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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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분열
들어가는 말
한반도의 중심 수도 서울의 야경은 붉은 십자가로 대표된다. 이 십자가의 장관을 바라보면서 누구나 느끼는 감정은 교회의 성장 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교회의 성장에 대해 불신자와 신자의 생각은 다르다. 불신자는 경이로움을 느끼면서도 너무 무질서하다 는 것을 생각한다. 신자는 '하나님의 도성'의 확장됨에 부듯함을 느끼면서도 천주교를 고려하여 왜 우리(개신교) 교회는 하나되지 못 할까 하는 물음을 제기한다.
한국 교회는 선교 1세기를 지나고 2세기를 향한 현 시점에서 서구교회의 사양화에 반비례하여 놀 라운 양적 성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함 못지 않게, 한국교회의 분열과 무질서 문제 나아가 사회 정의 (Social Justice)에의 무관심했던 문제를 진지하게 반성하고 지속적인 질적, 양적 성장을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소고는 한국 개신교의 분열과 분열 배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분열에서의 통일로 나아갈 수 있는 나름대로의 답변 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에 한국 3대 교단을 두루 살펴야 하겠지만, 감리교와 성결교의 분열사는 장로교 분열사의 흐름 을 벗어나지 않으므로 본 소고에서는 장로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I. 교회의 분열
⑴ 초기 선교사들의 갈등(알렌과 언더우드)
한국선교사들은 두 진영으로 나뉘어졌다. 그것은 명분사의 교파적 교리의 경계선까지 관통해서 알렌의 장로교와 언더우드, 아펜젤 러, 스크랜톤의 "감리교적" 감리교, 둘로 분할된 것이다. 알렌은 직접적인 설교나 복음의 전파는 우선 왕명이 있어서 허락이 날 때 까지 보류하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정부를 현대 문명의 기관으로 가르치고 지도하는 것이 훨씬 면적이 넓 은 공헌을 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한국 왕실 선교에 주력하였다.
그런데 언더우드는 거리나 지방으로 직접 순회 전도를 나갔다. 물론 감리교 선교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러다 가 1888년 종교 금령이 내리자 알렌은 순회전도에 나간 언더우드를 서울에 소환하고, "이 금령의 발표는 경거망동 한 순회전도가 그 기본적 원인이 되어 있다" 고 반박하면서, 선교나 전도에서 손떼고 의료사업과 교육에만 당분간 치중할 것을 종용했 다. 이에 대해 언더우드를 비롯한 순회 전도사들은, 알렌은 선교사도 아니라며 공박한다. 의견 충돌이 처음 표면화된 데 불과했으 나 한국교회의 분열을 상징하는 첫 사건이 되었다.
⑵ 소종파의 태동
일제의 억압이라는 암울한 현실에서, 현실에 절망한 민중들은 종교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 인간의 원초적 기 복욕구와 민족의 구원이라는 열망이 결합되어 소종파가 난립하게 된다. 소종파의 난립은 교회의 분열이라는 큰 흐름의 지류이므로, 여기 서는 간단히 해방전의 소종파 유형만 살피기로 한다. 교리적 소종파 유형에는 김장호의 자유주의적 성경해석으로 인한 것과, 성서본 문 비평과 문학적 역사적 연구의 필요성을 제시한 양주삼의 성경고등비평으로 태동한 것이 있다. 반선교사적 소종파 유형에는 반선교 사 기치를 둔 최중진계와 이만집계가 있다. 반선교사와 반교권의 기치가 일제하에서 "조선적" 주체성을 외쳤으되 친일한다는 역학은 비 극적이었다. 반선교사적 정책으로 한미관계를 약화시키는 일본종교정책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반교권적 소종파 유형에는 변성옥계의 조선기독교회와 하나님의 교회 사건이 있다. 지역 및 진보적 소종파 유형에는 토착화에 관 심을 보인 신흥우의 적극 신앙단이 있다. 무교회주의는 일본의 복음교회가 대표적이다. 환상적 신비주의의 소종파 유형에는 이용도와 백 남주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소종파 난립은 반선교사 운동과 교권적, 지역감정적 요소등이 복합되면서 초기의 종파분열이 확대되기도 했다. 실지로는 신앙형태의 다름인데, 신학적 이해 부족으로 분열을 가속화되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⑶ 해방 이후의 교회 분열
해방전 일제치하에서의 신사참배에 대한 조선기독교계의 대응양상은 각 교단마다 달랐다. 특히 선교부가 신사참배문제로 선교부 설 립 학교를 폐쇄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로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이다. 당시 장로교 총회장 이었던 이인식은 총독부 교섭 위원을 통해 기독교 학생들의 신사참배면제를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총독부측은 아무리 교회경영의 학교들이라 하더라도 조선총독 의 교육정책에 따라 신사참배를 해야만 한다고 강경하게 대답한다. 그래서 장로교 선교사들은 서로 모여 이 문제를 상의하였고, 대체적 으로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므로 신사참배를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학교의 존폐문제가 달렸으므로 각 학 교 이사들은 입장을 달리했다. 즉시 철저히 거부하자는 입장과 신사참배 행위에 비록 종교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을지라도 학교를 살리 기 위해서는 참배에 응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도 있었다.
이처럼 선교사들 중에서는 남북 장로교 선교부와 호주장로교 선교부가 대체적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폐쇄로 나아갔는데 비 해, 카나다 선교부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이고 학교 경영을 계속해 나갔다. 선교사들은 치외법권을 가지 고 있었으므로 일본정부는 그들을 강제적으로 참배시킬 수는 없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신사참배문제에 대한 대처는 자신의 신 앙의 문제라기 보다는 학교폐쇄냐 학교유지냐의 문제였을 뿐이다. 선교지 교회인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문제를 신앙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 로 파악했는데, 선교사들은 한갓 학교 존립여부로만 이를 파악한 것이다.
① 신사참배로 인한 고신파의 분열 : 해방이 되면서 신사참배 문제는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1945 년 9월 18일 재건 노회가 열리고 2개항의 자숙 안을 정했다. 그러나 곧 기성교회 인 사들과 주남선 목사 등의 출옥성도와의 마찰이 야기되었는데, 10여명의 기성교회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이미 우리 양심 으로 해결한 것이며, 지금에 해방이 되었다하여 죄로 운운함은 비양심적이다" 라고 주장했고, 1946 년 12월 3일 진주에서 열린 제48회 노회에서는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의 논쟁까지 빚어내어 말썽 을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는 초기 기독교 시대에 있어 로마의 탄압에 의한 배교자문제 처리로 인한 교회의 분열과 일맥상통한 다 할 수 있다.
