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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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교육
I. 교육수행자로서의 교회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다른 사람에게 반응하는 가운데 자아가 성장, 변화된다. 기독교 신앙도 본성적으로 사회적이기 때문 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과의 관계에 크게 좌우된다. 즉 인간은 관계 속에서 양육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떠 난 교육은 있을 수 없다. "기독교교육이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생기는 생명력을 염두에 둔다면 기독교교육은 교회중심이어야 한다"라 고 그라임스는 말한다. 따라서 교회는 교육수행자이다. 그런데 교육은 또한 교회의 본성과 일치하여 행해져야 한다. 이런 면에서 교회 는 수행자일뿐 아니라 목적까지 된다. 그라임스에게 있어서 교회는 교육과 이처럼 밀접하게 관련된다. 여기서는 그라임스 (Howard Grimes)를 중심으로 교회의 교육에 대해서 살펴보자.
II. 교회는 무엇인가
그의 교회 이해는 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를 묻는데 서부터 나온다. 따라서 교회이해는 교회를 교회 되게 하자는 말일 뿐 아니라 교회의 사역에 교회의 본성과 일치하는 올바른 방향을 주자는 말이 된다. 그는 교회를 세 가지 면에서 보고 있다. 즉 그 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백성, 성령의 친교가 그것이다.
1. 그리스도의 몸1)
교회는 얼핏 보아 인간의 조직이나 기구 같은 생각이 든다. 물론 그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이상 의 기구로서 인간에 의해 구성되어 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신적인 성격을 띈다. 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되 신 하나님의 말씀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육신의 확장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우선권은 하나님에게 있으며 그것은 인간이 구성하여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그 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주시는 선물이다. 이와 같이 사랑과 용서로 주어지는 선물은 세례라는 상징을 통하여 인간에게 표현되며 이 행위 를 통하여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에 용납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교회에 받아들여진 사람은 성령의 활동에 대한 개인적 응답으로서, 즉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믿고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신자는 세례에 의하여 교회에 들어와 다른 사람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한 몸 의 지체가 된다. 즉 여럿이나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나 여럿인 그리스도인을 그 머리로 한 지체인 것이다.
2. 하나님의 백성2)
이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를 하나님께 봉사하도록 불림 받은 신자들의 공동체로 보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백성의 개념은 구약에로 소급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런데 이 선택 은 자칫 특권으로 이해하기 쉽다. 사실 이 선택은 누려야 할 특권이 아니라 섬겨야 할 특별한 책임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이 선택은 우리에 의한 하나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우리 선택임을 알 수 있다. 교회라는 말의 헬라 어 ekkesia와 히브리어 quahal은 "함께 불림 받은 이들"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능동성과 인 간의 피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름은 모든 신자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교직자와 평신도의 간격이 무너진 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선교에서 모두 교직자일 수 있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은 굴레나 자유, 유대인이나 헬라 인, 안수 유무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다만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는 평신도이다.
3. 성령의 친교3)
친교라는 말은 자칫하면 인간의 사교적 성격의 활동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면 친교는 성령의 작용을 말한다.
친교는 부룬너(Emil Brunner)에게 있어서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형제를 사귐으로 하나됨이지 만 이 이상으로 친교는 참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친교라는 말의 헬라어인 Koinonia는 "다른 사람과 함께 동 참"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 친교는 바로 이 연합과 참여의 면에서의 의미이다. 이 친교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먼저 성령의 활동에 의한 응답에 의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교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친교야 말로 사역을 사역되게 하며 사역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그의 교회 이해는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백성, 성령의 친교로서 삼위 일체적 이해라고 볼 수 있 다. 이 같은 교회관은 교회의 실제 사역을 검토할 뿐만 아니라 가능케 하는 힘이 된다. 기독교교육은 바로 이 같은 교회 사역의 일 부이다.
III. 기독교교육과 교회
서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라임스는 교육이 교회관에 일치하여 수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위에서 그의 교회 이해를 보 아 알 수 있듯이 교회가 그리스도에 근거를 두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속적 친교에 참여하는 것이라면, 교육 또한 그와 같은 성격 의 것이 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우선 '기독교교육'이라는 말 대신에 좀 더 넓은 의미의 '양육'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 다.4) 이것은 그가 교회의 친교 공동체를 염두에 둘 때 틀과 같은 구조를 우려한데서 나온 말 같다. 아무튼 그는 기독교교육은 상 호관계성을 띤 사회성 속에서 성립된다고 보았다. 인간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그곳은 바로 교회 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독교교육은 교회에 의해 수행되고 바로 교회의 본성인 하나님의 부름과 만나며 응답하도록 도와주는 곳 인 교회에서 발생된다.
또한 기독교교육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에로 이끄는 것이므로 그 방법에 있어서 종래의 시행착오설이나 조건반사설, 암기 방식 등과 같은 학습법은 경시될 수밖에 없다.5) 그는 친교로서의 교육은 경험에 의해 가능하다고 하면서 그 경험을 인격적이고 창의 적인 만남이라고 말한다. 그 만남은 물론 생명의 주님과의 만남이며 이 만남 속에서 진리를 발견케 되는데 이것은 변화시키는 진리 가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교육은 다만 일어나기를 바랄 수 있는 만남에 대한 준비여야 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만남은 신적 자아 와 인간적 자아,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포함된 그룹의 자아를 포함한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교육은 주로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 을 뜻한다. 물론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관계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교육은 교회의 모든 이 가 하나님과의 창의적 관계에 들어오고 관계를 설립하게 하는 과정이다.
