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설교는 인간의 본성,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에 관한 김근수 목사(분당 한울교회, 칼빈대학교 신약신학 교수)의 로마서 강해설교를 속기녹취하였다. (편집자 주)
본문 말씀(롬 3:9-20) 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9절에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중심해서 “죄 아래 있는 인생”, “죄 아래 있는 사람”, “그러므로 심판 아래 있고”, “사망 아래 있는 모든 인생”의 본질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음
본문 9절에 의하면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우리”라는 것은 바울 사도를 포함한 유대인들의 특권을 지금 묻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특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구원에 있어서는 유대인들이 “특별한 권한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이 말씀을 읽고 보존하고 전하는 이 고귀한 사명을 맡았다는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복을 받은 민족이라”는 사실에 관해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비단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죄 문제에 있어서는 나은 점이 전혀 없습니다. 즉 말하면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그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 모든 이방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똑같이 죄 아래 있습니다.
10절 말씀부터는 구약에 시편 14편 1-3절과 53편 1-3절을 주로 인용한 말씀인데, 이 말씀은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우선 10절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죄의 보편성”입니다. 죄는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굳이 죄 없는 사람을 찾는다면, 범죄 하기 이전에 아담과 하와라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지음을 받을 때는 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죄를 지음으로 인해서 역시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스스로 “의롭다, 죄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자기들이 “죄 없는 자인 줄”로 안 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오산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죄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다
오늘 이 말씀을 보면 11절에는 “깨닫는 자도 없고” 그렇게 했습니다. 여기에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을 깨닫는다고 말하느냐면 자신의 죄를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죄는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죄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의지 할 수 있게 되어 집니다.
그런데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 자기가 “죄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자기의 도덕과 윤리와 자기의 행함으로써, 그 공로로서 구원받을 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보실 때 가장 어리석은 죄요, 용서 받지 못하는 죄임에 틀림없습니다.
다 치우쳐 무익하게 되다
12절에 보게 되면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여기에 보면, “다 치우친다”는 말은 “다 탈선했다”, “길을 잃었다”는 말입니다. 헬라 말에서 죄라는 말은 하말티아라는 말인데, 이 말은 “길을 잃어버렸다” 그런 뜻입니다. “목표에서 빗나갔다”는 말입니다. “방향을 잃어버렸다”는 뜻이 정확한 말입니다.
“우리는 다 그릇 행하여 양과 같이 제 갈 길로 갔거늘” 하는 이 말은 죄의 본성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는 길로 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인간이 원하는 길로 갔다는 말입니다. 마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그 귀한 회개의 기회와 돌이킬 수 있는 은총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제 갈 곳으로 가버림과 같이 인간은 가야할 길로 가지 아니하고 탈선의 길로 갔다는 말입니다.
생명과 영생의 길로 가지 아니하고 사망과 심판의 길로 간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익하게 되고” 이렇게 했습니다. 여기 “무익하다”는 말은 죄를 짓는 사람은 죄를 회개치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으로서 무슨 일을 해도 그 사람은 선이 없습니다. 그가 고아원을 경영하고 자선사업을 한다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가 행하는 선은 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죄 안에 있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요 자기의 행하고 싶은 대로 따라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고, 자기의 이름으로 드러내고, 자기의 마음의 기쁨을 추구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선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 안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고서 행하는 것은 그가 아무리 세상적인 면에서는 선을 행한다고 칭송을 받을지언정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누더기와 같이 더러운 것입니다. 그건 가치가 없습니다. 무익한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
그 다음에는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선은 하나님에게 기쁨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들어드리는 행위인데, 그런 행위는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의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우리의 어떤 한 부분만 타락시킨 것이 아니고 우리의 전 인격을, 우리의 지식이나, 감정이나, 의지나, 우리의 정서적인 면이나, 감정적인 면이나, 의지적인 면이나, 전체의 사람을 완전하게 타락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전혀 의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길이 없습니다. 전혀 다른 길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을 바울 사도께서 잘 모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 즉 유대인들도 다 죄 아래 있는 인생이라고 말했습니다.
죄 아래 있는 인생의 모습
구체적으로 죄 아래 있는 인생의 모습은 어떠한지 본문에서 세 가지 면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언어에서 나타납니다. 죄안에 있는 사람은 언어생활에서 나타나고, 둘째로는 행동에서 나타나고, 세 번째는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첫째는 언어에서 나타납니다.
