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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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복을 주시는 하나님”(엡 1:3-6)
본문의 말씀은 “신령한 복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씁니다. 그래서 밥그릇에도, 수저에도, 상에도, 옷에도, 문에도 복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고서 복을 받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물론 복을 받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복을 받기를 사람들은 조상들에 대한 제사를 잘 드리면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섬기는 신(神)에게 정성을 다하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불교 사찰에 가보면 불교 사찰에 가보면 어디든지 대웅전, 명부전, 삼성각 이 세 가지 건물이 있습니다. 대웅전(大雄殿)은 불타에게 소위 예배를 드리는 곳이고, 명부전은 죽은 사람에 대한 제사를 드리는 곳이고, 삼성각은 산신(= 한국의 토속 신으로 여긴 산신령), 칠성신(= 도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옛날부터 우리나라 민간에서 재물과 재능을 주고 아이들의 수명을 늘려주며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주는 신), 독성(=스승 없이 혼자 깨달음을 얻은 성자)을 모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불교인들 가운데 제일 인기가 있는 곳이 바로 삼성각입니다. 여기에서 복(福)을 빌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종교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에게 정성을 다하면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정성을 드리기 때문에 복을 받는 곳이 아니라 복을 이미 주셨기 때문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교회는 복을 얻기 위하여 정성을 드리는 곳이 아니라 이미 복이 내려 흘러넘치는 곳입니다. 그 복을 알고 소유한 사람들이 즐거워 예배하며 찬양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은 이미 무한한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3절)
본문 3절 상반 절에서 “찬송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6절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의 복 곧 신령한 복을 받은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복된 성도라면 복을 주신 하나님에 대하여 칭송과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복된 성도라는 마음의 감사와 입술에 찬송이 넘쳐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지만 자기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복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의 교회 성도들에게도 권면하고 있습니다. 「찬양합시다! 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축복 받은 성도들은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께 찬송을 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복 주신 이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신령한 복"이란 육신적인 복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육신적인 축복을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신령한 복”이란 보다 근본적이고, 더욱 중요한 복인 영적인 복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받는 신령한 복은 “하늘에 속한” 복 곧 천상에서부터 오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땅에 속한 불신자들은 땅엣 것을 좋아하나 성도의 마음은 하늘에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복된 삶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신령한 은혜를 더 추구하는 새로운 삶이라는 우리는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풍성히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격과 기쁨이 남아 있습니까? 우리의 삶을 통하여 찬양해야 합니다.
2. 신령한 복은 누구로부터 옵니까?(3절 중)
본문 3절 중반 절에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신령한 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복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결코 신령한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복은 무엇입니까?
① 과거적인 복으로는 선택의 복이 있고(4-6절) ② 현재적인 복으로는 속죄 혹은 구원의 복이 있고 (7-12절) ③ 장차 미래에 누릴 복으로는 양자로 인치심의 복 곧 영생의 복을 주십니다(12-13절)
그렇다면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놀라운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아들을 보내어 죄와 죽음 가운데서 우리들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약속한지 2,000년 만에 그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입니다. 「복음(福音)」이란 약속하신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입니다. 그래서 롬 1:2에서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무한하신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요 17:4-6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되신 예수님에게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피 흘려 목숨을 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일 4:8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곧 나의 아버지입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하신 조물주요, 만왕의 왕이신 권능자이십니다. 우리 죄인들이 감히 근접할 수 없는 두려운 분입니다. 근접했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무서운 분입니다.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실 때, 우리들은 그분 앞에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 1:12에서 “영접 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죄인들도 감히 하나님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울 것이 무엇입니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인데,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데 무엇이 걱정이 됩니까? 부르십시오! 찾으십시오! 믿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 “전능하신 아버지” “만군의 여호와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 나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3. 신령한 복은 누구를 통하여 옵니까?(3절 중)
본문 3절 중반 절에서 “...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복의 주인 되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물가서 숭늉 찾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숭늉을 마시려면 부엌에 가야 합니다. 아기는 엄마 품안에 있어야 젖을 먹을 수 있습니다. 복이 있는 곳에 가야 복을 받습니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령한 복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말입니다.