또한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기독교교육은 기독교 공동체 안의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6) 그는 여기서 영아 에서 시작하여 장년에 이르기까지 친교, 만남, 응답 등의 교회적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특기할 내용들을 기술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교육은 가족을 강조한다.7) 여기서 우리는 그가 가정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가족을 강조하고 있다는데 유의해야 할 것이다. 즉 가정의 회복이 아닌 가족단위로서의 교회참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친교, 만남, 응답의 색채를 띈 기독교교육은 그 교육내용에 있어서도 지식 위주의 내용보다 학습상황에서 일어나는 경험이 중 시된다.8) 즉 말보다는 참여가 중요하며, 말씀, 관계, 행위가 모두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학습자료를 전혀 무시하는 것 은 아니다. 성경, 교회사, 교리 등도 구석적 공동체 안에서 사랑, 수용, 용서 속에서 전달될 때, 친교의 가능성을 창출할 수 있 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결국 그라임스에게 있어서 기독교교육은 무엇인가?9) 그는 기독교교육을 정의하기를, "기독교교육은 전통적 교육 의 지식전달 위주의 교육도 아니고, 자유주의 교육의 도덕교육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앙만 내세우는 회심위주의 교육도 아니라고 하면 서 기독교교육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만남에로 이끌고 전 삶에서 이 만남의 의미를 규명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교육은 바로 하나님과 사람과의 창조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창조적 만남은 그룹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누누이 인간의 사회성을 강조하면서 그 사회성의 개발의 방편으 로 가장 좋은 것이 바로 소그룹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교육의 현장은 바로 이 소그룹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면 여기서 교사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가? 교육이 만남이라면 바로 이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된 사람과의 만남 을 통해 그룹 내에서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교사의 역할은 하나님의 성령의 인간통로가 된다. 그러므로 교사는 가르치기보다 학생 을 위해 도움이 되어질 수 있는 학습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기독교교육의 과정은 쉐릴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그를 인용하고 있다. 쉐릴은 기독교교육의 목표인 만남을 성취하기 위하 여 1. 기독교 공동체에 소개, 2. 성경과 교회사, 3. 계시에 대한 응답의 준비 성, 4. 함께 의도적 행위에의 참여, 5. 위기 때의 상담을 들고 있다.10)
이와 같은 그라임스의 기독교교육은 양육과 전도, 케리그마와 디다케의 이분법을 불가능하게 한다. 양육이 만남이라면 전도 또 한 만남이므로 시간차이는 있어도 본질적으로 같으며 만남으로서의 디다케는 그리스도와의 대면시키는 케리그마와 별반 다를 것이 없겠 기 때문이다.
또한 만남은 인간의 조작이나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남을 위한 의도적 조작은 불가능하다. 만남은 어느 때,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므로 다만 준비시킬 수밖에 없다.
IV. 평신도 교육의 요소
제임스 쉐퍼(James R. Schaefer)에 의하면 평신도 교육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 려면 6가지의 요소가 필요하다고 한다.11) 여기서 이 6가지 요소를 그라임스의 내용으로 설명해보 자. 우선 목적 설정이다. 이것은 평신도의 정체성 문제와 관련된다. 평신도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평신도 가 교회 조직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평신도의 성격이라고 보는 오해이다. 교역자의 권위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같이 일 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으로 교역자에 맞서는 입장이다. 둘째, 하나님께 나가는데 교역자의 도움이 불필요하고 스스로 나갈 수 있다 고 본다. 이것은 교역자와는 무관한 입장이다. 셋째, 영적 지도자의 권위문제로 권위에 대한 이해 문제와 관련된다.
그러나 평신도는 교역자와 대칭 되는 입장에서의 정체성 확인이 아니라 오히려 "소명의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확인해야 할 것 이다. W.C.C.의 제 2차 회의는 이 평신도의 역할과 성격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말하고 있 다.
 1. 교회가 세계에 들어가 일상적 접촉을 하고 세상과 더불어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고 나눌 수 있는 것은 평신도를 통해서 이며
 2. 교회가 세상에서 중생과 구속의 힘을 발휘하는 것은 평신도의 생활과 사역에서이다.
그러므로 평신도 교육의 목적은 이런 뜻을 포함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목적설정에 이어 두 번째 평신도 교육의 요소는 인적 자원이다.12) 평신도가 세상과 교회에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는 훌륭하게 교육되어야 한다. 교육은 평신도이며 지도자인 사람들에 의해 실행되어지는데 그 교육은 평신도 지도자 훈련이 된다. 그라 임스는 지도자를 방임형, 독재형, 민주형으로 나누고 평신도의 지도자 상은 민주형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거기에 더 첨가될 것이 있다 면 지도자의 신앙, 즉 헌신이 요구된다. 이들에 대한 훈련은 주로 기독교 신앙 공동체 응답의 중심인 예배를 통해 또한 그룹생 활, 기타 교육프로그램이나 신학교육기관에 위탁교육하는 식의 방법이 있다.
평신도 교육의 세 번째 요소는 범위이다. 그라임스는 교회의 활동범위를 몇 가지로 크게 나누고 있는데 교회의 사역이 평신도 의 사역이라면 평신도 교육의 범위를 설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봉사를 들고 있다. 이것은 교육지도자로부터 노인이나 기도그 룹 모임까지 그 형태가 다양하다. 두 번째는 전도이다. 이 전도는 교리나 설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생활로서의 전도여야 한다. 셋째 는 사회적인 봉사를 들고 있으며 그밖에 선교, 에큐메니칼 운동까지 들고 있다.
평신도 교육의 네 번째 요소는 과정이다.13) 그라임스는 교육과정을 성경, 교회사, 신학, 기독교 삶의 의미, 예배, 그 리고 인간이해, 지도자론, 교육방법론 등을 들고 있다. 이 모든 교육과정은 늘 참여와 만남을 염두에 두고 검토되어야 한다.
다섯째는 학습의 장이다. 기독교교육은 그룹 속에서 효과가 큰데, 평신도 교육도 이 (소)그룹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 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평신도 교육은 이 "교회내의 교회"(churches in church)에 의 해 가능할 것이다. 이 소그룹에는 모든 이가 참여하여야 하며, 과제 중심의 그룹이 되어야 하며, 최대한의 자유와 융통성이 보장되어 야 하며, 구성원의 욕구를 채울만한 크기여야 할 것이다. 결국 교회의 이 소그룹은 그룹원의 광범위한 참여를 격려할 수 있는 것이어 야 한다. 주의할 것은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사라지게 되는 위험이나 그룹이 친교를 창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을 버려야 한 다. 왜냐하면 그룹의 친교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평신도 교육의 요소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프로그램의 성격에 따라 또 개교회의 형평과 여건에 따라 달리 고려되 어야 한다고 본다. 그라임스는 15주 정도의 프로그램과 4년 정도의 장기 프로그램도 예를 들고 있 다.
