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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서와 메시아 시대"
[들어가는 말: 해석의 원칙]
예언서에서 메시아 사상을 찾아 논하려면 일정한 해석학적 원리가 필요하다. 구약과 함께 신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정 경(正經, canon)으로 삼는 기독교 신앙공동체는 성경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 다. 기독교는 이른바 히브리 성경만을 자신들의 경전으로 삼는 유대교와는 달리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동일한 창조주, 구속주 하나님 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며 그의 최종적인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사건을 통해 그가 말씀해야할 모든 것을 다 말씀하셨다고 믿는다. 이 것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 바로 히브리서 1:1-2이다. 구약에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다양한 선지 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통해 이 모든 '마지막 날들'에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러 한 선언은 궁극적으로 성경해석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요점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첫째는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주체는 하나님이 라는 사실이며, 따라서 성경 해석은 하나님 중심적 해석을 요청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구약에서 출발하여 신약에 이르게 되는 구원사 적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을 구속사에 따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할 것을 요청한다. 시드 니 그레이다누스는 이 두 가지 관점의 융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구약 해석에 있어서 "그리스도 중심적 방법론은 하나님 의 왕국을 지상에 건설하려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그리스도 안에 그 초점이 모아진다는 사실을 정당하게 평가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 면 하나님의 모든 경륜(whole counsel of God)을 구원사의 전개에 따 라 이해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조명하려는 것이 구약 성경에 대한 정당한 구속사적-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 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학적 원리를 가지고 구약의 예언서를 살펴보아야만 우리는 예언서를 정당하게 메시아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 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메시아 사상은 구·신약 성경의 정경적 구조에 따라 통일되고 유기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고 이해해야 한 다. 이것은 해석의 출발점인 동시에 결과이기도 하다.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약속들은(메시아 약속을 포함하여) 점진적인 성취 로 나아간다. 다시 말해서 그 약속들은 어느 특정한 시기에 단번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사가 전개되어 감에 따라 점점 채워 져 가며 나아가는 것이다. 윌리암 라솔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예언은 그것이 하나님의 구속 목적의 어 떤 부분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채워질 수 있으며, 또한 완전히 성취될 수 있다. 그래서 예언은 완전히(full) 채워질 (filled) 때 성취되는(fulfilled) 것이다. 예언을 이러한 의미로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예언이 하나 의 성취 이상 가능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완전히 성취될 때까지 더더욱 채워질 수 있다."
이것을 일명 '예언자적 원근법' 혹은 '예언적 원근 통시법'(prophetic foreshortening)이 라 부른다. '예언자적 원근법'이란 앞으로 여러 시대에 걸쳐 되어질 일들(원근, 遠近)을 하나로 묶어 말하는 예언자들의 문학적 습 성을 가리키는 표현구이다. 이것을 다르게는 '예언자적 전망'(prophetic perspective)이라고도 부르는 데, 장차 일어날 수많은 사건들을 하나의 환상 속으로 바라보는 현상을 가리킨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멀리 있는 사건들과 가까운 미래 에 있을(곧 일어날) 사건들의 이 두 경우가 마치 매우 가까이 붙어있는 것처럼 통시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예로 들 어 멀리 있는 산봉우리들을 쳐다봤을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실제로 가서 보면 서로 수백 미터씩 떨어져 있는 봉우리들이 멀리서 보 면 마치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와 같은 이치이다. 이것은 예언서에 나타난 특정한 (메시아)예언들이나 약속들은 일차적으로 역사 의 지평 안에서 점진적으로 성취되어 가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全) 시대에 걸쳐 성취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 석자들은 구약의 약속 구절들을 취급할 때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예언서에 나타나는 메시아 사상은 장차 도래할 메시아 시대, 그 시대를 이끌어갈 메시아적 인물, 그 리고 메시아 시대의 중심부로서의 새로운 성전 등과 같은 주제들과 연관하여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예언서 에 나타나는 메시아 사상은 종말론적·구속사적·기독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할 성질의 것이라는 점이다.
[역사적 배경으로 본 '성전 재건축'의 의미]
이 글은 학개서의 특정한 본문들을 중심으로 메시아 사상을 기술하려 한다. 그러나 학개서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 지방으 로 귀환하여 무너진 옛 솔로몬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상황아래서 선지자 학개가 선포한 말씀들을 수록하 고 있으므로 그의 메시아 사상 역시 그가 사역했던 시대적 상황과 배경, 특별히 '성전 재건축'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떠나서는 충분 히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아래의 서술문을 통해 '메시아 사상'과 '성전'이 서로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는 사실이 독자들에게 인식되기를 바란다.
주전 587년경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과 그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참으로 무 참하게 함락된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신앙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비통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가나안이라 불리는 약속의 땅, 그 땅 의 중심부인 예루살렘 도시, 그리고 하나님의 거처로 알려진 예루살렘 성전, 이 세 가지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가시적(可視 的) 증거물들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모두 일순간에 사라지고 만 것이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초기 이스라엘의 역사 기술에 의하면, 민족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보잘것없던 히브리 민족은 언약의 하나님 야 웨의 손에 이끌려 노예의 집이었던 애굽에서 나와 그야말로 파란 만장한 광야 생활을 거쳐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에 도착하 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야웨의 토라(Torah)를 따라 살 수 있는 축복된 삶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가 적나라하게 보 여주듯이, 그들의 정치 및 종교 지도자들은(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야웨의 가르침(토라)을 따르는 대신 다른 헛된 것들(우상) 을 따르고, 그들의 백성들을 잘못 인도하는 치명적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하나님의 토라에 의해 운영되어야할 사회는 공의와 정의 대 신 불의와 부정이 만연되었고, 친절과 신실 대신에 압제와 폭력이 난무하였으며, 종교는 심하게 부패하여 오물 썩는 냄새가 성전 안뜰 에서부터 진동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 중앙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정권 유지에 집착한 왕들과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 랑에 대한 아무런 열정도 없는 관료적인 제사장들, 그리고 세속적 허영과 물욕으로 가득 찬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 도 불구하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애(仁愛)하신 하나님은 인내하셨고, 바야흐로 참 선지자들의 등장은 배역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 님의 인내의 표현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부지런히 보내시어, 그들(배역한 자들)을 엄하게 책망 도 하시고, 재앙으로 협박도 하시며, 때로는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설득도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기에는 너무나 멀리 가있었 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그같이 멀리하면서 입술로는 그분을 계속해서 찬양하고 경배하였으니 그 얼마나 이기적 이었던가!
