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I. 장로교 신학 사상을 역사적,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총괄적으로 입장에서 본 장,단점과 보수주의의 응전,선교 방법,종말론 일련의 분열,토착화 신학에 대한 문제점들을 역사적으로 논술하고 한국교회의 부정적,긍정적 측면   

한국장로교의 역사는 그 특징상 ① 한국에 공식적으로 선교가 시작되던&nbsp1984년부터 총회가 설립되 던&nbsp1912년까지,② 총회 설립(1912년) 후 해방(1945년)되기까지, ③ 해방(1945년)후부터 장로교가 합동 과 통합으로 분열되던&nbsp1960년까지 ④&nbsp1960년 이후 현재까지 네부분으로 대별하여 볼 수 있을 것이 다.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은 한국 기독교 아니 한국장로교의 역사는 성경관에 의해 조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 장로교 설립이전까지(1884년&nbsp-&nbsp1912년)
1884년 북장로교 소속의 의료선교사 알렌이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입국하면서 개신교 선교가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 던 것이다. 그 다음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그리고 스크랜톤이 입국하여 한국의 선교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로부 터&nbsp4년후인&nbsp1889년 호주 장로교 선교가 시작되었고,그리고&nbsp1892년에는 언더우드 선 교사의 노력의 결실로 남장로교 선교사인 이눌서 선교사가 파송되어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가 개시되었던 것이다. 남장로교 선교가 시작 된 이후&nbsp6년 후인&nbsp1898년에는 카나다 장로회가 공식적으로 한국선교를 시작하였다. 한국에 파송된 장 로교 공의회를 일찍이 형성하여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협력선교를 자신의 선교의 모토로 삼았다.

4개의 선교회는 한국선교를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설정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장로교 공의회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자립,자치, 자전)과 성서 번역을 통한 한국인에 의한 복음전도,그리고 효율적인 복음의 확산을 위해서 분할 협정 채택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선교사들의 이런 선교정책이 대단한 효과를 거둔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성경중심의 선교에 기초한 선교정책 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성공을 거둔 것도 성경공부가 저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며,성서번역이 조기에 완 성된 것도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의 성서에 대한 사랑 때문이며,자립,자전,자치가 성공한 것도 성경공부를 통한 복음주의 신앙에 기초하였 기 때문이다.&nbsp1903년(원산부흥운동),1907년(평양부흥운동)의 부흥운동도 역시 성경중심의 네비우스 선교와 무관하 지 않다는 사실이다.&nbsp1890년부터&nbsp1910년까지 한국장로교회는 말 그대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였 다. 이기간동안에 세례교인수는 전년에 비해 매년&nbsp30%씩 증가하고 있었다. 부흥웅동이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하는 사경 회에서 기원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둘째로, 초기 선교가 성공한 것은 균형잡힌 선교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히 복음만 전하지 않았다. 복음전파와 함 께 의료선교 및 교육선교를 중요한 선교정책으로 삼고 추진하였다. 선교초기에 의료와 교육은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학교와 병원의 설립은 천주교에 대한 이미지를   쇄신하고 개신교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 다.&nbsp1914년까지 선교사들은&nbsp37개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nbsp1900년에 신약성경 의 번역을 완성하였다.

세째로, 당시의 시대적인 환경도 초기 한국교회 성장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 기간동안에 발생한&nbsp1895년 의 청일전쟁,1904년의 노일전쟁,1910년의 한일합방,그리고&nbsp1910년과&nbsp1911년에 대대적으로 진 행된&nbsp100만인의 구령운동 등은 한국교회의 성장을 가속시킨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이런 일련의 주변환경은 한국인으 로 하여금 정치적 독립 소망에서 기독교의 영적 소망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한국교회의 급성장은 총회의 설립을 촉진시켰다. 드디어&nbsp1907년에 한국장로교는 평북,평남,황해,함경,경 충,경상,전라대회가 모여 총노회를 구성하고 그로부터&nbsp5년 후인&nbsp1912년 총회를 결성하였다. 이것 은 한국개신교 선교가 시작된지&nbsp28년만의 일이며 노회가 결성된지&nbsp5년만의 일이다.
총회의 결성으로 통하여 한국장로교회는 한국민족의 교회로서 공식출범하게 된 셈이며,장로교 성장의 도약을 위한 틀을 마련한 셈 이다. 이북지역의 교회는 평양의 마포삼열을 중심으로,중부지역에는 언더우드와 그의 매서인들을 중심으로,경상도 지역에서는 게일 베어 드 아담 선교사들을 중심으로,전라도 지역은 이눌서를 비롯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서울,경성 지 역에는 새문안교회(1887),남대문교회(1887),승동교회(1893),연동교회(1894),강원도에는 양양교회(1901),중부지역에 서는 춘천중앙교회(1902),청주 강서의 신대교회(1901),그리고 영남권에서는 초량교회(1893)를 시작으로 전국에 교회가 설립 되었다.

2.장로교 총회설립 후 해방전까지(1912년&nbsp-&nbsp1945년)
총회가 설립되던&nbsp1912년부터&nbsp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한국교회는&nbsp3.1운동, 자유주의 도전,신사참배의 문제 등 일련의 위렵적인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상당히 안정된 성장을 계속하 고 있었으며,한국개신교를 주도하는 교단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괄목할만한 성장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정착,종말 론 중심의 타세적인 신앙의 강조,신사참배 문제 등 일련의 시대적인 요인과 선교정책의 변천으로 말미암아 전기 (1884&nbsp-&nbsp1912)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있었던 복음의 균형잡힌 발전이 상당히 줄어들면서 교회 의 사회적인 책임을 간과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특별히&nbsp1930년대 총회가 일련의 자유주의의 도전과 신사침배의 문제로 갈등을 겪던 그 시대에 두드러졌 다. 이 기간동안 한국장로교회를 주도한 곳은 평양신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평양을 비롯 이북지역이었다. 이 기간동안에 평양은 한국장로 교의 메카였다. 총회설립 후&nbsp1942년까지&nbsp31회의 총회 중&nbsp22회가 북한에서 개최되었 으며 총회 장로&nbsp31명 중에서 거의&nbsp70%인&nbsp20명이 이북출신이었다. 노회의 수에 있어 서도 북한의&nbsp14개 노회는 남한의&nbsp10개 그리고 만주의&nbsp4개보다 단연 앞서고 있었 다. 교역자수도 북한의&nbsp551명은 남한의&nbsp374명보다앞선다.

3.해방이후 통합,합동의 분열까지(1945년&nbsp-1960년)
해방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정치적인 분단에 의하여 불가피하게 남쪽 총회와 북쪽총회로 나누어졌다.  해방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자신들의 문제를 정립하기도 전에 신사참배와 자유주의의 문제의 일련의 대립과 논쟁의 시기를 맞이하여야 했다.

