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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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란 무엇인가?
“사사시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
사17:6,21:25
지금 우리 나라의 현실은,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대로, 매우 어둡고 우울합니다. 매우 무질서하고 혼란합니다. 모두 자기들이 옳다고 아우성을 치며 상대방을 비방하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한 편에서는 미국의 성조기를 불 태우며 그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북한의 인공기를 불 태우며 그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도 세계의 172개국으로부터 온 8500여명의 젊은이들이 지금 대구에 모여서 “벽을 넘어 하나로, 꿈을 펼쳐 미래로” 란 주제를 가지고 평화에 근거한 하나되는 미래의 꿈을 추구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분노와 분쟁과 분열에 휩싸여 있는 완고한 기성 세대가 물러가고 보다 순수하고 발랄한 젊은 세대가 나타나서 평화와 하나됨의 꿈을 한 반도와 지구 곳곳에 펼쳐 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 봅니다.
조금 전에 읽은 사사기 사17:6 말씀과 사사기21:25 말씀은 오늘 우리 사회의 어둡고 무질서한 현실을 너무나 잘 묘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성경 말씀은 과거의 사실을 그대로 기술한 역사적인 책인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영적이고 실존적인 책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과거 사람들의 이야기는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비추어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자기 소견대로 생각하고 자기 소견대로 행동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사시대의 사람들은 각각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했고 자기 기분대로 생각하고 행동했으며 자기 욕심대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국민들은 모두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둘로 또는 셋으로 갈라져서 분노하고 분쟁하고 분열하면서 모두 자기들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상대방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사사 시대는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시대였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 왕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종교적인 기준과 질서가 있고 가정적인 기준과 질서가 있으며 국가적인 기준과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정해 주셨고 지도자들을 세우셔서 그것들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사사 시대는 지도자도 없었고 기준도 없었고 질서도 없었습니다. 모두 자기가 왕이었고 자기가 기준이었고 자기가 질서였습니다.
첫째 종교 질서가 없었습니다.
사사기17장은 그 당시 종교 질서가 없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미가는 자기 어머니의 은 일 천 일백 세겔을 훔친 도둑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저주가 두려워서 도둑질 한 것을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미가 자기 아들이 기특했던지 자기 아들을 제 멋대로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자기 집에 신상을 만들고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사사기17:6은 그 사건을 기록한 후 이렇게 덧붙혔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베들레헴에 레위 지파에 속한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이 생활고 때문에 방황하다가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를 만났습니다. 미가가 그 소년에게 어디서부터 오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 거할 곳을 찾으러 다니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미가가 그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제사장이 되라 내가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그래서 그 소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사시대는 종교 질서가 없었습니다. 우상주의와 물질주의로 치우쳐서 제멋대로 행동했습니다.
이야기는 또 계속됩니다. 사사기18장은 단 지파가 자기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라이스 를 침략한 사건을 보여줍니다. 단 지파가 군인 육백 명을 거느리고 라이스로 가서 그들을 죽이고 그 성읍을 불 사르고 그곳을 점령했습니다. 그런데 단 지파가 군인 육백 명을 거느리고 가서 라이스를 침략할 때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에 가서 제사장 레위 소년과 그곳에 있던 우상과 비품을 강제로 빼앗아 갔습니다. 침략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거짓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거짓 종교 지도자는 단 지파의 침략 행위를 정당화했고 축복까지 했습니다.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삿18:6). 아부와 아첨의 말이었습니다. 종교가 정치에 이용당한 것이었습니다. 단 지파는 라이스를 점령하고 그곳에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서 살았습니다. 거짓 제사장도 그곳에서 정치적 비호를 받으며 종교 행위를 계속했습니다. “단 자손이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며 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요나단[레위 소년]과 그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삿18:28-30). 그러나 그들의 운명이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종교를 빙자한 그들의 침략 행위를 하나님께서 징계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외국으로 사로잡혀가는 포로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백성이 사로 잡혀가는 날까지 이르렀더라”라고 했습니다. 그 사건은 사무엘 시대 말기 수리아 군대에 의해 포로로 잡혀 간 사건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사사 시대는 종교 질서도 군사 질서도 정치 질서도 없었습니다.
