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내가 믿습니다.”(벧전&nbsp2:21-25)
 
신앙 고백에 있어서 네 번째는 “본디오 빌라도에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 부분 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리 사 고난의 죽음을 당하신 것을 고백하는 내용입니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에 대하여 많은 성경 기자들은 이를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 취급하 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 선지자들은 장차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의 고난의 죽음까지를 여러 차례에 걸쳐 예언 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특징을 가리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 가...」(고전&nbsp15:3-4)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고난당하시는 현장에서 그 잔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내 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라고 하시면서 성경의 예언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마 26:54) 예수님의 생애를 소개하고 있는 복음서 기자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사실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도 예수님의 고난의 특징은 이미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하여 예고된 고난이요, 예수님 자신도 이를 예견하시고 미리 언급하신 내용이 며 이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대속(代贖)의 고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고난당하 심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대하여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苦難)의 내역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nbsp2:6-8에는 예수님의 고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밝혀 놓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 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 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한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관여하셨고(요1:3) 권능과 영광이 동등 되는 분으로서 하늘 보좌의 모든 영광을 누리고 계실 수 있는데도 오히려 고난의 길을 자원하셨다는 것입니다.

⑴ 인성(人性)을 입고 땅위에 오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원대한 경륜에 따라 성자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만물의 근원자요(요 1:2) 대자연을 통치하시는 주권자로서 세세에 영광만 받으실 분이 오히려 피조물인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고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습니 다. 

⑵ 세상에서 인간이 당하시는 고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탄생에서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 우리 범죄(犯罪)한 인생이 당하는 고난을 하나도 빼어 놓지 않으시고 다 당하셨습니다. 

① 탄생의 과정 :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하기 위하여 베들레헴에 갔을 때에 마리아는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관에 유할 곳이 없어 짐승의 우리 안에 들어가 아기를 낳았고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했습니다(눅2:7)

② 애굽으로 피난 가심 :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당시 유대 왕 헤롯은 자기의 왕위에 위태로울 것으로 생각하여 베들레헴 지경의 두 살 이하에 드 는 영아를 모두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나시자 마다 그 죽음을 면하기 위하여 부모와 함께 국경을 넘어서 애굽으 로 피난을 가셨습니다(마2:13-14)

③ 가난과 노동 : 
예수님께서는&nbsp30세가 되어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까지 나사렛 마을에서 목수의 일을 하였습니다. 그것 은 그의 양부 요셉이 가난한 목수로서 여러 명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목공소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부터 목수 의 일을 하며 모친과 동생들을 부양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목수」라고 지칭하였습니다(마 13:55)

④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 :  
예수님께서는 짧은 기간이지만 세상에 계시면서 인간이 당하는 고난은 다 체험하셨습니다. 당시의 유대 나라가 로마의 속국으 로 있어서 자주권이 없었기 때문에 약소민족으로서 당하는 고난을 몸소 겪었으며 가난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배고픈 현장을 보셨고(마 15:32) 예수님 자신도 배고픔과 목마름을 체험하셨습니다(마21:8,요4:7)
그뿐 아니라 질병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불행을 목격하셨으며(요5:3-5) 더 나아가서 죽음과 슬픔의 현장 을 직접 체험하셨습니다(요11:11-35) 또한 더위와 추위와 바다의 풍랑 등 인간 세상에 미치는 자연 재난에 이르기까지 인간 이 겪고 있는 온갖 고난을 다 겪어 보심으로서 인간 고난의 모든 면을 체휼(體恤)하신 것입니다(히2:18)