포도 가지는 포도나무에 속했을 때 열매를 얻습니다. 가지가 나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 15:5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품안에 속해 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살아갑니까?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삽니까? 예수님의 몸인 교회생활에 충실하고 있습니까?
둘째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갇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 갇혀 있지만 그는 그리스도 안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 6:20에서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속박 당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을 속박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업입니까? 시기와 질투입니까? 병마입니까? 생활의 염려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속박 당하지 않는 사람, 그리스도 예수에게 꼼짝 못하고 속박 당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속박 당한 사람, 그리스도 안에 갇힌 사람,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① 주일날 그리스도 안에 속박 당하여/갇히어/속했으므로,예배를 드려야 하며 온 가족이 나들이를 가도 참여 할 수 없는 그 사람―복 있는 사람입니다. ② 적당히 눈감아 주면 큰돈이 굴러들어 옴에도 그리스도 안에 속박 당하여/갇히어/속했으므로 죄에 동참할 수 없는 그 사람 ― 복 있는 사람입니다. ③ 당장 보복을 하고 싶으나 그리스도의 마음에 속박 당하여/속했으므로/갇혔으므로 용서할 수 밖에 없는 그 사람―복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살므로 「義」를 위하여 살고 있다면 어떤 고난과 핍박이 온다 해도 누가 뭐라고 비난한다고 당신은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제 당신이 할 일은 복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다 주신 복을 세어 보고 그 복을 확인하고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입니다.“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예화) 4세기 교부 [크리소스톰]이 체포되어 로마황제 앞에 끌려갔을 때 황제는 이렇게 위협하였습니다. “너의 목숨을 끊어도 좋으냐?” 이에 크리소스톰은 “저의 생명은 벌써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안겨 있습니다. 황제 폐하, 당신이 나에게서 빼앗을 것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나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복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맡기셨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 안으로 안겨 본 경험이 없다며 지체하지 말고 이 복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으로 회개하고 뛰어드십시오.
4. 신령한 복은 “하나님의 선택”을 말합니다.(4절)
⑴ 선택(選擇)의 시기 - “ 곧 창세 전(前)에”(4절)
본문 4절에서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여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시기는 “창세 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 곧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만이 완전하신 존재로 존재하시던 영원의 과거에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도 전에 이미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뽑아 놓으셨던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였을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 된 복을 받은 것이나, 본질적으로 우리는 이미 이 우주가 존재하기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자신을 선택하셨다는 믿음과 확신이 분명하였습니다. 선택의 교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택교리는 인간의 지적 소산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모습을 연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형편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의 체험을 한 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은 후 그는 변화되었고, 복음의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선택 교리는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고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자신의 절대주권을 가지고 직접 실행하시는 계시이기 때문에, 이 선택의 교리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감격함으로 겸손하게 고백되어야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은 제네바의 성 베드로 교회에서 1558년 5월 1일 부터 48회에 걸쳐 에베소서를 강해하였습니다. 그는 강해 중에 선택의 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비록 우리는 논증이나 추론을 통하여 왜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을 지라도 우리는 우리에게 그 선택을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에 눈을 뜰 때 체험을 통해 그것을 충분히 알게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세 전에 선택하셨다」는 선택 교리는 체험과 믿음과 고백을 통해서만이 그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여야만 합니다. 선택의 교리는 결코 사변의 대상이 아니라 고백의 대상이며 감사와 감격함으로 느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⑵ 선택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 “그리스도 안에서”(4절)
선택의 기초는 교회의 기초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4절)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대신하여 율법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갈 3:1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벧전 1:19-20에서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것이니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⑶ 선택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 “우리들입니다”(4절)
선택의 대상은 우리들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란 1절의 말씀과 같이 “성도들과 믿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말했을 때에 “우리들”은 인류 전체의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과 믿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께서 따로 뽑으시고 산 신앙으로 하나님을 영접하게 하신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⑷ 선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
첫째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4절)
본문 4절에서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것”라고 말씀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첫 번째 목적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4절)
