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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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75
서론 - “내가 믿습니다”(롬 1:17)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 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 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 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 다.” (아멘)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은 대부분의 교회가 공적(公的) 예배 때 모든 성도 들이 한 목소리로 고백하는 등 신앙의 내용을 인식하며 실천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할 중요한 신조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신경은 복음 (福音)의 본질적인 진리를 압축해 놓은 것으로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우 리 신앙의 내용이요, 성경의 축소판(縮小版)이기 때 문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진리가 너무 압축된 나머지 이 신경은 단순히 형식적인 것으로 흐를 위험이 있기도 합니다.
성경의 66권 말씀이 아름다운 꽃에 비한다면, 사도신경은 그 꽃들로부터 꿀벌들이 꽃가루를 모아다가 꿀을 만들 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사도 신경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혁주의 교회라면 사도 신경 을 마땅히 고백되어져야 하며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 신경을 단순히 암송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사도신경」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배워야만 합니다. 주기도문이 모든 기도문 중에서 근본이요 으 뜸이며 또 십계명이 모든 율법들 중에서 그러한 것처럼 사도 신경은 기독교 신조의 대표요 으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의 「신경 (信經)」이란 말은 라틴어로 “나는 믿는다”(Credo」)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도 신경이란 말은 「사도들의 신앙고 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최근 우리 한국 기독교의 여러 가지 특색 중의 하나는 교리에 대한 강조가 약화되었다는 점입니 다. 과거 한국 교회는 교리를 아주 중요시했습니다. 교리 문제로 교단이 분립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교단」이라는 것 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교리 문제」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요즘에는 장로교나 감리교의 구별 이 잘 되지 않기도 하고 모두들 성령을 강조하고 모두들 교인 수를 강조하고 연보를 강조하다 보니까 교리의 조그마한 차이는 강조하 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교리의 작은 것까지 너무 지나치게 강조해서 이 교회와 저 교회는 이렇게 다르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건전하 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리(敎理)를 너무 강조하지 않아서 이제는 기독교인지 무당 종교인지 그 구별마저 분명하지 않 게 되어 버린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필자는 우리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라고 할 수 있는 사도신경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의의(意義) 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오늘은 사도신경 강해의 서론 시간으로 “나는 믿습니다”라는 말씀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 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신앙의 원칙(原則)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인이 믿는 바 신앙의 척도(尺度)를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성도는 신앙고백을 통하여 그가 마음속에 믿고 있는 내용을 증거 하게 됩니다. 사도신경은 바른 믿음의 기준이 됩니다.
최초의 신앙고백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행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주는 그 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마 16:16) 또한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분 명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 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예루살렘 교회가 흩어지기 직전에 사도들이 신앙으로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해 모였던 것은 중세 시대에 있 어서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조항을 만들게 되었고 결국 여기에서 최종적으로 나은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신조(信條)」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예루살렘 교 회가 흩어지기 직전에 사도들이 신앙으로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해 모였던 것은 중세 시대에 있어서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전통 을 유지하기 위해 조항을 만들게 되었고 결국 여기에서 최종적으로 나은 것이 사도 신경입니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이단들로부터 순수 한 신앙을 방어할 필요가 있을 때에 몇몇 조항들이 첨가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삼위일체 교리라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에 관 한 교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주후 215년에 「히폴리투스」(Hippolytus)의 질문 형식의 신앙고백은 각 지방의 교회가 세례를 주 기 위한 조건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첫째,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습니까? 둘째,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셋 째,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회와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까?