1946년에 남쪽 총회에 의하여 조선신학교가 공식적으로 총회의 인준을 받았고, 이에 반대하던 출옥한 신사참배 반대자들이 고 려신 학교를 설립하였다.&nbsp1947년에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교육을 우려한&nbsp51명의 복음주의 학생들 은 조선신학교의 진보주의 신학문제를 총회에 건의하게 되었고, 총회는 이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만주에서 박형 룡박사가 귀국하면서 한국의 장로교회의 전통적인 신앙을 고수하려는 보수주의 세력과 세계적인 학문의 조류를 과감하게 수용하려는 진보주 의자들 사이에 일련의 신학적인 논쟁이 발생하였다.

진보주의 노선에는 김재준 목사가,보수주의 노선에서는 박형룡 박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신학적인 논쟁은 신학교에서만 문제 는 아니었다. 총회의 지도자들과 교회들이 이 신학적인 논쟁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일련의 논쟁의 거친 후 한국장로교회는 세차 례의 분열의 아픔을 겪어야 하였다. 신사참배로 인한&nbsp1952년 고신총회의 분열,조선신학교 문제로 인 한&nbsp1953년 기장의 분열은 한국교회의 뼈아픈 사건이었다.

그러다가&nbsp1959년&nbspW.C.C. 문제로 인하여 또다시 한국장로교회는&nbspW.C.C. 를 반대하는 합동측과&nbspW.C.C.를 옹호하는 통합측으로 다시 분열되고 말았다. 이런 분열의 과정을 통해 한국장로교회 는 해방이전에 가졌던 동일성은 붕괴되고 한국문화에 부정적인 인상을 심화시키고 말았다. 교회의 사회적인 주도력을 점점 상실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수로 통해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 다.&nbsp1945년부터&nbsp1960년까지 한국장로교회는 북부를 제외하고는 고른 성장을 하였 다.&nbsp1953년에 예수교 장로교 세례인 수는&nbsp1만&nbsp6천&nbsp9백44명이었 다. 교려파를 합친다면 장로교회의 세례교인 수는&nbsp10년동안에 약&nbsp3배가 증가한 셈이다.

이처럼 한국장로교회는 내외적으로&nbsp6.25전쟁,교회분열,신학적 논쟁,이단의 등장 등  일련의 어려운 문제들 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성장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사실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점이다.

4. 정체성 파악의 시기(1960년&nbsp- 현재)
&nbsp1950년대에 일련의 분열을 겪는 한국장로교회는 신학적인 색감을 분명히 표방하면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길 을 걸어왔다. 즉 자신들의 정체성에 따라 한국장로교회는 토착화 신학,신정통주의,그리고 정통주의로 대별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배경에 는 경직된 보수주의 신학 혹은 정통주의에 대하여 반동함으로 시작되었고, 또한 이것은 시대적이고 정치적인 배경에서 시작되었 다.&nbsp1960년대 이전에는 교단적인 배경 안에서 신학이 이해되고 있었는데,&nbsp1960년대 이후부터는 토 착화 신학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즉 미국 기독교 지성과 사회가 변혁을 맞던&nbsp19세기 후반과&nbsp20세기 초엽 격변에 시대에 한 국 선교는 시작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구라파 전통의 근본주의적 정통주의, 현대주의, 그리고 이들 사이에 중도 노선을 추구하는 진보주 의가 선교초기부터 한국신학 사상사 속에서 세가지 조류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① 구학파 전통에 선 선교사들에 의하여 주도된 네비우 스 선교정책과 평양신학교를 통하여 형성된 변증학적 정통주의 혹은 근본주의적 정통주의(구학파 전통을 계승한 선교사들,평양신학교,길선 주,김익두,박형룡,박윤선) ② 개방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신학적 전통이나 신학적 보수주의보다는 복음의 문화변혁을 시도하는 감리교의 사 상인 문화&nbsp- 자유주의(최병헌,정경옥) ③ 구학파 전통의 근본주의와 감리교의 문화&nbsp-자유주의의 중 도 노선을 취하는 신정통 진보주의가 있다.(김재준과 그의 동료들이 있는데, 이들은 반정통주의,반성경무오,반보수주의를 이데올로기화였 다)  즉 감신을 중심한 문화 토착화(윤성봉),한신을 중심으로 정치 사회 참여의 토착화(민중신학),연신을 중심한 민족주의 토착화 가 시도되었다. 즉&nbsp1970년대에는 윤성봉 교수의 성(誠)의 신학,1975년에는 김경재의 과정신학과 변선환의 전통종 교와 기독교와의 융합을 시도하는 종교다원주의(배경 :계몽주의,세속화),1980년대에는 박종천의 통일신학(서남동+안병무 = 민중신 학),1990년대에는 박종천의 상생(相生)신학이 등장하게 되었는데,이러한 토착화 운동은 한국의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에게 긍정적인 인 상보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토착화 신학의 긍정적인 면은 ① 신학함의 필요성과 거기에 따른 과제를 환기시켜주고 있다. ② 학문성 ③ 기독교와 문 화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④ 한국의 민족주의와 주체성 확립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⑤ 자유주 의 신학은 세계 교회의 교류,세계 조류 속에 한국 기독교를 바라보도록 자극을 주었다.

하지만 토착화 신학의 약점은 ① 복음을 지나치게 상황화하였다. ② 자유주의 신학은 반동주의 신학으로서 보수주의에 반동으 로 시작되었다. ③&nbspCOntext를 극대화한 남지&nbsptext를 약화 내지 변질시키고 있다. ④ 종교 혼 합주의 현상으로 나타났다. 즉 기독교의 유일성이 흐려지게 되었다.
한편 통합측은 에큐메니칼이라는 세계적인 교회 연합운동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파악하고&nbspW.C.C.가 추구 한 신정통주의를 자신들이 걸어갈 새로운 장로교 신학의 방향으로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획일화 시킬 수 없지만 상당수의 교수들의 현 대 한국장로교의 신학적 방향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신학적인 입장에 반대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복음주의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 견하려고 시도하였으며, 한철하 교수를 비롯한 일부 교수들은 아세아연합신학원을 중심으로  복음주의 신학을 표방하기 시작하였다. 복음 주의는 한국의 보수주의가&nbsp1950년대 이후 지나치게 분리주의,페쇄주의로 흐르고 있음을 염려하면서 신학적 보수주의 를 계승하면서도 그리스인의 사회적 ,문화적 책임을 완수하려는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교단을 초월하여 복음주의라 는 이름으로 한데 연합하였다. (KEF,ETS,CCC,네비게이트,IVF,생명의 말씀사,엠마오,두란노서원)

고신측과 합동측은 약간의 의견의 차이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기 위하여 함께 노력을 경주하여 왔다. 우 리의 신학적 입장은 {수정되지 않는 칼빈주의}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구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자신들이 신학적 정체성을 이야 기 할 때 마다 자신들은 구 칼빈주의를 계승한다고 고백하였던 것처럼,합동측은 수정되지 않는 정통칼빈주의가 교단의 입장임을 천명하 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존중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포함되어 있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계승하는 것을 의미한 다.

결론적으로&nbsp1960년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더 이상 신학적인 통일성을 찾아 볼 수 없다. 일련의 장로교 분열 을 통하여 이전에 갖고 있던 신학적 통일성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고신측과 합동측은 약간의 의견의 차이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전통 적인 입장을 고수하기 위하여 함께 노력을 경주하여 왔다.