둘째 가정 질서가 없었습니다.
사사기19장은 그 당시 가정 질서와 윤리 질서가 없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사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레위인은 오늘날로 말하면 교역자나 장로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교회와 예배를 봉사하기 위해서 택함을 받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레위인이 첩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첩은 행음을 하고 남편을 떠나 베들레헴에 있는 그의 아비 집으로 갔습니다.
가정 질서와 윤리 질서가 파괴된 것을 보여줍니다. 그 레위인은 첩을 다시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첩의 아비 집으로 갔습니다. 첩의 아비는 사위를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며 사위와 함께 나흘 동안 날마다 먹고 마시며 즐겼습니다. 첩의 아비도 무절제하고 무질서한 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다섯째 되는 날 밤에야 그 레위인이 첩을 데리고 장인 집을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너무 밤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돌아가는 도중에 사고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베냐민 지역의 기브아란 곳에 들어가서 한 노인의 집에서 하루 밤을 유숙하게 되는데 그 밤에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그 노인의 집에 들이 닥쳤습니다. 노인의 집에 들어 온 사람들을 끌어내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 때 그 노인은 기브아 불량배들에게 자기 집에 온 손님들에게 악을 행치 말고 그 대신 자기의 딸들을 줄 터이니 그들과 상관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레위인은 자기 첩을 그 불량배들에게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불량배들은 레위인의 첩을 밤 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아주었습니다. 새벽에 그 첩이 노인의 집으로 돌아와서 집 문에 엎드러져 있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칼로 첩의 시체를 열 두 덩이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 토막을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 보냈습니다. 사사 시대는 가정 질서와 윤리 질서가 파괴된 시대였습니다. 음행과 폭행과 토막 살인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레위인도 그의 첩도 첩의 아비도 기브아의 노인도 기브아의 불량배들도 모두 자기 기분대로 자기 정욕대로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사사 시대는 가정 질서도 윤리 질서도 없었습니다.
셋째 국가 질서가 없었습니다.
사사기20장과 21장은 그 당시 국가 질서와 사회 질서가 없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이스라엘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으로 하여금 사건의 전말을 고하게 했습니다. 레위인의 말이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가 내 첩으로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나의 우거한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한지라 내가 내 첩의 시체를 취하여 쪼개어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내었노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인함이로다”(삿20:4-6).
사실을 말하기는 했지만 그 레위인은 뻔뻔하게 말했습니다. 사실 음행과 망령된 일은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첩을 얻어서 행음을 했고 자기가 자기의 첩을 내어주었고 그 시체를 토막 내는 망령된 일을 했지만 자기의 죄는 보지 못하고 기브아 사람들의 죄만을 고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정치인들은 정치인들대도 기업인들은 기업인들대로 노사는 노사대로 동서는 동서대로 남북은 남북대로 시청 앞에 모이고 국회 앞에 모이고 부두에 모이고 공장에 모이고 고속도로 상에 모여서 상대방의 잘못만을 지적하며 분노하고 분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미스바에 모였던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두 합심하여 베냐민의 기브아를 치기로 작정했습니다. 복수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브아를 치기 전에 이스라엘의 대표를 먼저 베냐민에게 보냈습니다.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잡아서 보내면 그들을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냐민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결국 전쟁이 붙었습니다.
종족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누가 먼저 나가서 싸우리이까” 라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자기들이 전쟁을 하기로 다 정해 놓고 “누가 먼저 나가서 싸우리이까” 라고 전략을 하나님께 물은 것입니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지한 답을 하시지 않습니다.
너희들 마음대로 해 보라고 하시면서 유다가 먼저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두 번이나 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만하고 자기 멋대로 복수의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전쟁에 패하게 하신 것입니다.
두 번 패한 후 이스라엘은 그제서야 금식하고 울면서 하나님께 회개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전쟁에서는 베냐민이 패하고 이스라엘이 승리를 했습니다. 삿20:48을 읽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마다 다 불살랐더라.” 베냐민 사람들은 다 죽고 말았습니다. 육백 명의 군사들만이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ㅐ르러 거기서 넉 달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승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벧엘에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대성통곡했다고 했습니다.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대성통곡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어찌하여 한 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 하더니”(삿21:2,3).