그러나 사도신경이란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주후 390년 밀란에서 로마로 보내는 편지 속에 「사도신 경」 곧 「실볼롬 아포스톨로롬」(Symbolum apostolorum) 처음으로 언급되면서부터입니다. 그러다가 주 후 404년에 본질적으로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동일한 신앙고백이 있었는데 이것을 「루피누 스」(Rufinus)의 신앙고백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과 같은 사도신경의 형태는 주후 710-724년 「공인된 문서」 즉 “텍스투스 리셉투스” (Textus Receptus)라는 것이 널리 보급되었는데 거기에 고백이 실린 고백이 지금 우리의 고백과 같습니 다. 다만 그때 것이 지금 우리가 가진 것보다 고백이 하나 더 들어 있었습니다. 즉 “사흘만에 죽은 자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 며”라는 말 앞에 “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말이 하나 더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초대의 여러 신앙고백에 나타나고 있습니 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고백하는 있는 사도신경이 주후 700년경에 정식으로 지금 우리가 외우고 있는 것과 똑같 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2세기경에 처음 형태가 이루어졌고 그 후 계속적으로 보충되거나 정비되어 현재의 형태로 완성 된 것은 8세기에 이르러서였다고 합니다. 사도들의 활동으로 복음이 세계적으로 확장될 때 언어와 종족이 다른 사람들 이 기독교로 들어오게 됨에 따라 각양각색(各樣各色)의 사람들로 하여금 통일된 신앙고백을 하게 함으로서 바른 신앙을 가지 게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초대 교회가 초기에는 로마의 정권에 의하여 혹독한 박해를 겪었고 4세기 이후부터 신앙 의 자유가 보장된 다음에는 갖가지 이단이 일어나서 내부적인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이때마다 세계 교회가 공인하는 신앙의 고백문 이 제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가장 오래된 고백문인 동시에 그 내용이 간결하면서도 기독교 신앙의 가장 요긴한 도리 를 다 함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훌륭한 신앙고백문을 암송할 뿐 아니라 그 내용을 깊이 알고 있어서 누가 “당신은 무엇 을 믿느냐?”라고 물을 때에 자신 있게 우리의 믿는 바를 설명해 줄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2. 신앙고백의 주체(主體)
우리말에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로 시작되어 있지만 원래 사도신경에는 “내가 믿습니다” (I belive)라는 말이 초두에 나옵니다. 이는 마치 대통령이 오른손을 들고 국민 앞에서 취임 선서 를 할 때 “나는 국헌을 준수하고...”라고 말하는 것처럼 고백하는 주체를 먼저 밝히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은 2인칭이나 3인칭이 아니고 1인칭 단수로서 남이 아 닌 자 자신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곧 “나 자신이 다음 조문들을 믿습니다”라고 명백하고 강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 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 관계를 명시하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그 리스도를 나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요 1:12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 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는 예수님을 마 음 속에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처럼 대가족 또는 가부장적인 봉건사회(封建社會)에서는 가정이나 집단의 대표되는 사람이 가지는 성향에 따라 거 기 속한 모든 사람의 운명이 좌우되어 마치 혈통이나 집단의 대표성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 다. 그러나 성경은 신앙 문제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고백하는 개인과 하나님의 관계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 다. 겔 18:2에 보면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 다. 겔 14:14에는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 만 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곧 아비의 범죄로 인하여 자식이 벌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사람의 의로 내가 구원받지 못 한다는 뜻입니다.
3. 믿음의 특징(特徵)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 중 흔히 “내가 믿습니다”라고 하면서도 그 믿음이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⑴ 하나님의 은혜(恩惠)
믿음은 인위적 산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의 결과인 것입니다. 엡 2:8을 보면 “너 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인간이 자기의 지식이나 기술이나 돈으로 권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감동하셔서 우 리의 마음속에 믿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하여 하 나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마 16:17)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을 통하여 믿어지도록 감동하실 때 어느 누구도 여기 거역하거나 불복하지 못합니다. 사 도는 옛날 그가 기독교를 박해하고 신자들을 죽이기 위하여 날뛰던 사람이었는데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바 되어 그리스도를 증 거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훗날 그는 박해자인 저를 불러 하나님 믿는 자요 전도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그 강력한 힘에 굴복되었 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 힘은 외부에서 오는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그 마음 속 깊은 속에 파고드는 성령의 감동된 힘이인 것입니 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 5:14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라틴어 로 믿음(Fide)이란 “신념, 신뢰” 등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나 자신을 믿음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의 지배 속으 로 완전히 내어 맡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것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래 서 히 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 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히 11:6)
⑵ 모든 것의 전제(前提)
믿음을 과학적으로나 수학적으로나 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내용은 하나처럼 대 전제일 뿐 합 리적 사고의 척도에서 이해되는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마치 수학이나 기하학의 공식과 같은 것입니다. [2X2=4]라고 하 는 것은 공식이요 전제인 것입니다. 이런 공식을 전제로 하여 수학이 성립되고 과학이 증명됩니다.