해방 전 신사참배 문제로 옥고를 치른 성도들은 기왕에 신사참배를 했던 교회를 향하여 통회 자복 근신을 요청하였고, 그 참회 의 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각 곳에서 기존교회에 대한 반발정죄가 잇달았다. 이렇게 해서 이북에 재건파, 복구파의 교회가 세워졌 고, 남한에서는 박윤선 목사의 고려신학교가 세워지면서 세칭 고신파 장로교의 분열이 표면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피차의 공방과정에 서 상대방을 공산당으로 중상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1951년 장로교회는, 사변으로 단속된 총회의 속회에 서 고신파를 정식 단죄하였고, 고신파는 그 나름대로 총회를 향해 용공을 비수처럼 덮어 씌웠고 신사참배문제로 끝내 저항했던 이들 고 신파는 자신들을 한국교회 정통으로 자처하게 된다.
② 신학사상 차이로 인한 기장과 예장의 분열 : 선교 개시이래 한국 개신교는 그 신학사상과 신앙적 태도에서 보수적 입장 을 지켜왔다. 이는 한국에 개신교회를 전래시킨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에 기인하고 있었으며, 또한 한국교회 지도자들(특히 장로 교) 이 세계적인 여러 신학적 조류에 접할 기회가 적었다는 데에도 그 이류를 찾을 수 있다. 더구나 1920년대로부 터 한국신학을 대표해온 박형룡 박사는 미국유학시절에도 근대 보수 신학의 대표 메이천에게서 사사한 신학자로서, 귀국이후 한국 신학 의 객척자의 구실 등, 모두가 한국 신학을 더욱 한 방향에 고착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진출한 몇몇 개신교파 (이중캐 나다 장로회도 포함된) 의 신학적 입장은 자못 자유로왔고, 그 소속 선교사들에 의해 훈련된 한국인 지도자들도 그러한 경향을 가졌 다.
뿐만 아니라 이미 1930년대 이후 한국의 새로운 신학사조 도입의 주체가 되는 김재준 박사를 비롯한 이들 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그 신학적 갈등을 엿보이기 시작했고, 특히 1935년의 단권 성경 주석 문제로 신학적 갈 등은 표면화된다. 이 사건은 감리교 류형기 목사의 편집발행 『아빙돈 단권주석』이 새로운 신학사상에 입각해 있다는 이유로 그 집필 자로 참여한 장로교 인사인 김재준, 송창근, 한경직, 채필근에 대한 문제이었다. 채필근은 즉시 사과하였으나 나머지 세 사람은 자신 들의 잘못 없음을 별도로 설명하였고, 장로교총회는 동 주석의 열람, 참고를 금지한 사건이다.
자유로운 신학의 발전을 추구하였던 일군은, 평양신학교가 무기휴학하자 1940년 4 월 19일 숭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를 개교했다. 해방 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조선신학교는 49년 남 부총회의 직영의 허락을 받았다. 그 후 새로운 신학사상을 나타냈다. 김재준 교수는 마음놓고 보수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비판 적 성경연구와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는 선교사들의 남북장로교의 신학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1947년 김재준 목사 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학생 51명이 그를 자유주의라고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장로교는 흥분했고, 박형룡 박사 는 진정서를 검토한 후 그가 한국교회를 능욕한다고 판단했다. 이는 김재준은 문제가 신학적 문제만은 아님을 직감하고 보수주의에서 이 탈을 결심하였다. 한편 총회가 제출한 조선신학교에 대한 개혁안이 수포로 돌아가자 신학대책위원회에서 박형룡목사를 중심으로 장로교 신 학교를 세웠다. 한 교단에 2개 신학교의 모순이 있자 합동 7원칙 안을 내놓았으나 조선 신학교 측 의 수락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 후 1952년 37차 총회 때는 김재준 교수를 파문 조선신학교의 직 영취소를 재인식시켰다. 조직신학교는 불복하고 한국 신학대학교로 출발했고, 1953년 총회를 개최하여 교단을 대한 기 독교장로회라 하였다.
③ 에큐메니칼(교회 연합) 운동으로 인한 분열
1. 통합 측과 합동 측의 분열 : 6. 25후 일치의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있을 때 장로교 의 3번째 분열이 1959년에 일어났다. 복음주의 연합회(NAE)라는 단체는 개인구원의 완성을 강조 한 단체이다. NAE는 보수신학과 신앙의 순수성을 주장하면서 W.C.C를 용공이라 하여 탈퇴할 것 을 주장하였다. 제44차 총회서 정회서 거듭하는 혼란 속에 대전에서 서울에 올라온 총대들은 승동 교회에서 1959 년 합동총회를 결성했다. 이것은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영구탈퇴를 선언했고, W.C.C를 지지하는 총대들 은 1960년 서울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개최했다. 일치를 위해 W.C.C서 잠정 탈퇴를 했으나 거절당했 다. 또한 박형룡 박사의 신학기금 유용을 두고 양측간의 대립도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연동교회 총회를 오늘 의 '장로회 신학대학'(총회 측) 승동교회 총회 측을 오늘날 '총회신학대학' (합동 측)으로 구분된다. 분열의 자기 신앙노선을 내 세우려는 주도권의 싸움이요, 신학보다는 그 방법론 때문에 다수의 분열을 보여주는 오점을 낳았다.
2. 기성과 예성의 분열 : 한국성결교회는 해방이후 한국교회협의회(N.C.C)에 가입하였으며, 1955 년 10회 총회 때 NAE에도 가입을 결의하여, 양 기관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로 인한 양측주장의 이 념논쟁과 상대방의 공격의 양상으로 심각성이 드러나 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양 기관의 탈퇴문제를 가지고 15회 총회 에서 격론을 벌이다가 1년 유보 안이 43대 40으로 통과된 후 16 회 총회에서 재론하다가 부결되자, 탈퇴를 주장하던 인사들이 회의에서 퇴장하였으며 1961년 서울 무교동에 있는 여 관에서 한보순 목사를 중심으로 '복음 진리수호 동지회' 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전개되자 총회에서는 분열되면서까지 연합기관에 가입하고 있을 필요성이 없음을 인식하고 임시총회를 열어 두 기관 의 탈퇴를 가결하였으나, 보수 측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1961년 부산에서 국제교회연합회(I.C.C.C)에 가입 결의 를 하였으며, 1962년 4월에 자체적으로 총회를 열고 교단명칭을 예수교대한성결교회라고 칭하였다.(예 성) 이분열은 외부단체와의 연계성에서 비롯되었으나 보다 중요한 것은 보수파의 편협하고 과격한 행동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볼 수 있 겠다. 이로써 성결교회가 이 땅에서 시작된 지 55년 만에 두개의 성결교회가 나타나는 현상이 벌어졌다.