⑶ 제자들에게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택하여&nbsp3년 동안 키운 제자들에 의하여 배반과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판 사람 은 로마 관리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니고 바로 그의 제자 「가룟 유다」였던 것입니다. 또한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이 체포되던 순간 에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 중의 어떤 자는 예수님께 와서 주님이 임금이 되시면 자기는 국무총리를 시켜 주고 자기 동생은 장관 을 시켜 주십시오 하더니 예수님이 체포되니까 다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들이 그 제자들을 비난할 자격이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다 마찬가지입니 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승이 죽으면  오지 않고 정승의 말이 죽으면 온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에게 이익(利益) 이 없으면 다 배반하고 마는 거시 우리 인간입니다. 인간의 신의라는 것은 별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신실한 제자 는 베드로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쳐 버렸지만 베드로는 그래도 멀리서 슬금슬금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했습니 까? 그 베드로조차도 예수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고 아끼던 자기 가족보다 더 귀하게 여기던 제자들은 거의 모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오히려 갈릴리에 서 온 제자들이 멀리 서 있었고 가까이에는 여인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당시에 제대로 사람대접을 하지 않아서 벌주는 것 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근처에 있어도 후환이 없었기 때문에 많이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문제가 간단하 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 알려져서 낙인을 찍히면 마치 호적에 빨간 줄이 그려지는 것과 같으므로 모조리 도망 을 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후에 거짓 송사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 을 사흘 동안 일으키리라”(막&nbsp14:5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말 한마디 살짝 고쳐서 예수님을 송 사 했습니다. 이 사람이 “성전을 부수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더라”(마26:61)고 거짓 송사 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 장 안나스나 가야바나 총독 빌라도 어느 누구도 예수님에 대해 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침에 십자가에 못 박히 시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⑷ 참기 어려운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자색옷」을 입혔습니다. 그들은 황제가 입는 옷과 비슷한 옷을 어디서 구해다가 예수님에게 덮어 씌웠습니 다. 게다가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왜 가시관을 씌었습니까? 가시에 찔려 피가 나도록 하기 위해, 고통을 주기 위해서 일까 요?  그보다도 가시가 햇빛에 비추면 마치 금관처럼 빛이 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당신의 면류관, 참 멋집니다. 이렇게 조롱하 기 위하여 가시 면류관을 씌운 것입니다. 이것은 가시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운 모독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머리 위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써 붙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란 표현은 상당한 조롱입니다. 그 예수 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갈대를 임금의 홀 대신 쥐어 주면서 수모를 당케 하다가 그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 고, 온갖 멸시를 다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손에다 갈대를 쥐어 줍니다. 요새 장군들이나 지휘관들이 다닐 때에 지휘봉을 들고 다니지요. 옛날에 임금들 은 「홀」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금으로 된 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갈대를 쥐어 주고서는 “자! 홀이다!”하면 서  조롱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갈대를 빼앗아 가지고 얼굴을 칩니다. 그리고 임금에게는 절을 해야 한다며 그 앞에서 절을 넙죽 하고서는 일어나 서 얼굴을 침을 뱉었습니다. 손으로 얼굴을 때리고 채찍질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고통과 육체의 고난을 겸한 것이었 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을 향하여 머리를 흔들면서 조롱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 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이제까지 너는 사기만 치지 않았느냐? 성전을 헐고 사흘 만 에 다시 짓겠다는 네가 왜 자기 자신은 구하지 못하느냐? 이 사기꾼아! 이 거짓말쟁이야!”라고 하면서 조롱했습니다. 이것은 대제사 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 다. 그러면 우리도 믿겠노라” 하면서 조롱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강도조차도 예수님을 향하 여 조롱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다음 로마 군인들은 그의 옷이 탐이 나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⑸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절정은 갈보리 산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최후의 고난입니다. 인류가 만들어 낸 형틀 중에 서 가장 혹독한 것은 십자가라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조금씩 죽이기 위하여 만든 형틀인데 오래 견디는 사람은&nbsp24 시간 견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nbsp24시간 동안 어느 순간에도 고통이 그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 은 총살형이나 교수형보다 훨씬 더 악독한 형벌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흉악한 죄인을 사형할 때 십자가의 형틀에 메달아 죽이 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양손 양발에 못을 박아 그 자국으로 피와 기름이 흘러내리고 결국 탈수 현상까지 빚어 최악의 고통 끝에 죽 게 하는 방법입니다.&nbsp33년 간 지상에서의 생활이 고난으로 일관되었으나 그 가운데 최후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은 보 통 사람이 당할 수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는 가장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안락사를 거절하셨습니다. 보편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사형수들에게 마취제의 역할을 하 는 쓸개 탄 포도주를 준다고 합니다. 이것을 볼 때에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대해서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나를 위하여 고통을 받으셨고, 나의 의를 위하여 고통을 받으셨고,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 은 오전&nbsp9시부터 오후&nbsp3시까지&nbsp6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서 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습 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목말랐고(... 내가 목마르다...)(요&nbsp19:28)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 다. 
이처럼 예수님은 인간에게 고통을 당하시고 온갖 모독과 조롱을 당한 뒤에 그는 마침내 그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거절을 당했습니다. 벧전&nbsp2:24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 를 담당하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여기의 「본디오 빌라도」란 예수님을 십자에 못 박도록 명령한 로마 재판관의 이름입니다. 그는 유대 나라 제5대 총독으로 (AD&nbsp26-36년) 재임 기간에 유대인들이 고소한 사건 곧 예수님의 사형을 결정한 악역을 맡으심으로서 역사의 죄인 으로 그 이름이 저주스럽게 남게 된 것입니다. 빌라도의 아내 프로클라(Claudia&nbspprocla)는 경건한 유대인으 로서 재판정에 있는 빌라도에게 사람을 시켜서 무죄하신 예수님을 정죄(定罪)하지 말라고 부탁하기까지 했습니다(마27:19) 그렇 지 않아도 빌라도 자신이 유대인의 송사 하는 내용을 다 듣고 그들이 죄 없는 예수님을 시기하여 넘겨준 것으로 쉽게 판단하였습니 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집정관의 양심으로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18:33)라고 하면서 「특별사면」을 시키 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더욱 거세게 떠들며 만약 예수님에게 무죄 판결을 하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고 협박까지 하였습니 다. 이때 빌라도는 예수님을 무죄(無罪) 방면시켰다가는 민란(民亂)이 일어날 것 같고 그렇게 될 경우 그는 총독으로서 직무를 잘못 한 것이 되어 가이사로부터 문책 받을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유대인의 요구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 어 주고는 사람이 보는 앞에서 물을 떠다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27:24)