V. 여름성경학교의 방향
1. '분주'와 '좋은 몫'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 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들였다.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 생이 있다. 마리아는 주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 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주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눅 10:38-42, 표준새번역)
위의 본문(특히 41-42절)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이다. 모파트(Moffatt)는 음식에 신경 쓰는 것 보다 예수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KJV는 한가지 필요한 것이 영적 삶에 대한 관심이라 고 본다. RSV는 마르다가 너무 접대에 신경을 쓰는데, 소박한 환대로 충분하다는 뜻으로 본다.1)
그러나 소박한 환대의 목적 또는 그로 인한 여유가 무엇을 위한 시간이냐고 물을 수 있다. 짧은 생애를 굵게 사셔야 할 예 수께서 한가로운 잡담 시간을 의도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몫'은 말씀을 듣는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본문은 일회적인 일화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마르다의 '분주'와 마리아의 '좋은 몫'은 계속되고 있다. 교회의 목 회 현장에서뿐 아니라 교회학교 현장에서도 그런 현상은 흔히 볼 수 있다. 교회는 수많은 예배와 기도회와 회의와 행사로 분주하지 만 말씀을 배우는 좋은 몫은 상실한 지 오래다. 교회학교는 말씀을 가르치는 좋은 장(場)으로 택함을 받았지만 영성 없는 노래(나 는 찬송이나 복음송이라고 하지 않는다)나 원시적(구태의연하다는 뜻에서) 프로그램에 분주하다. 이런 현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 는 곳이 소위 여름성경학교이다.
2. 작으나 큰 여름성경학교
본래 여름성경학교는 주일 아침의 한두 시간의 교육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교회 지도자들이 방학기간을 이용해 교육시간을 확장 시킨 데서 유래되었다.2) 그러므로 여름성경학교의 특성 중 하나는 연장된 교육시간이다. 여기에 비추어 볼 때 교회는 어떤가? 어 린 유치부니까 주일을 포함에서 이틀, 유 초등부라도 주일 오후에 시작해서 수요일 오전에 끝나는 스케줄이 대부분이다. 그것도 하 루 종일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비는 시간을 둔다.
초등학교 학생의 경우 하루에 평균 6시간 정도를 학교에서 보낸다. 교회의 여름성경학교의 교육시간을 초등학교 의 교육시간과 비교하는 것은 초등학교보다 더 많은 교육시간을 갖자는 말도 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전통적인 여름성경학교의 교육 시 간에는 훨씬 못 미친다. 본래 여름 성경학교는 1, 2주 동안 계속되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교육시간을 많이 갖는 것은 낭비이다. 거기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어야 한다. 올즈 (L. C. Olds)는 교회학교의 시간 계획의 원칙을 세 가지로 말한다.3) 첫째, 시간을 좀더 효 과적으로 배당한다. 둘째, 중요한 시간을 더 늘리도록 한다. 셋째, 신앙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위의 시간 계획의 원리에서 여름 성경학교의 시간 계획에 대한 시사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여름성경학교(보통 때 도 마찬가지이지만)는 시간을 규모 있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든 앞의 시간은 준비(준비찬송에서부터 장내 정돈 까지)하느라 허비하고, 뒤의 시간은 시간을 넘겨 다른 프로그램에 차질을 빚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둘째, 여름성경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무엇일까? 이미 (여름)'성경'학교라는 명칭에서 자명하듯, 여름성경학교 는 말 그대로 성경말씀을 배우는 학교이다. 그런데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말씀은 뒤로 밀리고 그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나서 있 는 상태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셋째, 교회교육이 목표로 하는 신앙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신앙은 가르칠 수 없는 신비에 속한 영역이다. 신 비는 체험될 뿐 언급되지는 않는다. 신앙의 자원인 성경은 신비의 책이다. 신비 앞에서 언어는 설자리를 잃는다. 신비의 파악은 신비 와의 만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다행히 신비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통해 전달될 수 있다. 마리아 몬테소리 (Maria Montessori)가 상징, 특히 자연상징에 대해 언급한 것은 문제를 제대로 본 것이다. 신앙체험 이 가장 활발히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곳은 가정일 것이다. 이미 조직화되고 대형화된(그렇지 않은 교회더라도 그런 것을 지향하기 에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생동감 있는 신앙체험의 장이 될 수 없다. 교회에는 신앙이 없고 조직이 있다.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싶 은 곳이 가정이다. 사실 신앙은 배울 수 없는 것이라 하였지만 함께 동거하는 사람의 모범을 통해 배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단적 인 예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동거이다.4)
어린이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곳은 어디인가? 그것은 가족이고 가정이다. 특히 부모는 어린이에게 가 장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보여지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러나 어린이에게 신앙의 본이 될 만한 부모가 얼마나 있겠느냐가 문제이다.
여기서 교회학교는 부모교육의 기회를 보아야 한다. 여름성경학교 기간이든 언제든 교회가 어린이의 신앙체험과 성장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모들을 교육하여 함께 살아가는 가정으로 돌려보낸다면 어린이들은 변화될 것이다.
변화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만물 중에 가장 변화되기 어려운 사람의 마음은 예수의 경우도 3 년을 동거함으로 겨우 이루어졌다. 네비게이토(Navigator) 같은 선교단체가 최소한 한 달에서 5년까지의 공동생 활 훈련을 행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여름성경학교가 점차 형식적이 되어 가는 이유중의 하나는 어린이들의 숫자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마디 로 신명이 안 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 대상인 어린이의 숫자가 줄었다고 해서 교육의 내용이 줄어든 것은 아닐 것이다. 더구 나 어린이의 숫자가 줄었다고 해서 영혼에 대한 애정이 줄어도 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사실 누가 한 명의 영혼이라도 자신 있 게 훈련할 수 있다고 장담하겠는가.