우리의 신학적 입장은 {수정되지 않는 칼빈주의}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구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자신들이 신학적 정체성 을 이야기 할 때 마다 자신들은 구 칼빈주의를 계승한다고 고백하였던 것처럼,합동측은 수정되지 않는 정통칼빈주의가 교단의 입장임 을 천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존중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포함되어 있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계승하는 것 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nbsp1) 긍정적인 요소
첫째로, 소수의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초기 대부분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기독교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성경의 절대 권위를 강조하였다.
그들은 초자연적 특성을 확신했으며,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법칙으로 믿었으며, 평양신학교의 모든 선교사 교수들은 성 경의 원본 무오성을 신앙과 행위에 재한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은 여가,과학,지리 그리고 연대기와 같은 문제들을 포함하여 본문 의 문제의 세부 사항들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영감되었다고 믿었다. 심지어 과학적인 문제들까지 오류가 없음을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에 의해 구술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의 저자들은 그들의 뚜렷한 개성을 통 해 그들 자신의 사상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인간 저자와 신적 사이에는 신인형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성경 은 참으로 인간의 기록이면서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둘째로, 선교사들의 이러한 불변의 확신이 선교사역을 위해 그들이 체택하고 옹호했던 네비우스 선교방법(자립,자전,자치)을 성 공시키는데 중심 역활을 했다는 것이다. 즉 성경 중심의 훈련과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과 그 학교에서 유래된 모든 선교사역에 적용되었 다. 미국의 구 프린스톤 신학교의 역사적 입장과 매우 유사한 장로교 출신들과 선교 사역을 통해 그들의 보수주의 성경관은 전국에 널 리 확산되었던 것이다.

세번째는, 성경의 권위와 무오설은&nbsp1930년대부터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흥하기 시작한 여러가지의 자유주의의 도전과 박형룡 박사의 응전에 있어서 결정적인 이슈였다.
박형룡 박사와 그의 동료들은 자유주의를 오경의 모세 저작권,성경의 초자연적 특성,그리고 성경의 과학적 정확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묘사하였지만 그러나 공격의 중심 주제는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에 촛점을 맞추어졌다.

성경관에 대한 자유주의의 도전에 반대하여 축자영감과 성경의 무오설이 역사적으로 가장 확실한 근거가 있는 가르침이며, 이것 은 개혁주의 전통이 고수해 온 성경관임을 전투적으로 변호하였다. 그리고 박형룡 박사의 성경관은 초대 선교사들의 성경관과 정확하 게 일치한다. 즉 박형룡은 정통주의 신앙을 한국에 보존시키고 성경의 권위를 한국에 뿌리 내리도록 하였다.

네째로,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절대적 확신은 일제 식민지 기간 특별히&nbsp1935년과&nbsp1945 년까지 약&nbsp10년동안 전천년설 종말론(언더우드&nbsp- 마초삼열&nbsp- 이눌 서&nbsp- 길선주&nbsp- 김익두&nbsp- 박형룡&nbsp- 박윤선)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전 국적인 현상으로 발흥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그런데 초대 선교사들과 한국 교회지도자들이 전천년설을 가장 믿을 수 있는 성경적 종말론으로 설파했으며,전천년설 종말론이 한 국교회에 지배적인 종말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열쇠인데, 이들은 성서 해석학에 대해 문자적인 접근을 요구했으며,그들의 전천년적 종말 론 사상은 일본의 식민 통치하의 수난당하는 한국인들의 희망과 잘 조화를 이루었다. 즉 일본정부의 신사참배와 핍박은 고난받는 백성들 이 미래지향적인 왕국개념과 성향을 간직하도록 자극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보수주의 성경관이 한국 장로교인들로 하여금 전천년설 종말사상을 간직하게 만들었음은 부정할 수 없 는 명백한 사실이다. ① 성경공부(축자영감설과 무오성에 대한 절대적 확신) ② 전천년설 종말사상 ③ 신사참배 반대 운동 ④ 동양철 학의 영향 등이 한국 장로교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발흥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죠지 말스든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여름사경 회와 성경공부 운동과 깊이 연계된 전천년주의 운동이 성경사경회,네비우스 선교방법,성경학교,그리고 평양신학교를 통해 매우 효과적으 로 전국교회에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일제 식민통치기간 동안 특별히&nbsp1938년 이후 이 두 운동은 정통장로교를 감리 교나 장로교 진보주의 사상들과 구분하는 두드러진 특성으로 발전하였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무오와 축자영감은 또한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고 난 후 그 다음 해인&nbsp1940년에 조선신학교가 설립할 대 중심적인 주제들이었다.
이 학교의 모든 교수들은 성경의 무오성과 축자 영감을 비판하면서 {성경은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는 자유주의 파라다임을 받 아 들였다. 인간의 저자에 의해 기록된 성경이 정확무오할 수 없으며,당연히 수많은 과학적,역사적, 그리고 연대기적 오류를 포함한 다. 하지만 구원을 목적으로 갖고 성경은 그것은 성취하는데 무오하다고 주장한다. 결국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 이&nbsp1945년과&nbsp1953년 사이에 발생한 보주주의대 자유주의 논쟁에서 중심적 이슈로 발전한 것은 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한국 장로교회의 내에서 발생한 전후 투쟁은 {성경에 대한  논쟁}으로  통칭될 수 밖에 없는 것이 다. 결국 이 기간동안 한국장로교회는 두번에 걸쳐 대분열이라는 슬픈 여파를 경험해야만 했다.

  &nbsp2)  부정적인 면
우리가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한국장로교회의 큰 장점은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불변의 신념이다. 한국교회는 성경무오 와 완전축자영감설에 대한 확고한 확신과 이들 교리들을 성경의 역사적 교리로 보존하고 변호하려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다. 그들도 {성경무오설은 일관된 복음주의와 완전한 개신교 정통주의에 필수적이다}고 믿었다. 이들 교리들은 성경의 종교적 권위 에 관한 교리적 확신을 변호하고 설명하며,또는 유지하는데 핵심 역활을 하였다. 성경권위의 본질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관심이었 다.   따라서 성경 권위의 문제는 역사적 기독교 뿐만 아니라 한국 장로교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한국교회장로교는 성경무오와 축 자 영감에 따라 그 신앙과 기독교 전체를 정의했다. 성경무오는 그리스도인들이 고수하고 변호해야 하는 최초의 교리일 뿐만 아니라 마 지막 기독교 교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에 성경만의 신학사상은 본의 아 니게 부차적인 위험 즉 신앙 의 페쇠주의,반지성주의,반사회주의,반개혁주의를 낳을 가능성이 항상 잠재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면서 보수성과 성경의 권위를 높여간다면 그것처럼 아름다운 일이 없을 것이다.