그렇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성결케 하시기 위함이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구원받았다는, 선택되었다는 데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선택의 목적인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가 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여야 합니다. 성결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이자 동시에 우리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더욱 거룩하여지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하여 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장을 멈춰버린 신앙인이 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 선택하고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기기” 위해서 입니다.(5절)
본문 5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두 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심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죄의 자녀였고 율법의 자녀였고 세상의 자녀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복,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롬8:15)
로마법에서는 누구든지 양자를 삼게 되면 친아들과 똑같은 권리와 자격을 소유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리시는 신분과 권리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 8:17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은 예수님과 꼭 같은 권세와 권리와 명예를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약속의 씨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롬 9:8에서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일 3:9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남자나 여자나 모두 영적인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의 인구는 6십만 3천 5백 5십 명이었는데 여자와 아이를 뺀 남자 장정들의 숫자였습니다. 이렇게 여자와 아이는 사람의 수에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그들에게는 씨가 없기 때문입니다. 씨는 남자 장정들에게만 있습니다. 성도는 영적으로 남자 장정과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하나님의 씨」 즉 예수님을 마음에 소유한 거듭난 사람이란 말입니다. 천국에 「예수 씨」를 간직한 장정 같은 씩씩한 아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여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자는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셨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바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영적인 축복이며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기쁘신 마음으로 이 모든 축복을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이제나저제나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아버지는 저 멀리 거지가 된 아들이 돌아오자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데려다가 씻기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 우고 잔치를 벌리고 기뻐하셨습니다 (눅 15장).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신분이요 권세를 누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아직도 죄인의 성품을 버리지 못하고 이 땅위의 옛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법적으로 양자가 되었지만 아직도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깨끗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로 만들어 가도록 예정하셨습니다.
미리 계획하셨습니다. 당신의 미래의 인생 계획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아들답게 만들어 질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오늘 당신에게 어려운 일이 있어 괴롭습니까?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욥은 자기를 만들어 가시려고 그 모진 고난을 겪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래서 욥 23:10에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6절)
본문 6절에서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영광은 거저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주시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일입니까? 고행이나 선행의 대가로 주신 것입니까? 사랑하시기에 거져 주신 것입니다(6절). 우리에게는 거저였으나 하나님에게서는 가장 값비싼 아들의 생명을 지불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신 복입니다. 신령한 복입니다.
이 지구와 우주를 다 팔아도 살 수 없는 가장 값진 복, 「하나님의 아들」된 것. 하나님의 아들된 권세입니다. 이 권세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지옥갈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입니다. 마귀를 이기고 지옥을 물리치는 권세를 당신은 사용하십니까? 천사도 흠모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묵혀 두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할 때 주신 복은 이와 같이 엄청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거저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근거와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根據)하고 있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선택하였고 사랑했기에 자녀가 되게 하셨고 사랑하셨기에 외아들 독생 성자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으며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자격이나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늘 저버렸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완악 했고 이기적이었으며, 관용을 베풀거나 용서할 줄도 몰랐습니다. 감사보다는 불평과 불만이 많았으며,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늘 우리를 떠나지 아니했었습니다. 늘 초조했고 두려움과 답답함과 곤고함 속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오늘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선택하신 목적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 우연히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마치 연극의 무대와도 같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연출자이며 우리는 모두 배우입니다. 무대에 나가는 배우는 반드시 연출자의 계획과 의도에 따라 행동하여야 합니다. 인생도 마치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이라는 무대위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자기의 달란트대로 자기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 첫째는,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심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심이며, 셋째는, 하나님 자신이 은혜의 영광을 받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 4321에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축복은 우리를 선택하심에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복을 찬양합시다. 이 복을 주신 하나님을 높이는데 최선을 다하며 삽시다. 아름다운 교회는 복을 얻기 위하여 정성을 드리는 곳이 아니라 이미 내게 주신 흘러넘치는 복을 기뻐하며 찬양하는 사람들의 교회입니다. 