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케 하옵소서!”(엡 3:14-21)

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하늘의 비밀과 경륜을 말씀하고 나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깊은 감격의 기도와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1절부터 13절을 통하여 자랑스런 복음의 일꾼에 대해서 언급을 하면서 하늘의 비밀의 사건, 그 비밀의 경륜에 대해서 말씀하였습니다. 너무나 벅차고 감격스레 하늘의 깨닫고 나면 사람은 할 말을 잃게 되며, 조용히 몸과 마음을 드려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자세가 됩니다. 

사람이 부분적으로 지식을 알 때, 그리고 그 지식이 전체적인 지식이 아니라, 얇은 지식일 때 쉽게 교만해지고 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성숙해질수록 거룩하고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순수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깨달을 때에, 더 이상 인간이 주장하고 싶은 말을 잃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높은 하늘의 비밀을 깨닫고 그것을 말하다가 갑자기 기도로 이야기를 바꿉니다. 더 이상 그 진리를 말하기 보다는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인류의 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중요한 말씀은 14절 상반 절에서 시작되는 [접두사] [이러하므로]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이러므로”라는 말은 3장 전반부의 내용을 받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게 하셨고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 바울에게 하나님의 자랑스런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셔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전하게 하셨으므로,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기도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면서 기도의 제목을 삼고자 합니다.

1. 누구에게 기도해야 합니까?(15절)
본문 14-15절에서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자의 대상자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예수님처럼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상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원래 구약에는 하나님이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역사에 개입하셔서 모든 잘못을 여지없이 파괴하며, 심판하며, 분노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은 피의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며,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의 그 분노를 달래기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이 잘못했을 때, 서슴없이 징계와 심판을 내리시고 죽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 앞에 합당치 않으면 전쟁에 패하게 하시어 포로로도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죄를 죽었던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두렵고 무서운 존재로 나타났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자는 죽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못 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 이름이 너무나도 거룩하고 완전하시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은 거룩하고 완전하시고 의로우시지만 멀리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분 앞에서는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긴장이 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이 좋으면서도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말씀은 거역할 수 없으면서도, 그 품에 안길 수 없는 것이 구약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선입관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혁명시켰습니다. “그런 심판과 진노와 거룩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짜 모습은 바로 사랑과 긍휼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공의롭고 거룩하셔서 죄를 용납하시지 않으시지만, 자신의 독생자를 죽여서라도 그 죄를 용서하고야 마는 하나님, 그리고 자기의 자녀를 삼으시며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마 6:9, 요 17장) 예수님은 그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너의 아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란 말을 가지고도 설명이 안 되니까? ‘아바’(막 1436,롬 8:15,갈 4:6) 아바는 우리나라의 말의 아빠와 같은 말입니다. 그 아빠라는 개념, 그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에 대해 탕자의 아버지시요, 간음한 여인의 남편과 같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으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구약의 호세아서에서 그런 통찰력을 짐작해서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보다 크시고 하나님의 인내는 인간의 불순종보다 깊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의 어떤 교만보다 높고, 하나님의 품은 어떤 죄인도 품을 수 있는 있을 만큼 넓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심장은 어떤 죄악의 칼로도 드려낼 수 없습니다. 이 분이 바로 내 하나님이요 내 아버지라고 바울은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을 섭리하시고 주권적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주셨다.”라는 것은 우리 아버지는 하늘과 땅을 주관하시는 주권자가 되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가 바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아버지 앞에 마땅히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14절 하반 절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노니...”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기도하는 자의 자세로서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은 문자적인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는 기도자의 자세를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꼭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만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는 말씀을 꼭 문자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서서 기도하든, 눈을 뜨고 기도하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걸어가면서도, 차를 타고 가면서도 심지어는 누워서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노니”라는 말씀은 간절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간절한 기도를 드릴 때는 무릎을 끊고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에스라가 이스라엘의 죄를 참회할 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땅에 얼굴을 대고 기도하실 때, 그리고 스데반이 순교할 때, 무릎을 끊고 기도하였습니다.(눅 22:41, 행 7:60,20:36,21:5) 

유대인의 기도 자세는 서서 기도하기도 하였고(막 11:25,눅 18:11), 엎드려 기도하는 하기도 하였습니다.(스 10:1, 눅 18:13) 그러나 신약에 들어와서 초대교회에서는 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무릎을 끊고 기도하였다”라는 것은 몸의 자세만이 아니라 기도하는 기도자의 마음의 중심을 더욱 강조하는 표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마음의 중심을 가지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울려나는 진실한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러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기도입니다. 