본문 말씀 13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무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열어놓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열어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썩은 송장 냄새가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돌로 이렇게 막고 그 돌 사이를 흙으로써 잘 발라서 무덤을 절대 열어놓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들”이라는 것은 이방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인간을 의미합니다. 마치 그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것이 열어놓은 무덤에서 썩은 시체의 냄새가 올라오는 것과 같이 더러운 것이 올라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악취나는 언어생활, 더러운 말, 음란한 말, 악한 말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18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은 그 중심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그 이야기들이 주로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까?
불신자들은 만나면 삼분 안에 음담패설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나면 3분 안에 재물 이야기, 돈 이야기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저는 그 말을 어떤 목사님이 하기에 그 다음부터라도 불신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 봅니다. 틀림없습니다. 나이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또 사회적인 직업이 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가끔 어떤 모임이나 혹은 사람들이 모이는 데에 가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하는 이야기를 한 번 들어 보십시오. 진짜 오늘 이 본문 말씀이 생각나는 대로 썩은 시체와 같은 더러운 냄새나는 이야기들을 그저 계속 쏟아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입만 더러운 것이 아니라 그 인간 속마음이 이미 죄로 오염되고 부패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언어는 그 사람의 인격과 그 사람의 삶을 보여주는 척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사도는 야고보서 3:2절에 말씀하시기를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항상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남을 죽이는 말을 하지 마십시다. 낙심하게 하는 말을 하면 안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 말의 실수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두 번씩이나 입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입에 재갈을 물리지 아니하고는 그 사람은 믿음 생활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재갈은 쇠로써 이렇게 말 입에 넣어가지고 말로 하여금 먹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말하면 침묵을 지키도록, 즉 말하면 우리 속에 썩은 부패한 냄새가 나타나지 않도록 입을 봉해서 침묵하도록 합니다. 이것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야고보 사도가 우리 언어생활에 가장 좋은 비결로서 제시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의 체험을 얻고 성도로서 산다고 하지만 우리 속에서 나오는 이 말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해를 주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남을 기쁘게 하기 보다는 남을 슬프게 하고 남을 힘 있게 하기 보다는 남을 좌절시키게 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 밑에 계속해서 그 말이 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입을 잘 단속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변치 아니하는 영구한 교훈으로 받는 것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사랑, 겸손, 침묵입니다. 그래서 그저 귀로 들어오는 것 다 듣되, 입으로 나가지 아니하고 듣기는 듣되 귀머거리처럼 듣고, 말할 때는 벙어리처럼, 말하지 아니하는 그것이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제가 늘 당부하는 바입니다.
교회에서 말이 많은 사람들을 좀 보십시오. 자기는 모르는지 몰라도 사람들이 다 비웃는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싫어하는지 모릅니다. 인격이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일을 좀하고도 말을 많이 해버리면 그 사람이 일한 것은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있을 때에 다른 사람이 알 때에 그것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입에 재갈 먹이는 경건 생활을 잘해야 됩니다. 그 사람이 얼마만큼 침묵 생활을 잘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얼마나 깊이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죄의 오염된 사람은 뚜껑 열어놓은 무덤과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13절에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라고 했는데 여기 “속인다”는 말은 “남을 넘어뜨리게 한다”는 말입니다. 남만 넘어뜨립니까? 남만 망하게 하고 맙니까? 아닙니다. 자기도 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를 심판하시니까, 자기와 남을 같이 망하게 하는 이런 자들은 죄에 부패되어진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라고 했습니다. 원래 독사의 독은 말입니다. 입술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날카로운 이빨 사이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사람의 입술의 독사의 무서운 독침 같은 그런 이빨처럼 생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드럽습니다.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입술에는 가장 무서운 사람을 죽이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사실은 총칼에 맞아죽는 사람보다는 이 입술에서 나오는 말 때문에 상처받아서 죽는 사람이 더 많을 것입니다. 아마 오늘날에 그 많은 병들이 그 뿌리가 정신적인 불안과 스트레스, 또 정신적인 여러 가지 우울증 이런데서 시작되는 병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의사들이 이야기하기를 “그 사람의 얼굴이 훤하면 위장도 훤해 있고, 얼굴이 찡그려있다면 위장도 찡그려져있다고 생각하라” 그런 말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쁘고 즐거운 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의 신체적인 모든 흐름도 신진대사도 다 기쁘고 즐거워지는 것입니다.
짜증내고 혈기부리고 소리를 지르고 하게 되면 모든 기관들이 다 짜증부리고 혈기를 부려 심장이 더 뛰게 되고, 혈압도 올라가게 되고, 이러다가 쓰러져 죽습니다. 죽는 사람들을 보면 주로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느긋하고 늘 벙긋벙긋 웃는 사람들은 장수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마음속에 있는 평강이 그 사람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우리의 입술로서 다른 사람을 상처 나게 하고 또 그런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은 의인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생활의 비극입니다.
