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와 한국사회 (2001.8.13. 개성연 하계수련회, 조병수)

1. 서론

  사회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다. 사회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개인들로 형성되는 집단이다. 개인들의 이해관계는 크기 에 있어서 작은 규모의 것으로부터 큰 규모의 것에 이르기까지, 성질에 있어서 아주 단순한 것으로부터 아주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 지, 대상에 있어서 우호적인 것으로부터 적대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렇게 개인들의 이해관계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양하 다 할지라도 언제나 불가피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러한 모든 이해관계의 배후에는 인간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라는 것은 인간성을 뿜어내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지닌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자연히 인간의 문제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사회 는 개인으로 표출되는 인간을 표현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회는 인간의 표현이다. 이렇게 볼 때 개인과 사회를 엄격하게 구분하 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 뿐 만 아니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대체적으로 개인의 성향이 사회의 성향을 위 한 전제이다. 때로는 어떤 지도자적인 개인의 의견을 대중이 환영하게 되어 사회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아주 단순한 경 우를 말하자면 디자이너의 아이디어가 다수의 개인들에 의하여 환영을 받고 사회적인 유행으로 확산되는 것이라든가, 조금 더 복잡한 경 우에는 카리스마적인 정치지도자의 정치적인 구상이 시민들에게 매려되어 국가전체의 구조로 자리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아 니라도 평범한 개인들의 성향이 사회화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다. 예를 들어 이동에 있어서 빠른 속도를 추구하는 개인의 성향은 자 동차 산업을 활성화시키는 사회의 성향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사회의 성향이 있고야 비로소 개인의 성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 려 개인의 성격이 사회의 성격보다 앞선다. 다시 말해서 개인은 사회의 전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합리적인데 사회는 비합리적이 라든가, 개인은 비합리적인데 사회는 합리적이라든가 하는 개인과 사회의 반립적인 구조는 거의 생각해 볼 수 없는 것이다. 개인과 사 회는 결합적이다. 사회는 언제나 인간에 근거한다. 사회는 인간에 따라서 그리고 인간과 함께 변화한다. 사회의 변화는 인간의 변화 를 전제로 한다. 사회에 타락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인간에게 타락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타락하기 때문에 사회도 타락 한다.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바라볼 때도 개인과 사회의 결합구조를 부인할 수 없다. 한국사회는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가장 분명하 게 반영하고 있다.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성향이 한국사회의 성향으로 현실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인 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면 한국인의 성향은 무엇인가? 한국인에게 나타나는 긍정적인 측면들이 적지 않게 많이 있을 것 이다. 한국인의 이런 긍정적인 모습은 구태여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인의 모습을 고찰 할 때 한 눈에 보기에도 한국사회에는 부정적인 의미에 있어서 개인의 성향이 극도에 달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부정적 인 개인성은 주로 세 가지로 정리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한국인에게 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민족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첫째 로 언급해야 할 개인의 부정적인 모습은 개인의 인격이 소유하고 있는 상태가 본질적인 차원에서 기형적이라는 것이다. 기형성은 개인 이 자리잡고 있는 고유한 위치에서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 못한 모습을 의미한다. 이것은 한 개인이 일반적으로 지녀야 할 본 질을 소유하는 대신에 비정상적인 요소들로 말미암아 개인성이 왜곡된 경우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것은 개인의 과잉성이다. 과잉개인 은 개인성의 왜곡을 가장 잘 보여준다. 더 나아가서 개인의 부정적인 모습과 관련하여 이탈성을 제시할 수 있다. 이것은 한 개인 이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비정상적인 위치로 탈선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상 이탈성이란 기형성의 발전이다. 개인의 기형적 인 본질이 확대되면 이탈적인 성향을 보이게 된다. 개인의 이탈성의 문제는 극단적인 차원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므로 말할 것 도 없고 소극적인 차원에서도 정확하게 지적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기형성이 확대되면 이탈성으로 나타나고, 개인의 이탈성 이 극대화되면 파멸성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탈성이 기형성의 발전적인 결과라면, 이탈성의 극단적인 결국은 파멸성이 다. 그래서 한 개인에게서 보여지는 가장 큰 부정적인 모습은 스스로의 파멸이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 있어서 본질의 변형이라든가 궤 도의 이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파멸에는 대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든지 회복시키는 것이 불가 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문제는 한국인의 문제에서 기인한다. 이 때문에 한국인에게 기형성, 이탈성, 파멸성이라는 세 가지 부정적인 모 습은 결국 한국사회에서도 자명하게 드러난다. 기형성이 조직의 구조적인 문제를 가리킨다면, 이탈성은 탈선적인 문제를 가리키며, 파탄 성은 해체적인 문제를 가리킨다. 물론 이런 현상은 한국인과 한국사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모든 사회에도 해당되 는 것임을 주지해야 한다. 이제 이와 같은 구도 속에서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파악하고자 한다. 우선 한국사회의 문제를 현상적인 차원 과 내면적인 차원에서 논의하고, 후에 개혁주의가 한국사회에 어떤 해결책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2. 한국사회의 현상적 문제점