히 11:1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고백하 는 하나님의 존재,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속죄와 부활 등 모든 신앙의 내용들이 조건 없이 마음속에 받아들임으로서 믿음이 되 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내용이 인간의 지식에 따라 합리적으로 설명되고 이해되어 수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⑶ 인간에게 있어서 삶의 구심점(求心點)
믿음은 인간이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의 생존이나 생활 자체가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롬 1:17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 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은 그 성경을 통하여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 음에 의하여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만이 범죄한 인생에서 사죄와 영생의 길이 되는 것이며 보다 밝고 희망찬 원천이 되는 것 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 선지자 하박국은 정의가 무너지고 불의가 득세하는 악한 세상을 보고 마음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고민하던 중에 “오 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여기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 말씀은 중세기 에 로마 카톨릭의 교권에 의하여 기독교가 우상 종교로 전략해 버렸을 때 유명한 개혁자 루터(M.Luther)가 종교개혁을 일으키 게 된 열쇠가 되었습니다.
4. 신앙 고백의 중요성(重要性)
첫째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믿고 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가 체험하는 바 하나님에 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성령과 교회에 관하여 또한 교회의 지체가 되는 모든 인간들의 현 재와 장래 일에 관하여 담대하게 고백하고 전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방대한 그리스도인의 모든 교리를 암송할 수 없으므로 사도 신경과 같은 간결하고 명백한 내용이 나오게 되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공동으로 믿을 수 있는 개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믿는 바를 고백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앙이 정당하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네가 만일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 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고 하 여 그리스도들의 신앙고백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자체에서도 우리 믿은 사람은 반드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 간접, 직접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누 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 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눅 12:8-9)
그러나 구체적으로 왜 성경에 있는 것 외의 신앙고백이 필요합니까?
① 세례를 줄 때에 어떤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표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아무에게든지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으려면 적어도 기본적인 것들을 받아 들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필 수 불가결한 신앙 간증이 필요한데 이것을 사도신경을 통하여 신앙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수 있어야 그 사람 은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② 자녀들에게 교육시킬 때에도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자녀들에게 아버지의 신앙을 물려주어야 할 터인데 어떻게 물려주어야 하겠습니까? 신구약 성경을 그냥 물려줌으로써 되겠습니 까? 되지 않습니다. 이 신구약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데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가령 안드레가 베드로의 동생이라든지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자라나셨다든지 하는 것 등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가르쳐서는 안될 것 입니다. 구원의 은총을 깨닫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본질적인 것을 가르쳐야 하는데 이것이 사도신경이기 때문입니다.
③ 이단을 물리치기 위해서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초대 교회에는 많은 이단들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단이란 것은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고 자기 말을 집 어넣어서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신앙의 표준이 분명하지 않으면 이단들이 나타나서 저마다 떠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단 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신앙고백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신경은 주기도문이 모든 기도문 중에서 근본(根本)이요 으뜸이며 또 십계명이 모든 율법들 중에서 그러한 것처럼 기독교 신 조의 대표요 으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습관이 아니라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믿는 것 이 아니라 “내가 믿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믿는 신앙에는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무엇을 믿는가 하 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모합니다. 인간의 사상도 생활양식도 변해 갑니다. 그렇지만 “내가 믿습니다”라 고 하는 우리의 믿음의 내용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롱하게 빛나며 시대를 밝혀 주고 인간을 새롭 게 변화시켜 주고 있습니다. 믿음에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행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했 습니다(막 9:23)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고백되고 또한 이 믿음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신뢰로 나타나질 때 우리의 생활은 참 으로 윤택하게 될 것이며 그 수준이 향상되어질 것입니다. 이제 바라기는 사도신경의 본질적인 의미를 살피는 가운데 우리의 신앙이 더 욱 바로 정립되고 성장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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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 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 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 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 다.” (아멘)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은 대부분의 교회가 공적(公的) 예배 때 모든 성도 들이 한 목소리로 고백하는 등 신앙의 내용을 인식하며 실천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할 중요한 신조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신경은 복음 (福音)의 본질적인 진리를 압축해 놓은 것으로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우 리 신앙의 내용이요, 성경의 축소판(縮小版)이기 때 문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진리가 너무 압축된 나머지 이 신경은 단순히 형식적인 것으로 흐를 위험이 있기도 합니다.