첫째로, 성경관에 대한 신학적 변호와 이들 교리의 실제적인 적용(생활과 기독교회에 대한) 사이에 현저한 괴리가 있다는 점이다.
즉 성경을 기독교인의 삶의 원천으로 삼는데 실패한다면 성경에 대한 확신과 생활 속에서의 인격적인 적용사이에는 피할 수 없 는 괴리가 발생할 것이다. 한국 장로교는 성경을 축자적으로 영감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성경에 관한 매우 보수적인 신 학적 자세를 가져왔으나 성경을 매일의 삶 속에서 적용되어야 할 기독교의 삶으리 원천으로 강조하는데는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생활 에 대한 성경의 실제적 적용 문제는 한국 장로교 뿐만 아니라 미국 장로교에서도 오랫동안 관심을 끌어온 상당히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 이다.

둘째로, 교리적 축소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개혁주의 전통을 통해 성경의 무오설과 완전축자영감설을 고집하여 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장로교는 개 혁주의 전통에서 제한된 수의 {근본적인 교리}만을 고수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 두 교리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한국 장로교회 를 교리적 축소주의로 흐르게 할 위험 가능성이 있다. 한국교회는 미국 기독교회가 교파주의적 보수주와 근본주의는 교리주의,폐쇄주의, 율법주의,반시저성주의 그리고 교리축소주의라는 비난을 종종 왔다는 사싱을 배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간하배 교수의 지적)

세째로, 개혁주의 전통과 명백하개 일치하지 않는 신앙요소가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한국장로교의 세대주의는 가장 좋은 실례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그들의 절대적 신뢰 그리고 개혁주의 그룹과 의 협력 때문에 한국 선교지에서 세대주의자들의 사여근 결과적으로 성경 중심의 교회를 낳는데 현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개혁주 의 전통과 신학 가치를 떨어 뜨리는 세대주의 종말론을 그들이 수용하고 고무했던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평양신학교의 교 수들이 칼빈주의 학자들이었지만 그들의 가르침이 뚜렷이 칼빈주의적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 한편으로 선교사,교수들이 웨스트민슽 신앙고 백,개혁주의 전통 그리고 구 프린스톤 전통을 고백하면서도 종말론에서는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세대주의를 가르쳤다는 것이 도 하나 의 부정적인 영향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유주의 학자나 보수주의 학자나 할 것이 없이 근본주의와 역사적 기독교를 구분하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근본주의를 메이첸의 전통주의와 동일시 했다. 더우나 그들 중 몇은 평양신학교를 근본주의와 일치 시켰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을 근본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두개의 특징이라고 믿음으로써 위 두 교리 를 변호하는 자들을 근본주의자들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런데 이와같은 해석들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한국 역사가들이 성경의 권위와 관 계된 미국 기독교의 역사를 잘못 이해하는 결과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는 ① 근본주의와 역사적 정통 개혁주의 전통을 구분하는 특성들을 이해하는  안목이 결피되어 있었기 때문 에, 한국 역사가들은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을 근본주의자들의 전용물이라고 전제해 버리는 경향이 농후한 것이다. ② 그런 전제는 후 속적인 오해 즉 종종 핫지&nbsp- 위필드&nbsp- 메이첸 전통을 근본주의로 몰아부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 다. 따라서 전혀 전혀 의심없이 그들의 메이첸의 정통 장로교를 근본주의와 동일시 하게 되었던 것이다. ③ 그들은 성경의 무오성 교 리에 관한한 두 그룹 즉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데 실패하였다.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사이의 두드 러진 차이는 성경관이 아니라 다른 요소들에 있음에 대하여 바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때문에 장로교 보수주의를 복음주의,근본주 의,칼빈주의적 근본주의,극단적 보수주의 또는 극단적 칼빈주의라고 비난을 하지만 이같은 비판적 용어들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함 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장로교의 역사는 우리에게 훌륭한 교훈을 제시한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우리에게 성경 중심의 신앙을 전수하여 주었다.
성서의 근본신앙을 파괴하는 현대주의를 관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인 신앙의 삶의 실존 속에서 표풀되지 않는다 면 그 신앙은 생명을 상실한 것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성경만의 신학사상은 본의 아니게 부차적인 위험 즉 신앙 의 페쇄주의,반지성주의,반사회주의,반개혁주의를 낳을 가능성이 항상 잠재해 있는데, 첫째로, 성경관에 대한 신학적 변호와 이들 교리 의 실제적인 적용(생활과 기독교회에 대한) 사이에 현저한 괴리가 있다는 점이다. 즉 엄격한 주일 성수와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해 서 부정적 시각을 갖게하였다.  둘째로, 교리적 축소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으며, 세째로,개혁주의 전통과 명백하개 일치하지 않는 신 앙요소가 있으며, 마지막으로,자유주의 학자나 보수주의 학자나 할 것이 없이 근본주의와 역사적 기독교를 구분하는데 실패했다.

그런데 이와같은 해석들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한국 역사가들이 성경의 권위와 관계된 미국 기독교의 역사를 잘못 이해하는 결과 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① 근본주의와 역사적 정통 개혁주의 전통을 구분하는 특성들을 이해하는  안목이 결피되어 있 었고 ② 핫지&nbsp- 위필드&nbsp- 메이첸 전통을 근본주의로 몰아부치는 결과를 낳았으며, ③ 그들은 성경 의 무오성 교리에 관한한 두 그룹 즉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데 실패하였다.

한국 장로교회는 개혁주의 균형잡힌 실천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 미국의 복음주의 역사가 인 {나단 해취}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은 단순히 교회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사회를 포용하며,개인의 경 건만 아니라 사회의 거룩함까지 포함하여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설득력인 있는 언급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신앙을 표명하면서도 교회의 사회적 책밍르 외면하는 이중적인 태도는 청교도들의 신앙관과는 차이가 있다. 청 교도들은 경제,직업,사회,정부 등 삶의 모든 분야를 성경적인 규범아래로 가져가려는 일에 헌신적이었는데, 한국장로교회도 세상 속에 서 교회의 책임을 총체적으로 완수하여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장로교회가 총회설립&nbsp80년사를 점검하면서 한국 장로교회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역사의 교훈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

II. 한국기독교 교회사에 대하여 논하되, {민족주의 사관}의 장,단점을 논하고,이것을 기독교 보편주의 관점에서 평가하라.

1. 배경 및 동기 : 해방이후&nbsp1960년 민족운동이발흥하면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한국사를 민족주의 관점에 서 조명하여 한다는 사관론이 많은 지식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는데, 민족주의 사관이 한국교회사 사관으로 확대된 것은 한국 교회사 가 {정체성}의 문체제로 갈등을 겪던&nbsp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즉 민족교회사관은 ① 선교사관 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국교회를 민족을 중심으로 한 {자주적}으로 하려는데 있었고 ② 민족주의 사관이 대중화되고 민족주의 운동이 직 접,간접적으로 영향을 줌으로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것과 아울러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면서&nbsp1960년대 초부터 민중신학이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는데 민중신학의 관점은 민중의 관점에서 한국교회를 조명해야 한다는 민중사관을 낳았던 것이다.