자기들이 자기들의 동족을 다 죽여 놓고는 그것을 인해 대성통곡했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동족을 향한 과격한 분노와 원수 갚음은 곧 민족적인 슬픔과 아픔을 가져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뉘우쳐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가로되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쳤도다 그 남은 자들에게[광야 림몬 바위에 숨어 있는 육백 명]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삿21:6,7).
그리고는 미스바에 모이지 않았던 사람들인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을 쳐서 죽이고 그곳에서 처녀 사백 명을 사로 잡아다가 림몬 바위에 숨어 있던 베냐민 사람들을 베냐민으로 돌아오게 한 후 그들에게 아내들로 주었습니다. 그래도 처녀 이백 명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이백 명은 실로의 여자들이 절기 때에 무도회를 여는데 실로의 여자들이 춤 추러 올 때에 베냐민 남자 이백 명이 포도원에 숨었다가 여자 이백 명을 붙잡아다 자기들의 아내로 삼게 했습니다. 여자들을 유괴해서 자기들의 아내로 잡는 유괴 범죄가 이미 오래 전부터 자행되었습니다. 사사기는 이 유괴 사건을 기술하므로 그칩니다.
“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 중에서 자기들의 수효대로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니라 그 때에 이스라엘이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3,25). 사사 시대는 국가 질서도 사회 질서도 정치 질서도 없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좀 복잡한 이야기를 소개 했습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종교 질서와 가정 질서와 국가 질서가 없었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저속한 표현을 쓴다면 모두가 개판이었습니다.
종교도 가정도 국가도 모두가 개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의 형편이 그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합니다. 지도자도 없고 기준도 없고 질서도 없습니다. 모두 자기들의 주장만을 분노의 목소리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요약하려고 합니다. 사사 시대는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무질서하게 행동하던 시대였습니다. 사사 시대는 첫째로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던 시대였습니다. 개인 이기주의와 집단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이익은 생각하지 않고 이웃의 이익은 생각하지 않고 모두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추구하던 부끄러운 시대였습니다.
손봉호 교수는 지적하기를 기독교의 윤리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생각하는 윤리인데 유교의 전통과 보수적인 기독교의 전통이 너무 개인주의적인 행복과 축복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오늘의 사회가 무질서와 혼란에 빠졌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사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했습니다.
사사 시대는 둘째로 자기 자신의 소견만을 강하게 나타내던 시대였습니다. 자기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제일 옳고 다른 사람들도 옳은데 자기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자기의 옳음을 너무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위태로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이웃을 무시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자기의 소견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김상복 목사님도 자기의 소견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욥은 나중에 자기의 소견을 나타내지 않고 그 대신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릴 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자기의 소견을 너무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님 편에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가슴에 깊이 품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은 그렇게 좁지도 않고 편협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남쪽 사람들뿐 아니라 북쪽 사람들도 사랑하고 동쪽 사람들뿐 아니라 서쪽 사람들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소견을 너무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또한 이웃의 편에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형편과 사정을 깊이 생각 하지도 않고 이해 하지도 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모든 악한 사람들을 대할 때 제일 먼저 그들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마음을 품었다고 합니다.
요셉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부드러운 마음을 품었습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친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부드러운 마음을 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의 소견을 너무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의 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의견이 제일 옳다고 생각하며 자기 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제일 옳은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는 것과 이웃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소견이 약해집니다. 자기의 주장이 약해집니다. 하나님이 크게 보이고 이웃이 크게 보입니다. 자기가 작게 보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복음이고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신 복음입니다.