특별히 그들의 제의(祭儀)적 열성과 성전집착 현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이런 의미에서 성전은 그들의 삶의 중심부에 서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떠난 성전이 무슨 그 존재목적이 있으며, 하나님과 관계없는 종교적 열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특별 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제의에 대한 주전 8세기 선지자들의 준엄한 질책과 심판 선언은 온몸에 전율 을 느낄 정도이다(아모스, 이사야, 호세아, 미가). 성전제의에 대한 질타와 심판 선언은 일세기 후에도 계속된다(예, 예레미야 의 "성전설교"). 마침내 하나님은 주전 587년 예루살렘 함락이라는 민족적 비극을 통해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정체성 을 확인한다고 믿었던 이상의 세 가지 것(땅, 도시, 성전)을 모두 몰수해 버리신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그러 한 보이는 것들이 아니었다. 실상 그들이 '상실'한 것은 '야웨 하나님'과 '야웨 하나님의 길'이었다. 토라를 통해 보여주었던 야 웨의 길을 상실한 것이야말로 진정한 상실이었다. 이것이 주전 587년에 발생한 예루살렘 함락과 그 성전 폐허에 대 한 신학적 의미일 것이다. 성전 폐허는 단순히 건물상실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그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떠나심'(에스겔서) 에 대한 부정적 결과일 뿐이었다. 인제 그들은 이방의 땅으로 '추방'(exile)되어 그곳에서 기나긴 세월을 참회와 재활의 시간으 로 보내야만 했다.
성경은 이러한 추방기, 곧 바벨론 포로기를 가리켜 '복역의 때'라고 말한다(참조, 사 40:2). 실형을 선 고받은 죄수가 감옥에서 형기를 채우는 기간으로 말이다. 그러나 마침내 시간이 흘러 이스라엘은 출소하게 된다. 하나님의 손에 의 해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곱절'이나 받은 이스라엘은 비로소 귀향(歸鄕, homecoming)길에 오르게 되 는 것이다. 형기를 마친 복역수에게 '귀향'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으랴! 주전 538년경에 바벨론을 정복한 페 르시아의 왕인 고레스는 그 동안 바벨론에 거주하고 있던 이스라엘인들을 그들의 고국으로 돌려보내기로 작정하고 칙령을 내린다. 꿈에 도 그리던 귀향!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라고 탄식하던 때가 언제였던가?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고국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물론 바벨론에서의 생활도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말이 70년이지 '꼭 들어 찬 수형 기간'이었다고 하는 편이 나으리라. 허나 모두가 귀국 길에 오른 것이 아니었던 것은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미 바벨론 제 국 안에 정착하였고, 그들 나름대로 생활터전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태어난 이민 2세들 중 상당수가 그대 로 남아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으로 강제로 이주해온 사람들 중 또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들의 자손들과 함께 귀국 길 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 앞에는 신앙적 지도자들이 있었다. 바벨론으로부터의 출국과 유대 땅으로의 귀향 은 마치 제 2의 출애굽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출애굽의 역사처럼 출바벨론의 역사도 모세와 아론, 여호수아와 같 은 지도자들을 갖고 있었다. 스룹바벨, 느헤미야, 에스라, 학개, 스가랴와 같은 주님의 '종들'이 그들이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바벨론 거주 유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다시 짓도 록 영을 내린다(에스라 1:2-4 6:3-5). 스룹바벨의 영도 아래 약 5만 명 이 나 되는 유대인들이 귀국하여 성전을 짓기 시작한다. 대략 2년 후 그들은 성전의 기초를 놓고 크게 기뻐하게 된다 (스 3:8-11).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그 지역에 이미 거주하고 있던 사마리아인들과 그들의 지원 세력들의 강력 한 저항에 봉착하게 된다. 성전을 재건축할 경우 발생하게 될지도 모르는 정치적 종교적 이슈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은 유대인들 의 성전 건축 계획을 반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결국 주전 520년경 유대인들은 성전 재건축 계획을 멈추어야만 했 다. 그 일은 다리오 대왕이 페르시아의 왕으로 즉위한 지(주전 522년, 에스 라 4:1-5, 24) 2년 후에 있었던 일이었다. 선지자 학개는 바로 이때, 즉 다리 오 대왕 즉위 2년, 성전 재건축이 난관에 부딪치게 된 시기에 네 번에 걸쳐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시작하였 다. 현대 달력으로 하자면 주전 520년 8월 29일(학 1:1) 과 10월 17일(2:1)에 각각 한번씩, 그리고 12월 18일에 두 번 이었다(2:10, 20). 그는 스가랴와 함께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유대 포로민들을 격려하여 폐허된 예루살 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한다(참고, 스 5:1-2 6:14). 학 2:3의 기록에 의하 면 학개는 솔로몬의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그의 노년기에 성전재건을 위 해 마지막 열정을 불태웠던 것처럼 보인다.
그의 메시지의 내용은 주로 성전 건축에 관한 것으로, 성전 건축에 무관심하고 나태한 유대인들을 질책하며 비록 어려운 환경 과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성전을 다시 건축하라고 격려한다. 그리고 그들이 지으려 하는 성전의 영광이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위대 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시키고 있다. 돌아온 유대인들이 제한적인 인적, 물질적 자원을 가지고 있고, 또한 페르시아라는 세계적 제 국 아래 복속(服屬)되어 있는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현재의 세계 질서를 개편하실 것이고, 지금 지으려는 성전의 영광을 통 해 자신(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드러내실 것이라고 선지자 학개는 선포하고 있다.
[메시아적 본문 해설]
이상의 것을 종합해 본다면, 학개의 예언은 특별히 두 개의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는 듯하다: (1) 하나는 장차 나타날 새 로운 성전의 우아함과 찬란함, 그리고 그 성전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이방나라들의 공헌에 관한 것이고(2:6-9), (2) 또 다 른 하나는 스룹바벨을 다윗 가문에 위탁된 약속들을 이어갈 메시아적 후사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다(2:20-23). 학개서 가운 데 바로 이 두 부분이 우리의 관심사인 메시아 시대와 관련 있는 본문들이다. 아래는 두 본문에 대한 성경신학적·기독론적 해설이다.
