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칼빈', 16세기의 위대한 인물   
  
요즘 불멸의 이순신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의 영웅이다. 이순신 장군은 1545년에 태어났다. 지금부터 자그마치 460년 전의 일이다.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다. 이순신은 특히 책을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겪은 모든 사건과 경험을 글로 남기려는 열심을 가진 장군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살아 있을 때보다 죽고 난 후에 훨씬 더 유명해진 인물이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을 그에게 적용한다고 해서 반대할 사람을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영웅은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추앙받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김훈의 <칼의 노래>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보여주는 인간 이순신에게 훨씬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민초들이 겪는 모든 인생고를 초월한 모습의 영웅이 아니라, 누구나 보편적으로 겪는 수많은 인생고 앞에서 고뇌하고 갈등하는 평범한 인간 이순신! 인간 이순신에게서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것은 그의 삶의 궤적에서 평범한 인생이 겪는 격랑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사한 인생의 격랑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평범함을 그의 비범함에 견주어 보기도 한다. 그리고 난세의 영웅이란 특별한 세상이 준비해 놓은 비범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현실에 충실한 범인의 일관된 의지의 열매라는 결론을 도출해 내기도 한다. 

이순신이 태어난 시기에 유럽은 종교개혁의 불씨가 피어오르느냐 사그라지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개신교 동맹군들이 로마의 교황과 황제의 연합군을 맞아 힘겨운 전투를 벌여야 할 쉬말칼트 전쟁이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영웅이 태어난 다음 해에 종교개혁의 선구자 루터는 임종을 맞이했다. 1507년에 태어나 이순신보다 28살 연상인 칼빈은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여 처음 공직 생활을 시작한 32세의 나이에 제네바 시정부에 의해 추방되었다. 칼빈의 제네바 생활은 마치 이순신이 선조와 원균 등으로부터 끊임없이 시기와 견제 속에 살았던 것처럼 긴장의 연속이었다.  

제네바 시의 초청으로 1541년에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 프랑스 피난민 칼빈은 스위스 호반도시 제네바를 개혁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특히 이단적인 교리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무리들, 즉 로마교, 재세례파, 영성주의자들, 니고데모파 등을 반박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개혁 의지와 추진력을 지지하는 사람은 소수요, 오히려 자신을 음해하려는 세력들이 다수임을 알면서도, 또한 그 다수가 한결같이 고위층 인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칼빈은 그와 같은 일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하나님 자신의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자들의 눈에 이와 같은 칼빈의 과격한 개혁은 도무지 납득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마치 이순신이 전란을 대비하여 무기를 정비하고 고된 훈련을 강행했을 때 그의 휘하의 장수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수많은 반대와 우여곡절의 위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두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 역사의 승리자들이 되었다. 그것도 역사에 남을 위대한 승리였다. 

이순신이 태어난 1545년에는 비성경적이고 불건전한 무리들에 대한 칼빈의 반박 논문들뿐만 아니라, 1539년판이 증보되어 1543년에 출판된 <기독교강요> 라틴어판이 불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1536년에 초판이 소개된 이후 계속해서 수정 정보되어 오다가 1559년에 드디어 라틴어 최종판이 완성되었다. 최종판은 제네바의 로베르투스 스테파누스(Robertus Stephanus) 출판사를 통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이 라틴어 최종판의 최초 번역서는 네덜란드어판이다. 이 번역서는 1560년에 출판되었는데, 같은 해에 불어 번역서가 뒤이어 출판되었다. 1561년에 출판된 제네바판은 라틴어 최종판의 8절판으로 된 포켓용이다. 같은 해에 <기독교강요>는 1559년 최종판 크기와 같은 2절판 크기의 라틴어판으로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출판되었고, 최초의 영어 번역이 런던에서 출판되었다.  

이런 고서들을 구경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고서를 소장하고 있는 유럽이나 미국의 유수한 도서관들이 그것들을 보물 취급하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보고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고서들을 구경하는 일이 한결 쉬워졌다. 부산 영도에 소재한 고신대학교 도서관이 바로 이와 같은 16-17세기에 출판된 고서들을 상당수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최소한 몇 권의 고서를 구경하기 위해 유럽이나 미국의 역사 깊은 대학 도서관을 찾아 가는 먼 여행의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 고서들 가운데 칼빈이 살아 있을 때 출판된 책들도 소수 포함되어 있는데, 제네바의 안토니우스 레불리우스(Antonius Rebulius) 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1561년 라틴판 <기독교강요>와 1553년에 출판된 <요한복음주석>과 1551년에 출판된 최초의 구약주석인 <이사야주석>이 그것들이다. 