복을 주신 하나님을 칭송하며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입술과 생활에서 찬송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아들 된 성도들의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있습니까? 다시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신령한 복을 받아 누리는 영육 간에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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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말씀은 “신령한 복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씁니다. 그래서 밥그릇에도, 수저에도, 상에도, 옷에도, 문에도 복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고서 복을 받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물론 복을 받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복을 받기를 사람들은 조상들에 대한 제사를 잘 드리면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섬기는 신(神)에게 정성을 다하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불교 사찰에 가보면 불교 사찰에 가보면 어디든지 대웅전, 명부전, 삼성각 이 세 가지 건물이 있습니다. 대웅전(大雄殿)은 불타에게 소위 예배를 드리는 곳이고, 명부전은 죽은 사람에 대한 제사를 드리는 곳이고, 삼성각은 산신(= 한국의 토속 신으로 여긴 산신령), 칠성신(= 도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옛날부터 우리나라 민간에서 재물과 재능을 주고 아이들의 수명을 늘려주며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주는 신), 독성(=스승 없이 혼자 깨달음을 얻은 성자)을 모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불교인들 가운데 제일 인기가 있는 곳이 바로 삼성각입니다. 여기에서 복(福)을 빌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종교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에게 정성을 다하면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정성을 드리기 때문에 복을 받는 곳이 아니라 복을 이미 주셨기 때문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교회는 복을 얻기 위하여 정성을 드리는 곳이 아니라 이미 복이 내려 흘러넘치는 곳입니다. 그 복을 알고 소유한 사람들이 즐거워 예배하며 찬양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은 이미 무한한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3절)
본문 3절 상반 절에서 “찬송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6절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의 복 곧 신령한 복을 받은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복된 성도라면 복을 주신 하나님에 대하여 칭송과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복된 성도라는 마음의 감사와 입술에 찬송이 넘쳐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지만 자기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복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의 교회 성도들에게도 권면하고 있습니다. 「찬양합시다! 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축복 받은 성도들은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께 찬송을 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복 주신 이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신령한 복"이란 육신적인 복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육신적인 축복을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신령한 복”이란 보다 근본적이고, 더욱 중요한 복인 영적인 복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받는 신령한 복은 “하늘에 속한” 복 곧 천상에서부터 오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땅에 속한 불신자들은 땅엣 것을 좋아하나 성도의 마음은 하늘에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복된 삶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신령한 은혜를 더 추구하는 새로운 삶이라는 우리는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풍성히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격과 기쁨이 남아 있습니까? 우리의 삶을 통하여 찬양해야 합니다.
2. 신령한 복은 누구로부터 옵니까?(3절 중)
본문 3절 중반 절에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신령한 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복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결코 신령한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복은 무엇입니까?
① 과거적인 복으로는 선택의 복이 있고(4-6절) ② 현재적인 복으로는 속죄 혹은 구원의 복이 있고 (7-12절) ③ 장차 미래에 누릴 복으로는 양자로 인치심의 복 곧 영생의 복을 주십니다(12-13절)
그렇다면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놀라운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아들을 보내어 죄와 죽음 가운데서 우리들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약속한지 2,000년 만에 그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입니다. 「복음(福音)」이란 약속하신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입니다. 그래서 롬 1:2에서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무한하신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요 17:4-6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되신 예수님에게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피 흘려 목숨을 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일 4:8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곧 나의 아버지입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하신 조물주요, 만왕의 왕이신 권능자이십니다. 우리 죄인들이 감히 근접할 수 없는 두려운 분입니다. 근접했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무서운 분입니다.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실 때, 우리들은 그분 앞에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 1:12에서 “영접 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죄인들도 감히 하나님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울 것이 무엇입니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인데,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데 무엇이 걱정이 됩니까? 부르십시오! 찾으십시오! 믿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 “전능하신 아버지” “만군의 여호와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 나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3. 신령한 복은 누구를 통하여 옵니까?(3절 중)
본문 3절 중반 절에서 “...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복의 주인 되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물가서 숭늉 찾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숭늉을 마시려면 부엌에 가야 합니다. 아기는 엄마 품안에 있어야 젖을 먹을 수 있습니다. 복이 있는 곳에 가야 복을 받습니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령한 복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말입니다.