I. 새로운 성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 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 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전(殿)의 나중 영광이 이전(以前)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 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6-9, 한글 개역)
본문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는 여기에서 언급되는 성전이 학개 당대에 세워질 성전을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장차 나타 날 종말론적 성전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이다. 문맥상 학개의 메시지는 일차적으로 성전 재건 운동에 대한 격려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 해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본문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나약하고 안일한 삶을 살고 있는 귀환자들에게 성전 재건을 독려하는 문맥 안 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본문의 메시지가 그 당대의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 다. 본문은 학개 당대를 넘어서 그 이후의 시대를 가리키고 있다. 이 사실은 학개가 사용하고 있는 신(神) 현현적(顯現 的, theophanic) 용어들 속의 깊게 드리워진 종말론적 색채를 통해 설명되어질 수 있다. 그는 장차 야웨 하 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육지, 그리고 만국을 진동시키는"(2:6) 종말론적이며 우주적인 사건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 것은 곧 자연과 나라들을 격렬하게 뒤엎고 우주의 중심부로서 새로운 성전을 세우는 일에 관한 예언이다. 따라서 본문에 그려지고 있 는 성전은 본질적으로는 장차 올 메시아의 도래(초림)와 관련을 맺는 새로운 성전의 수립인 것이다.
특별히 '진동한다'(뒤엎는다)는 단어가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聖戰)을 연상하게 한다. 야웨 하나님께서 위대한 전쟁의 용 사로서 이방 나라들을 정복하시고 그들의 가장 귀중한 것들을('보배', 7절) 전리품으로 취하여 가지고 오실 것이 며, 또한 사방 각처에 있는 열국(列國)도 은과 금을(8절) 가지고 종말론적 시온의 성전으로 올라와 야웨를 경배하게 될 것이라 고 예언했다(예, 사 2:1-4 60:2 66:12). 따라서 이 성전의 영광이 솔로 몬 성전의 영광보다 크고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선언은 매우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성전이 세워진 그 장소에 만군의 야 웨 하나님은 '샬롬'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9절).
그렇다면 이런 약속은 언제 이루어졌는가? 우선 제 2 성전이 세워져 있는 동안 전체에 걸쳐 역사상에서 점진적 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에드워드 뵐(B hl)의 말을 인용하자면, 바벨론이 무너지고 페르시아가 몰락하고 알 렉산더는 파산되었다. 그리고 강철같은 로마 역시 몰락되어야 했다. 그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모 든 민족들 가운데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복음서의 가르침에 의하면, 특별히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죽으심을 통해 어두움이 온 땅 을 뒤덮었고, 성전 휘장이 두 조각으로 찢겨졌으며,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깨어지는 종말론적 사건이 발생하였다(마 태 27:45-54). 옛 성전의 종말을 고하는 우주적인 사건이었다(참조, 겔 10:18-19). 히 브리서 저자에 의하면 예수의 죽으심을 통한 성전 휘장의 '갈라짐'은 로마 병사들의 창에 의해 예수의 심장이 '터지는' 사건 (요 19:34)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living)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19-20).
분명히 히브리서 저자는 성전 휘장을 그리스도의 육체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열어졌다 '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로마 군인들의 창에 의해 예수의 심장이 '터진' 표현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 다. 그러므로 예수의 심장(가슴)이 새로운 성전이 된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해서 자신을 통해서 새로운 언약을 중재해 주시는 분이 며 대제사장이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 피부색이나, 사회적 계급이나, 남녀 성별에 상관없이 ― 이곳으로 들어오도록 초청 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무장 해제시킨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聖戰)이었다. 비로 소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특별히 기독론적이며 종말론적인 안목을 가지고 학개 2:6을 인용하고 있는 히브리서 12:26 은 메시아 사상과 관련하여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히브리서 12:26-28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그 때에는 그분의 음성이 땅을 뒤흔들었지만, 이번에는 그분께서 약속하시기를 "내가 한 번 더, 땅뿐만 아니라 하늘까지도 흔 들겠다" 하셨습니다. 이 '한 번 더'라는 말은 흔들리는 것들 곧 피조물들을 없애버리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하시는 까닭은 흔 들리지 않는 것들을 남아있게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래서 경건 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섬깁시다. (표준 새번역)
히브리서 저자는 26절에서 학 2:6의 "조금 있으면" 이란 문구를 "다시금"으로 바꿔 번역함 으로써 종말론적인 미래를 더욱더 강조하고 있다. 즉 히브리서 저자는 학개 당시의 제 2 성전이 다시금 영화롭게 되 신 부활하신 예수라는 분 안에서 새로운 종류의 성전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진동하거나 흔들리 지 않을 새로운 시온 산과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 서 저자는 그의 독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 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 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에 이르렀다"(22-24절)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은 메시아의 재림 사건을 통하여 최종적인 성취 를 이루게 될 것이다.
