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교회를 이루려면”(엡 1:1-2) 

오늘 부터 에베소서를 강해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는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더불어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61-62년경) 기록한 옥중서신(獄中書信)으로서 이상적인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서를 통하여 기독교의 복음과 복음의 의미를, 간결하게, 그 핵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을 비롯해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이 에베소서를 즐겨 읽었습니다. 아미테이지 로빈슨(Armitage Robinson)은 <사도 바울의 서신들의 왕관>이라고 하였고, 윌리암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서신들의 여왕>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당시 에베소 시(市)에는 하나님의 질서가 파괴된 그러한 도시였습니다. 도덕적 타락과 매춘이 성행하였고 살인자들, 도적들, 강도들이 자유롭게 사는 죄악의 도시였습니다. 그러한 에베소에 사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바울은 비록 옥중에 있었으나 옥안에서 옥밖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질서는 불일치의 세상에 하나된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며, 소외된 세상에서 화해를 이루는 것이고, 그리고 전쟁 대신에 평화를 건설하는 질서인 것입니다. 이것이 에베소서의 전체적인 주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총 여섯 장으로 구성된 짧은 책으로 된 에베소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질서가 새롭게 회복되어 일치와 하나 됨의 공동체를 이루고, 화해하는 공동체를 이루며, 평화를 건설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에베소서를 통해서 주목할 것은 에베소서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교회의 구성원은 하나님을 전혀 몰랐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처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새 신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더구나 든든한 목회자가 그들을 책임적으로 양육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평신도 중에서 조금 먼저 믿은 사람들이 교회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리고 연약한 교회가 어떻게 그 거칠고 음란한 세상의 도전을 뿌리치며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은 비록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의 옥에 갇힌 입장이었지만 아기를 낳은 어머니가 아기를 품속에 안고서 돌보는 심정으로 본 서신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아름다운 교회]에 대한 말씀으로 일명 [교회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어떤 외형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름다운교회란 외형적으로 치장되어진 것에 있지 아니합니다. 그렇다고 외형적으로 치장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외형적 치장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세상 사람들이 보고 매력을 느끼며 흠모하여 사랑하고픈 교회이어야 합니다. 교회를 나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뭔가 새로워 질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줄 수 있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아름다운 교회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 청지기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가꿀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교회가 아름다운교회입니다. 아름다운교회가 되려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쳐야 합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교회를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며,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본 서신의 발신자는 누구입니까?(1절 상)
본문 1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이 본서의 발신자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1절에서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절 상반 절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는 확신과 자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행 9:15) 이것은 바울 서신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합니다(롬 1:1, 고전1:1, 고후1:1,갈1:1, 골1:1, 딤전 1:1,딤후 1:, 딛 1:1 등)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소명 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소명의식(召命意識)은 생명보다도 중요했고 그의 삶의 전부였고 그를 지탱해 주는 삶의 원동력(原動力)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은 소명의식(召命意識)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데는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또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소명 의식이 없는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에게 주신 소명을 발견하여 목적 있는 삶, 의미 있는 삶,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 3:15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고, 딤전 6:12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가졌던 이 소명의식(召命意識)은 자신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소명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요, 하나님이 주시는 특권입니다. 이 권위를 가지고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편지가 바로 에베소서인 것입니다.

2. 본 서신의 수신자는 누구입니까?(1절 하) 
본문 1절 하반 절에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에베소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쓴 직접적인 동기는,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성도들이 근심하고 있을 때, 「두기고」를 통해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리고 그들의 신앙을 권면하기 위해서 에베소서를 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사실은 본문의 수신자는 에베소 교인만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이 이 편지의 수신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본 서신의 수신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서를 열심히 읽고 묵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편지를 받은 사람이 수신을 거부하던지, 편지를 받고도 뜯어서 읽어보지 않는다면 편지 보낸 사람이 매우 섭섭하게 생각할 것이고, 더 나아가 화를 내고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로 바꾸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개념은 에베소서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에베소서 전체인 6장의 주제를 장별로 정리할 때, 그 공통성이 바로 「그리스도 안」이라는 개념입니다.

     1장의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적인 소유」 입니다.
     2장의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적인 위치」 입니다.
     3장의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적인 공동체」 입니다.
     4장의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적인 교제」 입니다.
     5장의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적인 생활」 입니다.
     6장의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적인 승리」 입니다.