성결교회가 분열된 후, 기성 측의 노력과 온건파 인사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1965년에 타협이 이루어지게 되었 다. 1965년 7월에 이명직 목사가 전국성결교회 신도들에게 합동을 권유하는 메세지를 보냄으로서 합동 운동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각기 총회를 열고 합동하기로 가결한 후, 바로 그 날(1965년 7 월 23일) 합동총회를 열어 역사적인 합동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예성측의 일부 강경 인사들은 끝까지 고집을 부 려 잔류케 되었다. 그 후 73년 6월에 또다시 많은 교회가 예성을 탈퇴하고(190 교 회 중 112교회) 기성과 합동하였다.
④ 교회분열을 틈탄 사이비 기독교의 등장 : 38선과 6.25라는 민족사의 분열이 치닷 는 날, 화해와 사랑 그리고 통일을 제시해 주어야 할 교회가 또 처절하게 이런 구실, 저런 면에서 갈기갈기 분열하였다. 이러한 혼 란기와 정서적 불안정의 틈을 타고 솟아나는 다양한 형태의 종파저그 부흥회적, 천년왕극적 메세지들이 있었다. 허탈과 비탄 속에 서 그 정서적 신령한 격동을 갈망하는 교인들 틈에 이전후의 이상한 경건은 줄기찬 발전의 토양을 획득할 수 있었다. 박태선 장로 의 전도관과 그의 환상적 신앙 공동체로서의 천년성, 문선명의 통일교, 기타 수도원 형식의 헤아릴 수 없는 부흥적 열망 신앙 이 그 주도를 맡고 있었다. 그 여운이 아직 생기 있게 계속되고 있다.
II. 분열의 배경
⑴ 국내적 배경 : 앞에서 살펴본 한국교회의 분열사를 이 장에서는 국내적 배경과 국외적 배경으로 나누어 분열의 배경을 살피고자 한다.
1. 지역성 : 한국교회의 분열에 있어 지역적 특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할 수 있다. 여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 국시대의 정치적 분열유산이 아직도 작용하여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에 의 한 지리적 나뉨이 역사, 정치의 나뉨까지 되었다. 이것 은 교회의 분열과 상관관계를 갖는다. 긍정적 의미에서 출발한 선교지역 분할정책이 이것과 연결된 것이다. 하나된 교회와 하나된 민족 을 지향하는 시점에서 우리가 지역의식은 강하게 갖되 정치인들에게 악용되는 이른바 지역감정은 버려야 할 것이다.
2. 붕당성 : 조선조 사회의 멸망원인을 볼 것 같으면 꼭 붕당정치가 거론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치 않고 무조건 배척하 는 심성이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붕당성이든 보편적 세계현상이지 우리만의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리하여 이를 긍정 적 의미에서 오늘의 정당정치로 이해할 수도 있다.
3. 유교의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 : 조선조 통치의 이데올로기이자 국가종교인 유교는, 종교특유의 배다성을 갖는다. 우리 는 이 배타성의 뿌리를 맹자에게서 찾을 수 있다. 맹자의 무군무부의 논리는 결과적으로 조선조 사회에 이질적인 것에 대한 포용력보 다, 배타성에 의한 분열의 악습을 안겨 주었다. 즉 자신들만이 공, 맹의 정통성을 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해석을, 다른 사상 을, 다른 종교를, 배척하게 되었다.
⑵ 국외적 배경 : 한국 교회가 분열된 근원적 요인은 실상 국내적 배경에 의한 한국인의 다른 것에의 무의식적 배타 의식보 다,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이라는 국외적 배경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 소고에서는 미국교회의 교파 중심저인 선교, 선교지 분 활 정책 나아가 신학적 상이성을 다룬다.
1. 미국 교회의 교파 중심적 선교 : 조선조에 먼저 선교를 했던 서구형 교회는 당시 천주교 박해 및 척사의 상황에서 도입 될 가능성이 희박했고, 시각적으로 서구 열강에 대한 단호한 쇄국정책 때문에 지속적, 적극적 선교활동을 할 수 없어서 한국 정착에 는 실패했다. 1882년 한미수호 통상으로 문호가 개방되고 당시 미국 내에 선교부흥운동의 열기가 치솟는 가운데 미 국 선교부는 한국선교를 결정한다. 한국기독교회 선교역사의 첫 장을 찬란하게 장식한 선교사들은 미국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나라는 원래 교파적 신앙공동체의 이주에 의해 형성된 국가로 건국 초기부터 헌법상 정교가 분리되어 국교 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파적 형태의 기독교로 발전한 대표적 국가였다. 이런 교파적 교회는 하나의 교리로서의 보편성에 대한 이 해와 교회의 교구적 일치에 대한 관념이 희박한 경향이 있으므로 한국교회에 분열의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한국교회 는 미국의 각이한 교파들의 선교운동에 의해 복음이 전래되었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여러 교파와 교파들로 나누어 졌고 미국 의 상황에 따라 한국교회도 분열될 수밖에 없는 상관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2. 선교지 분활 정책 : 한국에서 활동을 하던 여러 교파 소속의 젊은 선교사들은 경험 미숙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 에 부딪히자 그 대안을 모색한다. 그 모색의 일환으로 이들은 1890년 중국지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존 네비우스 (John Nevius)목사 부처를 초빙한다. 네비우스는 '독립 자존적인 토착 교회수립'을 목표로 본토 전도인들에 게 드는 경제적 지출을 최대한 줄여 선교비를 본토 교인들이 스스로 부담하는 선교방법을 내세웠다. 이것이 네비우스 플랜이다.
다음으로 이 원칙을 한국교횡 적용할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 1893년 '장로회정치를 쓰는 미센 공의회'에 서 내세운 선교지역의 분할 정책이다. 이것은 선교기간이 여럿이기 때문에 노력을 중복하거나 필요 없는 경쟁을 하지 않도록 연합적으 로 분할하는 프로그램이다. 연합해서 피차 협조하려면, 하는 일과 지역을 분할해야만 할 때가 있다. 이렇게 해서 남장로교는 전라도 와 충청도, 호주장로교는 경상남도, 캐나다 선교회는 함경도, 북장로교는 평안도, 황해도및 경상북도를 분할하여 받았다.