II. 새로운 종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열방의 세력 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 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 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 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21-23, 한글 개역)
앞의 본문(2:6-9)이 새로운 성전과 종말론적 시대의 개막을 알리고 있다면, 이 본문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한 정치 적 인물에 대해 집중적으로 예언하고 있다. 특별히 성전을 세우는 일이 하나님께서 천상의 왕으로서 행하시는 '왕적(王的) 행동 '(royal act)이시라면, 하나님께서 정치적 인물이며 다윗 왕의 후손인 스룹바벨에게 새로운 시대를 맡기시는 그 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앞의 본문(2:6-9)에서는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는 일이 경제적 측면(번 성, 번영)과 연결되고 있다면 본 단락에서는 정치적 격동, 즉 새로운 왕국의 출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 그 특색이다. 열국 의 왕권(보좌)을 뒤엎고 나라들의 세력을 멸하고 그 군대를 멸절시킨다는 것은 전(全)세계적 특정한 세력의 등장을 암시하고 있 다. 그리고 그 세력은 특정한 인물, 즉 다윗의 자손과 연관되어 있다. 천지를 뒤흔들어 놓은 하나님의 우주적 행위가 다윗 왕조 의 재건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히브리서 저자가 옳게 해석해 주었듯이, 새로운 세력의 출현에 관한 이 예언 은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 떨게 만드시고, 하늘과 땅 역시 새롭게 변혁될 것이다. 학개 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구속을 희망하도록 인도하고 있음에 틀림없지만 충만한 성취는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가리어져 있다. 왜냐하 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써만 이루어질 그러한 세상의 대변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건들이나 인물은 학개 당시 에 일어나게 될 국제적 상황들이나 특정한 역사적 인물인 스룹바벨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미래에 이루어질 사건들 과 한 인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 역시 매우 묵시문학적인 용어들로서 ― 예를 들어, 천지가 진동함, 열국의 정권이 전복 됨, 강력한 군대들의 파멸 등 ― 학개는 단순히 그 당대의 국제적 정치의 변혁적 사건들이나 특정한 인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 다. 다른 선지서들에서도 그렇듯이 학개가 말하고 있는 이러한 미래는 종종 확정되지 않은 미래를 가리킨다(예, 요 엘 2:30-3:3 사 2:4). 그리고 신약성경과 함께 이 구절을 보면 이러한 미래는 신약의 그리스 도의 출현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스룹바벨에게 적용된 칭호를 보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 진다. 물론 역사적으로 스룹바벨에게는 다윗 자손의 계보를 잇는 공식 적인 정치적 지위가 주어졌다(21절). 그러나 본문 안(23절)에서는 그에게 왕적 명칭을 주지 않고 있다. 본문은 그를 왕이나 왕 자 혹은 총독이라고도 부르지 않는다. 그는 오직 '야웨의 종'으로 호칭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본문에서 말하는 스룹바벨은 학 개 시대의 역사적 인물인 스룹바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적 인물의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야웨의 종'은 종종 왕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되며(예, 삼하 7:5 시 132:10 왕 상 11:32, 36 대상 17:4 사 37:35), 특별히 이사야서에서 는 이 종을 이른바 야웨의 고난받는 종이라 호칭하는 바, 곧 메시아적 종을 가리킨다 (사 42:1 43:10 49:6-7 52:13 53:11). 포 로기에 들어서서도 '야웨의 종'은 다윗의 계보에서 등장할 왕과 같은 인물을 가리킨다 (겔 34:23 37:24,25). 이런 전통에서 볼 때 학개가 말하고 있는 스룹바벨(23절) 역 시 페르시아의 왕이 임명한 총독 스룹바벨이 아니라 천상의 왕 야웨가 임명한 종말론적 '야웨의 종'으로서 장차 나타날 메시아(그리스 도)를 가리킨다. 특별히 스룹바벨이 실제로 여호야긴의 손자로서 왕적 지위를 갖고 있는 인물이며, 또한 성전을 세울 자의 역할을 하 는 자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그 의미하는 바가 깊다. 즉 그가 야웨의 종으로 묘사됨으로써 그로 표상(表象)되는 메시아(그리스도) 는 새로운 세상을 다스릴 진정한 왕으로 오시는 분이시며, 새로운 성전을 짓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가 천상의 왕 야웨를 대신하여 새로운 시대를 다스릴 왕과 같은 존재라는 것은 야웨께서 그를 '반지 도장 '(signet ring)으로 삼으신다는 말(言)속에서 확인된다. 반지 도장은 왕권이나 왕위를 상징한다. 이 도장 을 눌러 찍으면 왕의 말씀들이 그대로 실행되었다(예, 왕상 21:8 단 6:17). 새로운 메시아 적 인물은 야웨 하나님의 정권과 권세를 그대로 물려받아 새로운 시대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본문에 대한 칼빈의 메시아적 해석은 상당한 설득력과 감화력을 갖고 있다:
예언자는 하늘과 땅을 흔들어 놓는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가 있을 것이라고 지금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은 반 드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야 맞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도께서 말씀하신 바처럼(골 1:20) 하늘과 땅 사방 에 흩어졌던 것들을 그리스도께서 다시 모으실 때 일어나는 새로운 세계 창조(new creation) 사건이기 때문이 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하나님과 천사들과 화목케 하실 때, 그리고 그리스도가 마귀를 물리치시고 죽은 자에게 생명을 회복시키 실 때, 그리고 그가 그 자신의 의로움으로 빛을 비추이실 때, 바로 그때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흔들어 놓으셨던 때였다. 그리 고 하나님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복음전파를 통하여서 하늘과 땅을 흔들고 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아담 의 자손들을 새롭게 만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적인 중생(重生, 새롭게 됨)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에 대한 강력한 증 거이며,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이 진동하시고 계시다 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선지자 학개는 종말론적 선지자였다. 그는 새로운 성전을 재건축하여 헌당(獻堂)하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 는 필수적인 사건이라고 내다본 종말론적 선지자였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그 시대를 이끌어갈 메시아적 인물, 스룹바벨을 가리킨다.
[나가면서: 요약과 제시]
마지막으로 학개서의 메시아 사상과 관련하여 몇 가지 신학적 주제를 요약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1. 학개는 새로운 성전의 건축을 독려함으로써 추방에서 정착으로 넘어가는 혼란스러운 격변기에 있던 이스라엘에 올바른 방향의 길을 제시한 매우 책임성 있는 선지자였다.
2. 그가 말하는 새로운 성전은 구원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의 구속 사역을 통해 성전의 참된 의미가 온전 한 성취를 이루기 시작하였다('이미', '시작된 종말론'). 그러나 온전한 최종적인 성취는 아직도 미래의 것으로 남아 있다('아직 ', '미래 종말론'). 이것, 즉 새로운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를 통하여 그와 연합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에 대한 종 말론적 이해는 신약신학이 다루는 중요한 주제중의 하나이다.
3. 이러한 구원사의 과정에서 열국(列國)이 차지하는 역할과 위치에 관한 문제이다. 학개의 메시지에 의하면, 더 이상 이스 라엘과 이방나라들 사이의 '갈라짐'이 아니라, 메시아의 도래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들은 한 분 야웨 하나님 아래 통일될 날 이 올 것이라는 환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종말론적이며 기독론적으로 다루는 로마 서 9-11장을 예기케 한다.
4. 학개와 아울러 스가랴를 함께 바라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특색이 있음을 알게 된다. 학개는 좀더 넓은 의미에서 메시 아 시대에 관한 말을 하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성전을 다루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정치 지도자로서 메시아적 인물인 스룹바벨 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의 경우는 이와 대조적이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중심부로서 성전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도, 그 시대의 정치적 중심 인물이 아니라, 종교적 중심 인물인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관심을 집중한다.