이런 면에서 어린이의 숫자가 준 것과 교육의 성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다. 오히려 적은 수를 잘 가르치도록 해야 할 것이 다. 예수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떠났을 때, 예수께서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6, 67). "필요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주님은 수적인 확보를 위하여 질적인 수준을 희 생치 않으신 분이다."5) 양이냐 질이냐는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성경은 분명히 양보다 질을 우선한다. 이런 차원에서 대 형화가 지상목표가 되어있는 교회의 추세 속에서 교회학교가 여름성경학교만이라도 당당하게 "작은, 그러나 큰 여름성경학교"를 하는 용 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3. 성경에 말을 거는 여름성경학교
이쯤에서 여름성경학교가 성경교육을 중심으로 다시 짜여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보자. 성경이 우리 신앙의 중심 축이라는 것 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성서에 대해 "이상한 침묵" (James Smart)을 하고 있다. 기독교교육 역시 마찬가지이다.
"너무 중요하지만 너무 적게 언급되는"것이 성경이 되어 버렸다(John H. Westerhoff Ⅲ).
성경이 이 같은 대접을 받게 된 이유중의 하나는 성경을 고대의 문서로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성경은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 성경은 죽어 있고, 우리와는 무관한 문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성경은 적대시되고 있다. 성경에 대한 지나친 영적 해석으로 성경 본문의 본래 의미를 상실하기도 하 고, 자기 주장을 위해 성경의 본문을 끌어다 대는 증거 제시용으로 성경을 사용하기도 한다.6) 또는 성경에서 자기가 듣고 싶은 내 용만 취사선택하는 자세도 있다.
이 같은 자세들은 모두 성경을 왜곡시키기 쉽다. 성경은 우리처럼 피와 살을 가진 신앙인들 의 이야기이며, 그들은 성경 속 에서 아직도 살아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자세는 성경에 대한 축자적 복종이나 자의적 해석이 아닌, 살아있는 성경과의 대화여 야 할 것이다.
교회의 교육현장은 성경을 가르치려고만 했지 그것과 말을 나누려고 하지는 않았다. 서경과의 직접적인 대면이 이루어지지 않았 던 것이다. 성경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성경과의 대화는 성격이 강조되어 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본질로부터 나온다.
차일즈(Childs)가 말하듯 성경이 교회의 정경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는 중요하다. 그런데 브루지만 (Brueggemann)은 성경의 형성과정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가운데 성경의 형성과정과 교육이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음 을 말하고 있다.7) 즉,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후손들에게 교육시켜야 될 내용을 중심으로 정경화 작업을 추진해 왔다는 것이다. 특 히 그는 구약의 토라에서 창세기의 선악과, 노아의 방주, 바벨탑 이야기들의 중요한 교훈들이 어떻게 그 후 신명기 등의 문서에서 반 복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8) 이런 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육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영적으로 이스라엘의 교육공동체의 맥을 잇고 있는 교회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육 공동체이어 야 한다. 이런 면에서 교육을 교회의 일부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교육은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의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와 그 교육현실은 어떤가. 말이 성경학교이지 성경은 어디로 갔는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교육을 통해 그 정 체성을 형성하고 생명을 유지해 왔다면 교회 역시 그래야 할 것이다. 교회의 미래는 있는 가라는 물음에 교회성장적인 외형적 측면에서 의 파악이나 처방만 내세운다면 미래는 없다고 감히 말한다. 교회는 성경교육을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되고 근본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 다.
4. 튀는 여름성경학교
포스트 모던 시대의 특징은 개성화와 단순화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말을 그대로 교회에 적용한다면 이 시대는 개성 있는 교 단을 원한다는 말이 될 수 있다. 이 시대로의 흡수가 아니라 그 형식을 이용해 선교에 박차를 가하려면 교회는 나만의 것을 추구해 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우리 교단은 그런 우리만의 것이 있다. 그것은 성경의 권위, 체험적 신앙, 그리고 온전한 복음 이다.9)
여름성경학교에서도 이런 우리 교회의 특성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성경의 권위는 성경을 문자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 다 성경의 권위는 그것이 현재와 미래에 계속해서 구원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10) 그런데 그 구원은 신자의 삶과 연관돼 있기 에 자연히 성경과의 대화 또는 해석이 요구된다. 여기서 앞서 말한 문자의 권위나 자의적 해석을 삼가야 함은 물론이다. 그럼 어떻 게 할 것인가? 성경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역사와의 계속적인 대화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면 오늘날의 성경 역시 넓게는 기독교인으로 서의 비전과 좁게는 성결교회의 전통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체험적 신앙은 종종 은사 받기와 연결 지어 생각하게 된다. 만일 체험적 신앙이 성경을 떠난 감정 교양이나 영적 기술이라면 그것은 사단 적인 것이다(대중예술 등에 나타난 사단의 전략을 보라. 대단한 호소력을 지니지 않는가!).
체험적 신앙은 성경을 발판으로 든든히 서야 한다. 성경 자체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 체험에 대한 신앙적 해석이라 면, 그리고 성경에 참여할 때 성령께서 동참하셔서 죽은 글자에 생명을 불어넣는다고 믿는다면, 성경과의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체험 적 신앙이 가능할 것이다. 사실 성경을 통하지 않은 체험적 신앙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성결교회는 사중복음을 전하는 교회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죄에서 용서받을 뿐 아니라 내면의 변화 를 가져오는 성결의 은혜로 새사람 되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뿐 아니라 육체의 질병도 치료하신다는 신유와 우주적 구원을 말하 는 재림을 우리는 온전한 복음이라고 믿는다. 사중복음은 가장 성결교회 적인 것이지만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이것을 망각하거나 경시함 으로써 교회의 정체성에 일대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여름성경학교는 성경 이외의 것에 너무 분주했었다. 이제 성경을 충분히 시간을 내어 가르치는 여름성경학교가 되어야 할 것이 다. 성경은 사실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과의 만남 도는 대화가운데로 초대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일 은 어린이들에 대한 교육이 일차적이지만, 이차적으로 교회가 교육공동체가 됨으로써, 가정의 부모들이 신앙의 본을 보임으로써 함께 노 력해야 할 일이다. 그러면서 선교의 차원에서 우리 교회의 특성을 살린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여름성경학교가 성경으로 돌아 갈 대, 교회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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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교육수행자로서의 교회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다른 사람에게 반응하는 가운데 자아가 성장, 변화된다. 기독교 신앙도 본성적으로 사회적이기 때문 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과의 관계에 크게 좌우된다. 즉 인간은 관계 속에서 양육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떠 난 교육은 있을 수 없다. "기독교교육이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생기는 생명력을 염두에 둔다면 기독교교육은 교회중심이어야 한다"라 고 그라임스는 말한다. 따라서 교회는 교육수행자이다. 그런데 교육은 또한 교회의 본성과 일치하여 행해져야 한다. 이런 면에서 교회 는 수행자일뿐 아니라 목적까지 된다. 그라임스에게 있어서 교회는 교육과 이처럼 밀접하게 관련된다. 여기서는 그라임스 (Howard Grimes)를 중심으로 교회의 교육에 대해서 살펴보자.