2. 민족주의 의의 및 한계점 : 한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면서 한국사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부정하는 {식민사관}의 탈피를 모 토로 하여 출발한 민족주의 사관은 해방 이후에 보편화되었다. 즉 민족주의 사관은 외세의 침략과 식민사관에 대항하면서 민족 주체 성 회복을 모토로 하여 출발하였는데,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인식하는 모든 지식인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즉 ① 한국 민족주의 형성 에 촉매 역활을 하였고 ② 역사인식을 통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인식케 하였는데, 이것은 한국사를 뚜렷한 목적을 갖고 조명하려는 최초 의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의(意義)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민족주의 사관은 ① 비과학적이고 {신비주의},{국수주의}라는 비판을 받 고 있으며 ② 역사인식의 태도가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특수성을 강조하여 역사 발전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 다.
민족주의사관은 객관적인 타당성보다는 주관적인 신념이 더 중요시되고 있으며,민족관념의 고유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민족을 세계로 부터 고립시키고 있다. 특별히 박암 박은식,단제 신채호,위당 정인보,호암 문일평 등은 민족주의 방편으로 한국사를 연구하였기 때문 에 민족의식이 역사 연구에 지나치게 투영되어 사학의 객관성을 상실하고 민족의 고유성을 지나치게 고집함으로 민족의 보편성을 부정하거 나 지나치게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3. 민족교회사관과 평가 :
1) 개념 및 특징 : {민족교회사관}이란 선교를 받은 한국민족 보다는 선교를 전해준 피선교국의 입장에서 한국교회 역사 를 조명하려는 선교사관에 대한 반동으로 민족주의,민족,민족운동을 주체로 한국교회사를 조명하려는&nbsp1970년대 이후 발 흥한 한국교회사관의 한 형태를 말하는데,교회사를 선교국 교회의 연장으로 보는 선교사관을 반대하고 한국교회의 {주체성}과 {독립성} 과 {특수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역사의 평가 기준은 {선교나 신학사상이 아니라 {민족,민족주의 혹은 민족운동이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민족운동 의 연계성 속에서 한국교회 역사를 재구성하기 때문에 기독교 발흥과&nbsp3.1운동과 같은 구한말 교회가가 민족의 생존 과 밀접한 관게를 맺고 있떤 그 시기에 맞추고 있는 것이다. 또한 민족교회의 모티브를 위해 한국 기독교는 한민족 스스로 자생했음 을 강조하고 선교사들의 선교사역과 공헌을 의도적으로 평가 절하시키며, 기독교인들의 민족주의 운동은 역사 형성의 동인으로 부각시키면 서 겨례와 교회를 민족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접목시키고 있는 것이다.

민족교회사관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① 공동체적인 민족 개념과 공동체적인 교회 개념을 조화시키려고 한 것이 특징인데, 민족교회사관을 갖고 한국교회를 조명할 경 우에 반 봉건주의,반 침략주의,항일 운동,민족운동을 중심으로 한국교회를 조명하기 때문에 교회와 민족간의 관계는 충실히 있다고 있다 고 본다.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민족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고 기독교인들은 개화운동과 항일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활을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교회사는 교회와 민족과의 관계가 반영되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② 민족교회사관은 한국교회를 민족이라는 공동체와 한국교회라는 공동체의 공통분모를 추론하여 조명하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갖 고 있는 이원론적인 사고와 현실에 대한 책임의식의 결여를 역사적으로 조명하여 한국교회의 국가와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과 사명의식 을 일깨워 주었다.

③ 피선교국의 상황에서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것을 민족교회사는 극복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민족주의 의식과 사상을 불어넣어 주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사를 민족주의 관점에서 조명하려고 하는 이들은 기독교라는 보편성을 평가절하시키고 한국민족이라는 것을 부각시킨 나머지 교회와 민족의 동일 의식을 추론하고 있따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다.

민경배 교수는 한국교회사가 아직까지 {민족교회사의 취급}되어 오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선교사적 역사 방법론} 을 필하고 {한국을 주체}로 하여 한국교회사를 기술하려고 했다. 즉 그는 {교회,국가 동일의식}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데,교회에서 의 공동체 개념을 성례에서 찾는다. 민족과 교회의 연합을 통해 한국교회의 주체성,독립성,특수성을 강조한 것은 장점이라고 할 수 있 지만 한국교회를 한국민족이라는 특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사관 자체가 어느 정도 반동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다.

따라서 민족주의 교회사관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민족과 교회를 연합시켜 형성한 민족교회라는 개념에 대한 분명한 정립이 필요하 다.  그것은 민경배 교수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① 민족교회사 자체가 작은 한 출발에 불과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전개과정에서 역 사 해석과 사건기술의 과정에서 논리적인 비약이 있기 때문이고 ② 민족교회라는 개념에 대한 분명한 제시가 없기 때문이며 ③ 민족교회 관을 뒷받침하는 역사자료가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때문에 민족교회사관은 복음의 수용과정에서 생기는 문화적인 갈등과 종교적 인 갈등을 구성하고 선교사들의 자료를 참고할 수 밖에 없는데, 이들 자료들을 민족주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기 위하여 자료를 주관적이 고 임의적으로 취사 선택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민경배 교수의 주관적인 역사해석은 기독교교회사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로,그리스도라는 역사상의 인물,교회라는 신도들의 세계 적인 공동체, 그리고 사(史) 등에  세가지를 들고 있는데 기독교 역사가라면 위 세가지를 기독교사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로 동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신학,교회관을 갖고 있으냐,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기독교회사의 역사해석 은 상당한 차이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민경배 교수가 교회를 공동체로 보고 있는데, 교회라는 공동체의 본질을 외형적인 요소에서 찾고 있는 것은 전통적인 교회관 이 아니다. 교회가 공동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성도의 집합체를 뜻하며 성령 안에서의 성도의 교통을 일차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에 대 한 구체적인 구현을 위해 성례는 필요한 것이다.

성경은 교회가 공동체라고 할 때 신앙의 공동체를 말하는데, 성서를 손에 쥔 성도들이 신앙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회는 역사 적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논리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다루면서 신앙과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고투하는 성도들의 실존 문제를 함께 다루 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회사를 교리 신학 일방도로 다루는 자들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신학과의 논리적인 관계를 제시하는데는 성동 하였다고 보지만 신앙과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고투하는 성도들의 실존적인 문제를 취급하는데는 실패하였다.

다른 한편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신앙과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고투하는 성도들의 실존적인 문제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 지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신학과의 노리적인 관게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취급하였기 때문에 한국교회사와 세계교회사와의 역사적인 단절 을 낳았고 한국교회사가 갖고 있는 보편성보다 특수성을 강조함으로써 역사해석의 정확성과 공평성을 상실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또한 민경배 교수는 교회는 화해의 공동체요,에큐메니칼하기 때문에 {교회의 통일은 정통에 선행한다}고 믿었는데, 역사적으 로 교회의 통일은 신앙의 통일성 위에 형성되어 왔고 그래야 된다고 역사는 교훈하고 있다.  초대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신앙이라 는 통일성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통일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교회사에서 역사적인 신앙이 제거된다면,각 민족이 갖고 있는 특수성은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주적 인 기독교가 갖고 있는 보편성을 제시할 수 없으며, 기독교 역사의 상대적인 가치를 고양시킬 수 있어도 절대적인 의의는 부여 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교회사가 세계교회와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역사적 신앙을 배제하고 기독교를 한국민족의 특수성 속에만 이해 한다면 결국 기독교의 보편성은 상실되고 말것이다. 역사는 한 교단을 정당화하기 위한 교단사가 될 수 없고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 면 한국 기독교회사는 한국이라는 지리적,역사적 상황(Context)이 반영되어야 하지만 세계 기독교와의 단절 속에서 기술되어서 는 안되고,기술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교회사 속에 한국교회사를,한국교회사 속에서 세계교회사를 조명해야 할 것이다.