*위의 글은 [그말씀]지 (2003년 6월)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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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해석의 원칙]
예언서에서 메시아 사상을 찾아 논하려면 일정한 해석학적 원리가 필요하다. 구약과 함께 신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정 경(正經, canon)으로 삼는 기독교 신앙공동체는 성경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 다. 기독교는 이른바 히브리 성경만을 자신들의 경전으로 삼는 유대교와는 달리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동일한 창조주, 구속주 하나님 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며 그의 최종적인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사건을 통해 그가 말씀해야할 모든 것을 다 말씀하셨다고 믿는다. 이 것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 바로 히브리서 1:1-2이다. 구약에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다양한 선지 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통해 이 모든 '마지막 날들'에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러 한 선언은 궁극적으로 성경해석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요점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첫째는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주체는 하나님이 라는 사실이며, 따라서 성경 해석은 하나님 중심적 해석을 요청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구약에서 출발하여 신약에 이르게 되는 구원사 적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을 구속사에 따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할 것을 요청한다. 시드 니 그레이다누스는 이 두 가지 관점의 융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구약 해석에 있어서 "그리스도 중심적 방법론은 하나님 의 왕국을 지상에 건설하려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그리스도 안에 그 초점이 모아진다는 사실을 정당하게 평가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 면 하나님의 모든 경륜(whole counsel of God)을 구원사의 전개에 따 라 이해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조명하려는 것이 구약 성경에 대한 정당한 구속사적-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 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학적 원리를 가지고 구약의 예언서를 살펴보아야만 우리는 예언서를 정당하게 메시아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 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메시아 사상은 구·신약 성경의 정경적 구조에 따라 통일되고 유기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고 이해해야 한 다. 이것은 해석의 출발점인 동시에 결과이기도 하다.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약속들은(메시아 약속을 포함하여) 점진적인 성취 로 나아간다. 다시 말해서 그 약속들은 어느 특정한 시기에 단번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사가 전개되어 감에 따라 점점 채워 져 가며 나아가는 것이다. 윌리암 라솔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예언은 그것이 하나님의 구속 목적의 어 떤 부분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채워질 수 있으며, 또한 완전히 성취될 수 있다. 그래서 예언은 완전히(full) 채워질 (filled) 때 성취되는(fulfilled) 것이다. 예언을 이러한 의미로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예언이 하나 의 성취 이상 가능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완전히 성취될 때까지 더더욱 채워질 수 있다."
이것을 일명 '예언자적 원근법' 혹은 '예언적 원근 통시법'(prophetic foreshortening)이 라 부른다. '예언자적 원근법'이란 앞으로 여러 시대에 걸쳐 되어질 일들(원근, 遠近)을 하나로 묶어 말하는 예언자들의 문학적 습 성을 가리키는 표현구이다. 이것을 다르게는 '예언자적 전망'(prophetic perspective)이라고도 부르는 데, 장차 일어날 수많은 사건들을 하나의 환상 속으로 바라보는 현상을 가리킨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멀리 있는 사건들과 가까운 미래 에 있을(곧 일어날) 사건들의 이 두 경우가 마치 매우 가까이 붙어있는 것처럼 통시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예로 들 어 멀리 있는 산봉우리들을 쳐다봤을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실제로 가서 보면 서로 수백 미터씩 떨어져 있는 봉우리들이 멀리서 보 면 마치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와 같은 이치이다. 이것은 예언서에 나타난 특정한 (메시아)예언들이나 약속들은 일차적으로 역사 의 지평 안에서 점진적으로 성취되어 가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全) 시대에 걸쳐 성취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 석자들은 구약의 약속 구절들을 취급할 때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예언서에 나타나는 메시아 사상은 장차 도래할 메시아 시대, 그 시대를 이끌어갈 메시아적 인물, 그 리고 메시아 시대의 중심부로서의 새로운 성전 등과 같은 주제들과 연관하여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예언서 에 나타나는 메시아 사상은 종말론적·구속사적·기독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할 성질의 것이라는 점이다.
[역사적 배경으로 본 '성전 재건축'의 의미]
이 글은 학개서의 특정한 본문들을 중심으로 메시아 사상을 기술하려 한다. 그러나 학개서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 지방으 로 귀환하여 무너진 옛 솔로몬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상황아래서 선지자 학개가 선포한 말씀들을 수록하 고 있으므로 그의 메시아 사상 역시 그가 사역했던 시대적 상황과 배경, 특별히 '성전 재건축'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떠나서는 충분 히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아래의 서술문을 통해 '메시아 사상'과 '성전'이 서로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는 사실이 독자들에게 인식되기를 바란다.
주전 587년경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과 그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참으로 무 참하게 함락된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신앙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비통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가나안이라 불리는 약속의 땅, 그 땅 의 중심부인 예루살렘 도시, 그리고 하나님의 거처로 알려진 예루살렘 성전, 이 세 가지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가시적(可視 的) 증거물들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모두 일순간에 사라지고 만 것이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초기 이스라엘의 역사 기술에 의하면, 민족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보잘것없던 히브리 민족은 언약의 하나님 야 웨의 손에 이끌려 노예의 집이었던 애굽에서 나와 그야말로 파란 만장한 광야 생활을 거쳐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에 도착하 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야웨의 토라(Torah)를 따라 살 수 있는 축복된 삶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가 적나라하게 보 여주듯이, 그들의 정치 및 종교 지도자들은(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야웨의 가르침(토라)을 따르는 대신 다른 헛된 것들(우상) 을 따르고, 그들의 백성들을 잘못 인도하는 치명적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하나님의 토라에 의해 운영되어야할 사회는 공의와 정의 대 신 불의와 부정이 만연되었고, 친절과 신실 대신에 압제와 폭력이 난무하였으며, 종교는 심하게 부패하여 오물 썩는 냄새가 성전 안뜰 에서부터 진동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 중앙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정권 유지에 집착한 왕들과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 랑에 대한 아무런 열정도 없는 관료적인 제사장들, 그리고 세속적 허영과 물욕으로 가득 찬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 도 불구하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애(仁愛)하신 하나님은 인내하셨고, 바야흐로 참 선지자들의 등장은 배역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 님의 인내의 표현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부지런히 보내시어, 그들(배역한 자들)을 엄하게 책망 도 하시고, 재앙으로 협박도 하시며, 때로는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설득도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기에는 너무나 멀리 가있었 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그같이 멀리하면서 입술로는 그분을 계속해서 찬양하고 경배하였으니 그 얼마나 이기적 이었던가!
