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엡 2:1-10)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恩惠)]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이 자기 분수를 모르기  때문에 경거망동(輕擧妄動)하고 기쁨과 감격함을 간직하고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감격함이 없다면 다시금 우리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삼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언급하기 전에 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그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1장을 통해서 바울은 성부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은 축복, 성자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구속의 은혜, 성령 하나님의 확실한 보증에 대하여 찬미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해주신 여러 가지 일들을 찬송합니다. 이를 인하여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린 후 바울은 기도를 드립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영안의 눈을 떠서, 하나님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사 그들이 부름을 받은 소망이 무엇이며, 받은 기업이 무엇이며, 이 소망을 실현시키며 기업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이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내려온다는 것을 확신 있게 강조합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비참한 절망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재를 이루고 있으면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풍성함의 축복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우리들이 이러한 복을 받기 전에는 어떤 자들이었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 우리들의 상태와 우리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게 되었는가를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왜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해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받은 은혜가 큰 것인지에 대해서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지난 과거에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해서 생각함으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삶을 살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사람이 왜 교만합니까? 지난 과거를 망각한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에베소교회의 성도는 거의 이방인 출신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유대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복(福)입니다. 이처럼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반만년동안 귀신을 섬겨오던 그 죄를 씻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별 볼일 없는 은혜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1.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어떤 자이었습니까?
⑴ 전에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이었습니다.(1절)
본문 1절 상반 절에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의 엄청난 선고를 받았던 자들입니다. 
여기에서 “허물”이란 “내가 스스로 생활 속에서 짖는 실수나 죄를 말하는 것으로서 진리나 의로움에서 벗어한 상태 혹은 바른 신앙에서 떨어져 나간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죄(罪)란 “표적을 못 맞춘 것”,“표준에 미치는 못한 것”, “표준에 미치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어떤 기준에서 빗나간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죄(罪)란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을 벗어나 미치지 못한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실패를 가르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는 죽었다” “너는 쓸모없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무척 충격적이고 기분 나쁜 선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만드신 분의 진단입니다. “죽었다”,“끝났다” 갖다가 장례식이나 치루라는 것입니다. 
마치 암 말기 환자의 가족들에게 의사는 말합니다. “끝났습니다. 먹고 싶다는 것 다 사주고, 보고 싶다는 것 다 해주고 마음이나 위로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는 이제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입니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은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시체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 4:18에서 "저희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너는 죽었다" 무척 충격적이고 기분 나쁜 선언이지만 이것은 우리의 진단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분의 진단입니다. 죽음이란 육체의 호흡이 멈추고 심장 박동이 멈춘 상태입니다.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데 왜 죽었단 말입니까? [허물과 죄]로 이미 죽은 사람은 자기가 죽어있는 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죽음의 의미는 생명의 근본으로부터의 [분리 됨]을 말합니다. 꽃꽂이의 꽃은 사실상 이미 죽은 것입니다. 마찬가지의 뜻입니다. 

사람의 근본은 하나님입니다.(창1:26)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단절되었다면 육신은 잠시 살았으나 본질인 영혼이 죽은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허물과 죄 때문입니다. [허물]은 알고 있는 경계선을 고의적으로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벗어난 결과가 죄이며, 죄의 결과가 죽음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첫 사람 아담이 저질렀습니다. 그가 하와를 속인 사탄의 말을 듣고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탈선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죽게 되었고 그 후손인 온 인류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죄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어서 세상에 태어나는”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모든 자연인은 살았다는 이름은 있지만 실상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시체라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이란」 육체의 호흡이 멈추고 심장 박동이 멈춘 상태로 이해합니다.