성경의 66권 말씀이 아름다운 꽃에 비한다면, 사도신경은 그 꽃들로부터 꿀벌들이 꽃가루를 모아다가 꿀을 만들 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사도 신경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혁주의 교회라면 사도 신경 을 마땅히 고백되어져야 하며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 신경을 단순히 암송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사도신경」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배워야만 합니다. 주기도문이 모든 기도문 중에서 근본이요 으 뜸이며 또 십계명이 모든 율법들 중에서 그러한 것처럼 사도 신경은 기독교 신조의 대표요 으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의 「신경 (信經)」이란 말은 라틴어로 “나는 믿는다”(Credo」)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도 신경이란 말은 「사도들의 신앙고 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최근 우리 한국 기독교의 여러 가지 특색 중의 하나는 교리에 대한 강조가 약화되었다는 점입니 다. 과거 한국 교회는 교리를 아주 중요시했습니다. 교리 문제로 교단이 분립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교단」이라는 것 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교리 문제」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요즘에는 장로교나 감리교의 구별 이 잘 되지 않기도 하고 모두들 성령을 강조하고 모두들 교인 수를 강조하고 연보를 강조하다 보니까 교리의 조그마한 차이는 강조하 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교리의 작은 것까지 너무 지나치게 강조해서 이 교회와 저 교회는 이렇게 다르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건전하 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리(敎理)를 너무 강조하지 않아서 이제는 기독교인지 무당 종교인지 그 구별마저 분명하지 않 게 되어 버린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필자는 우리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라고 할 수 있는 사도신경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의의(意義) 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오늘은 사도신경 강해의 서론 시간으로 “나는 믿습니다”라는 말씀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 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신앙의 원칙(原則)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인이 믿는 바 신앙의 척도(尺度)를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성도는 신앙고백을 통하여 그가 마음속에 믿고 있는 내용을 증거 하게 됩니다. 사도신경은 바른 믿음의 기준이 됩니다.
최초의 신앙고백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행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주는 그 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마 16:16) 또한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분 명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 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예루살렘 교회가 흩어지기 직전에 사도들이 신앙으로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해 모였던 것은 중세 시대에 있 어서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조항을 만들게 되었고 결국 여기에서 최종적으로 나은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신조(信條)」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예루살렘 교 회가 흩어지기 직전에 사도들이 신앙으로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해 모였던 것은 중세 시대에 있어서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전통 을 유지하기 위해 조항을 만들게 되었고 결국 여기에서 최종적으로 나은 것이 사도 신경입니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이단들로부터 순수 한 신앙을 방어할 필요가 있을 때에 몇몇 조항들이 첨가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삼위일체 교리라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에 관 한 교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주후 215년에 「히폴리투스」(Hippolytus)의 질문 형식의 신앙고백은 각 지방의 교회가 세례를 주 기 위한 조건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첫째,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습니까? 둘째,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셋 째,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회와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까?