오늘 본문은 서신의 인사말인데 세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의 자기소개-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둘째는 수신자-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의 신실한 자들, 그리고 세째는 은혜와 평강의 기원입니다.-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쫒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그런데 이 세부분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사도된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성도들에게,「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재창조임을 에베소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될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막힌 담이 허물어져 버린다는 것이 에베소서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와 사회는, 오늘 말씀의 결론인 “은혜와 평강”가운데 거하는 나라입니다.

에베소서의 메시지는 바로 이 은혜와 평강을, 그것도 풍성한 은혜와 평강을 누리라는데 있습니다. 이 은혜와 평강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면 <은혜로 말미암은 평강> 입니다. 즉 은혜 때문에 누리는 평강입니다. 본서의 저자인 사도 바울은 일평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에베소서 3장 8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서 <죄인 중에 괴수>라고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신을 살려주셨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을 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사도라는 직분까지 주신, 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평강, 이 평강을 바울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평강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이며,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평강이며,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뺏어갈 수 없는 평강입니다.
로마의 차가운 감옥소도 이 평강을 빼앗지 못했습니다. 같은 옥중서신인 빌립보서4장 4절에 옥 안에 있는 바울이, 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그리고 이어서 6,7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성도 여러분! 에베소서의 수신자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 바로 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말미암은 평강으로, 풍성한 평강 속에서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바울의 소명의식을 본받아서 은혜와 평강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동참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3. 본서를 기록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진 각종 신령한 축복들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깨닫고 본서를 통해 그 사실을 확신 있게 전했습니다. 그래서 본서 전반부 1-3장까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에 대한 교훈으로서 교회의 기원과 목적 등 교리적인 설명이 나타나고 있고, 후반부 3-6장까지는 교회에 속한 성도에 대한 교훈으로서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과 행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서는 다른 어떤 서신서보다 교회론(敎會論)에 관해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데, 여러 가지 비유(몸, 성전, 신랑, 군인 등)을 통해 이상적인 교회 상에 대해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본서를 기록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제3차전도 여행 중에 세워진 에베소 교회는 다른 대부분의 도시에 세워진 개척 교회들과 같이 세상의 힘센 도전 앞에 무력하기만 하였습니다. 사실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을 전혀 몰랐던 이방인들로서 구성된 교회였습니다. 
이제 처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새 신자들이 대부분인 교회였습니다. 더구나 든든한 목회자가 그들을 책임적으로 양육하는 것도 아니었고, 평신도 중에서 조금 먼저 믿은 사람들이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리고 연약한 교회가 어떻게 그 거칠고 음란한 세상의 도전을 뿌리치며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교회마다 달려가고 싶었지만 감옥에 갇힌 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바울에게 이 말씀 「에베소서」를 쓰도록 성령으로 감동시켰습니다. 
편지 형식으로 된 「교회론(敎會論)」을 각 교회마다 돌려 읽도록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아기를 낳은 어머니가 아기를 품속에 안도 돌보는 마음으로 이 교회론(敎會論)을 써서 교회마다 읽히어져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신부는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아름다운 교회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온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가꾸어 가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교회를 가꾸어 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가꿀 수 있습니까?(1절)

첫째로, 하나님의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1절 상)
본문 1절 상반 절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본 서신의 송신자(送信者)자인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부름을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부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라는 소명 의식이 분명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소명은 생명(生命)보다도 중요했고 그의 삶의 전부였고 그를 지탱해주는 삶의 원동력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바울이 정식 예수님에 의하여 임명된 사도가 아니다”라는 비방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자기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들에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부름 받은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였습니다.(참조: 갈 1:1)
[바울]의 유대식 이름은 「사울」입니다. 사실 과거의 사울은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악명 높은 핍박 자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 구금, 고문 ,학살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의 교회의 성도들을 또 체포하기 위하여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이로 인하여 그의 생애는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울을 변화시켜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로 이미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행 9:15에서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제 이방인을 위해서 택함을 위해 택한 받은 그릇으로 다시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를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가꾸는 일꾼으로 불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교회](敎會)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는 말인데, 이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아 모인 무리”란 뜻입니다. 이 아침에 모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부름을 받아 모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경꾼이나 손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가꾸어야 부름을 받은 일꾼들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주인은 아니로되 주인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가꾸어야 책임을 가지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각각의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직분자들에게 의하여 아름답게 꾸며집니다.