  가장 먼저 한국사회가 보여주는 현상적인 문제를 살펴보자. 사회의 현상적인 문제는 다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지만, 결국 다 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하여 종합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인간이 어떤 차원에서든지 인간의 영혼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성이 다. 이것은 사회의 종교적 측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성으로서 좁 은 의미에 있어서 사회의 사회적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로 사회적 현상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에서 나타나는데 이것은 사회 의 환경적 측면이다.  

1) 한국사회의 종교적 측면

  한국사회의 종교적인 현상은 매우 복잡한 듯이 보이지만 사실상 간단하게 전래 종교, 외래 종교, 신흥 종교로 분류해서 생 각해 볼 수 있다. 한국사회의 전래종교라는 것은 세계의 거의 모든 민족에게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샤마니즘, 토테미 즘, 애니미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전래종교는 주로 미신적인 것으로서 점술과 주술의 방식으로 널리 보급되어 있다. 그런데 중요 한 것은 한국사회의 전래 종교들이 외래 종교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외래 종교는 일찍부 터 소개된 불교를 비롯하여 유교의 전통과 기독교가 큰 세력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이외에도 비록 크게 활동적이지는 않지만 일본 과 동남아에서 수입된 외래 종교들이 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외래 종교들은 한국사회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변형되는 현상을 자아낸 다. 더 나아가서 흥미스러운 것은 외래 종교들이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본래의 색채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근 자에는 한국사회에서 새로 생산된 신흥 종교들이 적지 않게 많이 있다. 특히 외래 종교의 수입물결이 강해지면서 신흥 종교의 발생 은 더욱 빈번해졌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한국사회의 신흥 종교들 가운데 고유한 성격을 띄는 것은 거의 없고, 보 통 전래 종교와 외래 종교의 변형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현금에 전래 종교, 외래 종교, 신흥 종교로 축을 이루는 한국사회의 종교세계는 기형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 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각각의 종교 현상은 다른 종교 현상들로부터 영향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고유한 본질을 유지하지 못 하고 변질되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은 전래 종교와 외래 종교와 신흥 종교 모두에게 일반화되어 있다. 심지어는 타종교와 세속화에 가 장 비타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마저도 한국사회에서는 변형과 변질을 겪으면서 기형적인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부인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기복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의 세속화 또는 물질화에서 분명하게 파악된다. 종교가 기형화되 는 현상의 배후에는 과잉추구가 도사리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종교의 형태든지 본연의 성질에 만족하지 않고 그 외의 것을 지나 치게 추구하는 것이 종교의 기형화의 동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의 기형성은 그 자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종교의 기형적인 형태는 반드시 종교의 탈선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종교의 탈선은 종교인의 육체와 정 신 뿐 아니라, 윤리와 생활에 강제력을 행사한다. 종교인의 신체에 물리적인 행동을 가하고, 비윤리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며 (예를 들 면, 나체 파티, 약물복용), 집단생활과 집단노동을 강요하며, 재산을 몰수하고, 결혼과 이혼을 강요하고, 사회생활을 금하며, 이탈 자에 대하여는 가혹한 보복을 시행한다. 이것이 종교의 과도한 행동이다. 종교는 도에 지나친 행동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가치를 상실하 고 만다. 이렇게 하여 탈선적인 종교의 과도현상은 사회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다. 종교의 탈선이 사회에 부정적인 파장을 일으킨다 는 것은 종교가 사회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종교는 사회에 대하여 영혼과도 같은 기능을 한다. 한 마디 로 말하자면 종교는 사회의 영혼이다. 그런데 종교의 탈선적인 현상은 결국 파멸적인 현상으로 나아간다. 종교의 파멸성은 양면적으 로 나타난다. 첫째로 파멸성은 종파가 분열한다든가 집단자살을 기도하는 방향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둘째로 예리한 종교비평가를 살인한 다든가 자폭적인 방식으로 기존사회질서를 파괴하려 한다든가 이런 방향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종교의 과잉성을 보여주 는 것이다. 종교의 기형성과 이탈성과 파멸성의 중심에는 과잉성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종교에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 는 과잉성이다.