특별히 그들의 제의(祭儀)적 열성과 성전집착 현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이런 의미에서 성전은 그들의 삶의 중심부에 서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떠난 성전이 무슨 그 존재목적이 있으며, 하나님과 관계없는 종교적 열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특별 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제의에 대한 주전 8세기 선지자들의 준엄한 질책과 심판 선언은 온몸에 전율 을 느낄 정도이다(아모스, 이사야, 호세아, 미가). 성전제의에 대한 질타와 심판 선언은 일세기 후에도 계속된다(예, 예레미야 의 "성전설교"). 마침내 하나님은 주전 587년 예루살렘 함락이라는 민족적 비극을 통해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정체성 을 확인한다고 믿었던 이상의 세 가지 것(땅, 도시, 성전)을 모두 몰수해 버리신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그러 한 보이는 것들이 아니었다. 실상 그들이 '상실'한 것은 '야웨 하나님'과 '야웨 하나님의 길'이었다. 토라를 통해 보여주었던 야 웨의 길을 상실한 것이야말로 진정한 상실이었다. 이것이 주전 587년에 발생한 예루살렘 함락과 그 성전 폐허에 대 한 신학적 의미일 것이다. 성전 폐허는 단순히 건물상실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그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떠나심'(에스겔서) 에 대한 부정적 결과일 뿐이었다. 인제 그들은 이방의 땅으로 '추방'(exile)되어 그곳에서 기나긴 세월을 참회와 재활의 시간으 로 보내야만 했다.
성경은 이러한 추방기, 곧 바벨론 포로기를 가리켜 '복역의 때'라고 말한다(참조, 사 40:2). 실형을 선 고받은 죄수가 감옥에서 형기를 채우는 기간으로 말이다. 그러나 마침내 시간이 흘러 이스라엘은 출소하게 된다. 하나님의 손에 의 해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곱절'이나 받은 이스라엘은 비로소 귀향(歸鄕, homecoming)길에 오르게 되 는 것이다. 형기를 마친 복역수에게 '귀향'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으랴! 주전 538년경에 바벨론을 정복한 페 르시아의 왕인 고레스는 그 동안 바벨론에 거주하고 있던 이스라엘인들을 그들의 고국으로 돌려보내기로 작정하고 칙령을 내린다. 꿈에 도 그리던 귀향!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라고 탄식하던 때가 언제였던가?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고국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물론 바벨론에서의 생활도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말이 70년이지 '꼭 들어 찬 수형 기간'이었다고 하는 편이 나으리라. 허나 모두가 귀국 길에 오른 것이 아니었던 것은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미 바벨론 제 국 안에 정착하였고, 그들 나름대로 생활터전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태어난 이민 2세들 중 상당수가 그대 로 남아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으로 강제로 이주해온 사람들 중 또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들의 자손들과 함께 귀국 길 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 앞에는 신앙적 지도자들이 있었다. 바벨론으로부터의 출국과 유대 땅으로의 귀향 은 마치 제 2의 출애굽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출애굽의 역사처럼 출바벨론의 역사도 모세와 아론, 여호수아와 같 은 지도자들을 갖고 있었다. 스룹바벨, 느헤미야, 에스라, 학개, 스가랴와 같은 주님의 '종들'이 그들이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바벨론 거주 유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다시 짓도 록 영을 내린다(에스라 1:2-4 6:3-5). 스룹바벨의 영도 아래 약 5만 명 이 나 되는 유대인들이 귀국하여 성전을 짓기 시작한다. 대략 2년 후 그들은 성전의 기초를 놓고 크게 기뻐하게 된다 (스 3:8-11).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그 지역에 이미 거주하고 있던 사마리아인들과 그들의 지원 세력들의 강력 한 저항에 봉착하게 된다. 성전을 재건축할 경우 발생하게 될지도 모르는 정치적 종교적 이슈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은 유대인들 의 성전 건축 계획을 반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결국 주전 520년경 유대인들은 성전 재건축 계획을 멈추어야만 했 다. 그 일은 다리오 대왕이 페르시아의 왕으로 즉위한 지(주전 522년, 에스 라 4:1-5, 24) 2년 후에 있었던 일이었다. 선지자 학개는 바로 이때, 즉 다리 오 대왕 즉위 2년, 성전 재건축이 난관에 부딪치게 된 시기에 네 번에 걸쳐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시작하였 다. 현대 달력으로 하자면 주전 520년 8월 29일(학 1:1) 과 10월 17일(2:1)에 각각 한번씩, 그리고 12월 18일에 두 번 이었다(2:10, 20). 그는 스가랴와 함께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유대 포로민들을 격려하여 폐허된 예루살 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한다(참고, 스 5:1-2 6:14). 학 2:3의 기록에 의하 면 학개는 솔로몬의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그의 노년기에 성전재건을 위 해 마지막 열정을 불태웠던 것처럼 보인다.
그의 메시지의 내용은 주로 성전 건축에 관한 것으로, 성전 건축에 무관심하고 나태한 유대인들을 질책하며 비록 어려운 환경 과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성전을 다시 건축하라고 격려한다. 그리고 그들이 지으려 하는 성전의 영광이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위대 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시키고 있다. 돌아온 유대인들이 제한적인 인적, 물질적 자원을 가지고 있고, 또한 페르시아라는 세계적 제 국 아래 복속(服屬)되어 있는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현재의 세계 질서를 개편하실 것이고, 지금 지으려는 성전의 영광을 통 해 자신(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드러내실 것이라고 선지자 학개는 선포하고 있다.
[메시아적 본문 해설]
이상의 것을 종합해 본다면, 학개의 예언은 특별히 두 개의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는 듯하다: (1) 하나는 장차 나타날 새 로운 성전의 우아함과 찬란함, 그리고 그 성전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이방나라들의 공헌에 관한 것이고(2:6-9), (2) 또 다 른 하나는 스룹바벨을 다윗 가문에 위탁된 약속들을 이어갈 메시아적 후사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다(2:20-23). 학개서 가운 데 바로 이 두 부분이 우리의 관심사인 메시아 시대와 관련 있는 본문들이다. 아래는 두 본문에 대한 성경신학적·기독론적 해설이다.