롬 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1)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앞장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교회]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를 아름답게 가꾸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지체들임을 깨닫고 우리가 모두 협력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1절 중)
본문 1절 하반 절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본 서신의 송신자(送信者)인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기의 「사도」라는 말은 [아포스톨로스]로서 “보냄을 받은 자” “전령자”,“메신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지만 결코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는 범죄자로 옥에 갇힌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다가 갇힌 것입니다. 그는 로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냄 받은 사신이 되어 옥에 간 것입니다. 바울은 그 곳에서 로마의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 후에 약 300년 뒤에는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더 이상은 사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바울과 같은 사도는 아니지만 다른 형태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보냄을 받은 자」는 계속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가꾸도록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사명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데에는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소명의식이 없는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에게 주신 소명을 발견하여 목적 있는 삶, 의미 있는 삶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꾸며야 할 때입니다. 
바로 지금이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시금 확인하여 그 일을 최선을 다하여 충성할 때입니다. 우리가 맡은 일에 충성하지 못하면 결코 아름다운 교회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온전히 돌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아름답게 가꾸려면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최선을 충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거룩하게 구별 받은 사람들입니다.(1절 하)
본문 1절 하반 절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본 서신의 수진자는 에베소에 사는 성도(聖徒)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성도(聖徒)란 말은 [하기오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거룩한 자” 혹은 “하나님의 소유된 거룩하게 구별 받은 무리”란 뜻으로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서 정결한 생활을 하는 자”입니다. 눅 4:34에 보면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부를 때에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성도(聖徒)란 말은 참으로 귀한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가꾸도록 부름을 받은 거룩하게 구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도(聖徒)”의 다른 표현은 “그리스도 예수 있는 신실한 자”란 말인데, 여기의 [신실한 자]란 [피스토스]란 말로 “믿음이 있는 자, 믿을 만한 자, 충성된 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충성스럽고 믿음직스런 참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가꿀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무슨 일을 맡겨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무슨 일을 맡겨도 믿음직스럽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가꾸려면 신앙적인 돈독함과 인격적인 성실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⑵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은 무엇입니까?(2절)
그것은 본문 2절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가꾸는 자에게 주시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은 [은혜(恩惠)]와 평강의 축복입니다. 따라서 은혜와 평강은 바울 서신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인사지만 이것은 본 서신을 요약하는 핵심적인 말입니다. 
여기에서 ① 은혜(恩惠)란 말은 [카리스]란 말로서 이 말은 헬라식 인사로서 “하나님의 총애”라는 뜻입니다. 또한 은혜(恩惠)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우리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과 기업으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恩惠)란 하나님의 무조건이며,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요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 2:8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의 ② 평강(平康)이란 말은 [에이레네]라는 말로 이 말은 유대식 인사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후에 주어지는 내적이며 영적인 은혜 것”을 말합니다. 보통 히브리 사람은 [샬롬]라고 인사말을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모든 가정에 들어갈 때에 평안을 빌라고 교훈하셨고(마 1012), 또한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친히 제자들에게 평안을 축복하셨습니다(요 2020-21)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있는 평강도 아니며(요 1427)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평강이며,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뺏어갈 수 없는 평강입니다. 그것은 내적이고 신앙적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관련하여 스티얼(Stier)이라는 사람은 “은혜(恩惠)를 비는 축복 인사는 성도와 관련된 것으로 성결한 첫 요소가 되며, 평강(平康)은 신실한 자와 관련이 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후의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은혜로 말미암아 누리는 평강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로마의 차가운 감옥에서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있는 평강을 뺏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 4:4에 보면 감옥 안에 바울이 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그리고 이어서 6,7절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恩惠)와 평강의 근원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은혜(恩惠)는 헬라인의 이상(理想)만이 아니고, 평강(平康)은 유대인의 이상(理想)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져야 할 축복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축복은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가꾸는 성도들에게 주어진다는 축복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에베소서의 수신자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은혜로 말미암은 평강으로 살아야 합니다. 풍성한 평강 속에서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소명의식을 본받아서 은혜와 평강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되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인 에베소교회가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도록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의 부름을 받은 예수의 온전한 일꾼으로 부름 받을 받았던 바울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가꾸라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한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또한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을 향하여 성도요 혹은 하나님의 신실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거룩한 구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아름다운교회라는 더욱 더 아름답게 가꾸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와 평강의 역사가 임하기를 기원했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의 헌신할 때에 아름다운교회는 물론이고 우리의 마음과 가정과 자녀와 일터 위에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의 역사가 가득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