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데 왜 죽었다고 한단 말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선언하신 죽음의 의미는 생명의 근본으로부터의 「분리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근본은 하나님입니다(창1:26). 뿌리로부터 잘려진 나무처럼, 사람이 생명의 근본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단절 되었다면 육신은 잠시 살았으나 본질인 영혼이 죽은 것입니다. 무정란과 같습니다. 먹을 수는 있으나 살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입니다. 허물은 알고 있는 경계선을 벗어남, 고의적으로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벗어난 결과가 죄이며, 죄의 결과가 죽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허물과 죄가 우리들에게 준 것은 죽음뿐입니다. 성경에서 “죽었다.”라는 표현은 대체적으로 3가지로 쓰이고 있습니다. ① 영적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을 말합니다. ② 육적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말합니다. ③ 영원한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인이 바로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비롯되었습니다. 롬 5:12에서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속인 사탄의 말을 듣고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탈선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죽게 되었고 그 후손인 온 인류를 죽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생명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떠났고, 아담의 혈통을 통하여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외면하고 고의적으로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죄인인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헬라인들도 미국인들도 한국인들도 불교인들도, 기독교인의 자녀도 모두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원죄) 인간의 본질은 모두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버려야 속이 시원하고, 항상 떠나고 싶은 유혹과 위협 속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개 전통적인 신앙의 가정 출신 자녀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에 대하여 전율을 느끼는 은혜의 고마움을 모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아버지 어머니가 교회의 중직이기 때문에 마땅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에게 선언된 이 놀라운 선언을 마음에 새겨야 놀라운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지에 대해서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⑵ 전에 우리는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자이었습니다.(2절)
본문 2절 하반 절부터 3절에서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며 이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공중 권세 잡은 자들로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여기의 「공중권세 잡은 자」란 공중권세를 잡은 자란 마귀를 일컫는 말로서 다른 번역서에서는 “허공을 다스리는 자의 세력의 두목을 따르는 자”란 말로 번역되고 있습니다(공동번역)

마귀는 허공을 다스리는 자입니다. 이 세상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입니다. 바울이 마귀에 대해서 공중 권세를 잡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은 언뜻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실세가 아니고 허세입니다. 허깨비란 말입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큰소리치 잘 살고 있는 것 같아도 그것은 헛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모두 허공을 다스리는 두목에게 지배받는다는 말입니다. 깡패 집단에 소속되면 그 두목의 지시와 명령을 따라 살아야 하지요. 개인적으로 선을 행하고 싶어도 조직의 두목의 지시에 따라 깡패 노릇을 계속해야 하듯,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마귀에게 노예 되어 죄를 짓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마귀를 “공중 권세를 잡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늘에 대해서 삼층 천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층은 땅위로서 사람들이 사는 곳, 이층은 공중으로서 마귀와 악한 영들이 사는 곳, 삼층은 하늘위로서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공중이란 어두움을 좋아하는 습한 곳, 불순종의 아들들, 마귀들이 좋아하는 은거지로 상징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영적 죽음의 상태에 있었을 때에는 공중권세를 잡은 마귀의 종이 되어 마귀를 따라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를 따르는 자, 노예 된 자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로, 내세를 거부하는 삶을 삽니다.(2절)
본문 2절 상반 절에서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며 이 세상의 풍습을 좇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마귀를 따르는 자는 이 세상을 풍습을 좇고 살아갑니다. 이는 내세를 거부하는 삶을 말합니다. 마귀는 이 세상만을 위해서 살라고 합니다. 노후 대책은 세우되 사후 대책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당장 오늘에 필요한 것을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내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쾌락주의와 향락주의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때에는 우상을 섬기고 여려가지 죄악을 행하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죄라는 의식 없이 습관적으로 행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의 영향 아래 있고 죄악이 곽 차있는 세상의 풍습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이처럼 내세를 거부하는 자는 [이 세상의 풍속을 좇고」 삽니다. 마귀는 이 세상만을 위해서 살라고 합니다. 노후(老後) 대책은 세우되 사후(死後) 대책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당장 오늘에 필요한 것을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내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없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사치와 향락에 빠집니까? 
현대인의 사치와 향락의 방탕 속에는 이 세상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촌각의 시간을 아껴가며 즐기지 않으면 손해 본다는 유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쾌락주의와 향락주의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환경이 어렵고 힘들면 비관주의자가 되게 합니다.→ (자살. 알콜중독) 그러나 환경이 좋아지면 쾌락주의자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민요는 언제나 두 가지 주제만을 노래합니다.