I. 새로운 성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 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 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전(殿)의 나중 영광이 이전(以前)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 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6-9, 한글 개역)
본문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는 여기에서 언급되는 성전이 학개 당대에 세워질 성전을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장차 나타 날 종말론적 성전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이다. 문맥상 학개의 메시지는 일차적으로 성전 재건 운동에 대한 격려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 해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본문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나약하고 안일한 삶을 살고 있는 귀환자들에게 성전 재건을 독려하는 문맥 안 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본문의 메시지가 그 당대의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 다. 본문은 학개 당대를 넘어서 그 이후의 시대를 가리키고 있다. 이 사실은 학개가 사용하고 있는 신(神) 현현적(顯現 的, theophanic) 용어들 속의 깊게 드리워진 종말론적 색채를 통해 설명되어질 수 있다. 그는 장차 야웨 하 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육지, 그리고 만국을 진동시키는"(2:6) 종말론적이며 우주적인 사건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 것은 곧 자연과 나라들을 격렬하게 뒤엎고 우주의 중심부로서 새로운 성전을 세우는 일에 관한 예언이다. 따라서 본문에 그려지고 있 는 성전은 본질적으로는 장차 올 메시아의 도래(초림)와 관련을 맺는 새로운 성전의 수립인 것이다.
특별히 '진동한다'(뒤엎는다)는 단어가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聖戰)을 연상하게 한다. 야웨 하나님께서 위대한 전쟁의 용 사로서 이방 나라들을 정복하시고 그들의 가장 귀중한 것들을('보배', 7절) 전리품으로 취하여 가지고 오실 것이 며, 또한 사방 각처에 있는 열국(列國)도 은과 금을(8절) 가지고 종말론적 시온의 성전으로 올라와 야웨를 경배하게 될 것이라 고 예언했다(예, 사 2:1-4 60:2 66:12). 따라서 이 성전의 영광이 솔로 몬 성전의 영광보다 크고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선언은 매우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성전이 세워진 그 장소에 만군의 야 웨 하나님은 '샬롬'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9절).
그렇다면 이런 약속은 언제 이루어졌는가? 우선 제 2 성전이 세워져 있는 동안 전체에 걸쳐 역사상에서 점진적 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에드워드 뵐(B hl)의 말을 인용하자면, 바벨론이 무너지고 페르시아가 몰락하고 알 렉산더는 파산되었다. 그리고 강철같은 로마 역시 몰락되어야 했다. 그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모 든 민족들 가운데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복음서의 가르침에 의하면, 특별히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죽으심을 통해 어두움이 온 땅 을 뒤덮었고, 성전 휘장이 두 조각으로 찢겨졌으며,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깨어지는 종말론적 사건이 발생하였다(마 태 27:45-54). 옛 성전의 종말을 고하는 우주적인 사건이었다(참조, 겔 10:18-19). 히 브리서 저자에 의하면 예수의 죽으심을 통한 성전 휘장의 '갈라짐'은 로마 병사들의 창에 의해 예수의 심장이 '터지는' 사건 (요 19:34)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living)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19-20).
분명히 히브리서 저자는 성전 휘장을 그리스도의 육체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열어졌다 '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로마 군인들의 창에 의해 예수의 심장이 '터진' 표현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 다. 그러므로 예수의 심장(가슴)이 새로운 성전이 된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해서 자신을 통해서 새로운 언약을 중재해 주시는 분이 며 대제사장이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 피부색이나, 사회적 계급이나, 남녀 성별에 상관없이 ― 이곳으로 들어오도록 초청 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무장 해제시킨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聖戰)이었다. 비로 소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특별히 기독론적이며 종말론적인 안목을 가지고 학개 2:6을 인용하고 있는 히브리서 12:26 은 메시아 사상과 관련하여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히브리서 12:26-28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그 때에는 그분의 음성이 땅을 뒤흔들었지만, 이번에는 그분께서 약속하시기를 "내가 한 번 더, 땅뿐만 아니라 하늘까지도 흔 들겠다" 하셨습니다. 이 '한 번 더'라는 말은 흔들리는 것들 곧 피조물들을 없애버리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하시는 까닭은 흔 들리지 않는 것들을 남아있게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래서 경건 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섬깁시다. (표준 새번역)
히브리서 저자는 26절에서 학 2:6의 "조금 있으면" 이란 문구를 "다시금"으로 바꿔 번역함 으로써 종말론적인 미래를 더욱더 강조하고 있다. 즉 히브리서 저자는 학개 당시의 제 2 성전이 다시금 영화롭게 되 신 부활하신 예수라는 분 안에서 새로운 종류의 성전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진동하거나 흔들리 지 않을 새로운 시온 산과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 서 저자는 그의 독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 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 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에 이르렀다"(22-24절)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은 메시아의 재림 사건을 통하여 최종적인 성취 를 이루게 될 것이다.