2) 평가 : 민경배 교수는 한국교회 역사를 내연과 외연이라는 체계 속에서 이해하면서 내연은 교회안 종교 신앙 등이며, 외연은 민족이나 사회를 말한다.

이러한 독특한 체계 속에서 이해하는 한국교회사는 단순히 제도의 변천이나 특정한 사건의 나열로 보지 않고 내연의 체험을 통하 여 나타나는 외연을 통하여 펴가하고 이해한다. 때문에 객관적인 사료에 근거한 역사 기술이기 보다는 주관적인 면에 역사 기술의 원리 로 적용할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 때문에 교회역사를 민족주의 관점에서 보는 시각은 복음주의  역사관에서 조명할 때 그 한계가 있 는 것이다. 교회의 역사는 복음의 공동체,신앙의 공동체를 주체로 한 역사여야 한다. 민족주의 사관은 역사의 외연에 집중하고 있 기 때문에 복음 역사의 내면적인 흐름 즉 복음 전파의 모습과 교회의 중심을 형성하는 신학 사상의 중요성을 평가절하 시키고 있 다. 민족주의 교회사관이 갖고 있는 한계점 과 약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설정한 기본전제의 타당성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민족주의 교회사관은 사상적인 접근이 빈약할 뿐만 아니라 민조교회 형성을 전제에 대한 검증을 설덩하여야 하기 때문에 선교사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선교사들과 한국교회와의 불연성,역사적인 단절을 추구하고 있다.

둘째로, 기독교와 민족과의 관계에 거의 국한 되기 때문에 사료의 선택과 해석 그리고 구성이 지나치게 주관적이다.
즉 역사는 해석되어야 하지만 그 해석은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히스토리에(Historie) 없 는 게쉬테(Geshichte)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역사관이 갖는 약점은 한국교회 역사를 민족,민족주의를 모체로 보 기 때문에 시각이 주관적이고 협소하다는 점이 약점이다. 기독교라는 것은 어떤 특수한 민족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하나 님은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세계교회를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세째로,민족주의 교회사관이 갖고 있는 약점은 상황(Context)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복음(Text)을 지나치게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민족사관에서는 복음이 하나의 수단으로 이해되고 있는듯하며, 그것은 복음에게 민족의 시대적 상황을 해결하여 달라는 요청이 따 르고 있다. 따라서 그 요청에 부흥하지 못한다고 여겨지면 복음은 평가절하되고 기독교 교회는 존재의의를 상실한다고 본다.  그러 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복음은 그 자체가 본질이며 목적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기독교는 결코 자민족 중심이 될 수 없으며,때문에 기독교의 복음을 민족이라는 틀 속에서 묶어 둘 수 없다는 본 다. 민족을 통하여 복음,기독교,그리스도를 볼 것이 아니라 복음,기독교,그리스도를 통하여 민족을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 서 복음이라는 보편성은 민족이라는 특수성을 넘어선다.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며,유대인 헬라인,야만인 어느 특정 민족을 초월하시 는 한 구주 하나님의 보편적인 종교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보편성을 일차적이 역사구성의 원리로 삼으면서 각민족에게 부여하신 특수적 인 민족의 게체성을 역사의 내용,구성,서술에 반영하여야 할 것이다.

네째로, 교회의 역활을 민족을 위한 공헌도에 따라서 평가하는 것은 복음이라는 보편성을 지나치게 민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평가절하 시키고 있다.
즉 민족주의교회사관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복음에서 찾고 있지 않는다. 교회는 민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의 중심을 민족에 두고 민족과 관련하여 조명하기 때문에 민족주의,민족 운동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한국교회를 평가하려는 경향이 두드 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교단에 대한 평가,선교사들의 평가,한 인물의 평가 역시 기준은 민족운동 혹은 민족주의,민족의식이다. 복음을 모체로 하는 보 편적인 교회의 공동체를 민족이라는 비신앙의 공동체를 통해 평가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고 이것은 성서적인 원리가 아니다 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섯째로, 식민사관,선교사관,선교사와 외국문화, 그리고 보수주의 사관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편향적 사관이다고 할 수 있겠다.
즉  민족주의 관점에서 민족과 교회와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선교사관의 극복을 하나의 과제로 삼는 것은 훌륭하지만 이들 이 외치는 선교사관의 극복이 단순히 사관의 탈피가 아니라 반선교사,반선교정책 등으로 이어지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디들은 선교사 들을 근본주의자,교리지상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교리제일주의자,독선주의작이며, 자유주의를 악마시하고 신앙의 획일주의와 의식주의에 빠 진 초보수주인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하고 있따.
더구나 이들은 성서의 말씀을 믿는 신앙보다는 성서 자체를 우상시하는 기만적인 인물이며,반지성주의자들이고 권위의식에 사로잡 힌 자들이라고 혹평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민족주의교회사관은 반동적이며,편향적이라고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 사관이 극복해야 할 문제는 한국 민족을 하나의 고립된 존재로 보기 보다는 인류 속의 하나의 민족으로 보아 야 할 것이다.  한국민족이 세계 여러 민족과 공통적으로 갖고 잇는 보편성의 올바른 이해 속에서 한국민족이 갖고 있는 특수성을 이 해해야 할 것이다. 즉 민족이 지니고 특수성을 기독교 보편성 위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민족주의 교회사관이 갖고 있는 한계성과 약점도 거의 비슷하다. 한국교회를 하나의 고립된 교회로 보기보다는 세계 기독 교 속의 한 교회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국기독교가 세계 여타 다른 교회의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기독교의 보편성의 오바른 이 해 위에 한국교회만이 갖고 있는 특수성을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다.

한국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특수성을 우주적인 기독교의 보편성 위에 그것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이해할 때 한국교회사는 역사적인 단절을 극복할 수 있고 세계 기독교의 일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nbsp20세기 말엽 오늘날의 한국교회사는 단순히 선교사적 관점에서만 조명될 수 없는데, 선교사는 선교 의 초창기를 조명하는데 적합하다. 그리고 그나름대로의 의 의가 있었다. 민족교회사관은 선교사관의 극복이라는 과제에서 그 이상의 역 활을 완수하였다.