II. 교회는 무엇인가
그의 교회 이해는 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를 묻는데 서부터 나온다. 따라서 교회이해는 교회를 교회 되게 하자는 말일 뿐 아니라 교회의 사역에 교회의 본성과 일치하는 올바른 방향을 주자는 말이 된다. 그는 교회를 세 가지 면에서 보고 있다. 즉 그 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백성, 성령의 친교가 그것이다.
1. 그리스도의 몸1)
교회는 얼핏 보아 인간의 조직이나 기구 같은 생각이 든다. 물론 그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이상 의 기구로서 인간에 의해 구성되어 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신적인 성격을 띈다. 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되 신 하나님의 말씀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육신의 확장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우선권은 하나님에게 있으며 그것은 인간이 구성하여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그 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주시는 선물이다. 이와 같이 사랑과 용서로 주어지는 선물은 세례라는 상징을 통하여 인간에게 표현되며 이 행위 를 통하여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에 용납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교회에 받아들여진 사람은 성령의 활동에 대한 개인적 응답으로서, 즉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믿고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신자는 세례에 의하여 교회에 들어와 다른 사람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한 몸 의 지체가 된다. 즉 여럿이나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나 여럿인 그리스도인을 그 머리로 한 지체인 것이다.
2. 하나님의 백성2)
이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를 하나님께 봉사하도록 불림 받은 신자들의 공동체로 보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백성의 개념은 구약에로 소급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런데 이 선택 은 자칫 특권으로 이해하기 쉽다. 사실 이 선택은 누려야 할 특권이 아니라 섬겨야 할 특별한 책임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이 선택은 우리에 의한 하나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우리 선택임을 알 수 있다. 교회라는 말의 헬라 어 ekkesia와 히브리어 quahal은 "함께 불림 받은 이들"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능동성과 인 간의 피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름은 모든 신자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교직자와 평신도의 간격이 무너진 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선교에서 모두 교직자일 수 있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은 굴레나 자유, 유대인이나 헬라 인, 안수 유무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다만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는 평신도이다.
3. 성령의 친교3)
친교라는 말은 자칫하면 인간의 사교적 성격의 활동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면 친교는 성령의 작용을 말한다.
친교는 부룬너(Emil Brunner)에게 있어서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형제를 사귐으로 하나됨이지 만 이 이상으로 친교는 참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친교라는 말의 헬라어인 Koinonia는 "다른 사람과 함께 동 참"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 친교는 바로 이 연합과 참여의 면에서의 의미이다. 이 친교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먼저 성령의 활동에 의한 응답에 의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교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친교야 말로 사역을 사역되게 하며 사역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그의 교회 이해는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백성, 성령의 친교로서 삼위 일체적 이해라고 볼 수 있 다. 이 같은 교회관은 교회의 실제 사역을 검토할 뿐만 아니라 가능케 하는 힘이 된다. 기독교교육은 바로 이 같은 교회 사역의 일 부이다.
III. 기독교교육과 교회
서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라임스는 교육이 교회관에 일치하여 수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위에서 그의 교회 이해를 보 아 알 수 있듯이 교회가 그리스도에 근거를 두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속적 친교에 참여하는 것이라면, 교육 또한 그와 같은 성격 의 것이 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우선 '기독교교육'이라는 말 대신에 좀 더 넓은 의미의 '양육'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 다.4) 이것은 그가 교회의 친교 공동체를 염두에 둘 때 틀과 같은 구조를 우려한데서 나온 말 같다. 아무튼 그는 기독교교육은 상 호관계성을 띤 사회성 속에서 성립된다고 보았다. 인간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그곳은 바로 교회 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독교교육은 교회에 의해 수행되고 바로 교회의 본성인 하나님의 부름과 만나며 응답하도록 도와주는 곳 인 교회에서 발생된다.
또한 기독교교육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에로 이끄는 것이므로 그 방법에 있어서 종래의 시행착오설이나 조건반사설, 암기 방식 등과 같은 학습법은 경시될 수밖에 없다.5) 그는 친교로서의 교육은 경험에 의해 가능하다고 하면서 그 경험을 인격적이고 창의 적인 만남이라고 말한다. 그 만남은 물론 생명의 주님과의 만남이며 이 만남 속에서 진리를 발견케 되는데 이것은 변화시키는 진리 가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교육은 다만 일어나기를 바랄 수 있는 만남에 대한 준비여야 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만남은 신적 자아 와 인간적 자아,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포함된 그룹의 자아를 포함한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교육은 주로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 을 뜻한다. 물론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관계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교육은 교회의 모든 이 가 하나님과의 창의적 관계에 들어오고 관계를 설립하게 하는 과정이다.