그러나 사도신경이란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주후 390년 밀란에서 로마로 보내는 편지 속에 「사도신 경」 곧 「실볼롬 아포스톨로롬」(Symbolum apostolorum) 처음으로 언급되면서부터입니다. 그러다가 주 후 404년에 본질적으로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동일한 신앙고백이 있었는데 이것을 「루피누 스」(Rufinus)의 신앙고백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과 같은 사도신경의 형태는 주후 710-724년 「공인된 문서」 즉 “텍스투스 리셉투스” (Textus Receptus)라는 것이 널리 보급되었는데 거기에 고백이 실린 고백이 지금 우리의 고백과 같습니 다. 다만 그때 것이 지금 우리가 가진 것보다 고백이 하나 더 들어 있었습니다. 즉 “사흘만에 죽은 자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 며”라는 말 앞에 “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말이 하나 더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초대의 여러 신앙고백에 나타나고 있습니 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고백하는 있는 사도신경이 주후 700년경에 정식으로 지금 우리가 외우고 있는 것과 똑같 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2세기경에 처음 형태가 이루어졌고 그 후 계속적으로 보충되거나 정비되어 현재의 형태로 완성 된 것은 8세기에 이르러서였다고 합니다. 사도들의 활동으로 복음이 세계적으로 확장될 때 언어와 종족이 다른 사람들 이 기독교로 들어오게 됨에 따라 각양각색(各樣各色)의 사람들로 하여금 통일된 신앙고백을 하게 함으로서 바른 신앙을 가지 게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초대 교회가 초기에는 로마의 정권에 의하여 혹독한 박해를 겪었고 4세기 이후부터 신앙 의 자유가 보장된 다음에는 갖가지 이단이 일어나서 내부적인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이때마다 세계 교회가 공인하는 신앙의 고백문 이 제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가장 오래된 고백문인 동시에 그 내용이 간결하면서도 기독교 신앙의 가장 요긴한 도리 를 다 함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훌륭한 신앙고백문을 암송할 뿐 아니라 그 내용을 깊이 알고 있어서 누가 “당신은 무엇 을 믿느냐?”라고 물을 때에 자신 있게 우리의 믿는 바를 설명해 줄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2. 신앙고백의 주체(主體)
우리말에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로 시작되어 있지만 원래 사도신경에는 “내가 믿습니다” (I belive)라는 말이 초두에 나옵니다. 이는 마치 대통령이 오른손을 들고 국민 앞에서 취임 선서 를 할 때 “나는 국헌을 준수하고...”라고 말하는 것처럼 고백하는 주체를 먼저 밝히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은 2인칭이나 3인칭이 아니고 1인칭 단수로서 남이 아 닌 자 자신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곧 “나 자신이 다음 조문들을 믿습니다”라고 명백하고 강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 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 관계를 명시하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그 리스도를 나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요 1:12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 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는 예수님을 마 음 속에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처럼 대가족 또는 가부장적인 봉건사회(封建社會)에서는 가정이나 집단의 대표되는 사람이 가지는 성향에 따라 거 기 속한 모든 사람의 운명이 좌우되어 마치 혈통이나 집단의 대표성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 다. 그러나 성경은 신앙 문제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고백하는 개인과 하나님의 관계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 다. 겔 18:2에 보면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 다. 겔 14:14에는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 만 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곧 아비의 범죄로 인하여 자식이 벌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사람의 의로 내가 구원받지 못 한다는 뜻입니다.
3. 믿음의 특징(特徵)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 중 흔히 “내가 믿습니다”라고 하면서도 그 믿음이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⑴ 하나님의 은혜(恩惠)
믿음은 인위적 산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의 결과인 것입니다. 엡 2:8을 보면 “너 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인간이 자기의 지식이나 기술이나 돈으로 권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감동하셔서 우 리의 마음속에 믿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하여 하 나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마 16:17)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을 통하여 믿어지도록 감동하실 때 어느 누구도 여기 거역하거나 불복하지 못합니다. 사 도는 옛날 그가 기독교를 박해하고 신자들을 죽이기 위하여 날뛰던 사람이었는데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바 되어 그리스도를 증 거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훗날 그는 박해자인 저를 불러 하나님 믿는 자요 전도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그 강력한 힘에 굴복되었 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 힘은 외부에서 오는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그 마음 속 깊은 속에 파고드는 성령의 감동된 힘이인 것입니 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 5:14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라틴어 로 믿음(Fide)이란 “신념, 신뢰” 등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나 자신을 믿음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의 지배 속으 로 완전히 내어 맡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것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래 서 히 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 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히 11:6)
⑵ 모든 것의 전제(前提)
믿음을 과학적으로나 수학적으로나 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내용은 하나처럼 대 전제일 뿐 합 리적 사고의 척도에서 이해되는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마치 수학이나 기하학의 공식과 같은 것입니다. [2X2=4]라고 하 는 것은 공식이요 전제인 것입니다. 이런 공식을 전제로 하여 수학이 성립되고 과학이 증명됩니다.