2. 무엇을 기도해야 합니까?(16-21절)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16절 상)
본문 16절 상반 절에서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라는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풍성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의 “영광의 풍성”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표현하는 말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은혜와 진리의 충만을 의미합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은 성도들을 구원하는 근원일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역사하여 그들을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원동력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영광]과 [풍성]이란 말을 강조하였습니다.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 차고 넘치는 풍성한 주의 은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서 바울은 지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풍성한 주의 은혜, 충만한 주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충만함에 있습니다. 차고 넘치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이 충만한 하나님이 우리가 고백하는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빈약해서는 안 됩니다. 매 마르고 강퍅하고 여유도 없고 마음도 좁고, 나누어주는 것도 없고 자기가 쓰기에도 모자라는 영성을 가지고 있으면 신앙생활이 재미도 없고 기쁨도 없고 성장도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세 가지의 충만한 주의 은혜에 대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풍성하면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권능을 힘입어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늘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속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강건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16절 하)
본문 16절 하반 절에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기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속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강건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 기도는 여러분들을 위해 향하여 기도해주는 기도의 내용이기도 하며, 앞으로 우리가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기도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기도는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속사람이 강건하려면 “성령의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풍성함이 임할 때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풍성하면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은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임재 하셔서 우리의 속사람을 바꾸어 주십니다. 임재(臨齋)라 하는 말은 지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말하는데 하나님은 영으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재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이러한 성령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강건하게 하는 힘인데, 이 능력은 우리의 것도 아니고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강건케 되는 것인데 이 하나님의 능력을 충만히 받는 길은 성령 충만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은 사마리아성에서 마술을 행하던 「시몬」이라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시몬은 빌립에게 복음을 듣고 그에게 세례를 받고 빌립을 따라다니면서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참 신기 해 했습니다. 그 때 사마리아에도 복음이 전파되었다 하는 말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었습니다. 이 두 사도가 사마리아에 와서 보니 아직 이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안수를 하매 그들에게 성령이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 이 마술사 출신의 시몬이 돈을 내면서 “이러한 권능을 내게도 좀 팔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 때 사도들이 말하기를 성령의 능력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까?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충만한 제자들이 설교할 때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그렇습니다.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해 성령 충만함을 받는 길은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있으며 이 둘은 서로 정비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많이 회개하면은 더 많은 능력을 받으며 철저히 통회하고 회개할수록 우리는 더 큰 능력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민족은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능력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성령 충만으로 강건한 삶을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속사람의 강건함보다 겉사람의 강건함을 더 추구할 때마가 더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관심은 보통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현실적이고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관심이 많은 사람과 그 반대의 경우입니다. 영의 양식보다는 육의 양식에 관심이 많고, 영의 건강보다도 육의 건강에 관심이 많고, 하늘보다는 땅에 관심이 많고, 속사람보다는 겉 사람에,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겉 사람에, 세사에, 외형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씩 현실과 타협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언제나 그것과 다르게 말합니다. 이 둘은 언제나 긴장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돌아가야 할 것은 성경입니다. 