그리고 한국교획사 연구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 넣었고 한국사,한국 교회사 연구의 촉진제 역활을 하였다.  그러나 민족이라 는 뜻렷한 개념이 정립되거나 제시되지 않고 전개됨으로 지나치게 주관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민족교회사관은 긍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 구하고 기독교 보편주의라는 관점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첫째로, 복음의 주체는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민족에게 복음을 주시고 복음을 통해서 이 민족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올바로 조명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 의  섭리의 역사를 조명하기 위해서는 외향적인 역사에서 역사구성의 주체를 찾기 보다는 신앙을 고백하는 복음의 공동체의 사상적인 고 투와 갈등에서 역사 구성의 주체를 찾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복음은 한 국가, 한 민족을 초월하여 세계적이다.
복음은 이 민족을 대상으로 할 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다. 한국교회라는 공동체는 역사적,지리적 특수성이 있지만 보 편적인 세계 기독교라는 전체 공동체 속ㄷ에 한 작은 공동체여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교회와 보편적인 교회는 떨ㅇ질 수 없는 관 계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서로는 한 복음, 한 신앙,한 하나님을 주체로 하기 때문이다.

세째로, 사회 구원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복음을 통한 개인구원이 복음의 일차적인 구원이라는 점이다.  민족사관은 사회구원을 강조한 나머지 개인구원의 중요성을 절하시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라고 할 때 그 기독교는 일차적으로영적인 우기체적 공동체 즉 성서를 쥔 신앙의 공동체를 말한다.

그러면 세계 기독교 역사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는 사상사라는 관점에서 조명되어야 하는데, 한국 교회사를 조명한다면 민족주의사 관과 선교사관을 배타적으로 보지 않으면서 그들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역사 방법론이라고 사료된다. 한국교회는 유난히 신학사상 을 축으로 형성되고 이어져 왔다.

