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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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 설교
장차남
설교가 왜 중요한가?
목회가 종합예술이라면 설교는 그 중심에 자리한 핵심 사역이다. 설교는 목회영역의 일부이면서 목회와는 순치의 관계랄 수 있다. 이빨 없는 잇몸이 무용지물이듯이 설교 빠진 목회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에서 설교는 계란의 노른자 위 같으며 그 나머지 목회 분야가 흰자위인 셈이다. 평양신학교에서 실천신학을 강의했던 곽안련(C.A.Clark)박사는 1925년에 두 달 간격으로 ‘목회학’과 ‘설교학’ 저서를 간행하였으니 이는 이 두 분야가 실천신학의 대종이 됨을 뜻함이다.
또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하다 1924년에 번역 출간한 존 A. 커언(J.A.Cern) 박사의 ‘교중의 대한 직무’는 제 1편이 예배에 대한 직무이고 제 2편이 강도(講道)에 관한 직무로서 전체 751쪽의 분량 중 서론을 제하면 예배 부분이 106쪽인데 비해 강도 부분은 520쪽이나 되어 설교에 무게의 중심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도들도 설교 사역을 그들의 본무로 여겨 잡다한 일은 집사님들께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설교에서의 부담감이 무엇인가?
한국신학대학의 전 학장 김재준 목사는 ‘나의 일과’란 글에서 설교자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매일 ‘비슷한 일을 반복하는 동안에도 언제나 마음 속에서 마치 태아처럼 무겁게 한 주일 나를 괴롭히며 자라는 것은 주일의 설교 과제이다. 규격적인 학교 일이란 것은 사명감에서 하기는 하지만 늘상 새로운 감흥에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설교는 그야말로 위에서 오는 무슨 영감이 반짝 내 영혼에 번개쳐 들어오기 전에는 구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이 주어지지 않는 때에는 우울하고 안타깝고 침통하다. 그것이 주어져 자라는 동안 마음은 무겁다. 그러나 그것을 주일 날 교우들에게 나눠준 다음의 기분이란 형언못할 가벼움과 기쁨인 것이다’ 과연 복중에 태아를 배태하고 출산하는 긴장된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 설교자의 삶이다. 그래서 친구 목사 중에 어떤 분은 영감의 샘이 솟지 않는다고 ‘상천(上泉)이 말랐다’면서 ‘설교가 가난한 사람 제사 돌아오듯이 너무 자주 돌아온다’고 푸념하더라.
대학의 강의는 같은 수준, 같은 연령의 학생들이고 일년 수강하면 어김없이 진급하고 이제는 새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하면 되는데 설교는 신력과 학력과 연령이 천차만별인 사람들을 상대로 전해야 하고 10년이고 20년이고 같은 사람들을 상대로 전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면서도 항상 새로운 감흥이 일어나도록 전해야 하니 정말 보통일이 아니다.
설교에서의 보람됨이 무엇인가?
설교가 엄청난 부담을 안겨줘도 설교만큼 보람과 기쁨을 가져다 주는 일 또한 없다. 나는 설교를 하되 첫째, 구령적 입장 둘째, 양육적 입장 셋째, 치유적 입장 넷째, 지로적 입장이란 네 가지 방향에서 설교하고자 진력했다. 여기서 구령적 입장이라 함은 영혼구원을 위한 전도설교를 말함이고 양육적 입장이란 함은 교회 속의 기존 신도들이 영적으로 성장, 성숙해지도록 교리와 윤리적 차원의 설교를 강화한다는 입장이고, 치유적 입장이라 함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있다’는 주님 말씀대로 현대인이 가지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모든 병과 약한 것을 싸매고 고쳐주려는 입장이며, 지로적 입장이라 함은 미로를 헤매이듯 길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 성도들의 삶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길을 보여주려는 입장이다. 그 결과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가지게 되고 유아적 신앙이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 성숙하게 되고 영육 간에 치유되어 육체와 정신과 영혼이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미로를 헤매이 듯 방황하던 성도들이 삶의 지표를 찾게 되고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활로를 찾아 뛰어갈 때 설교자로서 큰 기쁨과 보람을 가지게 된다. 설교를 통해서 감동과 깨달음을 얻고 또한 은혜를 받았다고 말이나 글로서 알려올 때 정말 감사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설교의 본령을 확보해야 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사역이다. 따라서 신언(神言)의 기록인 성경을 중심으로 해야 하며 성경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신앙적 자세와 신학적 토대가 선결되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면서도 성경본문을 현장상황에 적용시켜야 하므로 설교자는 성경과 더불어 또 한 손엔 신문을 가져 역사와 사회 및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와 통찰력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대체로 진보적 성향의 설교자는 컨텍스트(Context)를 중시하고 텍스트(Text)를 등한하며 보수적 성향의 설교자는 텍스트에 치중하고 컨텍스트를 경시하는 형편이나 설교는 말씀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란 두 세계 사이를 연결해 주는 면이 있는 고로 설교자가 어느 일방에 치우쳐서 안 된다고 본다.