2) 사회적 측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좁은 의미에서 있어서 순수한 사회적 측면이다. 사회적 측면은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보자면 개 인, 집단, 국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기형성, 이탈성, 파탄성은 여실히 드러난다. 여기에서는 주로 개인과 집단 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국가에 대하여는 마지막에 간단히 지적하고자 한다.

(1) 기형성

  개인에게 기형성의 대표적인 것은 변태적인 일상이다. 무엇보다도 변태일상이란 개인에게 시간분배가 불량한 것을 의미한 다. 한국사회에서 개인은 하루뿐 아니라 주, 월, 년에서 모두 불규칙한 생활을 한다. 한국사회에서는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은 말 할 것도 없고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조차도 일상의 시간분배에서 실패한다. 이런 불량성은 한 개인이 동시에 주간직업과 야간 직업을 가짐으로써 가시화되는 경우도 있다. 맞벌이 부부에게는 남편과 아내의 시간사용 범위가 뒤바뀌기도 한다. 직업여성에게는 맞벌 이 부부의 문제로 가사에 임할 수 없고 자기 아기를 돌볼 수 없는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한다. 게다가 한국사회에는 회식문화가 구조적 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여성들은 낮 시간을 잃고, 남성들은 밤 시간을 잃는다. 여기에서 개인적인 시간의 과잉소비를 보게 된다. 이 런 상황에서 부산물로 나타나는 것은 여가시간의 결핍으로 인하여 취미생활은 물론이고 작업시간과 휴식시간까지도 부족한 현상이 일어난 다. 그 결과로 한국사회는 시간부족현상 앞에서 무질서해지고 무책임해지게 되었다. 

  또한 개인의 기형성은 과잉경제에서도 나타난다. 먼저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과잉경제는 지나친 소유에 대한 의지에서 풀이된 다. 한국사회에서 개인은 대체적으로 과잉소유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잉소유란 이미 현실생활에 충분한 물질적 혜택을 누리 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무시하고 그 이상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소유를 추구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한국사회에서 발견되 는 과잉소유의 문제 중에 가장 악한 것은 빈곤 속의 과잉이다. 말하자면 개인이 생활의 한 부분에서는 심각한 빈곤을 겪고 있으면 서, 생활의 다른 부분에서는 과도한 풍요를 감행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최소급여자가 최신승용차를 구입하는 경우이다. 결국 과잉 소유추구는 과잉소비를 낳는다. 한국사회에서 과잉소비는 오랫동안 치료하지 못하고 있는 고질병가운데 하나이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한탕 주의나 복권당첨을 바라는 요행주의가 한국사회를 멍들게 하는 요인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아나바다 운동 (아 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기 운동)과 같은 건전한 시도는 거의 실효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한 국사회에서는 "이제 대중들은 자신이 생산하는 것에 의해서 동실시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소비하는 것에 따라 동일시되는 존재 로 되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금의 한국사회에서는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 생산이 아니라 소비라는 것이 다. 

  한국사회에서 집단의 기형성은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한국사회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병폐는 지역주의 와 지역이기주의이다. 지역주의는 소위 지방색이라고 불리는데 한국사회에는 해방 후에 남북의 갈등과 동서의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 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지역이기주의는 지역주의에서 파생하는 것이지만 조금 더 규모가 작은 사회적 현상으로서 오랫동안 한국사회에 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특히 지방자치제가 도입되면서 훨씬 더 강하게 작용을 하고 있다. 지역주의와 함께 등장하는 것은 연줄망 과 연고주의이다. 연줄망과 연고주의는 한국사회에 융단폭격 하는 듯한 피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의 모든 분야와 영 역에 이러한 악질적인 세균이 스며들어 있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연줄망과 연고주의는 학교의 출신과도 관계가 있어서 교육 제도의 문제점을 부채질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한국사회에서도 집단의 기형성은 불평등의 문제에서도 완연하게 나타난다. 불평등은 주로 두 가지 종류로 표현된 다. 첫째로 구조적인 불평등이다 (구조불평등). 구조불평등은 사회적인 집단 내에서의 계급화에서 야기된다. 또한 불평등에는 성적 인 불평등이 있다. 성불평등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으로서 성차별 (억압)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사회적 집단의 기형성은 과잉시도이다. 예를 들면 집단의 과잉시도는 다른 사업체들 을 질식시키고 사업을 독식하는 독과점화와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대기업화에서 아주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제적인 과 잉시도 외에도 사회의 과잉성은 교육과 예술, 체육, 대중문화와 같은 분야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어려 움 중에서 대표적인 과잉교육이다. 예술과 체육 그리고 대중문화에서 나타나는 과열현상도 한국사회가 소화하지 못하는 커다란 문제점이라 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가 없다.  