선교사들의 신학사상,대부흥운동,전천년설,신사참배문제, 자유주의와 정통주의 대립은 모두 한국교회사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며, 그 리고 이것들은 신학사상을 축으로 한다. 그리고 이런 신학 사상의 중심에는 성경관이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교회사 연구에서 사상사 적 측면을 간과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학사상을 축으로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되, 한국이라는 {Context}을 충실히 반영해야 할 것이다. 그러 나&nbsp1960년대 이후 자유주의와 진보주의자들의 토착화는 오히려 복음을 변질,왜곡시켰다. 문화를 통하여 기독교를 보 는 토착화는 복음의 변질을 한국이라는 상황 속에서 지나치게 상황화 시켰다.  기독교 문화의 원리는 복음을 통하여 문화를 조명하 고 복음을 통하여 문화를 창출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를 사상사라는 측면에서 조명하되 사회문화적 측면을 타부시하지 않는 조화로운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 면 한국교회를 지나치게 사상사적인 접근을 할 경우에&nbspText에 치중한 나머지&nbspContext를 무시하 는 위험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III. 객관식 문제&nbsp- ① 연대 ② 사건 ③ 인물
1930년도에 박형룡 박사에 의하여 한국교회는 완전 영감,성경무오성,축자 영감성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였 다. 그런데&nbsp1930년 이전 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nbsp1930년 이후의 신학사상을 이분화 하려는 시도들 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1832년 / 구출라프 선교사 만주 한인선교(주기도문 번역)
1866년 / 한국 기독교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시기
         ① 로버트 토마스 목사 순교&nbsp- 미국상선 제너랄 셔먼(General&nbspSherman)호
            의 방화 사건 / 대동강에서 소각(9월)
         ②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통상조약 체결
1872년 /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 선교사가 만주에서 개척 전도하며 한인에게 전도
1873년 / 대원군 하야&nbsp- 이것으로 인하여 개방정책이 실행되고 미국과 통상조약 체
         결,복음도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1876년 / 한일 통상조약 체결&nbsp- 일찌기 개화정책으로 눈뜬 일본은 한국에 세력을 확
         장하기 시작하였다.
         만주에서 백홍준 외&nbsp4명 로스 선교사로부터 세례받음(한국 최초의 세례 /신교)
1882년 / 임오군란이 일오난 후 수신사 박영호,이수정이 일본에 건너감
         한미통상조약 체결(상호 공관 설치)
         복음전도 시작
1883년 / 이수정이 일본에서 세례 받음,백홍준이 노끈 성경 가지고 입국(로스 역)
         푸트(L.H.Foote)가 한국에 파견하고 이로 인하여서 미국으로 사절단을 파
         견하였는데, 사절단은 미국의 실상에 눈 뜨고, 이들이 개화파로 전향하게
         되었다.
         미국의 사절단 일행은 미 감리교 소속인 {죤 가우쳐}(Hohn&nbspF.&nbspGoucher) 목
         사를 만나고,가우쳐 목사는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김청송이 셰례 받음(총&nbsp6명이 받음)
1984년 / 최초의 한인교회가 세워짐(11월, 소래 교회&nbsp- 황해도 서상륜,서경조)
         {알렌}부부(미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 입국&nbsp- 이때 갑신정변이 일어남.
         정부는 수구파와 개화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이 일본에서 기독교 수용을 건의함
         일본에서 이수정이 한글로  마가복음 등 간행
1885년 / 이때부터 선교의 열매의 맺기 시작
         언더우드(북장로교,PCUSA),아펜젤러(감리교),스크랜튼(감리교)가 입국하였
         는데, 한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
         광혜원 설립(2월)
1986년 / 이화학당 설립(스크랜트 여사)
         노도사가 세례받음(국내 최초의 세례)
         한불조약
1887년 / 새문안교회(언더우드,한국 최초의 조직),남대문교회,정동교회(아펜젤러)
1889년 / 호주에 살고 있는 데이비스 남매가 한국에 입국(호주 선교회의 최초의 선
         교사)하였는데,입국 후&nbsp1년 후 복음전도하다 콜레라에 걸려 사망함(오빠)
         마펫 선교사 내한
         감리교에서 최초의 인쇄소 설립
1890년 / 죤 리빙스톤 네비우스 선교사가 한국에 방문(파송)/네비우스 선교 정책
         한국성서회 창립,언더우드- 서울에서 최초의 사경회 개최
1892년 / 한국에 남장로교(PCUS)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다.&nbsp- 언더우드 선교사의 노력
         의 결실로 남장로교 선교사인 이눌서 선교사가 파송되어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가 개시되었다.
1893년 / 선교사들이 공의회 조직
         장대현교회(평양)승동교회,초량교회(부산) 설립
         수일 에배(3일) 시작됨
1894년 / 평양,숭실학당 설립,찬송가 출간,연동교회 설립
1895년 / 청일전쟁
1896년 / 이병호(최초의 유아세례),대영성서공회 조선지부 결정
         최초의 기독학생 운동인 협성회 조직
1898년 / 카나다에서 한국에 선교사 파송 // 이제 한국에는 선교가 자리잡고 시작하
         였다.(함경도 지역)
1900년 / 평북 선천북교회에서 최초의 전도회 조직
         신약성경의 번역
1901년 / 조선 에수교 장로회 공의회(선교사와 한국인 총대로 구성)
         평양신학교가 세워짐
         장로교에서 신학생(김종섭,방기창)&nbsp2명을 교수하기 시작함(평양신학교)
         북감리교에서 김창식,김기범을 목사 안수(집사목사)
1902년 / 곽안련 선교사 입국,목포에서 아펜젤러 선교사 익사
1903년 / 원산부흥운동&nbsp- 이때에 교인수가&nbsp3배로 증가함
1904년 / 노일전쟁
1905년 / 장로교,1907년에 독립 장로교회 창립과&nbsp12신조 채용을 결의
1907년 / 평양신학교를 장로회 신학교로 개칭,제1회 졸업생&nbsp7명 배출
         평양부흥운동&nbsp- 이때에 교인수가&nbsp3배로 증가함
         이때 한국장로교 노회가 최초로 결성됨(노회장 : 마포삼열)
1909년 /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
         ① 선교&nbsp25주년를 맞이하는 시기 ② 이때의 선교사들은 매우 성숙해 짐
1910년 / {백만인 구령운동}을 교파연합으로 진행
         합일합방 / 선교사들에게 고민과 문제를 가지게 함
1911년 /&nbsp105인 사건&nbsp- 일본인이 조작
1912년 / 장로회 총회가 결성됨(7대노회,총대221명,노회장 :길선주 목사)
1913년 / 총회 결의대로 산동성에 선교사 파송(김영춘,박태로,사병순)
1915년 / 기독신보 창간
1917년 / 제&nbsp6회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수정 채용
1918년 / 장로교 신학교에서 신학지남 창간
         한국에 진보주의(자유주의)가 등장함
         김장호가 최초의 자유주의자
         월리암 커(W.C.kerr)선교사가 김장호에게 영향을 미침
1919년 / 총회에서 선교사에게 언권만 주기로 함
         삼일운동&nbsp- 이후에 종말론 사상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925년 / 라부열 선교사 평양신학교의 제&nbsp2대 교장으로 취임함
1930년 / 자유주의자로 공부하던 사람들이 입국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에 김재준,
         채필근,송창근이 입국하였다.
         이들은 신학지남을 통해 모였는데 이들의 글은 박형룡 박사에 의해 문제가
         제기되고 총회로까지 비판을 받게 되었다.
1935년 / {신학난제서평} 발간
         박형룡 박사를  보수주의의 대변자로 만들어 놓은 책이다.
참고 / &nbsp1935년 이후 / 신사참배 문제로 한국교회 진통과 고민
1938년 / 평양신학교 폐교&nbsp- 박형룡 박사 등이 한국을 떠남
         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가결
1940년 / 김재준 박사를 중심으로 한 조선신학교 탄생(진보주의적 신학교 승동교회에서 개교)
         이때를 전환점으로 해서 한국교회는 정통주의에서 진보주의로 흐르게 됨
1942년 / 외국 선교사 전원 출국
1943년 / 일본 기독교 조선 장로교단 창립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 결성,각 교단 강제 통합(초대,통리 김관식,총무 송창근 목사)
1945년 / 해방&nbsp- 이때에 추방당했던 외국선교사들 및 보수주의자 신학자들 입국
         이로 인해서 한국교회는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대립되기 시작
         김재준 목사 조선신학교 교장 취임
1946년 / 남부총회에서 조선신학교 승인
         고려신학교 탄생&nbsp- 한상동,박윤선(이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한 사람들끼리
         세운 학교)
         한국 기독교 연합회 결성
         상기 교단 완전 해체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재조직
1947년 / 조선신학교 학생&nbsp51인 진정 사건(제33차 총회)
         조선신학교 조사 위원 설립
         박형룡 박사 귀국
1948년 / 개혁안 제출
         장로회 신학교 인준(제&nbsp25회 총회)
         장로회 신학교 설립(남산에,박형룡 교장, 상기의 개혁안을 거부함에 대한 결과)
        &nbspWCC  창립(김관식,엄요섭 참석)
1949년 / 보수주의자들 끼리 갈등&nbsp- 이때 중국에서 박형룡 박사 입국
         에밀 부루너(칼 바르트를 중심한 진보주의자)가 김재준 옹호하였는데, 이
         에 힘을 얻어 박형룡과 신학토론 제의하였다.
1950년 /&nbsp6.25 사변&nbsp- 전쟁의 와중에도 한국교회는 신학적인 문제로 갈등이 심화됨
         대구에서&nbsp36회 총회
1951년 / 경상노회 설립/기성의 노회가 무효라고 주장함
         제36회 계속 총회에서  조선신학교와 장로회 신학교의 직영 및 총회신학교 설립 결의
         대구에서 총회신학교 설립(교장 : 감부열 )
1952년 / 제1차 분열
         고려신학교(고신)이 갈라져 나감(346교회,210명 전도사,56명의 목사)
1953년 / 제2차 분열
         한신이 갈라져 나감(기장)/ 호헌대회(법통&nbsp38차 총회 대회)
        &nbsp700교회,120,000명의 성도
1954년 / 에반스톤 총회
1959년 /&nbsp3차 분열
        &nbspW.C.C와&nbspN.A.E 파가 서로 대립됨으로 결국 통합,합동으로  분열
         합동(승동교회)&nbsp-&nbspWCC 가입 반대/ 통합(연동)&nbsp-&nbspWCC 가입 찬성
1960년 /&nbsp4.19가 일어남&nbsp- 국사정권으로 교회는 고민 즉 {교회가 정부에 대해 무엇
         을 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으로 토착화 신학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967년 / 신앙고백
1970년 / 윤성봉 교수의 성(誠)의 신학
1973년 / 빌리그레함의 대집회가 시작
1974년 /&nbspExpolo&nbsp74
1975년 / 김경재의 과정신학과 변선환의 전통종교와 기독교와의 융합을 시도하는 종
         교다원주의(배경 :계몽주의,세속화)
1980년 / 민족 부흥운동 (?)
         박종천의 통일신학(서남동+안병무 = 민중신학)
1981년 / 복음주의 운동체가 형성됨
         남서울교회,사랑의 교회 ,ETS,KEF,CCC,네비게이트,IVF,생명의 말씀사,
         엠마오,두란노서원
1984년 / 한국 기독교 선교&nbsp100주년 기념대회
1990년 / 박종천의 상생(相生)신학

1) 사상사적인 분류
① 장로교 설립이전까지(1884년&nbsp-&nbsp1912년)
② 장로교 총회설립 후 해방전까지(1912년&nbsp-&nbsp1945년)
③ 해방이후 통합,합동의 분열까지(1945년&nbsp-1960년)
④ 정체성 파악의 시기(1960년&nbsp- 현재)

2) 시대적인 분류
①&nbsp1884&nbsp-&nbsp1918 / 개신교 선교 역사적 배경(성서번역)
②&nbsp1918&nbsp-&nbsp1930 / 개신교 정초기
③&nbsp1930&nbsp-&nbsp1934 / 자유주의 도전시기
④&nbsp1934&nbsp-&nbsp1935 / 보수주의의 응전의 시기
⑤&nbsp1935&nbsp-&nbsp1945 / 시련과 박해의 시기
⑥&nbsp1945&nbsp-&nbsp1960 / 혼돈과 분열의 시기
⑦&nbsp1960&nbsp-&nbsp1992 / 정체성 파악의 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