한국이라는 좁은 땅에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이 정책은 교파단위 선교로 생긴 분열의 잠재적 가능성에 가세하 는 결과가 된 것이다. 즉 고려파는 해방이후 호주 장로교 선교지역이었던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1952년에 는 기장이 분립했는데, 이 교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함경도 인사들로서 함경도 지역은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지역이었 다. 1960년대를 전후한 합동과 통합의 분열은 남,북장로교 선교지역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같이 분할된 선교지역 은 각 교파 선교부의 영향 하에 있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지역적 특성과 결부되어 교회의 일치가 어려워졌다.
3. 신학적 상이성 : 한국교회는 1930년대까지는 신학적인 문제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보수주의 신학의 입장 에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를 지나면서 보수주의 신앙이 공격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성경관이나 신학적 견해 에 분명한 차이가 나타났는데, 다음의 동기와 영향이 있었다. 첫째로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서 유학한 인사 중에 자유주 의적 신학을 연구하거나 그 신학의 영향을 받은 인사가 귀국하여 집필히나 신학활동을 한 것이고, 둘째는 미국 교회의 신학적 논쟁 과 그 여파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북 장로교회 프린스턴 신학교의 신학적인 자유주의화 경향은 선교의 상관관계를 볼 때 한국에 영향 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나가는 말
한국 기독교회는 1세기도 안되는 짧은 선교 역사 속에서 세계교회가 놀랄 엄청난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하 나됨을 이룩하지 못한 분열의 교회였다. 분열의 배경에는 첫째, 역사적 정치적 배경이 결합된 지역성, 둘째로는 정치적 붕당성, 그리 고 셋째 유교의 배타성이 있다. 국외적 배경에는 첫째 미국교회의 교파중심적 선교가 이 땅에 행해졌다는 것, 들째 선교지 분할 정 책, 끝으로 신학적 상이성을 들수 있다. 분열의 원인으로는 선교사들의 합력부족, 이런 선교사들의 편협된 직접적인 사간으로는 신사참 배 문제를 들 수 있겠다. 그리고 보수주의자들의 자유주의및 사회참여 신학에 대한 절대적 배타감(역도 마찬가지)과 서로의 에큐메니 컬 운동에의 몰이해 등이 있다.
이러한 분열의 배경과 원인으로 한국 교회는 분열의 아픔을 겪는다. 신사참배 문제는 교회분열의 핵심사건이었 다. 신사참배 문제로 끝내 저항했던 이들은 고러파로 분리해 나가되 한국교회전통을 자처헸으며, 자유로운 신학의 발전을 추구하던 일군 은 조선신학교(현 한신)를 중심해서 한국적 신학과 에큐메니칼 신학을 표방하면서 분립하여 역시 법통을 자처하였다. 뒤이어 감라교 와 성결교, 침례교의 여러 교파들이 대개 같은 심리적 갈등의 길을 경유하여 분열하였던 것이다.
 B. 우리의 제안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외모로 하나, 참으 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립보 서 1: 15-18)
한국 교회분열의 문제를 부정적 분위기에서 다룬 듯하다. 그러나 위의 사도 바울의 지적처럼, 교회의 분열로 분 립된 교회가 자기 교파교회의 성장을 힘썼고 그것은 총체적으로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을 가져온 긍정적 측면도 있다. 이런 긍정적 측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열을 비판하는 것은 더나은 한국교회의 미래상을 위한 겻이다. 지금 경제학이나 사회복지학에서는 성장과 안정 (정의로운 분배 구현)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우리 역시 이러한 백락에 서서 교회의 분열과 통합을 살펴 볼 필요가 있 다.
이제 더 나은 미래의 한국교회상을 장립하기 위한 의식의 전환을 제시해 본다. 첫째 교회의 통일성는 '다양 성 속의 통일성'(Unity amongst diversity)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통일성 이 다양성이 없는 획일적인 것이 되어 버리면, 이 통일은 얼마 안가 또 다른 분열을 낳게 됨을 우리는 세계교회사를 통해 잘 알 고 있다. 둘째 이 통일작업을 위해 기독인들의 철저한 회개가 있어아 하겠다. 해방후 반민투위의 실패는 민족정기의 말살이라는 결과 를 가져왔고 오늘의 혼란한 장치 상황도 그 결과라 할수 있다. 신사참배문제로 인한 쇼회의 분열도 걑은 맥락에서 볼수 있다. 특 히 성직자들은 교회 분열의 책임을 철저히 뉘우치고(悔) 교회의 일치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앞설일이다(改). 셋째 이를 위한 구체 적 실천과업으로서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사회정의를,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 면 각 진영이 이것들에 대한 강조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이러할때, 서로의 '다름'을 배타시했던 풍조가 없어지고, 서로 의 '같은점'을 오 잘 알수 있고, '다름'을 유기체적 조화로 볼수 있을 것이다. 넷째 공통분모가 되는 한국 신학을 형성하는 것이 다.
이러한 의식의 전환에 따른 구체적 실천작업을 생각해본다.
첫째 선교를 통한 각교파의 협력방안이다. 한국교회의 분열의 원인 중 하나가 교파 중심적 선교로 인한 것인데 오늘알 선교 하는 교회가된 한국교회가 선교지 교회에서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있다. 선교지 교회가 하나된 교회를 요청하고, 우리 한국 교회안에서 도 선교를 위한 교회의 일치를 주장하는 교회들도 많아졌다. 이는 우리의 불일치가 우리가 전하는 화해의 복음을 손상시키듯이 우리 의 하나됨은 우리의 증거를 더욱 힘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둘째 지역교회안에서의 교파 목회자들의 모임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다. 밑에서부터의 이러한 화합이 이루어질때 교파간의 협동사업도 강화될 것이다.
세째 주일 오후 예배와 수요 기도회 그리고 새벽기도회를 성도가 거주하는 가까운 다른 교파 교회에 참석하도록 분위기를 형 성해 보는 것이다. 물론 본교회가 지역적으로 가까운 사람은 본교회를 참석한다. 그리고 에배후 친교의 시간을 나누면 지역 공동 체 의식으로 하나된 터에 에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각 교파 성도가 하나되니 시도해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네째 사회정의 문제에 교회가 하나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3.1운동시 하나된 목소리를 낸 전통을 오늘 에 되살리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 통일을 위한 우리의 노력이 게속될 때 다양성 가운데서 통일된 교회가 이루어질 것이고, 분단된 조 국 통일의 원동력을 이룰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合久必分이요 合久必合이다. 하나된 교회를 요청하신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글로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 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함이로소이다(요17:22-23)"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4) 우리 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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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한반도의 중심 수도 서울의 야경은 붉은 십자가로 대표된다. 이 십자가의 장관을 바라보면서 누구나 느끼는 감정은 교회의 성장 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교회의 성장에 대해 불신자와 신자의 생각은 다르다. 불신자는 경이로움을 느끼면서도 너무 무질서하다 는 것을 생각한다. 신자는 '하나님의 도성'의 확장됨에 부듯함을 느끼면서도 천주교를 고려하여 왜 우리(개신교) 교회는 하나되지 못 할까 하는 물음을 제기한다.