(2) 이탈성

  위에서 기형적인 상태는 반드시 이탈성을 야기시킨다고 지적하였다. 개인의 기형성에서 개인의 이탈성이 나온다. 개인이 정상 적인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현상은 무질서와 무책임에서 가장 쉽게 발견된다. 이것은 시민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국사회에서 개인들은 새치기와 끼어들기 또는 그와 유사한 행동에 아주 익숙해 있다. 새치기와 끼어들기는 개인의 사회적 이탈에서 대표 적인 현상이다. 또한 이러한 행위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표현되는 양보불허와 대열파괴도 개인의 사회적 이탈로서 무시할 수 없는 일이 다. 무책임과 관련하는 불법적인 쓰레기 처리, 폐수 방출, 폐자재 유기와 같은 처사들을 언급할 수 있다. 개인의 기형성에서 현저하 게 나타나는 또 한 가지 양상은 중독이다. 이미 한국사회에서 개인이 대중미디어 (특히&nbspTV)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 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더 나아가서 영상녹화물 (Video)에 대한 중독이라든가 최근에 급증하고 있는 인터넷 중독은 개인의 심 각한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이탈현상은 알코올 중독과 마약적인 약물복용이다. 물론 이런 개인의 중독성의 배후에 는 대체적으로 음란과 폭력에 대한 욕구가 도사리고 있다. 이로부터 개인의 이탈은 범죄 (사기, 절도, 강도)와 음행 (매춘, 간 통, 강간)으로 발전한다. 불행하게도 이런 것들은 이미 청소년비행에서 선취적으로 경험된다 (소년비행. 왕따, 학원폭력). 최근 에 들어서 개인의 이탈은 성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의 이탈은 의상에 있어서 성통합적인 (unisexual) 현 상을 보이고 있을 뿐 만 아니라 모습에 있어서 성무별적인 (asexual) 현상도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서는 남성이 여성화되 고, 여성이 남성화된다. 성과 관련된 이탈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성전환적인 (transsexual) 시도이다. 최근에 한국사회에서 는 성전환 (Transgender)이 공공연하게 정당화되고 있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집단의 이탈성은 해체와 이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할 수 있다. 우선 가정에 관하여 말하자면 가족해체와 핵가족제도 를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은 일종의 이기주의의 일면이다. 연고주의가 강해지면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폐쇄적인 성향이 나타난다. 구조불평 등과 계급화에 대한 반작용은 노사분규이다. 이런 현상들은 모두 관계파괴라는 현대인의 현실적 상황에 근거를 두고 있다. 집단의 이탈 성에서 가장 큰 문제로는 농촌해체와 도시화를 들 수 있다. 종래의 학군을 중심으로 하는 인구이동이나 신도시를 선호하는 인구이동 과 같은 현상들도 사실상은 집단의 이탈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3) 파탄성

  기형성과 이탈성은 결국 파멸성으로 인도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형성과 이탈성으로 말미암아 개인이 맞이하게 되 는 파멸이란 피동적인 측면에서는 육체질환, 정신질환 (신경쇠약, 우울증, 자폐증, 광란증, 자학증), 자살로 나타나고, 능동적 인 측면에서는 착취, 폭력, 살인으로 나타난다. 

  집단과 관련하여 파탄성은 가정분란 (가출, 별거, 이혼), 소득분배불량과 빈곤, 주택문제와 교통마비, 기업의 도산과 대중문화의 파괴성을 거론할 수 있다. 