히 11:1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고백하 는 하나님의 존재,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속죄와 부활 등 모든 신앙의 내용들이 조건 없이 마음속에 받아들임으로서 믿음이 되 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내용이 인간의 지식에 따라 합리적으로 설명되고 이해되어 수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⑶ 인간에게 있어서 삶의 구심점(求心點)
믿음은 인간이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의 생존이나 생활 자체가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롬 1:17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 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은 그 성경을 통하여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 음에 의하여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만이 범죄한 인생에서 사죄와 영생의 길이 되는 것이며 보다 밝고 희망찬 원천이 되는 것 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 선지자 하박국은 정의가 무너지고 불의가 득세하는 악한 세상을 보고 마음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고민하던 중에 “오 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여기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 말씀은 중세기 에 로마 카톨릭의 교권에 의하여 기독교가 우상 종교로 전략해 버렸을 때 유명한 개혁자 루터(M.Luther)가 종교개혁을 일으키 게 된 열쇠가 되었습니다.
4. 신앙 고백의 중요성(重要性)
첫째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믿고 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가 체험하는 바 하나님에 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성령과 교회에 관하여 또한 교회의 지체가 되는 모든 인간들의 현 재와 장래 일에 관하여 담대하게 고백하고 전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방대한 그리스도인의 모든 교리를 암송할 수 없으므로 사도 신경과 같은 간결하고 명백한 내용이 나오게 되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공동으로 믿을 수 있는 개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믿는 바를 고백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앙이 정당하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네가 만일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 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고 하 여 그리스도들의 신앙고백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자체에서도 우리 믿은 사람은 반드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 간접, 직접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누 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 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눅 12:8-9)
그러나 구체적으로 왜 성경에 있는 것 외의 신앙고백이 필요합니까?
① 세례를 줄 때에 어떤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표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아무에게든지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으려면 적어도 기본적인 것들을 받아 들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필 수 불가결한 신앙 간증이 필요한데 이것을 사도신경을 통하여 신앙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수 있어야 그 사람 은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② 자녀들에게 교육시킬 때에도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자녀들에게 아버지의 신앙을 물려주어야 할 터인데 어떻게 물려주어야 하겠습니까? 신구약 성경을 그냥 물려줌으로써 되겠습니 까? 되지 않습니다. 이 신구약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데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가령 안드레가 베드로의 동생이라든지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자라나셨다든지 하는 것 등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가르쳐서는 안될 것 입니다. 구원의 은총을 깨닫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본질적인 것을 가르쳐야 하는데 이것이 사도신경이기 때문입니다.
③ 이단을 물리치기 위해서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초대 교회에는 많은 이단들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이단이란 것은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고 자기 말을 집 어넣어서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신앙의 표준이 분명하지 않으면 이단들이 나타나서 저마다 떠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단 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신앙고백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신경은 주기도문이 모든 기도문 중에서 근본(根本)이요 으뜸이며 또 십계명이 모든 율법들 중에서 그러한 것처럼 기독교 신 조의 대표요 으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습관이 아니라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믿는 것 이 아니라 “내가 믿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믿는 신앙에는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무엇을 믿는가 하 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모합니다. 인간의 사상도 생활양식도 변해 갑니다. 그렇지만 “내가 믿습니다”라 고 하는 우리의 믿음의 내용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롱하게 빛나며 시대를 밝혀 주고 인간을 새롭 게 변화시켜 주고 있습니다. 믿음에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행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했 습니다(막 9:23)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고백되고 또한 이 믿음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신뢰로 나타나질 때 우리의 생활은 참 으로 윤택하게 될 것이며 그 수준이 향상되어질 것입니다. 이제 바라기는 사도신경의 본질적인 의미를 살피는 가운데 우리의 신앙이 더 욱 바로 정립되고 성장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