한국 교회는 선교 1세기를 지나고 2세기를 향한 현 시점에서 서구교회의 사양화에 반비례하여 놀 라운 양적 성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함 못지 않게, 한국교회의 분열과 무질서 문제 나아가 사회 정의 (Social Justice)에의 무관심했던 문제를 진지하게 반성하고 지속적인 질적, 양적 성장을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소고는 한국 개신교의 분열과 분열 배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분열에서의 통일로 나아갈 수 있는 나름대로의 답변 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에 한국 3대 교단을 두루 살펴야 하겠지만, 감리교와 성결교의 분열사는 장로교 분열사의 흐름 을 벗어나지 않으므로 본 소고에서는 장로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I. 교회의 분열
⑴ 초기 선교사들의 갈등(알렌과 언더우드)
한국선교사들은 두 진영으로 나뉘어졌다. 그것은 명분사의 교파적 교리의 경계선까지 관통해서 알렌의 장로교와 언더우드, 아펜젤 러, 스크랜톤의 "감리교적" 감리교, 둘로 분할된 것이다. 알렌은 직접적인 설교나 복음의 전파는 우선 왕명이 있어서 허락이 날 때 까지 보류하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정부를 현대 문명의 기관으로 가르치고 지도하는 것이 훨씬 면적이 넓 은 공헌을 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한국 왕실 선교에 주력하였다.
그런데 언더우드는 거리나 지방으로 직접 순회 전도를 나갔다. 물론 감리교 선교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러다 가 1888년 종교 금령이 내리자 알렌은 순회전도에 나간 언더우드를 서울에 소환하고, "이 금령의 발표는 경거망동 한 순회전도가 그 기본적 원인이 되어 있다" 고 반박하면서, 선교나 전도에서 손떼고 의료사업과 교육에만 당분간 치중할 것을 종용했 다. 이에 대해 언더우드를 비롯한 순회 전도사들은, 알렌은 선교사도 아니라며 공박한다. 의견 충돌이 처음 표면화된 데 불과했으 나 한국교회의 분열을 상징하는 첫 사건이 되었다.
⑵ 소종파의 태동
일제의 억압이라는 암울한 현실에서, 현실에 절망한 민중들은 종교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 인간의 원초적 기 복욕구와 민족의 구원이라는 열망이 결합되어 소종파가 난립하게 된다. 소종파의 난립은 교회의 분열이라는 큰 흐름의 지류이므로, 여기 서는 간단히 해방전의 소종파 유형만 살피기로 한다. 교리적 소종파 유형에는 김장호의 자유주의적 성경해석으로 인한 것과, 성서본 문 비평과 문학적 역사적 연구의 필요성을 제시한 양주삼의 성경고등비평으로 태동한 것이 있다. 반선교사적 소종파 유형에는 반선교 사 기치를 둔 최중진계와 이만집계가 있다. 반선교사와 반교권의 기치가 일제하에서 "조선적" 주체성을 외쳤으되 친일한다는 역학은 비 극적이었다. 반선교사적 정책으로 한미관계를 약화시키는 일본종교정책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반교권적 소종파 유형에는 변성옥계의 조선기독교회와 하나님의 교회 사건이 있다. 지역 및 진보적 소종파 유형에는 토착화에 관 심을 보인 신흥우의 적극 신앙단이 있다. 무교회주의는 일본의 복음교회가 대표적이다. 환상적 신비주의의 소종파 유형에는 이용도와 백 남주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소종파 난립은 반선교사 운동과 교권적, 지역감정적 요소등이 복합되면서 초기의 종파분열이 확대되기도 했다. 실지로는 신앙형태의 다름인데, 신학적 이해 부족으로 분열을 가속화되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⑶ 해방 이후의 교회 분열
해방전 일제치하에서의 신사참배에 대한 조선기독교계의 대응양상은 각 교단마다 달랐다. 특히 선교부가 신사참배문제로 선교부 설 립 학교를 폐쇄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로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이다. 당시 장로교 총회장 이었던 이인식은 총독부 교섭 위원을 통해 기독교 학생들의 신사참배면제를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총독부측은 아무리 교회경영의 학교들이라 하더라도 조선총독 의 교육정책에 따라 신사참배를 해야만 한다고 강경하게 대답한다. 그래서 장로교 선교사들은 서로 모여 이 문제를 상의하였고, 대체적 으로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므로 신사참배를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학교의 존폐문제가 달렸으므로 각 학 교 이사들은 입장을 달리했다. 즉시 철저히 거부하자는 입장과 신사참배 행위에 비록 종교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을지라도 학교를 살리 기 위해서는 참배에 응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도 있었다.
이처럼 선교사들 중에서는 남북 장로교 선교부와 호주장로교 선교부가 대체적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폐쇄로 나아갔는데 비 해, 카나다 선교부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이고 학교 경영을 계속해 나갔다. 선교사들은 치외법권을 가지 고 있었으므로 일본정부는 그들을 강제적으로 참배시킬 수는 없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신사참배문제에 대한 대처는 자신의 신 앙의 문제라기 보다는 학교폐쇄냐 학교유지냐의 문제였을 뿐이다. 선교지 교회인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문제를 신앙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 로 파악했는데, 선교사들은 한갓 학교 존립여부로만 이를 파악한 것이다.
① 신사참배로 인한 고신파의 분열 : 해방이 되면서 신사참배 문제는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1945 년 9월 18일 재건 노회가 열리고 2개항의 자숙 안을 정했다. 그러나 곧 기성교회 인 사들과 주남선 목사 등의 출옥성도와의 마찰이 야기되었는데, 10여명의 기성교회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이미 우리 양심 으로 해결한 것이며, 지금에 해방이 되었다하여 죄로 운운함은 비양심적이다" 라고 주장했고, 1946 년 12월 3일 진주에서 열린 제48회 노회에서는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의 논쟁까지 빚어내어 말썽 을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는 초기 기독교 시대에 있어 로마의 탄압에 의한 배교자문제 처리로 인한 교회의 분열과 일맥상통한 다 할 수 있다.
