마 군인의 훈장도 다 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아주 겸손한 모습으로 도움을 요청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은사가 있어도 겸손이 없으면 무익합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인은 유대인 집에 자유로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로마인 집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금하고 로마인의 집에는 우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의 집은 유대인의 집 보다 더 부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론 자격이 없습니다. 또,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면 예수님이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선한데 겸손한 믿음이 없는 이도 있습니다. 백부장은 선한 사람이면서 믿음이 있었습니다.
▶ 겸손(謙遜)이 없으면 어떠한 하나님의 은혜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 젊다는 그것 때문에 교만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조금 건강하다는 그것 때문에 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조금 있다고 하는 그것 때문에 거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조금 배웠다고 하는 그것 때문에 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래 믿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오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한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약 4:6과 벧전 55에서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지만 교만한 자는 대적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믿음은 겸손에서 나옵니다. 어거스틴은 "어떻게 하면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 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거듭해서 말하기를,"첫째도 겸손이고, 둘째도 겸손이고,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사람은 겸손 위에 위대한 믿음을 건축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한 사도 바울도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겸손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당당하게 소명을 받은 이사야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으로다"하고 자기 겸손에서 출발했습니다.(사 6:5) 이사야는 깨끗한 줄로만 알았던 자기 입술이 부정함을 먼저 알았습니다. 손을 들어 기도하면 기적을 나타냈던 모세도 애굽에 못 간다고 거듭해서 겸손하게 사양할 줄 안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들도 겸손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4. 칭찬받는 믿음은 말씀의 절대적 권위와 능력을 믿는 믿음입니다 .(8절 하)
본문 8절 하반 절에서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백부장은 말씀의 절대적 권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칭찬받는 믿음은 말씀의 절대적 권위를 믿는 믿음입니다.
로마 군대의 장교로서 수하(手下)의 군인에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즉 눈에 보이는 세계의 현상을 비유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영적 현상의 원리를 꿰뚫어 본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의 능력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당장 나타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말씀 속에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주님의 말씀 한마디면 어느 곳에 있든지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으로 말씀의 역사 속에서 되어지는 사건입니다. 마리아는 요 2:5에서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말씀이 가라하면 가고, 말씀이 서라하면 서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말씀으로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자체이십니다.(요1:1-3,14).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요, 영생의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요 6:68에서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고백하였던 것처럼 우리들도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요1:1-3), 말씀으로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바꾸어 놓았습니다(요21:15-19,행9:1-22). 말씀으로 병을 고치시고, 말씀으로 바다를 잔잔케 하셨습니다(마8:23-27). 또한 말씀으로 귀신을 내쫓았습니다(마8:28-3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장 37절에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과 원리가 이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만족하는 신앙은 성숙한 성도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말씀보다 경험이나 지식을 앞세우지 맙시다. 꿈이나 이상이나 안수 받는 행위보다 예수님의 말씀이 더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외면한 기적 중심, 체험 중심에서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성장하도록 하나 님의 말씀을 매일 매일 읽고 듣고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적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신앙이 약한 사람입니다. 기적은 믿음을 낳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낳게 하는 유일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17절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여 지고, 만져지고, 느껴지는 감각적인 신앙에서 이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이면 족하다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확신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5. 칭찬받는 믿음은 다른 사람까지 복을 받게 하는 믿음입니다.(8절 상)
본문 13절에서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백부장은 다른 사람까지 복을 받게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칭찬받는 믿음은 다른 사람까지 복을 받게 하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의 믿음 때문에 제3자인 부하의 병이 나왔으니 그는 자기가 잘 믿어 자기 혼자만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믿음으로 다른 사람까지 복을 받게 한 것입니다. 이는 가나안 여인 곧 수로보니게 여인의 경우와 흡사합니다. 마 15:28에서“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절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흉악한 귀신에 들린 딸이 고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중풍병자 마 9:2에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으되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지만 결코 낙심하지 아니하고 예수님께서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예수님께 달아 내릴 때에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육신적인 병뿐만 아니라 영적인 병까지도 고쳐주셨던 것입니다.(눅 2:4-5)
그렇습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분명히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들의 믿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 여리고 성의 전투에서 대승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아이성 전투에서 실패하였던 것은 바로 아간과 같은 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 경우입니다. 그러나 백부장과 수로보니게 여인 그리고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어서 그들로 말미암아 제3자가 복을 받은 경우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백부장과 같이 다른 사람까지 복을 받게 한 신앙입니까? 아니면 아간과 같이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화를 받게 하는 신앙입니까? 다시금 우리 자신의 믿음의 새롭게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백부장과 같이 나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복을 받게 하는 그런 믿음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백부장의 신앙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그의 신앙은 ① 주님께 나아와 간구하는 믿음이었습니다. ②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역사를 가진 믿음이었습니다. ③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④ 말씀의 절대적 권위와 능력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⑤ 다른 사람까지 복을 받게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바라기는 이와 같은 신앙의 모습이 과거에 있었던 한 백부장의 믿음이 아니라 오늘 나를 통해서도 이런 증거가 나타날 수 있도록 보다 성숙한 믿음을 가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철저한 믿음은 예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중에서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했다는 칭찬을 받았던 것처럼 주님이 우리를 향해 이 지구촌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했다는 칭찬을 듣고 응답을 받는 축복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