14절 말씀에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여기 “저주”는 영혼까지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육체만 병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까지 망하게 하는 것이 저주인데, 그 입술에서 나오는 말로서 남의 영혼까지 망하게 하고, 악한 독이 가득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은 그저 이대로가 틀림없습니다. 그들이 좋은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진실이 없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실은 지혜롭게 처신하지 아니하면 속아 넘어갑니다. 얼마나 잘 속아 넘어가는지 모릅니다.
두 번째로는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의인이 없다는 것이 행동이 어떠하냐면 15절부터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여기 “피 흘린다”는 말은 “사람을 죽인다”는 살인 행위를 가르치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는 죽이는 일에 신속합니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여기 파멸과 고생이라는 것은 하나님 없이 나가는 죄악의 길의 마지막이 파멸입니다. 살아봤자 그 사람은 일생동안 고생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밝은 날 보기를 원하지만 정작 밝은 날의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죄의 길에는 세상은 넓어도 가기는 편한 길이지만 그 길에는 생명도 기쁨도 가치도 없는 길입니다. 이 길로 가는 것은 다 인간이 죄 아래서 어두워졌다는 증거입니다.
셋째, 죄로 감염되어진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7절에 “평강읭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절에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두 가지로써 이야기를 했는데, 첫째는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여기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하는 이 말씀은 평강이나 평화라는 말은 전쟁과 반대되는 개념의 말이 아니라고 누차 제가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 평강이라는 이 말은 죄 아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이 평강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하면 마음의 기쁨이 저절로 들어옵니다. “나는 아직도 왜 이렇게 기쁨이 없습니까?” 그러면 대답은 “죄 문제를 해결하라”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하면, 참된 회개 후 반드시 마음속에 큰 기쁨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 없는 상태입니다. 내가 기뻐지지 아니한다면 결국 나에게는 아직도 내가 알지 못하는 죄가 있든지, 감추어둔 죄가 있든지, 회개치 아니한 죄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죄 없으면 반드시 기뻐집니다. 끼니가 없어도 반드시 기뻐지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충만해 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둘째로 태도는 부정적인 면에서 밝혀진 태도인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죄인들이 죄를 깨우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 중의 한 가지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중에 하나님이 겁나고 두렵고 무서운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개념을 바로 정립해야 하긴 합니다만 그런 사람은 이미 중생한 증거입니다. 이미 그런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자기가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지 아니하는 그런 사람은 이미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이요,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하나님의 눈총을 느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를 회개하게 되어 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라는 말씀에서 “경외한다”는 것은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믿음이 없을수록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많을수록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내 죄가 하나님 앞에 부끄럽습니다”라는 그런 뜻에서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우리가 이제 노예적인 두려움, 즉 말하면 하나님께서 채찍으로 때리고, 심판과 징계를 우리에게 날리셔서 그래서 무섭고 두렵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어린 신앙입니다.
그런 것은 마치 코 흘리는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회초리가 무서워서 피하는 그런 것과 같습니다. 그건 유치한 것입니다. 장성하고 신앙생활을 오래 한 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말도 조심하게 되고, 행동도 조심하게 되고, 삶의 모든 태도를 조심하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식들이 그 아버지 어머니를 두려워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장성한 아들과 딸들은 힘으로 말하면 아버지 어머니 보다 힘이 더 셉니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가 연로해 져서 기력이 세하여 져도 "얘들아" 하게 되면 "예"라고 말하면서 존경과 예의를 갖추지 않습니까?
그저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하지 않으셔도 “아이고 무슨 일이 있는가?” 혹시 “우리가 잘못한 것은 없는가?” 라고 생각하면서 두렵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 어머니의 욕설이나 채찍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혹시라도 어머니에게 누를 끼치지는 아니했는가?” “그 희생과 사랑을 주신 부모님에게 혹시라도 잘못한 것이 없는가?” 그렇게 생각해서 두려워하는 자식의 마음은 수준 높은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하나님을 향해서 노예근성으로써 두려워하는 그런 노예적인 두려움이 아닙니다. 노예는 주인을 무조건 두려워합니다. 그런 진정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드리지 못함으로 인하여 내가 혹시라도 아버지의 마음에 근심을 끼쳐 드릴까봐 그렇게 하는 두려움은 가장 수준 높은 두려움입니다. 이런 면에서 잠언 1:7절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는 것 중에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잠언 9:10절에는 이것이 바로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지혜인데 우리가 살아가는 문제 중에서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써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이것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단절된 사이가 됩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불편한 관계가 되어 집니다.