해방 전 신사참배 문제로 옥고를 치른 성도들은 기왕에 신사참배를 했던 교회를 향하여 통회 자복 근신을 요청하였고, 그 참회 의 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각 곳에서 기존교회에 대한 반발정죄가 잇달았다. 이렇게 해서 이북에 재건파, 복구파의 교회가 세워졌 고, 남한에서는 박윤선 목사의 고려신학교가 세워지면서 세칭 고신파 장로교의 분열이 표면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피차의 공방과정에 서 상대방을 공산당으로 중상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1951년 장로교회는, 사변으로 단속된 총회의 속회에 서 고신파를 정식 단죄하였고, 고신파는 그 나름대로 총회를 향해 용공을 비수처럼 덮어 씌웠고 신사참배문제로 끝내 저항했던 이들 고 신파는 자신들을 한국교회 정통으로 자처하게 된다.
② 신학사상 차이로 인한 기장과 예장의 분열 : 선교 개시이래 한국 개신교는 그 신학사상과 신앙적 태도에서 보수적 입장 을 지켜왔다. 이는 한국에 개신교회를 전래시킨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에 기인하고 있었으며, 또한 한국교회 지도자들(특히 장로 교) 이 세계적인 여러 신학적 조류에 접할 기회가 적었다는 데에도 그 이류를 찾을 수 있다. 더구나 1920년대로부 터 한국신학을 대표해온 박형룡 박사는 미국유학시절에도 근대 보수 신학의 대표 메이천에게서 사사한 신학자로서, 귀국이후 한국 신학 의 객척자의 구실 등, 모두가 한국 신학을 더욱 한 방향에 고착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진출한 몇몇 개신교파 (이중캐 나다 장로회도 포함된) 의 신학적 입장은 자못 자유로왔고, 그 소속 선교사들에 의해 훈련된 한국인 지도자들도 그러한 경향을 가졌 다.
뿐만 아니라 이미 1930년대 이후 한국의 새로운 신학사조 도입의 주체가 되는 김재준 박사를 비롯한 이들 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그 신학적 갈등을 엿보이기 시작했고, 특히 1935년의 단권 성경 주석 문제로 신학적 갈 등은 표면화된다. 이 사건은 감리교 류형기 목사의 편집발행 『아빙돈 단권주석』이 새로운 신학사상에 입각해 있다는 이유로 그 집필 자로 참여한 장로교 인사인 김재준, 송창근, 한경직, 채필근에 대한 문제이었다. 채필근은 즉시 사과하였으나 나머지 세 사람은 자신 들의 잘못 없음을 별도로 설명하였고, 장로교총회는 동 주석의 열람, 참고를 금지한 사건이다.
자유로운 신학의 발전을 추구하였던 일군은, 평양신학교가 무기휴학하자 1940년 4 월 19일 숭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를 개교했다. 해방 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조선신학교는 49년 남 부총회의 직영의 허락을 받았다. 그 후 새로운 신학사상을 나타냈다. 김재준 교수는 마음놓고 보수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비판 적 성경연구와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는 선교사들의 남북장로교의 신학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1947년 김재준 목사 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학생 51명이 그를 자유주의라고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장로교는 흥분했고, 박형룡 박사 는 진정서를 검토한 후 그가 한국교회를 능욕한다고 판단했다. 이는 김재준은 문제가 신학적 문제만은 아님을 직감하고 보수주의에서 이 탈을 결심하였다. 한편 총회가 제출한 조선신학교에 대한 개혁안이 수포로 돌아가자 신학대책위원회에서 박형룡목사를 중심으로 장로교 신 학교를 세웠다. 한 교단에 2개 신학교의 모순이 있자 합동 7원칙 안을 내놓았으나 조선 신학교 측 의 수락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 후 1952년 37차 총회 때는 김재준 교수를 파문 조선신학교의 직 영취소를 재인식시켰다. 조직신학교는 불복하고 한국 신학대학교로 출발했고, 1953년 총회를 개최하여 교단을 대한 기 독교장로회라 하였다.
③ 에큐메니칼(교회 연합) 운동으로 인한 분열
1. 통합 측과 합동 측의 분열 : 6. 25후 일치의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있을 때 장로교 의 3번째 분열이 1959년에 일어났다. 복음주의 연합회(NAE)라는 단체는 개인구원의 완성을 강조 한 단체이다. NAE는 보수신학과 신앙의 순수성을 주장하면서 W.C.C를 용공이라 하여 탈퇴할 것 을 주장하였다. 제44차 총회서 정회서 거듭하는 혼란 속에 대전에서 서울에 올라온 총대들은 승동 교회에서 1959 년 합동총회를 결성했다. 이것은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영구탈퇴를 선언했고, W.C.C를 지지하는 총대들 은 1960년 서울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개최했다. 일치를 위해 W.C.C서 잠정 탈퇴를 했으나 거절당했 다. 또한 박형룡 박사의 신학기금 유용을 두고 양측간의 대립도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연동교회 총회를 오늘 의 '장로회 신학대학'(총회 측) 승동교회 총회 측을 오늘날 '총회신학대학' (합동 측)으로 구분된다. 분열의 자기 신앙노선을 내 세우려는 주도권의 싸움이요, 신학보다는 그 방법론 때문에 다수의 분열을 보여주는 오점을 낳았다.
2. 기성과 예성의 분열 : 한국성결교회는 해방이후 한국교회협의회(N.C.C)에 가입하였으며, 1955 년 10회 총회 때 NAE에도 가입을 결의하여, 양 기관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로 인한 양측주장의 이 념논쟁과 상대방의 공격의 양상으로 심각성이 드러나 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양 기관의 탈퇴문제를 가지고 15회 총회 에서 격론을 벌이다가 1년 유보 안이 43대 40으로 통과된 후 16 회 총회에서 재론하다가 부결되자, 탈퇴를 주장하던 인사들이 회의에서 퇴장하였으며 1961년 서울 무교동에 있는 여 관에서 한보순 목사를 중심으로 '복음 진리수호 동지회' 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전개되자 총회에서는 분열되면서까지 연합기관에 가입하고 있을 필요성이 없음을 인식하고 임시총회를 열어 두 기관 의 탈퇴를 가결하였으나, 보수 측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1961년 부산에서 국제교회연합회(I.C.C.C)에 가입 결의 를 하였으며, 1962년 4월에 자체적으로 총회를 열고 교단명칭을 예수교대한성결교회라고 칭하였다.(예 성) 이분열은 외부단체와의 연계성에서 비롯되었으나 보다 중요한 것은 보수파의 편협하고 과격한 행동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볼 수 있 겠다. 이로써 성결교회가 이 땅에서 시작된 지 55년 만에 두개의 성결교회가 나타나는 현상이 벌어졌다.