또한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기독교교육은 기독교 공동체 안의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6) 그는 여기서 영아 에서 시작하여 장년에 이르기까지 친교, 만남, 응답 등의 교회적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특기할 내용들을 기술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교육은 가족을 강조한다.7) 여기서 우리는 그가 가정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가족을 강조하고 있다는데 유의해야 할 것이다. 즉 가정의 회복이 아닌 가족단위로서의 교회참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친교, 만남, 응답의 색채를 띈 기독교교육은 그 교육내용에 있어서도 지식 위주의 내용보다 학습상황에서 일어나는 경험이 중 시된다.8) 즉 말보다는 참여가 중요하며, 말씀, 관계, 행위가 모두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학습자료를 전혀 무시하는 것 은 아니다. 성경, 교회사, 교리 등도 구석적 공동체 안에서 사랑, 수용, 용서 속에서 전달될 때, 친교의 가능성을 창출할 수 있 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결국 그라임스에게 있어서 기독교교육은 무엇인가?9) 그는 기독교교육을 정의하기를, "기독교교육은 전통적 교육 의 지식전달 위주의 교육도 아니고, 자유주의 교육의 도덕교육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앙만 내세우는 회심위주의 교육도 아니라고 하면 서 기독교교육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만남에로 이끌고 전 삶에서 이 만남의 의미를 규명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교육은 바로 하나님과 사람과의 창조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창조적 만남은 그룹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누누이 인간의 사회성을 강조하면서 그 사회성의 개발의 방편으 로 가장 좋은 것이 바로 소그룹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교육의 현장은 바로 이 소그룹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면 여기서 교사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가? 교육이 만남이라면 바로 이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된 사람과의 만남 을 통해 그룹 내에서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교사의 역할은 하나님의 성령의 인간통로가 된다. 그러므로 교사는 가르치기보다 학생 을 위해 도움이 되어질 수 있는 학습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기독교교육의 과정은 쉐릴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그를 인용하고 있다. 쉐릴은 기독교교육의 목표인 만남을 성취하기 위하 여 1. 기독교 공동체에 소개, 2. 성경과 교회사, 3. 계시에 대한 응답의 준비 성, 4. 함께 의도적 행위에의 참여, 5. 위기 때의 상담을 들고 있다.10)
이와 같은 그라임스의 기독교교육은 양육과 전도, 케리그마와 디다케의 이분법을 불가능하게 한다. 양육이 만남이라면 전도 또 한 만남이므로 시간차이는 있어도 본질적으로 같으며 만남으로서의 디다케는 그리스도와의 대면시키는 케리그마와 별반 다를 것이 없겠 기 때문이다.
또한 만남은 인간의 조작이나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남을 위한 의도적 조작은 불가능하다. 만남은 어느 때,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므로 다만 준비시킬 수밖에 없다.
IV. 평신도 교육의 요소
제임스 쉐퍼(James R. Schaefer)에 의하면 평신도 교육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 려면 6가지의 요소가 필요하다고 한다.11) 여기서 이 6가지 요소를 그라임스의 내용으로 설명해보 자. 우선 목적 설정이다. 이것은 평신도의 정체성 문제와 관련된다. 평신도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평신도 가 교회 조직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평신도의 성격이라고 보는 오해이다. 교역자의 권위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같이 일 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으로 교역자에 맞서는 입장이다. 둘째, 하나님께 나가는데 교역자의 도움이 불필요하고 스스로 나갈 수 있다 고 본다. 이것은 교역자와는 무관한 입장이다. 셋째, 영적 지도자의 권위문제로 권위에 대한 이해 문제와 관련된다.
그러나 평신도는 교역자와 대칭 되는 입장에서의 정체성 확인이 아니라 오히려 "소명의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확인해야 할 것 이다. W.C.C.의 제 2차 회의는 이 평신도의 역할과 성격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말하고 있 다.
 1. 교회가 세계에 들어가 일상적 접촉을 하고 세상과 더불어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고 나눌 수 있는 것은 평신도를 통해서 이며
 2. 교회가 세상에서 중생과 구속의 힘을 발휘하는 것은 평신도의 생활과 사역에서이다.
그러므로 평신도 교육의 목적은 이런 뜻을 포함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목적설정에 이어 두 번째 평신도 교육의 요소는 인적 자원이다.12) 평신도가 세상과 교회에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는 훌륭하게 교육되어야 한다. 교육은 평신도이며 지도자인 사람들에 의해 실행되어지는데 그 교육은 평신도 지도자 훈련이 된다. 그라 임스는 지도자를 방임형, 독재형, 민주형으로 나누고 평신도의 지도자 상은 민주형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거기에 더 첨가될 것이 있다 면 지도자의 신앙, 즉 헌신이 요구된다. 이들에 대한 훈련은 주로 기독교 신앙 공동체 응답의 중심인 예배를 통해 또한 그룹생 활, 기타 교육프로그램이나 신학교육기관에 위탁교육하는 식의 방법이 있다.
평신도 교육의 세 번째 요소는 범위이다. 그라임스는 교회의 활동범위를 몇 가지로 크게 나누고 있는데 교회의 사역이 평신도 의 사역이라면 평신도 교육의 범위를 설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봉사를 들고 있다. 이것은 교육지도자로부터 노인이나 기도그 룹 모임까지 그 형태가 다양하다. 두 번째는 전도이다. 이 전도는 교리나 설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생활로서의 전도여야 한다. 셋째 는 사회적인 봉사를 들고 있으며 그밖에 선교, 에큐메니칼 운동까지 들고 있다.
평신도 교육의 네 번째 요소는 과정이다.13) 그라임스는 교육과정을 성경, 교회사, 신학, 기독교 삶의 의미, 예배, 그 리고 인간이해, 지도자론, 교육방법론 등을 들고 있다. 이 모든 교육과정은 늘 참여와 만남을 염두에 두고 검토되어야 한다.
다섯째는 학습의 장이다. 기독교교육은 그룹 속에서 효과가 큰데, 평신도 교육도 이 (소)그룹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 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평신도 교육은 이 "교회내의 교회"(churches in church)에 의 해 가능할 것이다. 이 소그룹에는 모든 이가 참여하여야 하며, 과제 중심의 그룹이 되어야 하며, 최대한의 자유와 융통성이 보장되어 야 하며, 구성원의 욕구를 채울만한 크기여야 할 것이다. 결국 교회의 이 소그룹은 그룹원의 광범위한 참여를 격려할 수 있는 것이어 야 한다. 주의할 것은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사라지게 되는 위험이나 그룹이 친교를 창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을 버려야 한 다. 왜냐하면 그룹의 친교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평신도 교육의 요소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프로그램의 성격에 따라 또 개교회의 형평과 여건에 따라 달리 고려되 어야 한다고 본다. 그라임스는 15주 정도의 프로그램과 4년 정도의 장기 프로그램도 예를 들고 있 다.