고린도후서 5:18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16에서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 거기에 접붙이면, 우리 안에 새사람, 속사람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사야 53장에서 나타나는 말씀처럼 연한 순과 같이 자랍니다. 이것은 결코 속사람이 완전히 자랄 때까지 강하지 못합니다. 보기에 흠모할 것이 없는 것처럼, 도살장에 끌려가는 모습처럼, 털 깎을 때 잠잠한 양과 같이,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속사람입니다. 이것은 눈에 별로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입니다. 복음의 씨앗이, 사랑의 씨앗이 심으면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속사람이 중요하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속사람이 자라야 하며, 자라되 강하게 자라야 하며, 속사람으로 말미암아 겉사람이 깨어지도록까지 자라야 한다고 바울은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16절) 
본문 17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서 내주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사람이 강해지고 계속 성장하려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서 나를 지배하셔야 합니다. 한번 계셨던 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은 이 말은 우리 마음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계시다가도 떠나시고 하시고, 다시 내주하시기도 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한번 내주하신 성령님은 결코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따라서 바울이 성령의 내주하심을 간구한 것은 성도들 속에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더욱 강한 역사로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해지기를 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성도들 속에 내주하실 것을 약속하셨고(요 14:20), 바울도 성도들의 몸을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고전 6:19) 「크리스천」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여있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그리스도가 그 마음속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요한복음 15장 8절에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내 안에 내주하시면서 나를 강하게 하시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주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서 본문 17절 상반 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계시게 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순간순간 믿음의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고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했다고 해도, 인간은 그냥 놔두면 못된 성격과 잘못된 사고방식과 죄악이 다시 나옵니다. 이것을 조절하지 않으면 사람은 이전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바울처럼 “오호라의 탄식”밖에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롬 8:24, 롬 8:18-20) 그러므로 나를 복종시켜야 합니다.(고전 9:27) 그래서 바울은 “나를 쳐서 복종케 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새사람으로 지어졌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지금 계속 지어져가는 것이다.”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 2:22에서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단하지 말라. 포기하지 말라. 경계를 늦추지 말고 믿음으로 결단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라’ 이것이 바로 가나안 점령입니다. ‘네가 밟는 땅을 내가 다 너희에게 다 주겠다.’(수 14:9)는 것입니다. 

신앙의 닻을 조그만 늦춰보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주일날 한번 빠지게 되면 두 번 빠지게 되고, 한 번 게으름을 피우면 계속 게을러집니다. 이런 저런 변명으로 자꾸 안일하게 가다보면 사람의 육체는 한없이 편안을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점점 해이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꾸 챙겨야 합니다. 힘들어도 추스려야 합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자기를 위해 끊임없이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은 아닙니다. 어떤 인위적인 선한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순간의 믿음의 결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자기의 결심, 결단을 내포합니다. 믿음은 마치 방패와 같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엡 6:16) 사탄은 안팎으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이때 우리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방패가 든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게 하는 믿음, 그 방패를 가져야만 합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정욕을 쳐야만 합니다. 자기의 모든 인간적인 생각을 쳐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지배합니다. 주님은 억지로 지배하지 않습니다. 내가 믿음의 결단을 내리기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서 거할 때에 그리스도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요 15:4,5,7,10) 그리할 때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하시기 됩니다. 