  국가의 문제는 간단히 지적하고자 한다. 국가의 기형성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화된 국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런 국가에서는 독재체제가 지배하고 정보회로가 폐쇄되는 특성을 나타난다. 국가가 정상적인 궤도에서 이탈하는 경우는 정당정치의 병 폐, 주권당의 횡포, 정부의 국민의견 외면, 종교적 민족주의, 우익강세, 무기거래 (밀수출), 국제적인 폭력을 말할 수 있다. 국 가의 파산은 혁명에 의한 것이나 멸망을 제시할 수 있다.

3) 환경적 측면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환경적인 측면을 고려하게 만든다. 인간에 의한 자연의 기형화는 동식물에 다같이 나타나고 있다. 이 런 현상은 더 크고 많은 생산량을 위하여 식물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일이나, 더 부드럽고 맛있는 살코기를 얻기 위하여 동물을 인공적 으로 사육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에 의한 자연의 이탈은 골프장이나 스키장을 건설하기 위한 산허물기, 갯벌훼손, 댐건 설, 고속도로 건설 등에서 잘 나타난다. 결국 이와 같은 자연의 기형화와 훼손은 무서운 파멸을 결과시킨다. 홍수, 열대야, 생태 계 교류의 파괴, 환경호르몬의 악영향 같은 것들이다. 결국 인간은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대기, 식수, 식품 등에 있어서 어려움에 처 하고 말게 되었다.

3. 한국사회의 내면적 문제점

  한국사회는 인간이 영혼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를 설명하는 종교적인 측면에서든지,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를 설명 하는 사회적 측면에서든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설명하는 환경적 측면에서든지 전체적으로 기형성과 이탈성과 파멸성이라는 현상적인 문 제를 완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한국사회가 이와 같은 현상적인 문제를 나타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한국사회의 이면에는 어 떤 문제가 있는 것인가. 이제 간단하게 한국사회의 내면적인 문제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한국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내면적인 문제점은 쾌락주의 (Hedonism)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쾌락을 얻는 데 모든 감각기관을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이 넘치도록 충분하게 구비되어 있다. 쾌락주의에서 두 가지 현상이 발생한다. 첫째는 이기주 의이고, 둘째는 편리주의이다. 이기주의는 쾌락을 추구하는 경우에 반드시 동반되는 현상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상황을 고려하 지 않기 때문이다. 쾌락주의는 편리주의로 연결된다. 불편한 것에서는 쾌락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기주의 에서는 파관주의 (破關主義)가 나오고, 편리주의에서 물량주의가 나온다. 파관주의란 모든 관계를 깨뜨리는 것으로서 이기주의의 극한표 현이다. 파관주의는 자발소외와 타자파괴로 구체화된다. 편리주의는 대형화를 목표로 삼는 물량주의에서 절정에 달한다 (대형백화점, 대 형서점 등). 물량주의는 신속성 ("좀더 빠르게")과 편리성 ("좀더 편하게")과 신선성 ("좀더 새롭게")을 실현하는 것을 지향 한다. 그런데 결국 한국사회의 내면적인 문제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일련의 현상들에서 항상 작용하는 요소는 과잉성이다. 쾌락주의라 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감각작용을 과도하게 사용하려는 것이다. 이기주의와 파관주의는 자신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말미암 아 발생하는 과잉현상이다. 편리주의와 물량주의는 쉽게 다량의 물건을 향유하려는 시도이다. 이렇게 한국사회의 모든 면에는 과잉성 이 들어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만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과잉개인이며, 사회가 아니라 과잉사회이고, 국가가 아니라 과잉 국가이다. 한국사회에는 모든 면에서 결핍과 빈곤이 해결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모든 면에서 과잉과 풍요가 행세를 하고 있 다. 과잉성은 한국사회의 최악의 문제이며 최대의 적수이다.