① (노세, 노세 젊어 노세! 니나노 닐리야) ②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어디 우리나라뿐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세계 모든 사람들의 노래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하는 내세의 삶이 있다는 말입니다. 삶은 쾌락이 전부가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이냐? 영원한 지옥이냐? 그러므로 깨어서 근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일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설 날이 곧 오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삶을 삽니다(2절 하반)
본문 2절 하반절에서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마귀를 따르는 자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삶을 삽니다.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악한 사조, 사상, 흐름, 철학(哲學) 등으로 가득합니다. 곧 하나님을 거부하고 불순종하게 하는 세상입니다. 세상 풍속을 좇고=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이 세상 풍속」-사탄이 지배하는 문화, 하나님을 거역하며 불순종하는 풍속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불순종의 아들”이란 불순종의 아들들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거스리고 반항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악한 영 곧 마귀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남편이, 내 자식이 마귀에게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사실입니다. 사탄이 우리들 속에서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육체에 잘못된 욕심을 갖게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무엇에 씌었나 보다' 좋은 일에 이런 말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을 죽이기나, 자식이 부모를 온 가족이 약을 먹고 죽는다든지 노름을 해서 집안을 망친다든지. 가족을 두고 딴 살림을 차린다든지. 이런 일들은 정상적인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고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마귀에 씌워서 마귀의 힘으로 행하여지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에베소교회 성도들만이 그랬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마귀를 이길 만한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의 설교대로 살다가는 이 사회에서 낙오되고 인간관계에서 소외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풍속을 거역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목사님은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설교고 현실은 현실이니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거부하고, 적당히 불순종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반문합니다. 에베소교회의 시대나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시대나 현대나 공통적인 사조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이 세상 풍속을 쫓는 일은 마귀를 따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느덧 하나님을 거부하는 풍속에 여러분들을 묶어 놓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롬 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처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 1-3절에서 “....이었더니”라는 말씀은 과거의 모습을 지적하는 말씀으로서 이제는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⑶ 전에 우리는 체의 욕심대로 살았던 자였습니다.(3절)
본문 3절에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는 말씀처럼 마귀를 따라는 자는 육체의 욕심대로 삽니다. 
그렇다면 욕체의 소욕이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서 바울은 갈 5:17-2에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본래 어떤 존재였습니까?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창 27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결코 육체의 욕심대로 살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4:4에서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떡을 먹기 위해 수고하고 땀흘리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말씀을 먹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통 이 세상은 육체만이 전부라고 여기게 합니다.
하나님이 육체를 정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육체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인의 최대 관심은 건강입니다. 물론 건강해야 합니다. 병원을 찾고, 아침 운동을 하고, 목욕을 하고, 보약을 먹고, 좋은 옷을 입는 것만큼  내 영혼의 관리를 하는가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혼이 죽었기 때문에 육신만을 위해 생각하고 원하고 따라간다고 하지만 교인들조차 그렇게 산다는 것은 너무도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물질 그 이상을 요구합니다.(롬 8:5-10)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게 삽니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눅 12:19에서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라고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되었습니다.(4-9절)
사도 바울은 1-3절에서 우리가 전에는 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였고 ②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자였고 ③ 육체의 욕심을 좇아 지내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역전된 것입니다. 
진노의 자녀가 은혜의 자녀로 바뀝니다. 죽은 자가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납니다. 진노의 자녀가 은혜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결코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긍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친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죗값을 지불하심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우리들을 죄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지옥 불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중에 아직도 우리가 착한 일을 해서, 고행을 해서 의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은 죽어버린 시체요, 공중권세 잡은 자, 마귀의 결박에 묶인 포로임을 잊지 않는 다면 스스로 노력과 선행으로 하나님이 만족할만한 의인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십시오. 인간은 전적인 타락자요, 무능 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문제입니다. 죽어버린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고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허물과 죄로 죽어버린 사람을, 불순종 밖에 모르는 진노의 자녀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긍휼에 풍성하신 분이십니다.(4절 상) 
본문 4절 상반 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여기에서 [긍휼의 마음]이란 상처 입은 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부모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이 그 상처를 입은 것처럼 생각하여 실제적인 도움을 베푸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긍휼의 마음으로 죄인을 다시 살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친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죗값을 지불하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큰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4절 하)
본문 4절 하반 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큰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긍휼을  베푸셨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긍휼을 실천 하셨습니다. 우리들을 위하여 죄 값을 치루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를 흘리시고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큰 사랑입니다.(롬 5:8)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큰 사랑은 구체적으로 어떤 분입니까?
①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5절 상)
본문 5절 상반 절에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큰 사랑은 허물과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함께 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우리와 그리스도를 함께 연합 시켰습니다. 그래서 롬 6:4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여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어떤 사람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씻음을 받아야 죄 값이 지불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저와 여러분들의 불신앙의 죄를 짊어지고 골고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 무엇으로 갚을 수 있단 말입니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②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 주셨습니다.(6절 상) 
본문 6절 상반 절에서 "또 함께 일으키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과 함께 죄인 되어 죽으셨으나 예수님은 우리들과 함께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은 생명의 주인이시기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께 일으켜 세워주심으로 우리도 다시 살아나 영원한 생명을 다시 찾았습니다.