이와 같은 정황으로 보아서 빌라도 자신은 악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아내의 충고나 자기의 양심에 따라 판결하지 못하고 눈앞 에 있는 군중심리에 압도되었으며 나아가서 황제에게서 받은 세상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생각이 앞섰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피 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고 말했지만 성경은 그를 가리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책임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매우 불행하 게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된 인간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는 인간의 죄를 대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 다. 

그런데 사도 신경에서 왜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고난 받 으셨다」라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꿈나라에서나 동화의 세계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 살고 있는 이 역사 안에서 주후&nbsp26년에서&nbsp37년 사이에 유대 총독이었던 본디도 빌라도에 의하 여 고난 당하셨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일은 아프리카의 어느 골짜기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 당시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라고 생 각되었던 로마제국의 황제를 대신한 「본디오 빌라도」 밑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해서 그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것 입니다. 

3. 십자가 고난의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죽음을 당하신 십자가 사형 법은 로마를 위시하여 고대사회에서 더러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형의 잔인성은 흉악범이 나 반역자에 집행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그 중에서도 노예나 다른 민족에는 시행하였지만 로마 시민에게는 거하지 않은 것입니 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비어 인간이 되시고 또 보통 사람이 당하지도 않는 최악의 고난으로 십자가형 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바른 의미를 알게 될 때 그토록 잔인하고 흉악한 방법의 죽음을 택하 게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⑴ 대표성을 가진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범죄 하므로 죽음 아래 있는 모든 인류의 대표자의 자격을 가지고 십자가 고난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최초의 사 람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 그의 범죄가 오고 오는 후손에게 죄와 죽음의 멍에를 메워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범죄한 인 간의 대표자로서 모든 인류가 받을 형벌을 자기가 다 맡아 십자가 위에서 고난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롬5:18) 그러므로 십자가 위 에서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에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하고 절규하신 것도 모든 인류의 당할 고통을 한 몸 에 다 받으시기에 고난의 양(量)이 더욱 무겁고 컸을 것입니다.

⑵ 대속의 의미를 가진 고난입니다.
벧전&nbsp2:22에서 예수님께서 죄인이 당하는 형벌을 받아 죽으셨으나 그 자신은 죄가 없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벧전&nbsp2:24에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는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의 죽음을 당하실 것을 예언하면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 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5)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시면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 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막10:45)

4. 죽으심과 장사지냄.
사도신경의 라틴어 원형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음에 “묻히시고”,“음부에 내려가시고”(지옥강하)까지 포함되 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하셨고 끝내 무덤 속으로 장사지낸바 되었습니다. 이는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 서 인간이 당하신 모든 고난을 남김없이 다 당하심으로서 우리를 체휼(體恤)하신 것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어 서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 자신이 생명의 본체로서 죽음과 상관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죽음 아래 있 는 모든 사람의 고통을 예수님 스스로 맡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죽음을 자취하신 것입니다. 그가 무덤에까지 내려가심으로서 장 차 무덤 속에 잠자던 모든 사람들을 살려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두고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 사랑의 극치라 고 하였습니다. 롬&nbsp5:8에서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5. 의로운 고난의 표본입니다.
시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시면서도 죄인이 받아야 될 형벌과 십자가 고난의 죽음까지 당하신 것을 두고 이는 의인 이 당하는 고난의 표본이라고 하였습니다. 벧전&nbsp2:19-21에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 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 를 이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때때로 죄가 없으면서 도 예수님의 자취를 따라가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의롭게 당하는 고난은 결국 승리와 영광을 가져다줍니 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해서 고난 당하셨고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진실이며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문제 는 그것을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로만 인정한다면 우리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내가 믿사오며”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객관적으로 고통 당하셨다 하더 라도 그것이 나와 주관적으로 아무 관계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우리 자신의 주관적인 관계 속에서 신앙고백으 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사도신경 속에 “본디오 빌라도에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신앙고백은 우리 의 신앙고백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고백이며 우리 자신이 믿음으로 고백해야 할 중요한 고백임을 명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