1551년에 등장한 이사야주석은 최초로 칼빈이 출판한 최초의 구약성경 주석이었다. 이것은 칼빈이 직접 작업한 것이 아니라, 1549년 칼빈의 이사야 강의를 수강하던 니꼴라 데 갈라르(Nicolas des Gallars)가 필기한 것을 칼빈이 약간 수정하여 출판한 것이다. 칼빈은 주석이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강의 내용을 모아 조심스럽게 정리되었음을 알리면서 1550년 12월 25일에 영국 왕 에드워드 6세(Edward VI)에게 헌정했다. 칼빈은 이 헌정사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당시의 부패한 교회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예언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교회를 회복시키시고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예언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제가 전하께 몇 말씀드리고자 계획했던 요점은 한 가지뿐입니다. 즉 선지자[=이사야]는 배은망덕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탄식을 설명한 후에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신용 없는 배신과 절망적인 완고함이 어떤 형벌을 받아 마땅한 것인지 경고했습니다. 즉 그들이 무시무시한 파멸로 돌아가게 될 시기가 임박하다고 [경고했습니다]. 동시에 그는[=선지자는] 새롭고도 믿기 어려운 교회 회복에 대해 다른 [목소리로 말하면서], 이후로는 비록 원수들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것이[=교회가] 항상 행복하고 영광스럽게 번성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란 오직 하나님 손에 놓여 있다는 칼빈의 확신을 엿볼 수 있다. 배은망덕한 교회를 황폐케 하는 것은 사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다. 흔적도 없이 파멸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사탄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완전히 넘겨주시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자신의 교회를 자신의 손으로 무너뜨리시지만, 그 무너뜨림은 완전히 소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재건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배은망덕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곧 새로운 교회 회복의 시작을 의미한다.  

칼빈은 이와 같은 교회 회복과 재건을 위해 자존심과 명예에 연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세상의 악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강물을 역행시키는 것만큼 무모한 짓"이라고 지적했는데,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은 바로 그와 같은 '무모한 짓'을 자행한 사람들이었다. 왜 그들은 그와 같이 '무모한 짓'을 저질렀는가? 그것은 '교회 재건'(ecclesiae instauratio)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일'(opus Dei ipsius)이라는 그들의 확신 때문이었다. 

16세기의 두 인물, 이순신과 칼빈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고 죽었다. 그들에게서 공통점을 찾는 일은 어색한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순신은 조선 사람이요, 칼빈은 서양 사람이다. 전자는 칼의 사람이요, 반면에 후자는 붓의 사람이다. 한 사람은 전사한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침대에서 병사했다. 이순신은 여호와 하나님을 몰랐겠지만, 칼빈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이처럼 그 두 사람을 대조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또한 두 사람 사이에 분명 공통점도 있다. 두 사람은 모두 16세기의 인물이다. 두 사람 모두 가까이에 자신들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적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수였을 뿐만 아니라 세도가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그들에게 굽히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신념에 따라 끝까지 싸웠고 결국 이겼다. 둘 다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을 동시에 물리칠 수 있었다. 이순신과 칼빈은 두려워해야 할 대상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분별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맞서 싸워야 적이 누구인지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 적을 향해 용감하게 칼을 뽑고 붓을 들었던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인류 역사에 위대하고 훌륭한 종적을 남긴 위인들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스스로 그와 같은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 되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일들을 드러내거나 자랑하려 들지도 않았다.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일이라 해도, 자신의 신념대로 일관성 있게 성실하게 추진해나갔을 뿐이다. 그들은 적들과 싸워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스스로를 큰 자로 여긴 적이 없다. 오히려 성실하게 자신의 소임을 다하려고 한 작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결코 소인배라 부르지 않는다. 역사는 그들을 위대한 인물이라 기록한다.  

이것이야말로 범인과 위인의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이 두 위인, 이 두 위인의 삶의 자세는 오늘날 스스로 위대한 인물이 되고자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 마치 자신이 대단한 인물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고 거만을 떠는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가! 

황대우 / 창원은광교회 부목사, 화란 아펠도른신학교 역사신학(Th.D) 

뉴스엔조이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