그것을 회개하기 전에는 부모와 자식 간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멀어지고 서운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 내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역시 부모님들은 마치 없었던 것과 같이 오히려 그 일 때문에 더 눈물까지 흘리면서 기쁘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지만 우리 죄를 깨닫고 우리의 사악함을 아버지 앞에 고할 때 저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 죄과를 옮기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문제는 죄인이 되어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죄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고 죄를 회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집요하게 질문하는 것은 너희들이 죄인이라고 하는 이 부끄러움을 지적하는 것보다 죄인을 위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너희들의 참 불행한 일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끔 노아나 모세나 혹은 아브라함이나 그 조카 롯을 성경에서 의인이라고 부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의 유전에 보게 되면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있지 않느냐 이것 봐라 성경에도 의인이 있다고 했지 아니했느냐 그렇게 해서 스스로 자기 스스로 의롭다할 수 있는 줄로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게 되면 성경에서 의인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을 다 조사를 해보면 그들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아 같은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12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했습니다. 물로써 심판을 받을 때 그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받았던 그런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죄가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방주에서 나오던 날 맨 처음으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제사는 죄의 용서를 받는 제사입니다.
노아가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 전혀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것은 아닙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람들의 의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 비해서 상대적인 면에서 비교해 볼 때에 보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고 자기들을 죄인으로 알았다는 그런 뜻에서 의인이라고 했지 본질적으로 의롭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바울 사도께서는 오늘 이 본문에서 강조한 것은 본질적으로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 악한 사람들입니다. 본질에 있어서 우리는 전혀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망이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20절 말씀을 보게 되면,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의 행위, 즉 율법을 지킴으로써는 전혀 의롭다 함을 받을 사람이 없지만 그러나 21절에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에 살펴보겠지만 이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화목 제물로 희생을 당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우리가 믿을 때에 나는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이 영적인 연합이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내 것이 되어 집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하나님은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의 죄의 삯은 사망인데 사망을 받아야 되는데 그 사망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아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로워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이제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심판하실 때에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것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의로워진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악한 사람들 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 주신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음으로써 우리가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면에서 그와 함께 죽고 살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사람의 죽음을 인정하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의롭다하는 것은 법정에 선언하시는 것과 같은 선언적인 의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불의한 사람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우리의 목구멍은 아직도 꽉 막히지 아니하고 아직도 조금 열려가지고 그 속에서 썩은 냄새가 모락모락 올라올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손과 발은 아직도 살리는 일보다는 죽이는 일에 앞장섭니다. 남을 칭찬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시큰둥해 가지고 듣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인간은 죄 아래 있는 그 오염된 인간성을 아직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서워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더 무서워 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본질적인 면에서는 아직도 불의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해 주십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소망이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고, 이제 우리는 본질적인 면에서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법에 의해서 새 사람, 옛 사람은 지나가고 의롭다 함을 받아진 사람이 되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누구도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사탄도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양심도 우리를 정죄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받고 새 사람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가운데서 기적같이 의롭다함을 받은 행운아 들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런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우리는 우리의 어느 것 하나도 잘 단속하고 우리의 행동도 잘 단속하고 우리의 태도도 하나님 두려워하는 태도를 드러내어서 정말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이루어가는 거룩한 모습을 만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운 아버지여. 우리 자신들이 겉으로는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선의 화신처럼 나타나고 우리의 말과 생각과 행동에는 다름이 전혀 없는 것 같이 드러나기를 원하지만 우리 자신이 스스로 알거니와 우리는 마치 열린 무덤과 같고 우리의 발은 피 흘린 듯 빠르고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여, 우리 자신이 이와 같이 죄인된 것을 우리 스스로가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어서 이것을 깨닫게 하시고 아버지께로 돌이키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여, 아직도 우리 가족 중에서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열린 무덤과 같이 썩은 악취를 풍기면서도 그 냄새를 감지하지 못하고 죽이는데 빨리 나가면서도 자신을 의로운 사람으로써도 사회에 유익한 사람으로 착각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알면서도 내세를 얻을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 인생 전체가 죄 아래 있는 사람인 것을 보여주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만들어서 새로워질 수 있는 이 소망을 선전하는 사람들로 만들어주옵소서. 저희들이 주의 전에 올라올 때는 피곤하고 지쳤지만 주님 말씀 받을 때에 우리의 삶이 얼마나 복이 있고 소망스러운지 다시 한 번 감사치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힘을 얻사오니 남은 생애는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단속하며 행동을 잘 단속하며 우리의 하나님 두려워하는 태도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신실한 자식들이 되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올려 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