성결교회가 분열된 후, 기성 측의 노력과 온건파 인사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1965년에 타협이 이루어지게 되었 다. 1965년 7월에 이명직 목사가 전국성결교회 신도들에게 합동을 권유하는 메세지를 보냄으로서 합동 운동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각기 총회를 열고 합동하기로 가결한 후, 바로 그 날(1965년 7 월 23일) 합동총회를 열어 역사적인 합동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예성측의 일부 강경 인사들은 끝까지 고집을 부 려 잔류케 되었다. 그 후 73년 6월에 또다시 많은 교회가 예성을 탈퇴하고(190 교 회 중 112교회) 기성과 합동하였다.
④ 교회분열을 틈탄 사이비 기독교의 등장 : 38선과 6.25라는 민족사의 분열이 치닷 는 날, 화해와 사랑 그리고 통일을 제시해 주어야 할 교회가 또 처절하게 이런 구실, 저런 면에서 갈기갈기 분열하였다. 이러한 혼 란기와 정서적 불안정의 틈을 타고 솟아나는 다양한 형태의 종파저그 부흥회적, 천년왕극적 메세지들이 있었다. 허탈과 비탄 속에 서 그 정서적 신령한 격동을 갈망하는 교인들 틈에 이전후의 이상한 경건은 줄기찬 발전의 토양을 획득할 수 있었다. 박태선 장로 의 전도관과 그의 환상적 신앙 공동체로서의 천년성, 문선명의 통일교, 기타 수도원 형식의 헤아릴 수 없는 부흥적 열망 신앙 이 그 주도를 맡고 있었다. 그 여운이 아직 생기 있게 계속되고 있다.
II. 분열의 배경
⑴ 국내적 배경 : 앞에서 살펴본 한국교회의 분열사를 이 장에서는 국내적 배경과 국외적 배경으로 나누어 분열의 배경을 살피고자 한다.
1. 지역성 : 한국교회의 분열에 있어 지역적 특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할 수 있다. 여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 국시대의 정치적 분열유산이 아직도 작용하여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에 의 한 지리적 나뉨이 역사, 정치의 나뉨까지 되었다. 이것 은 교회의 분열과 상관관계를 갖는다. 긍정적 의미에서 출발한 선교지역 분할정책이 이것과 연결된 것이다. 하나된 교회와 하나된 민족 을 지향하는 시점에서 우리가 지역의식은 강하게 갖되 정치인들에게 악용되는 이른바 지역감정은 버려야 할 것이다.
2. 붕당성 : 조선조 사회의 멸망원인을 볼 것 같으면 꼭 붕당정치가 거론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치 않고 무조건 배척하 는 심성이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 붕당성이든 보편적 세계현상이지 우리만의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리하여 이를 긍정 적 의미에서 오늘의 정당정치로 이해할 수도 있다.
3. 유교의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 : 조선조 통치의 이데올로기이자 국가종교인 유교는, 종교특유의 배다성을 갖는다. 우리 는 이 배타성의 뿌리를 맹자에게서 찾을 수 있다. 맹자의 무군무부의 논리는 결과적으로 조선조 사회에 이질적인 것에 대한 포용력보 다, 배타성에 의한 분열의 악습을 안겨 주었다. 즉 자신들만이 공, 맹의 정통성을 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해석을, 다른 사상 을, 다른 종교를, 배척하게 되었다.
⑵ 국외적 배경 : 한국 교회가 분열된 근원적 요인은 실상 국내적 배경에 의한 한국인의 다른 것에의 무의식적 배타 의식보 다,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이라는 국외적 배경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 소고에서는 미국교회의 교파 중심저인 선교, 선교지 분 활 정책 나아가 신학적 상이성을 다룬다.
1. 미국 교회의 교파 중심적 선교 : 조선조에 먼저 선교를 했던 서구형 교회는 당시 천주교 박해 및 척사의 상황에서 도입 될 가능성이 희박했고, 시각적으로 서구 열강에 대한 단호한 쇄국정책 때문에 지속적, 적극적 선교활동을 할 수 없어서 한국 정착에 는 실패했다. 1882년 한미수호 통상으로 문호가 개방되고 당시 미국 내에 선교부흥운동의 열기가 치솟는 가운데 미 국 선교부는 한국선교를 결정한다. 한국기독교회 선교역사의 첫 장을 찬란하게 장식한 선교사들은 미국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나라는 원래 교파적 신앙공동체의 이주에 의해 형성된 국가로 건국 초기부터 헌법상 정교가 분리되어 국교 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파적 형태의 기독교로 발전한 대표적 국가였다. 이런 교파적 교회는 하나의 교리로서의 보편성에 대한 이 해와 교회의 교구적 일치에 대한 관념이 희박한 경향이 있으므로 한국교회에 분열의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한국교회 는 미국의 각이한 교파들의 선교운동에 의해 복음이 전래되었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여러 교파와 교파들로 나누어 졌고 미국 의 상황에 따라 한국교회도 분열될 수밖에 없는 상관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2. 선교지 분활 정책 : 한국에서 활동을 하던 여러 교파 소속의 젊은 선교사들은 경험 미숙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 에 부딪히자 그 대안을 모색한다. 그 모색의 일환으로 이들은 1890년 중국지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존 네비우스 (John Nevius)목사 부처를 초빙한다. 네비우스는 '독립 자존적인 토착 교회수립'을 목표로 본토 전도인들에 게 드는 경제적 지출을 최대한 줄여 선교비를 본토 교인들이 스스로 부담하는 선교방법을 내세웠다. 이것이 네비우스 플랜이다.
다음으로 이 원칙을 한국교횡 적용할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 1893년 '장로회정치를 쓰는 미센 공의회'에 서 내세운 선교지역의 분할 정책이다. 이것은 선교기간이 여럿이기 때문에 노력을 중복하거나 필요 없는 경쟁을 하지 않도록 연합적으 로 분할하는 프로그램이다. 연합해서 피차 협조하려면, 하는 일과 지역을 분할해야만 할 때가 있다. 이렇게 해서 남장로교는 전라도 와 충청도, 호주장로교는 경상남도, 캐나다 선교회는 함경도, 북장로교는 평안도, 황해도및 경상북도를 분할하여 받았다.