V. 여름성경학교의 방향
1. '분주'와 '좋은 몫'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 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들였다.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 생이 있다. 마리아는 주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 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주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눅 10:38-42, 표준새번역)
위의 본문(특히 41-42절)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이다. 모파트(Moffatt)는 음식에 신경 쓰는 것 보다 예수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KJV는 한가지 필요한 것이 영적 삶에 대한 관심이라 고 본다. RSV는 마르다가 너무 접대에 신경을 쓰는데, 소박한 환대로 충분하다는 뜻으로 본다.1)
그러나 소박한 환대의 목적 또는 그로 인한 여유가 무엇을 위한 시간이냐고 물을 수 있다. 짧은 생애를 굵게 사셔야 할 예 수께서 한가로운 잡담 시간을 의도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몫'은 말씀을 듣는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본문은 일회적인 일화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마르다의 '분주'와 마리아의 '좋은 몫'은 계속되고 있다. 교회의 목 회 현장에서뿐 아니라 교회학교 현장에서도 그런 현상은 흔히 볼 수 있다. 교회는 수많은 예배와 기도회와 회의와 행사로 분주하지 만 말씀을 배우는 좋은 몫은 상실한 지 오래다. 교회학교는 말씀을 가르치는 좋은 장(場)으로 택함을 받았지만 영성 없는 노래(나 는 찬송이나 복음송이라고 하지 않는다)나 원시적(구태의연하다는 뜻에서) 프로그램에 분주하다. 이런 현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 는 곳이 소위 여름성경학교이다.
2. 작으나 큰 여름성경학교
본래 여름성경학교는 주일 아침의 한두 시간의 교육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교회 지도자들이 방학기간을 이용해 교육시간을 확장 시킨 데서 유래되었다.2) 그러므로 여름성경학교의 특성 중 하나는 연장된 교육시간이다. 여기에 비추어 볼 때 교회는 어떤가? 어 린 유치부니까 주일을 포함에서 이틀, 유 초등부라도 주일 오후에 시작해서 수요일 오전에 끝나는 스케줄이 대부분이다. 그것도 하 루 종일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비는 시간을 둔다.
초등학교 학생의 경우 하루에 평균 6시간 정도를 학교에서 보낸다. 교회의 여름성경학교의 교육시간을 초등학교 의 교육시간과 비교하는 것은 초등학교보다 더 많은 교육시간을 갖자는 말도 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전통적인 여름성경학교의 교육 시 간에는 훨씬 못 미친다. 본래 여름 성경학교는 1, 2주 동안 계속되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교육시간을 많이 갖는 것은 낭비이다. 거기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어야 한다. 올즈 (L. C. Olds)는 교회학교의 시간 계획의 원칙을 세 가지로 말한다.3) 첫째, 시간을 좀더 효 과적으로 배당한다. 둘째, 중요한 시간을 더 늘리도록 한다. 셋째, 신앙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위의 시간 계획의 원리에서 여름 성경학교의 시간 계획에 대한 시사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여름성경학교(보통 때 도 마찬가지이지만)는 시간을 규모 있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든 앞의 시간은 준비(준비찬송에서부터 장내 정돈 까지)하느라 허비하고, 뒤의 시간은 시간을 넘겨 다른 프로그램에 차질을 빚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둘째, 여름성경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무엇일까? 이미 (여름)'성경'학교라는 명칭에서 자명하듯, 여름성경학교 는 말 그대로 성경말씀을 배우는 학교이다. 그런데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말씀은 뒤로 밀리고 그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나서 있 는 상태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셋째, 교회교육이 목표로 하는 신앙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신앙은 가르칠 수 없는 신비에 속한 영역이다. 신 비는 체험될 뿐 언급되지는 않는다. 신앙의 자원인 성경은 신비의 책이다. 신비 앞에서 언어는 설자리를 잃는다. 신비의 파악은 신비 와의 만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다행히 신비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통해 전달될 수 있다. 마리아 몬테소리 (Maria Montessori)가 상징, 특히 자연상징에 대해 언급한 것은 문제를 제대로 본 것이다. 신앙체험 이 가장 활발히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곳은 가정일 것이다. 이미 조직화되고 대형화된(그렇지 않은 교회더라도 그런 것을 지향하기 에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생동감 있는 신앙체험의 장이 될 수 없다. 교회에는 신앙이 없고 조직이 있다.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싶 은 곳이 가정이다. 사실 신앙은 배울 수 없는 것이라 하였지만 함께 동거하는 사람의 모범을 통해 배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단적 인 예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동거이다.4)
어린이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곳은 어디인가? 그것은 가족이고 가정이다. 특히 부모는 어린이에게 가 장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보여지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러나 어린이에게 신앙의 본이 될 만한 부모가 얼마나 있겠느냐가 문제이다.
여기서 교회학교는 부모교육의 기회를 보아야 한다. 여름성경학교 기간이든 언제든 교회가 어린이의 신앙체험과 성장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모들을 교육하여 함께 살아가는 가정으로 돌려보낸다면 어린이들은 변화될 것이다.
변화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만물 중에 가장 변화되기 어려운 사람의 마음은 예수의 경우도 3 년을 동거함으로 겨우 이루어졌다. 네비게이토(Navigator) 같은 선교단체가 최소한 한 달에서 5년까지의 공동생 활 훈련을 행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여름성경학교가 점차 형식적이 되어 가는 이유중의 하나는 어린이들의 숫자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마디 로 신명이 안 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 대상인 어린이의 숫자가 줄었다고 해서 교육의 내용이 줄어든 것은 아닐 것이다. 더구 나 어린이의 숫자가 줄었다고 해서 영혼에 대한 애정이 줄어도 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사실 누가 한 명의 영혼이라도 자신 있 게 훈련할 수 있다고 장담하겠는가.