II. 새로운 종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열방의 세력 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 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 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 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21-23, 한글 개역)
앞의 본문(2:6-9)이 새로운 성전과 종말론적 시대의 개막을 알리고 있다면, 이 본문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한 정치 적 인물에 대해 집중적으로 예언하고 있다. 특별히 성전을 세우는 일이 하나님께서 천상의 왕으로서 행하시는 '왕적(王的) 행동 '(royal act)이시라면, 하나님께서 정치적 인물이며 다윗 왕의 후손인 스룹바벨에게 새로운 시대를 맡기시는 그 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앞의 본문(2:6-9)에서는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는 일이 경제적 측면(번 성, 번영)과 연결되고 있다면 본 단락에서는 정치적 격동, 즉 새로운 왕국의 출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 그 특색이다. 열국 의 왕권(보좌)을 뒤엎고 나라들의 세력을 멸하고 그 군대를 멸절시킨다는 것은 전(全)세계적 특정한 세력의 등장을 암시하고 있 다. 그리고 그 세력은 특정한 인물, 즉 다윗의 자손과 연관되어 있다. 천지를 뒤흔들어 놓은 하나님의 우주적 행위가 다윗 왕조 의 재건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히브리서 저자가 옳게 해석해 주었듯이, 새로운 세력의 출현에 관한 이 예언 은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 떨게 만드시고, 하늘과 땅 역시 새롭게 변혁될 것이다. 학개 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구속을 희망하도록 인도하고 있음에 틀림없지만 충만한 성취는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가리어져 있다. 왜냐하 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써만 이루어질 그러한 세상의 대변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건들이나 인물은 학개 당시 에 일어나게 될 국제적 상황들이나 특정한 역사적 인물인 스룹바벨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미래에 이루어질 사건들 과 한 인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 역시 매우 묵시문학적인 용어들로서 ― 예를 들어, 천지가 진동함, 열국의 정권이 전복 됨, 강력한 군대들의 파멸 등 ― 학개는 단순히 그 당대의 국제적 정치의 변혁적 사건들이나 특정한 인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 다. 다른 선지서들에서도 그렇듯이 학개가 말하고 있는 이러한 미래는 종종 확정되지 않은 미래를 가리킨다(예, 요 엘 2:30-3:3 사 2:4). 그리고 신약성경과 함께 이 구절을 보면 이러한 미래는 신약의 그리스 도의 출현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스룹바벨에게 적용된 칭호를 보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 진다. 물론 역사적으로 스룹바벨에게는 다윗 자손의 계보를 잇는 공식 적인 정치적 지위가 주어졌다(21절). 그러나 본문 안(23절)에서는 그에게 왕적 명칭을 주지 않고 있다. 본문은 그를 왕이나 왕 자 혹은 총독이라고도 부르지 않는다. 그는 오직 '야웨의 종'으로 호칭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본문에서 말하는 스룹바벨은 학 개 시대의 역사적 인물인 스룹바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적 인물의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야웨의 종'은 종종 왕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되며(예, 삼하 7:5 시 132:10 왕 상 11:32, 36 대상 17:4 사 37:35), 특별히 이사야서에서 는 이 종을 이른바 야웨의 고난받는 종이라 호칭하는 바, 곧 메시아적 종을 가리킨다 (사 42:1 43:10 49:6-7 52:13 53:11). 포 로기에 들어서서도 '야웨의 종'은 다윗의 계보에서 등장할 왕과 같은 인물을 가리킨다 (겔 34:23 37:24,25). 이런 전통에서 볼 때 학개가 말하고 있는 스룹바벨(23절) 역 시 페르시아의 왕이 임명한 총독 스룹바벨이 아니라 천상의 왕 야웨가 임명한 종말론적 '야웨의 종'으로서 장차 나타날 메시아(그리스 도)를 가리킨다. 특별히 스룹바벨이 실제로 여호야긴의 손자로서 왕적 지위를 갖고 있는 인물이며, 또한 성전을 세울 자의 역할을 하 는 자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그 의미하는 바가 깊다. 즉 그가 야웨의 종으로 묘사됨으로써 그로 표상(表象)되는 메시아(그리스도) 는 새로운 세상을 다스릴 진정한 왕으로 오시는 분이시며, 새로운 성전을 짓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가 천상의 왕 야웨를 대신하여 새로운 시대를 다스릴 왕과 같은 존재라는 것은 야웨께서 그를 '반지 도장 '(signet ring)으로 삼으신다는 말(言)속에서 확인된다. 반지 도장은 왕권이나 왕위를 상징한다. 이 도장 을 눌러 찍으면 왕의 말씀들이 그대로 실행되었다(예, 왕상 21:8 단 6:17). 새로운 메시아 적 인물은 야웨 하나님의 정권과 권세를 그대로 물려받아 새로운 시대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본문에 대한 칼빈의 메시아적 해석은 상당한 설득력과 감화력을 갖고 있다:
예언자는 하늘과 땅을 흔들어 놓는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가 있을 것이라고 지금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은 반 드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야 맞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도께서 말씀하신 바처럼(골 1:20) 하늘과 땅 사방 에 흩어졌던 것들을 그리스도께서 다시 모으실 때 일어나는 새로운 세계 창조(new creation) 사건이기 때문이 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하나님과 천사들과 화목케 하실 때, 그리고 그리스도가 마귀를 물리치시고 죽은 자에게 생명을 회복시키 실 때, 그리고 그가 그 자신의 의로움으로 빛을 비추이실 때, 바로 그때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흔들어 놓으셨던 때였다. 그리 고 하나님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복음전파를 통하여서 하늘과 땅을 흔들고 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아담 의 자손들을 새롭게 만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적인 중생(重生, 새롭게 됨)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에 대한 강력한 증 거이며,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이 진동하시고 계시다 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선지자 학개는 종말론적 선지자였다. 그는 새로운 성전을 재건축하여 헌당(獻堂)하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 는 필수적인 사건이라고 내다본 종말론적 선지자였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그 시대를 이끌어갈 메시아적 인물, 스룹바벨을 가리킨다.
[나가면서: 요약과 제시]
마지막으로 학개서의 메시아 사상과 관련하여 몇 가지 신학적 주제를 요약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1. 학개는 새로운 성전의 건축을 독려함으로써 추방에서 정착으로 넘어가는 혼란스러운 격변기에 있던 이스라엘에 올바른 방향의 길을 제시한 매우 책임성 있는 선지자였다.
2. 그가 말하는 새로운 성전은 구원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의 구속 사역을 통해 성전의 참된 의미가 온전 한 성취를 이루기 시작하였다('이미', '시작된 종말론'). 그러나 온전한 최종적인 성취는 아직도 미래의 것으로 남아 있다('아직 ', '미래 종말론'). 이것, 즉 새로운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를 통하여 그와 연합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에 대한 종 말론적 이해는 신약신학이 다루는 중요한 주제중의 하나이다.
3. 이러한 구원사의 과정에서 열국(列國)이 차지하는 역할과 위치에 관한 문제이다. 학개의 메시지에 의하면, 더 이상 이스 라엘과 이방나라들 사이의 '갈라짐'이 아니라, 메시아의 도래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들은 한 분 야웨 하나님 아래 통일될 날 이 올 것이라는 환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종말론적이며 기독론적으로 다루는 로마 서 9-11장을 예기케 한다.
4. 학개와 아울러 스가랴를 함께 바라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특색이 있음을 알게 된다. 학개는 좀더 넓은 의미에서 메시 아 시대에 관한 말을 하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성전을 다루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정치 지도자로서 메시아적 인물인 스룹바벨 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의 경우는 이와 대조적이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중심부로서 성전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도, 그 시대의 정치적 중심 인물이 아니라, 종교적 중심 인물인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관심을 집중한다.
*위의 글은 [그말씀]지 (2003년 6월)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