이제 한 말씀 더 드리고 마무리합니다. 지난 주일 설교의 제목이 “은금의 증식: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 부 제목을 붙인다면 “하나님의 염려”라고 부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의 제목이 “사사 시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함”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에 부제목을 붙인다면 “하나님의 실망”이라고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출애굽의 구원과 가나안 정복의 축복을 주셨는데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도 이웃도 무시하고 자기 소견대로 제멋대로 행동하는 실망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기쁨과 자랑의 존재가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실망의 존재가 되고 있습니까? 나 자신의 소견보다 하나님의 소견과 이웃의 소견을 앞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 자신의 이익보다 하나님과 이웃의 이익을 앞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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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시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
사17:6,21:25
지금 우리 나라의 현실은,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대로, 매우 어둡고 우울합니다. 매우 무질서하고 혼란합니다. 모두 자기들이 옳다고 아우성을 치며 상대방을 비방하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한 편에서는 미국의 성조기를 불 태우며 그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북한의 인공기를 불 태우며 그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도 세계의 172개국으로부터 온 8500여명의 젊은이들이 지금 대구에 모여서 “벽을 넘어 하나로, 꿈을 펼쳐 미래로” 란 주제를 가지고 평화에 근거한 하나되는 미래의 꿈을 추구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분노와 분쟁과 분열에 휩싸여 있는 완고한 기성 세대가 물러가고 보다 순수하고 발랄한 젊은 세대가 나타나서 평화와 하나됨의 꿈을 한 반도와 지구 곳곳에 펼쳐 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 봅니다.
조금 전에 읽은 사사기 사17:6 말씀과 사사기21:25 말씀은 오늘 우리 사회의 어둡고 무질서한 현실을 너무나 잘 묘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성경 말씀은 과거의 사실을 그대로 기술한 역사적인 책인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영적이고 실존적인 책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과거 사람들의 이야기는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비추어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자기 소견대로 생각하고 자기 소견대로 행동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사시대의 사람들은 각각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했고 자기 기분대로 생각하고 행동했으며 자기 욕심대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국민들은 모두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둘로 또는 셋으로 갈라져서 분노하고 분쟁하고 분열하면서 모두 자기들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상대방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사사 시대는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시대였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 왕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종교적인 기준과 질서가 있고 가정적인 기준과 질서가 있으며 국가적인 기준과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정해 주셨고 지도자들을 세우셔서 그것들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사사 시대는 지도자도 없었고 기준도 없었고 질서도 없었습니다. 모두 자기가 왕이었고 자기가 기준이었고 자기가 질서였습니다.
첫째 종교 질서가 없었습니다.
사사기17장은 그 당시 종교 질서가 없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미가는 자기 어머니의 은 일 천 일백 세겔을 훔친 도둑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저주가 두려워서 도둑질 한 것을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미가 자기 아들이 기특했던지 자기 아들을 제 멋대로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자기 집에 신상을 만들고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사사기17:6은 그 사건을 기록한 후 이렇게 덧붙혔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베들레헴에 레위 지파에 속한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이 생활고 때문에 방황하다가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를 만났습니다. 미가가 그 소년에게 어디서부터 오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 거할 곳을 찾으러 다니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미가가 그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제사장이 되라 내가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그래서 그 소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사시대는 종교 질서가 없었습니다. 우상주의와 물질주의로 치우쳐서 제멋대로 행동했습니다.
이야기는 또 계속됩니다. 사사기18장은 단 지파가 자기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라이스 를 침략한 사건을 보여줍니다. 단 지파가 군인 육백 명을 거느리고 라이스로 가서 그들을 죽이고 그 성읍을 불 사르고 그곳을 점령했습니다. 그런데 단 지파가 군인 육백 명을 거느리고 가서 라이스를 침략할 때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에 가서 제사장 레위 소년과 그곳에 있던 우상과 비품을 강제로 빼앗아 갔습니다. 침략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거짓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거짓 종교 지도자는 단 지파의 침략 행위를 정당화했고 축복까지 했습니다.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삿18:6). 아부와 아첨의 말이었습니다. 종교가 정치에 이용당한 것이었습니다. 단 지파는 라이스를 점령하고 그곳에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서 살았습니다. 거짓 제사장도 그곳에서 정치적 비호를 받으며 종교 행위를 계속했습니다. “단 자손이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며 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요나단[레위 소년]과 그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삿18:28-30). 그러나 그들의 운명이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종교를 빙자한 그들의 침략 행위를 하나님께서 징계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외국으로 사로잡혀가는 포로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백성이 사로 잡혀가는 날까지 이르렀더라”라고 했습니다. 그 사건은 사무엘 시대 말기 수리아 군대에 의해 포로로 잡혀 간 사건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사사 시대는 종교 질서도 군사 질서도 정치 질서도 없었습니다.
둘째 가정 질서가 없었습니다.