4. 개혁주의의 사회참여관

  한국사회는 현상적으로 볼 때 뿐 아니라 내면적으로 볼 때도 매우 심각한 상태에 처해 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 는 방법을 상황 안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다. 개혁주의는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오직 사회 외적인 방식에 의존 한다. 마치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밖에서 일어나듯이 사회의 구원도 사회의 밖에서 일어난다고 믿는 것이다. 사회학의 실패는 사회 의 문제를 내재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이에 반하여 개혁주의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인간과 인간의 사 회에는 안전한 치료가 가능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개혁주의의 사회관은 비관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 다.&nbspBieler는 칼빈의 사상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 사실을 잘 지적하였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좀 더 깊고 본질적인 지식을 산출해내지는 못한다. 오직 하나님만 이 인간본성의 궁극적 정체를 인간에게 전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자연스러운 교제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부터 하나님에게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무데도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위 칼빈의 급격한 비관주의를 만나게 되는데 이 비관주의가 사 실상 그의 복음주의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 개혁주의의 사회관에서 낙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사람이 변하는 것이 사회가 변하 는 근본적인 조건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개인을 변화시키시고 후에 사회를 변화시키신다. 사회의 변화는 개인의 변화에 의존한다. 하 나님께서는 변화된 사람을 통하여 사회를 변화시키신다. 따라서 변화된 사람은 사회를 개혁하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다. 그러면 하나님 의 은혜에 의하여 변화된 사람은 어떻게 사회개혁에 참여하는가. 개혁주의의 사회참여의 원리는 무엇인가. 개혁주의의 사회참여관은 영역 과 방식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전영역 참여

  첫째로 영역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개혁주의는 사회의 전영역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개혁할 것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자는 사회가 서로 상관없는 개인들의 조잡한 단체가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 다시 말하자면 사회의 유기체라고 생각한다. 이 사 회적 유기체는 인류의 복잡한 생활에서 발생한 독특하면서도 서로 관계된 많은 영역들로 구성되었는데, 각 영역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책 무와 명령이 있다. 여기에서 사회의 영역주권을 말하게 된다. 이 영역은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이 주권을 주셨고, 또한 특별한 책무 를 수행하라고 맡겼으므로 자신의 영역 내에서 주권적인 권리를 가진다. 

  신자는 독특한 주권을 가지고 있는 각 영역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문화적인 사명을 수행한다. 사회에의 능동적인 참여에 관하여&nbspMeeter의 진술을 들어보자.

"칼빈주의자는 마치 종교가 하나님과 관련된 인간의 사적 생활에만 관계가 있고, 인간과 인간의 사회와는 상관이 없는 것인 양, 종교와 사회 생활이 분리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조직화된 형태의 사회는 물론 조직화된 형태의 사회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 며,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야 한다&nbsp... 칼빈주의자의 의무는 그로 하여금 사회를 피해 수도자의 삶을 살도록 하지 않 고, 사회생활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서 사회에 하나님의 지배력을 증진시키도록 이끄는 것이다&nbsp... 칼빈주의자는 신비적 으로 하나님을 명상하는 일에 빠지는 수동적인 형태의 개인들을 만들지 않는다".

인간의 사회는 문명인과 야만인, 가치가 있는 사람과 가치가 없는 사람, 친구와 원수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렇 게 분리적 질서와 대립적인 구조와 상반적 체계를 지니고 있는 사회의 모든 영역에 긍정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조건은 사람들을 그 자체 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다 (quoniam&nbspin&nbspDeo,&nbspnon&nbspin&nbspseipsis&nbspconsiderandi&nbspsunt). 이 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오류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을 보고 사람을 보면 사회에 대한 긍정성이 생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확대시키라고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긍정적 사회참여의 동인은 하나님에 의거한 인간접 근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조망에 의존할 때에만 사회의 모든 영역을 편견없이 바라보며 변화시키기 위하여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 다. 이때 비로소 이기주의와 파관주의가 깨어진다.

  개혁주의의 사회참여관은 전분야의 개혁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절정에 달한다. 사회를 개혁한다는 말에는 사회의 두 가지 성격 이 전제된다. 우선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회개혁의 이유는 사회가 피조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며,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회 의 타락성 때문이다. 사회는 하나님의 피조세계이지만 타락하여 부패해있기 때문에 그 본연의 성격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개혁되어야 한 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회의 전분야 개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모든 분야에 그리스도께서 주권적으로 개입하심으로만 가능하다. 사회 의 모든 분야의 개혁은 어떤 인간적인 방식에 의하여도 가능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내적인 충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에 대 한&nbspBieler의 한 견해를 들어보자.

"먼저 부부관계를 생각해보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인간성을 회복시키심으로써 남자와 여자가 다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 고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개입하심으로써만 비로소 천성적으로 나뉘어져 있는 부부의 결합이 가능하다. 그리 스도께서는 여자를 열등한 존재로 격하시키려는 남자의 경향을 감소시킨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 다음 가족을 생 각해보자. 오로지 그리스도의 중개를 통해서만 수많은 죄의 세력에 의해 찢긴 가족의 유대를 회복시킬 수 있다".