이런 면에서 어린이의 숫자가 준 것과 교육의 성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다. 오히려 적은 수를 잘 가르치도록 해야 할 것이 다. 예수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떠났을 때, 예수께서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6, 67). "필요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주님은 수적인 확보를 위하여 질적인 수준을 희 생치 않으신 분이다."5) 양이냐 질이냐는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성경은 분명히 양보다 질을 우선한다. 이런 차원에서 대 형화가 지상목표가 되어있는 교회의 추세 속에서 교회학교가 여름성경학교만이라도 당당하게 "작은, 그러나 큰 여름성경학교"를 하는 용 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3. 성경에 말을 거는 여름성경학교
이쯤에서 여름성경학교가 성경교육을 중심으로 다시 짜여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보자. 성경이 우리 신앙의 중심 축이라는 것 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성서에 대해 "이상한 침묵" (James Smart)을 하고 있다. 기독교교육 역시 마찬가지이다.
"너무 중요하지만 너무 적게 언급되는"것이 성경이 되어 버렸다(John H. Westerhoff Ⅲ).
성경이 이 같은 대접을 받게 된 이유중의 하나는 성경을 고대의 문서로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성경은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 성경은 죽어 있고, 우리와는 무관한 문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성경은 적대시되고 있다. 성경에 대한 지나친 영적 해석으로 성경 본문의 본래 의미를 상실하기도 하 고, 자기 주장을 위해 성경의 본문을 끌어다 대는 증거 제시용으로 성경을 사용하기도 한다.6) 또는 성경에서 자기가 듣고 싶은 내 용만 취사선택하는 자세도 있다.
이 같은 자세들은 모두 성경을 왜곡시키기 쉽다. 성경은 우리처럼 피와 살을 가진 신앙인들 의 이야기이며, 그들은 성경 속 에서 아직도 살아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자세는 성경에 대한 축자적 복종이나 자의적 해석이 아닌, 살아있는 성경과의 대화여 야 할 것이다.
교회의 교육현장은 성경을 가르치려고만 했지 그것과 말을 나누려고 하지는 않았다. 서경과의 직접적인 대면이 이루어지지 않았 던 것이다. 성경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성경과의 대화는 성격이 강조되어 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본질로부터 나온다.
차일즈(Childs)가 말하듯 성경이 교회의 정경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는 중요하다. 그런데 브루지만 (Brueggemann)은 성경의 형성과정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가운데 성경의 형성과정과 교육이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음 을 말하고 있다.7) 즉,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후손들에게 교육시켜야 될 내용을 중심으로 정경화 작업을 추진해 왔다는 것이다. 특 히 그는 구약의 토라에서 창세기의 선악과, 노아의 방주, 바벨탑 이야기들의 중요한 교훈들이 어떻게 그 후 신명기 등의 문서에서 반 복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8) 이런 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육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영적으로 이스라엘의 교육공동체의 맥을 잇고 있는 교회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육 공동체이어 야 한다. 이런 면에서 교육을 교회의 일부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교육은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의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와 그 교육현실은 어떤가. 말이 성경학교이지 성경은 어디로 갔는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교육을 통해 그 정 체성을 형성하고 생명을 유지해 왔다면 교회 역시 그래야 할 것이다. 교회의 미래는 있는 가라는 물음에 교회성장적인 외형적 측면에서 의 파악이나 처방만 내세운다면 미래는 없다고 감히 말한다. 교회는 성경교육을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되고 근본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 다.
4. 튀는 여름성경학교
포스트 모던 시대의 특징은 개성화와 단순화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말을 그대로 교회에 적용한다면 이 시대는 개성 있는 교 단을 원한다는 말이 될 수 있다. 이 시대로의 흡수가 아니라 그 형식을 이용해 선교에 박차를 가하려면 교회는 나만의 것을 추구해 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우리 교단은 그런 우리만의 것이 있다. 그것은 성경의 권위, 체험적 신앙, 그리고 온전한 복음 이다.9)
여름성경학교에서도 이런 우리 교회의 특성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성경의 권위는 성경을 문자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 다 성경의 권위는 그것이 현재와 미래에 계속해서 구원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10) 그런데 그 구원은 신자의 삶과 연관돼 있기 에 자연히 성경과의 대화 또는 해석이 요구된다. 여기서 앞서 말한 문자의 권위나 자의적 해석을 삼가야 함은 물론이다. 그럼 어떻 게 할 것인가? 성경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역사와의 계속적인 대화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면 오늘날의 성경 역시 넓게는 기독교인으로 서의 비전과 좁게는 성결교회의 전통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체험적 신앙은 종종 은사 받기와 연결 지어 생각하게 된다. 만일 체험적 신앙이 성경을 떠난 감정 교양이나 영적 기술이라면 그것은 사단 적인 것이다(대중예술 등에 나타난 사단의 전략을 보라. 대단한 호소력을 지니지 않는가!).
체험적 신앙은 성경을 발판으로 든든히 서야 한다. 성경 자체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 체험에 대한 신앙적 해석이라 면, 그리고 성경에 참여할 때 성령께서 동참하셔서 죽은 글자에 생명을 불어넣는다고 믿는다면, 성경과의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체험 적 신앙이 가능할 것이다. 사실 성경을 통하지 않은 체험적 신앙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성결교회는 사중복음을 전하는 교회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죄에서 용서받을 뿐 아니라 내면의 변화 를 가져오는 성결의 은혜로 새사람 되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뿐 아니라 육체의 질병도 치료하신다는 신유와 우주적 구원을 말하 는 재림을 우리는 온전한 복음이라고 믿는다. 사중복음은 가장 성결교회 적인 것이지만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이것을 망각하거나 경시함 으로써 교회의 정체성에 일대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여름성경학교는 성경 이외의 것에 너무 분주했었다. 이제 성경을 충분히 시간을 내어 가르치는 여름성경학교가 되어야 할 것이 다. 성경은 사실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과의 만남 도는 대화가운데로 초대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일 은 어린이들에 대한 교육이 일차적이지만, 이차적으로 교회가 교육공동체가 됨으로써, 가정의 부모들이 신앙의 본을 보임으로써 함께 노 력해야 할 일이다. 그러면서 선교의 차원에서 우리 교회의 특성을 살린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여름성경학교가 성경으로 돌아 갈 대, 교회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