포도 가지는 포도나무에 속했을 때 열매를 얻습니다. 가지가 나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 15:5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품안에 속해 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살아갑니까?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삽니까? 예수님의 몸인 교회생활에 충실하고 있습니까?
둘째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갇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 갇혀 있지만 그는 그리스도 안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 6:20에서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속박 당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을 속박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업입니까? 시기와 질투입니까? 병마입니까? 생활의 염려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속박 당하지 않는 사람, 그리스도 예수에게 꼼짝 못하고 속박 당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속박 당한 사람, 그리스도 안에 갇힌 사람,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① 주일날 그리스도 안에 속박 당하여/갇히어/속했으므로,예배를 드려야 하며 온 가족이 나들이를 가도 참여 할 수 없는 그 사람―복 있는 사람입니다. ② 적당히 눈감아 주면 큰돈이 굴러들어 옴에도 그리스도 안에 속박 당하여/갇히어/속했으므로 죄에 동참할 수 없는 그 사람 ― 복 있는 사람입니다. ③ 당장 보복을 하고 싶으나 그리스도의 마음에 속박 당하여/속했으므로/갇혔으므로 용서할 수 밖에 없는 그 사람―복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살므로 「義」를 위하여 살고 있다면 어떤 고난과 핍박이 온다 해도 누가 뭐라고 비난한다고 당신은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제 당신이 할 일은 복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다 주신 복을 세어 보고 그 복을 확인하고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입니다.“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예화) 4세기 교부 [크리소스톰]이 체포되어 로마황제 앞에 끌려갔을 때 황제는 이렇게 위협하였습니다. “너의 목숨을 끊어도 좋으냐?” 이에 크리소스톰은 “저의 생명은 벌써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안겨 있습니다. 황제 폐하, 당신이 나에게서 빼앗을 것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나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복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맡기셨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 안으로 안겨 본 경험이 없다며 지체하지 말고 이 복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으로 회개하고 뛰어드십시오.
4. 신령한 복은 “하나님의 선택”을 말합니다.(4절)
⑴ 선택(選擇)의 시기 - “ 곧 창세 전(前)에”(4절)
본문 4절에서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여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시기는 “창세 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 곧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만이 완전하신 존재로 존재하시던 영원의 과거에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도 전에 이미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뽑아 놓으셨던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였을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 된 복을 받은 것이나, 본질적으로 우리는 이미 이 우주가 존재하기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자신을 선택하셨다는 믿음과 확신이 분명하였습니다. 선택의 교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택교리는 인간의 지적 소산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모습을 연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형편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의 체험을 한 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은 후 그는 변화되었고, 복음의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선택 교리는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고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자신의 절대주권을 가지고 직접 실행하시는 계시이기 때문에, 이 선택의 교리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감격함으로 겸손하게 고백되어야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은 제네바의 성 베드로 교회에서 1558년 5월 1일 부터 48회에 걸쳐 에베소서를 강해하였습니다. 그는 강해 중에 선택의 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비록 우리는 논증이나 추론을 통하여 왜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을 지라도 우리는 우리에게 그 선택을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에 눈을 뜰 때 체험을 통해 그것을 충분히 알게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세 전에 선택하셨다」는 선택 교리는 체험과 믿음과 고백을 통해서만이 그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여야만 합니다. 선택의 교리는 결코 사변의 대상이 아니라 고백의 대상이며 감사와 감격함으로 느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⑵ 선택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 “그리스도 안에서”(4절)
선택의 기초는 교회의 기초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4절)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대신하여 율법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갈 3:1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벧전 1:19-20에서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것이니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⑶ 선택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 “우리들입니다”(4절)
선택의 대상은 우리들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란 1절의 말씀과 같이 “성도들과 믿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말했을 때에 “우리들”은 인류 전체의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과 믿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께서 따로 뽑으시고 산 신앙으로 하나님을 영접하게 하신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⑷ 선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
첫째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4절)
본문 4절에서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것”라고 말씀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첫 번째 목적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4절)
그렇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성결케 하시기 위함이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구원받았다는, 선택되었다는 데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선택의 목적인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가 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여야 합니다. 성결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이자 동시에 우리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더욱 거룩하여지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하여 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장을 멈춰버린 신앙인이 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 선택하고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기기” 위해서 입니다.(5절)