③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게 하셨습니다.(6절 하) 
본문 6절 하반 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부활하셨고 승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연합하셨기에 함께 부활하셨고, 함께 하늘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인종, 혈통, 국적, 신분 여하를 초월하여 이미 하늘의 사람입니다. 잠시 이 세상에 사는 것뿐입니다. 그야말로 「천국의 나그네」입니다. (벧전 2:11) 영광스러운 이 천국 시민이 된 기쁨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에 관하여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와 허물로 죽었던 시체였으니까요? 불쌍히 죽어서 썩은 시체, 마귀의 결박당한 포로된 자가 우리들입니다. 속수무책(束手無策)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에 관한 할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들에게 값없이 베푸신 영원히 변치 않는 구원의 선물입니다.(7절)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서 구원 얻은 존재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구원을 주신 분이십니다.(8절)
만약 우리가 천국을 가기 위해 위하여 시험을 치룬다고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면 “성경 10독 이상, 새벽기도 3년 이상, 금식기도 10번 이상, 헌금 5,000 만원이상, 구제활동으로 신문에  이름이 난일이 있을 것” - 누가 이 시험에 합격을 한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나를 강권하여 말씀 가운데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성령께서 탄식하시고 근심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성도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되어 천국백성 된것은 감사할 조건이지 뽐낼 조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얻으려면 「죄인이요, 시체요, 포로된」 자신을 놓고 하나님의 큰 사랑, 예수께서 이루신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가 나와 함께 연합하여 이루신 일인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구원은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16세기 봉건암흑 시대에 종교 개혁을 일으켜 하나님의 구원을 되찾은 독일 신부 마르틴 루터의 고행- 배드로 성당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는 수행에서도 얻을 수 없던 ‘구원’은  로마서 1장 17절을 읽다가 해결 받았습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을 완성한 칼빈의 외침-① “오직 믿음” ② “오직 은혜”③ “오직 성경”④ 오직 하나님의 영광!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모든 죄 값을 지불하고 형벌을 탕감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전혀 죄와 상관없는 새로운 인생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하셨습니다. 공중권세 잡은자의 권세를 이겨 우리 죄인들을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짜장면 한그릇을 얻어먹어도 신세를 갚아야 마음이 편한 것이 사람인데,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 수 있습니까? 

3. 그렇다면 구원받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10절)
본문 10절에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으로 만드신 목적은 선한 일을 위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조금이나마 은혜 받은 자의 도리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수님을 높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공로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의 결과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 자랑은 치명적입니다.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며 인내하며, 겸손하며 오직 예수님만 자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3:27에서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랑이 있다면 롬 15:17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자랑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후 10:17에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 안에서 자랑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갈 6:14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자랑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선한 일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 세상 풍속을 좇지 말고 천국의 풍속을 전파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의 문화를 창조하며 그 문화를 전파해야 합니다. 계명을 목숨처럼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증거는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요일5:3) 은혜를 아는 사람은 세상과 타협할 수 없습니다. 주일성수 문화, 양심 문화, 이웃사랑 문화, 자연보호 문화, 근검절약 문화 등, 우리 은혜 받은 성도들이 앞장서야 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풍속은 문화입니다. 기독교 풍속을 잃으면 교회가 무너집니다. 문화를 잃으면 나라를 잃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순종하는 풍속을 지키며 전파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 문화 창달을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들이 힘써야 할 선한 일입니다. 

셋째로, 육신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내 영혼의 관리, 내 인격을 관리하는데 힘을 쏟으며 살아야 합니다. 
육신보다 앞서야 할 것은 영혼입니다. 속사임을 잘 돌보세요. 영혼관리를 위하여 땀을 흘립시다. 교회생활에 성실하십시오. 교회는 「영혼의 헬스클럽」입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영혼의 관리, 내 인격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곧 하나님의 계명을 목숨처럼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계명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일 5:3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내 영혼의 관리, 내 인격을 관리하는데 힘을 쏟으며 살아야 합니다. 함부로 살면 놀라운 은혜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와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 귀한 신분에 감사하며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분명히 깨닫고 참으로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을 ② 공중 권세 잡은 자를 좇았던 우리들을 은혜로 구원하셔서 선한 일을 하도록 다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감사해야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함부로 살면 놀라운 은혜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엉터리로 살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놀라운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하나님 보기에 선한 생활을 하는 성도, 아름다운 교회의 성도는 놀라운 은혜를 보답하는 성도로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