한국이라는 좁은 땅에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이 정책은 교파단위 선교로 생긴 분열의 잠재적 가능성에 가세하 는 결과가 된 것이다. 즉 고려파는 해방이후 호주 장로교 선교지역이었던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1952년에 는 기장이 분립했는데, 이 교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함경도 인사들로서 함경도 지역은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지역이었 다. 1960년대를 전후한 합동과 통합의 분열은 남,북장로교 선교지역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같이 분할된 선교지역 은 각 교파 선교부의 영향 하에 있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지역적 특성과 결부되어 교회의 일치가 어려워졌다.
3. 신학적 상이성 : 한국교회는 1930년대까지는 신학적인 문제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보수주의 신학의 입장 에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를 지나면서 보수주의 신앙이 공격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성경관이나 신학적 견해 에 분명한 차이가 나타났는데, 다음의 동기와 영향이 있었다. 첫째로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서 유학한 인사 중에 자유주 의적 신학을 연구하거나 그 신학의 영향을 받은 인사가 귀국하여 집필히나 신학활동을 한 것이고, 둘째는 미국 교회의 신학적 논쟁 과 그 여파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북 장로교회 프린스턴 신학교의 신학적인 자유주의화 경향은 선교의 상관관계를 볼 때 한국에 영향 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나가는 말
한국 기독교회는 1세기도 안되는 짧은 선교 역사 속에서 세계교회가 놀랄 엄청난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하 나됨을 이룩하지 못한 분열의 교회였다. 분열의 배경에는 첫째, 역사적 정치적 배경이 결합된 지역성, 둘째로는 정치적 붕당성, 그리 고 셋째 유교의 배타성이 있다. 국외적 배경에는 첫째 미국교회의 교파중심적 선교가 이 땅에 행해졌다는 것, 들째 선교지 분할 정 책, 끝으로 신학적 상이성을 들수 있다. 분열의 원인으로는 선교사들의 합력부족, 이런 선교사들의 편협된 직접적인 사간으로는 신사참 배 문제를 들 수 있겠다. 그리고 보수주의자들의 자유주의및 사회참여 신학에 대한 절대적 배타감(역도 마찬가지)과 서로의 에큐메니 컬 운동에의 몰이해 등이 있다.
이러한 분열의 배경과 원인으로 한국 교회는 분열의 아픔을 겪는다. 신사참배 문제는 교회분열의 핵심사건이었 다. 신사참배 문제로 끝내 저항했던 이들은 고러파로 분리해 나가되 한국교회전통을 자처헸으며, 자유로운 신학의 발전을 추구하던 일군 은 조선신학교(현 한신)를 중심해서 한국적 신학과 에큐메니칼 신학을 표방하면서 분립하여 역시 법통을 자처하였다. 뒤이어 감라교 와 성결교, 침례교의 여러 교파들이 대개 같은 심리적 갈등의 길을 경유하여 분열하였던 것이다.
 B. 우리의 제안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외모로 하나, 참으 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립보 서 1: 15-18)
한국 교회분열의 문제를 부정적 분위기에서 다룬 듯하다. 그러나 위의 사도 바울의 지적처럼, 교회의 분열로 분 립된 교회가 자기 교파교회의 성장을 힘썼고 그것은 총체적으로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을 가져온 긍정적 측면도 있다. 이런 긍정적 측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열을 비판하는 것은 더나은 한국교회의 미래상을 위한 겻이다. 지금 경제학이나 사회복지학에서는 성장과 안정 (정의로운 분배 구현)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우리 역시 이러한 백락에 서서 교회의 분열과 통합을 살펴 볼 필요가 있 다.
이제 더 나은 미래의 한국교회상을 장립하기 위한 의식의 전환을 제시해 본다. 첫째 교회의 통일성는 '다양 성 속의 통일성'(Unity amongst diversity)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통일성 이 다양성이 없는 획일적인 것이 되어 버리면, 이 통일은 얼마 안가 또 다른 분열을 낳게 됨을 우리는 세계교회사를 통해 잘 알 고 있다. 둘째 이 통일작업을 위해 기독인들의 철저한 회개가 있어아 하겠다. 해방후 반민투위의 실패는 민족정기의 말살이라는 결과 를 가져왔고 오늘의 혼란한 장치 상황도 그 결과라 할수 있다. 신사참배문제로 인한 쇼회의 분열도 걑은 맥락에서 볼수 있다. 특 히 성직자들은 교회 분열의 책임을 철저히 뉘우치고(悔) 교회의 일치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앞설일이다(改). 셋째 이를 위한 구체 적 실천과업으로서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사회정의를,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 면 각 진영이 이것들에 대한 강조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이러할때, 서로의 '다름'을 배타시했던 풍조가 없어지고, 서로 의 '같은점'을 오 잘 알수 있고, '다름'을 유기체적 조화로 볼수 있을 것이다. 넷째 공통분모가 되는 한국 신학을 형성하는 것이 다.
이러한 의식의 전환에 따른 구체적 실천작업을 생각해본다.
첫째 선교를 통한 각교파의 협력방안이다. 한국교회의 분열의 원인 중 하나가 교파 중심적 선교로 인한 것인데 오늘알 선교 하는 교회가된 한국교회가 선교지 교회에서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있다. 선교지 교회가 하나된 교회를 요청하고, 우리 한국 교회안에서 도 선교를 위한 교회의 일치를 주장하는 교회들도 많아졌다. 이는 우리의 불일치가 우리가 전하는 화해의 복음을 손상시키듯이 우리 의 하나됨은 우리의 증거를 더욱 힘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둘째 지역교회안에서의 교파 목회자들의 모임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다. 밑에서부터의 이러한 화합이 이루어질때 교파간의 협동사업도 강화될 것이다.
세째 주일 오후 예배와 수요 기도회 그리고 새벽기도회를 성도가 거주하는 가까운 다른 교파 교회에 참석하도록 분위기를 형 성해 보는 것이다. 물론 본교회가 지역적으로 가까운 사람은 본교회를 참석한다. 그리고 에배후 친교의 시간을 나누면 지역 공동 체 의식으로 하나된 터에 에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각 교파 성도가 하나되니 시도해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네째 사회정의 문제에 교회가 하나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3.1운동시 하나된 목소리를 낸 전통을 오늘 에 되살리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 통일을 위한 우리의 노력이 게속될 때 다양성 가운데서 통일된 교회가 이루어질 것이고, 분단된 조 국 통일의 원동력을 이룰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合久必分이요 合久必合이다. 하나된 교회를 요청하신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글로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 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함이로소이다(요17:22-23)"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4) 우리 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