칼 바르트의 지적처럼 설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진술함”이 아니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본문의 중요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더라도 어떤 설교대가의 말처럼 회중석의 모든 줄마다 하나의 병든 가슴이 자리잡고 있으므로 설교자의 임상적 자세가 요망되는 것이다. 여기서 선포된 말씀이 현실 상황에 적중할 때 치유와 환희, 약동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법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 교회엔 신학과 예배와 설교가 변질, 약화되어 가고 있다. 개신교의 전통인 성경적 신앙의 원칙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포스터 모더니즘의 영향 탓인지 영성화, 신비화 경향과 더불어 직관적, 감성적 면이 강하다. 지금은 조용히 듣기만 하는 시대가 아니라 영상과 조명과 음악과 춤판이 한데 어우러져 그 속에서 체감하고 소리지르고 흔들어 대는 시대인고로 예배와 설교에서도 이러한 역동성과 현장감을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고 실험하는 시대이다. 그렇다고 예배와 설교의 본령에서 일탈하여 강단을 무대화하고 연예인의 공연 흉내나 내는 어릿 광대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런데도 주제 있고 내용 있는 설교는 간 곳이 없고 기승전결도 없이 앞뒤 없는 전차요 만담인지 개그인지, 연극인지 간증인지 번지 없는 설교이기 일쑤이다. 그것도 주역이 되지 못하고 불신자의 기호와 취향에 맞는 질펀한 마당놀이에 잠깐 등장하는 엑스트라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의 속화요 예배의 타락이요 설교의 종언을 뜻하기에 절대로 일시의 바람에 흔들려서 안 되고 신령함과 경건함이 있는 예배와 권능 있는 말씀의 선포로서 설교가 예배의 중심에 굳게 서고 회중의 심령들을 장악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설교자로서 확고한 원칙과 목표가 있어야 한다. 한국의 대표적 설교자 한경직 목사는 설교의 세 가지 원칙으로 첫째, 성경 중심이라야 하고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중심은 십자가라 했으며 둘째, 목표가 있어야 하며 그 목표는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라 했고 셋째, 실존적이 되어야 한다면서 교인들이 살고 있는 시대를 알고 교인들의 환경을 잘 살펴서 그들에게 꼭 필요한 생명의 양식을 전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설교의 원칙을 지키므로 그 본령을 확보함에 불타는 사명감과 순교적 각오가 서야 하리라고 믿는다.
설교자의 인격을 함양해야 한다.
목사는 신(神)의 소명에 의해 교역자로 헌신하게 되었고 신학을 연마하여 설교자의 자격을 취득한 성직자이다. 지교회 담임자일 때 그는 당회장이란 행정의 수장직보다 강단권이란 더욱 본질적 권한과 권위를 보유하게 된다. 이는 신언(神言)을 대언,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뜻하는 것이다. 실제로 세상의 그 어떤 정치인이나 연예인도 오직 그만이 독점하는 전용 연단이나 무대는 없는 법인데 목회자만은 누구든지 그가 담임하는 교회의 강단이 매주 그가 고정 출연하는 전용강단이라고 볼 때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인가, 이것이야말로 설교자만이 누리는 특권이요 영광인 것이다.
김호식 목사가 어느 큰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했을 때 그 교회 장로 중 대학에서 연극학을 강의하는 교수가 이렇게 말하더란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실망이 됩니다. 우리가 연극한 편을 무대에 올리려면 몇 달을 고생하고 수 천 만원을 쓰고 조명, 소도구, 분장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목사님은 조명도 없이 분장도 안하고 딱 혼자서 우리가 그 고생을 하고 공연하는 연극의 몇 십배의 감동을 주니 저는 공연히 연극을 전공했다 싶네요”
정말 이렇게 위대한 설교를 인식한다면 그 영향과 효과에 따른 책임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념해야 한다. 부흥사는 기껏해야 삼사일 천사이지만 목회자는 수 십년을 같은 강단에 설 수 있는 고로 인격의 함양이 꼭 필요하다.
무릇 훌륭한 설교자는 첫째, 지적 실력 둘째, 영적 능력 셋째, 영혼 사랑 넷째, 구연 기술 다섯째, 신앙 인격이 구비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여기서 지적 실력은 진리를 표현하는 설교내용을 아주 충실하게 하여 주며 영적 능력은 인간의 힘과 재능을 초월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낸다. 영혼사랑은 설교자의 참된 자세와 구령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보여주며 구연기술은 설교내용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준다. 그러면 설교자로서 목사의 인격은 왜 중요한 것인가? 설교가 성경본문이란 주재료와 다른 보조재료를 소재로 사용하여 잘 준비된 요리와 같다면 설교자의 인격은 그것을 담은 그릇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일품요리를 만들어 최대의 언변과 열의와 봉사심을 가지고 권유한다 할지라도 음식을 담은 그릇이 더러우면 먹을 맛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릇이 깨끗하면 금상첨화격으로 음식 맛을 돋구어 주므로 더욱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법이다. 설교말씀은 설교자의 인격이라는 그릇에 담겨져 교인들에게 전달되는 고로 설교자로서 목사의 인격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설교내용과 언변만을 중히 여겨서 안되고 신뢰와 존경의 인물이 되어야 함을 새겨서 더욱 인격함양에 최선을 다해야 할 줄 안다. 결코 이 영광스러운 설교사역을 수행함에 누가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효과를 배가시키겠금 성인(聖人)의 경지로 향상해 가야 할 것이다.
장차남 / 온천제일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