2) 조절주의

  이에 더하여 방식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개혁주의의 사회관에서 중요한 것은 조절주의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사회 의 전영역적인 병폐의 배후에는 과잉성이 도사리고 있다. 과잉성이란 것은 조절의 실패를 의미한다. 자기 통제력을 상실했을 때 과잉 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검소, 절약, 정직, 성실과 같은 미덕들을 실천한다. 사실상 조절의 원리는 성경의 교훈이 다. 사도 바울은 조절의 원리를 정확하게 가르친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고 전&nbsp6:12).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 니니" (고전&nbsp10:23). 조절주의의 원인은 두 가지이다. 사도 바울은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를 설명하는 단락에 서 조절주의의 원인을 분명하게 언급한다. 첫째로 개혁주의가 추구하는 조절주의는 사람을 위한 성격을 가진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 을 구하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nbsp10:24). 이것은 인간적 조절주의이 다 (principle&nbspof&nbsphuman&nbspcontrol). 둘째로 개혁주의는 하나님을 위 하여 조절주의를 추구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 전&nbsp10:31). 이것을 가리켜 신적 조절주의라고 부를 수 있 다 (principle&nbspof&nbspDivine&nbspcontrol). 신적 조절주의는 "모든 일 과 인생의 모든 선택에서 오직 언제나 자신의 의식에 임재하시며 언제나 그 눈으로 자신을 보시는 하나님께 대한 가장 면밀하고 기운 찬 경의에 의해서 통제되는 구속받은 사람"에 의하여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두 가지 원인에서 출발하는 조절주의에 의하여 개혁주의 의 사회참여관이 정당하게 형성되는 것이다.

5. 결론

  개혁주의가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한국사회에 긍정적인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부정적인 면이 훨 씬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한국사회의 문제점은 사실상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와 사회와 환경이라 는 세 가지 차원에서 기형성, 이탈성, 파멸성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가지고 한국사회를 살펴보았지만 이런 구도에 포착되지 않는 부분 은 말할 수 없이 많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만큼 한국사회의 병폐와 질환은 크고 깊은 것이다. 개혁주의는 이러한 한국사회 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격리되는 것도 개혁주의의 길이 아니며, 한국사회에 용해되는 것 도 개혁주의의 길이 아니다. 개혁주의는 한국사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전영역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며, 질다른 방식으로 자신 을 표현해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노력은 전영역 참여관과 조절주의라고 요약될 수 있다. 따라서 개혁주의의 사회참여관은 소극적으 로 말하자면 참여하지만 동화되지 않는 것이며,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적극적 참여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것 은 사회와의 분리가 아니라 구별일 뿐이며, 사회에의 융화가 아니라 참여일 뿐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회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므로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회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 다. 따라서 개혁주의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사회의 문제를 해결한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사회에 의하여 개인이 매도되거 나, 개인에 의하여 사회가 파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자주 발생하는 문제점은 바로 이와 같은 양자의 현상이다. 개 인이 사회에 의하여 매장되는 일도 비일비재하거니와 사회가 개인에 의하여 농락당하는 것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개혁주의 는 사회를 존중하지만 개인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개인주의적 사회주의를 말할 뿐 아니라 개인을 존중하지만 사회의 안정을 보호하려는 사 회주의적 개인주의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혁주의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는다. 개혁주의는 개인에게 있는 타락성이 사회에서 그대 로 표현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개인과 사회를 모두 억제하는데 관심을 가진다. 기형성, 이탈성, 파멸성은 개인에게 나타나는 대 로 사회에서도 나타난다. 만일에 이것들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개인도 사회도 모두 파산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개혁주의의 사회관에서 는 개인억제와 사회억제가 다같이 중요하다. 이와 같은 억제는 다른 말로 하면 조절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주의의 조절성은 한국사회 의 과잉성을 개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이다. 이렇게 할 때 한국사회는 인간의 쾌락과 이익과 욕구를 추구하는 인간적 인간의 사회에 서 오직 "하나님 안에서 생활하며 의존하여 존재하는" (행&nbsp17:28) 신적 인간의 사회로 변화되는 것이 개혁주의 에 의하여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