본문 5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두 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심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죄의 자녀였고 율법의 자녀였고 세상의 자녀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복,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롬8:15)
로마법에서는 누구든지 양자를 삼게 되면 친아들과 똑같은 권리와 자격을 소유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리시는 신분과 권리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 8:17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은 예수님과 꼭 같은 권세와 권리와 명예를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약속의 씨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롬 9:8에서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일 3:9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남자나 여자나 모두 영적인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의 인구는 6십만 3천 5백 5십 명이었는데 여자와 아이를 뺀 남자 장정들의 숫자였습니다. 이렇게 여자와 아이는 사람의 수에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그들에게는 씨가 없기 때문입니다. 씨는 남자 장정들에게만 있습니다. 성도는 영적으로 남자 장정과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하나님의 씨」 즉 예수님을 마음에 소유한 거듭난 사람이란 말입니다. 천국에 「예수 씨」를 간직한 장정 같은 씩씩한 아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여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자는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셨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바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영적인 축복이며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기쁘신 마음으로 이 모든 축복을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이제나저제나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아버지는 저 멀리 거지가 된 아들이 돌아오자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데려다가 씻기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 우고 잔치를 벌리고 기뻐하셨습니다 (눅 15장).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신분이요 권세를 누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아직도 죄인의 성품을 버리지 못하고 이 땅위의 옛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법적으로 양자가 되었지만 아직도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깨끗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로 만들어 가도록 예정하셨습니다.
미리 계획하셨습니다. 당신의 미래의 인생 계획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아들답게 만들어 질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오늘 당신에게 어려운 일이 있어 괴롭습니까?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욥은 자기를 만들어 가시려고 그 모진 고난을 겪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래서 욥 23:10에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6절)
본문 6절에서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영광은 거저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주시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일입니까? 고행이나 선행의 대가로 주신 것입니까? 사랑하시기에 거져 주신 것입니다(6절). 우리에게는 거저였으나 하나님에게서는 가장 값비싼 아들의 생명을 지불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신 복입니다. 신령한 복입니다.
이 지구와 우주를 다 팔아도 살 수 없는 가장 값진 복, 「하나님의 아들」된 것. 하나님의 아들된 권세입니다. 이 권세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지옥갈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입니다. 마귀를 이기고 지옥을 물리치는 권세를 당신은 사용하십니까? 천사도 흠모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묵혀 두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할 때 주신 복은 이와 같이 엄청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거저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근거와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根據)하고 있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선택하였고 사랑했기에 자녀가 되게 하셨고 사랑하셨기에 외아들 독생 성자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으며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자격이나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늘 저버렸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완악 했고 이기적이었으며, 관용을 베풀거나 용서할 줄도 몰랐습니다. 감사보다는 불평과 불만이 많았으며,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늘 우리를 떠나지 아니했었습니다. 늘 초조했고 두려움과 답답함과 곤고함 속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오늘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선택하신 목적을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 우연히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마치 연극의 무대와도 같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연출자이며 우리는 모두 배우입니다. 무대에 나가는 배우는 반드시 연출자의 계획과 의도에 따라 행동하여야 합니다. 인생도 마치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이라는 무대위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자기의 달란트대로 자기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 첫째는,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심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심이며, 셋째는, 하나님 자신이 은혜의 영광을 받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 4321에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축복은 우리를 선택하심에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복을 찬양합시다. 이 복을 주신 하나님을 높이는데 최선을 다하며 삽시다. 아름다운 교회는 복을 얻기 위하여 정성을 드리는 곳이 아니라 이미 내게 주신 흘러넘치는 복을 기뻐하며 찬양하는 사람들의 교회입니다. 복을 주신 하나님을 칭송하며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입술과 생활에서 찬송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아들 된 성도들의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있습니까? 다시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신령한 복을 받아 누리는 영육 간에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