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내 뜻대로

김우영

시카고 시내를 다니다 보면 길가에 세워놓은 자동차 바퀴에 노란 색깔의 철갑 족쇄가 채워져 있는 걸 자주 보게 된다. 이름하 여 ‘덴버 부츠’라 했던가? 주로 주차 위반으로 몇 번씩 티켓을 받고도 부과된 벌금을 내지 않아 강제로 벌칙이 집행되어 꼼짝 못하 게 된 차량들의 모습을 시내에서 볼 수 있다. 벌금을 내지 않는 한 자동차 바퀴에 채워진 족쇄는 쉽게 벗어버릴 수 없게 되어 있 다. 수갑 대신 발에 족쇄가 채워져, 감방 대신 길가에 붙잡혀 있는 죄수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이 자동차는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 고 그대로 길가에 세워놓을 수가 없다. 계속 세워두면 다시 티켓이 발부되고 나중에 차를 견인하면 벌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주 차 위반 티켓을 받으면 제 때에 벌금을 내는 것이 경제적 손실을 그나마 줄일 수 있다. 아마도 살인죄는 변호사를 통해 무죄 석방 도 가능하지만, 시카고 시내에서 교통 위반 티켓을 받으면 그냥 풀려나기는 힘들다. 

나는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족쇄가 채워진 자기 자동차의 트렁크를 열고 필요한 짐을 챙겨 가는 걸 보았다. 아마도 당장은 벌 금을 지불할 능력은 없으니 우선 필요한 짐을 챙겨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실 이런 광경을 보노라면 아무리 여 러 번 주차 위반을 했더라도 그런 식의 벌칙 부과는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더구나 날마다 일을 다녀야 하는 픽업 트럭에 여 러 가지 장비가 얹혀진 채 묶여있는 걸 보면 그들이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벌금도 낼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안타까움마저 들 때 가 있다. 

만약에 자기 차에서 짐을 챙겨갔던 그 젊은이가 아침에 나와보니 저절로 족쇄가 풀려있었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재수 좋다’ 면서 손뼉을 쳤을 수도 있고 입버릇처럼 “Thank&nbspyou !&nbspGod"라고 한 마디 하고 신나게 차 를 몰고 가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발이 족쇄에 채워진 채 빌립보 옥중에 갇혀있던 바울과 실라가 찬양과 기도로 밤을 지새고 있었을 때 갑자기 옥터가 움직이 고 문이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풀린 기적이 일어났다. 그들을 지키던 간수가 자다가 깨어 감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 들이 도망한 줄 알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고 했을 때 바울이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다’고 크게 소리질렀다고 성경 에 기록되어 있다(행&nbsp16:16-34). 

사실 바울과 실라가 ‘아멘, 할렐루야’와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열린 감옥문으로 유유히 걸어나와도 누가 감히 이의 를 제기하겠는가?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이 있을지 모르니 더 기다려보아야 한다’고 말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감옥 담당자들 도 그들을 다시 감옥에 가두는 것조차 두려워 그대로 석방했을지 모를 일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그 뜻을 자신에게 적 용시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임을 알 수가 있다. 과연 이 기적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억울하게 투옥되어 고생하 는 복음의 사역자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서 풀어주는 것이었을까? 하나님의 마음에 왜 그런 긍휼히 여기심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바울 과 실라가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감옥문을 나섰더라면 간수는 자결했을 것이고 간수와 그의 가족에게 비극이 닥쳤음은 물론이 고, 복음에 의한 구원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감옥에서 풀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하더라도 결 국 그들은 탈주범이 되어 합법적인 신분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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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기적으로 옥문이 열리고 그들의 발에 채워진 족쇄가 벗겨진 건 그들로 하여금 감옥에서 빨리 나가라는 뜻이 아니라 간 수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거기 있었다고 봐야 한다. 결과적으로 바울과 실라를 고문하고 감금했던 것은 불법이었다 는 것도 알게 해 주었다. 바울과 실라가 합법적인 신분을 가지고 유유히 감옥을 나온 것도 물론 하나님의 뜻이었다. 

우리가 이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우선 감옥에서 풀려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할 것이다. 이런 기도는 오로지 내 가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하나님의 뜻을 내 유익에 맞춰놓고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유익 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버릇에 길들여져 있다. 바울과 실라가 밤에 찬양과 기 도를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만 그들은 적어도 ‘우리를 속히 이 감옥에서 풀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 다. 만약 그렇게 기도했다면 감옥문이 열렸을 때 그들은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뛰쳐나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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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우선 자기 중심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의 뜻 이었다면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뜻이 무엇일지를 생각해 보는 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첩경이 다. 주님께서 부활 이후 갈릴리에서 베드로를 만나 그의 사랑을 확인하시고 그의 노년의 원치 않는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 씀하신 걸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이익이나 평안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염두 에 둘 필요가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사도 바울 일행이 두로에 상륙해서 제자들을 찾아 이레를 머물고 있었을 때이다. 제자들 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그들은 제자들의 말을 무시하고 배에 올랐다. 바울에게 닥칠 위험 을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대로 떠나 가이샤라에 이르렀을 때에도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 신의 수족을 잡아매고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말하 자 거기 있던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는 걸 보게 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울 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면서 자신 의 소신를 밝히고 있다(행&nbsp21:4-14). 사도 바울은 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위험의 경고를 외면하고 오히려 죽 기를 각오했는가? 바욊¸은 하나님의 뜻이란 곧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 이 되사 고난과 죽임을 당하셨던 것도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 뜻에 초점을 맞추고 살다 보니 자신에 게 보여주신 위험의 경고는 피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바울은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 을 부르셨다고 믿고 살았다. 바울은 자신의 안전을 빼앗길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뜻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살아왔다. 

우리들이 일상의 삶 속에서 이것저것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경우가 많은데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묻는 것일 까? 잘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아닌가? 베드로가 주님의 죽음을 만류하다가 혼 이 난 것은 죽음을 피하고 싶은 베드로의 속마음 때문이지 않을까? 베드로가 우리들의 속마음을 대변해 준 것은 아니었을까? 재물이 나 명예나 권력을 가지고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하 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는가? 또 어떤 병들고 가난한 거지가 ‘하나님, 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다 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는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을 것이다. 인류가 범죄하고 하나님과 나뉘어져 죽음에 처했 을 때, 하나님의 계획의 모든 것, 하나님이 세우신 뜻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아니었던가? 세상에 사는 자녀 가 아버지의 뜻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자녀들에 대해 아무런 뜻을 갖지 않은 아버지가 어디에 있겠는가? 아버지의 뜻을 아 는 자녀란 그의 성공이나 실패에 관계없이 아버지와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녀여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사는 사람 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이다. 


김우영 / 재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