사사기19장은 그 당시 가정 질서와 윤리 질서가 없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사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레위인은 오늘날로 말하면 교역자나 장로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교회와 예배를 봉사하기 위해서 택함을 받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레위인이 첩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첩은 행음을 하고 남편을 떠나 베들레헴에 있는 그의 아비 집으로 갔습니다.
가정 질서와 윤리 질서가 파괴된 것을 보여줍니다. 그 레위인은 첩을 다시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첩의 아비 집으로 갔습니다. 첩의 아비는 사위를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며 사위와 함께 나흘 동안 날마다 먹고 마시며 즐겼습니다. 첩의 아비도 무절제하고 무질서한 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다섯째 되는 날 밤에야 그 레위인이 첩을 데리고 장인 집을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너무 밤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돌아가는 도중에 사고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베냐민 지역의 기브아란 곳에 들어가서 한 노인의 집에서 하루 밤을 유숙하게 되는데 그 밤에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그 노인의 집에 들이 닥쳤습니다. 노인의 집에 들어 온 사람들을 끌어내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 때 그 노인은 기브아 불량배들에게 자기 집에 온 손님들에게 악을 행치 말고 그 대신 자기의 딸들을 줄 터이니 그들과 상관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레위인은 자기 첩을 그 불량배들에게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불량배들은 레위인의 첩을 밤 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아주었습니다. 새벽에 그 첩이 노인의 집으로 돌아와서 집 문에 엎드러져 있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칼로 첩의 시체를 열 두 덩이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 토막을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 보냈습니다. 사사 시대는 가정 질서와 윤리 질서가 파괴된 시대였습니다. 음행과 폭행과 토막 살인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레위인도 그의 첩도 첩의 아비도 기브아의 노인도 기브아의 불량배들도 모두 자기 기분대로 자기 정욕대로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사사 시대는 가정 질서도 윤리 질서도 없었습니다.
셋째 국가 질서가 없었습니다.
사사기20장과 21장은 그 당시 국가 질서와 사회 질서가 없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이스라엘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으로 하여금 사건의 전말을 고하게 했습니다. 레위인의 말이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가 내 첩으로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나의 우거한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서 그로 죽게 한지라 내가 내 첩의 시체를 취하여 쪼개어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내었노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인함이로다”(삿20:4-6).
사실을 말하기는 했지만 그 레위인은 뻔뻔하게 말했습니다. 사실 음행과 망령된 일은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첩을 얻어서 행음을 했고 자기가 자기의 첩을 내어주었고 그 시체를 토막 내는 망령된 일을 했지만 자기의 죄는 보지 못하고 기브아 사람들의 죄만을 고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정치인들은 정치인들대도 기업인들은 기업인들대로 노사는 노사대로 동서는 동서대로 남북은 남북대로 시청 앞에 모이고 국회 앞에 모이고 부두에 모이고 공장에 모이고 고속도로 상에 모여서 상대방의 잘못만을 지적하며 분노하고 분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미스바에 모였던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두 합심하여 베냐민의 기브아를 치기로 작정했습니다. 복수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브아를 치기 전에 이스라엘의 대표를 먼저 베냐민에게 보냈습니다.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잡아서 보내면 그들을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냐민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결국 전쟁이 붙었습니다.
종족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누가 먼저 나가서 싸우리이까” 라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자기들이 전쟁을 하기로 다 정해 놓고 “누가 먼저 나가서 싸우리이까” 라고 전략을 하나님께 물은 것입니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지한 답을 하시지 않습니다.
너희들 마음대로 해 보라고 하시면서 유다가 먼저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두 번이나 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만하고 자기 멋대로 복수의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전쟁에 패하게 하신 것입니다.
두 번 패한 후 이스라엘은 그제서야 금식하고 울면서 하나님께 회개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전쟁에서는 베냐민이 패하고 이스라엘이 승리를 했습니다. 삿20:48을 읽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마다 다 불살랐더라.” 베냐민 사람들은 다 죽고 말았습니다. 육백 명의 군사들만이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ㅐ르러 거기서 넉 달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승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벧엘에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대성통곡했다고 했습니다.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대성통곡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어찌하여 한 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 하더니”(삿21:2,3).
자기들이 자기들의 동족을 다 죽여 놓고는 그것을 인해 대성통곡했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동족을 향한 과격한 분노와 원수 갚음은 곧 민족적인 슬픔과 아픔을 가져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뉘우쳐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가로되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쳤도다 그 남은 자들에게[광야 림몬 바위에 숨어 있는 육백 명]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삿21:6,7).
그리고는 미스바에 모이지 않았던 사람들인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을 쳐서 죽이고 그곳에서 처녀 사백 명을 사로 잡아다가 림몬 바위에 숨어 있던 베냐민 사람들을 베냐민으로 돌아오게 한 후 그들에게 아내들로 주었습니다. 그래도 처녀 이백 명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이백 명은 실로의 여자들이 절기 때에 무도회를 여는데 실로의 여자들이 춤 추러 올 때에 베냐민 남자 이백 명이 포도원에 숨었다가 여자 이백 명을 붙잡아다 자기들의 아내로 삼게 했습니다. 여자들을 유괴해서 자기들의 아내로 잡는 유괴 범죄가 이미 오래 전부터 자행되었습니다. 사사기는 이 유괴 사건을 기술하므로 그칩니다.
“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 중에서 자기들의 수효대로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니라 그 때에 이스라엘이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3,25). 사사 시대는 국가 질서도 사회 질서도 정치 질서도 없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좀 복잡한 이야기를 소개 했습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종교 질서와 가정 질서와 국가 질서가 없었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저속한 표현을 쓴다면 모두가 개판이었습니다.
종교도 가정도 국가도 모두가 개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의 형편이 그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합니다. 지도자도 없고 기준도 없고 질서도 없습니다. 모두 자기들의 주장만을 분노의 목소리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요약하려고 합니다. 사사 시대는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무질서하게 행동하던 시대였습니다. 사사 시대는 첫째로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던 시대였습니다. 개인 이기주의와 집단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이익은 생각하지 않고 이웃의 이익은 생각하지 않고 모두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추구하던 부끄러운 시대였습니다.
손봉호 교수는 지적하기를 기독교의 윤리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생각하는 윤리인데 유교의 전통과 보수적인 기독교의 전통이 너무 개인주의적인 행복과 축복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오늘의 사회가 무질서와 혼란에 빠졌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사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했습니다.
사사 시대는 둘째로 자기 자신의 소견만을 강하게 나타내던 시대였습니다. 자기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제일 옳고 다른 사람들도 옳은데 자기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자기의 옳음을 너무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위태로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이웃을 무시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자기의 소견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김상복 목사님도 자기의 소견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욥은 나중에 자기의 소견을 나타내지 않고 그 대신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릴 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자기의 소견을 너무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님 편에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가슴에 깊이 품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은 그렇게 좁지도 않고 편협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남쪽 사람들뿐 아니라 북쪽 사람들도 사랑하고 동쪽 사람들뿐 아니라 서쪽 사람들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소견을 너무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또한 이웃의 편에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형편과 사정을 깊이 생각 하지도 않고 이해 하지도 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모든 악한 사람들을 대할 때 제일 먼저 그들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마음을 품었다고 합니다.
요셉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부드러운 마음을 품었습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친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부드러운 마음을 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의 소견을 너무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의 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의견이 제일 옳다고 생각하며 자기 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제일 옳은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는 것과 이웃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소견이 약해집니다. 자기의 주장이 약해집니다. 하나님이 크게 보이고 이웃이 크게 보입니다. 자기가 작게 보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복음이고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신 복음입니다.
이제 한 말씀 더 드리고 마무리합니다. 지난 주일 설교의 제목이 “은금의 증식: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 부 제목을 붙인다면 “하나님의 염려”라고 부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의 제목이 “사사 시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함”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에 부제목을 붙인다면 “하나님의 실망”이라고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출애굽의 구원과 가나안 정복의 축복을 주셨는데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도 이웃도 무시하고 자기 소견대로 제멋대로 행동하는 실망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기쁨과 자랑의 존재가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실망의 존재가 되고 있습니까? 나 자신의 소견보다 하나님의 소견과 이웃의 소견을 앞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 자신의 이익보다 하나님과 이웃의 이익을 앞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