우리의 신앙가운데서 믿음을 빼놓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도 그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것도 그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도 그가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도, 그가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것도 그리고 지금도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한다는 것도 우리는 모두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이 우리는 기독교의 모든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시 말하면 믿기 만하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좋은 믿음 주옵소서! 도마와 같이 의심치 아니하고 믿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고 인정하심을 얻고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도 받으며 믿음으로 에베소서에 있는 모든 영적인 축복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17절 하-19절) 
17절 하반 절에서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마음에 계시는 그리스도 위에 사랑의 뿌리를 두고 굳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뿌리는 식물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이며 터는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뿌리가 깊지 아니한 나무는 견고히 설수가 없습니다. 역시 터를 잘 닦지 아니하면 좋은 건물을 지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깊이 내린 뿌리와 견고한 터와도 같은 신앙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본문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설령 우리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전 13:1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꾕가리가 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천사의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꾕가리처럼 시끄러운 소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기초는 사랑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랑의 기초 위에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절 말씀에는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네 가지 사랑에 대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것은 본문 19절에서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넓이는 사랑의 포옹성을 말합니다. 사랑의 길이는 사랑의영원성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높이는 사랑의 지고성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깊이는 사랑의 심원성을 말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사랑의 포용성은 어떠합니까? 
창녀와 세리와 간음한 자와 각색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와 삽자가의 한편 강도까지 포옹했던 포용성입니다. 버림받은 자와 소외된 자와 가난한 자를 받아주는 것이 사랑의 포용성입니다. 이 사랑의 가슴에 안기지 못할 죄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사랑에 우리를 초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예수 사랑의 포로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 사랑의 포용성을 다 체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둘째, 이 사랑의 길이 즉 영원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 영원성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까지 갔습니다. 얼마나 갑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가 얼마나 깁니까? 죽기까지입니다. 죽음을 넘어서기까지입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의 사랑을 재본 사람은 없습니다. 측량치 못할 사랑인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의 사랑의 높이입니다.
예수 사랑의 지고성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은 어디까지 높습니까? 하늘의 보좌까지 높습니다. 하나님까지 높습니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인간 차원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차원에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보좌의 이 사랑의 지고성을 다 체험한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극히 그 일부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사랑의 깊이입니다.
심원성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깊이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베드로가 용서를 일곱 번할 것인가를 묻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22)  용서에 한계가 보여주는 이 말씀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깊이는 어느 누구도 다 깨달을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런 말을 합니다. 네 죄가 진흥같이 븕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네 죄가 진홍같이 븕을지라도  양털같이 희리라고 하셨습니다.(사 1: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안에서 발견된 이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는 곧 하나님의 충만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충만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발견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이것이야말로 우리 성도들이 해야 지고의 기도요, 최선의 기도요, 가장 높은 이상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 하나님의 긍휼의 충만,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 하나님의 충만을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함이 지금 죄인인 나의 영혼에 쏟아지고 있습니다. 수없이 배신하며, 턱없이 부족하며 연약한 나에게 그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충만이 우리에게 임하고 있으며, 그것이 오늘 성도들에게 임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충만 속에서 발견되는 예배(워십)입니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바울은 지금 에베소 교인들과 그리고 우리들에게 충만한 주의 은혜를 깨달아 알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우리의 하나님은 충만한 은혜와 충만한 성령과 충만한 축복을 주시는 풍성한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인들은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충만한 주의 은혜를 실감치 못하면 신앙생활에 감격이 없습니다. 조그만 은혜를 실감하면 우리는 조그만 감격을 갖습니다. 조금 더 큰 은혜를 실감하면 조금 더 큰 감격을 맛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실감하면 우리는 아주 큰 감격과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그 자체가 감격입니다. 왜냐하면 충만한 주의 은혜를 날마다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충만한 주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아닌 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아무런 죄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죽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을 이유가 너무나도 명백하고 뚜렷하였습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를 그는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주실 정도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넓이가 도대체 얼마큼이나 되겠습니까? 한 공설 운동장 만큼이나 되겠습니까? 그 높이가 도대체 얼마나 되겠습니까?  6.3빌딩만큼이나 되겠습니까? 무엇을 갖다 대면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결론은 측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과도 비교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충만한 주의 은혜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떠한 조건을 보시고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철저히 조건을 보고 사람을 만납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얼마나 유익한가? 손해는 보지 않겠는가를 우리는 따지고 만납니다. 우리는 그 사람 자체보다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조건을 더욱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좋아하는 것도 우리는 좋아할 까닭이 있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그가 성격이 좋다던지, 그의 겸손한 품성 때문이던지, 그가 말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던지, 그가 노래를 잘하기 때문이던지 그가 피아노를 잘 치기 때문에 아무개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아무런 조건 없이 무조건 상대를 좋아한다던가 사랑한다던가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비정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더더구나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러한 사랑입니다. 그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가 어려운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는 그에게 사랑 받을 만한 조건이 (... 때문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를 떠나 있을 때가 많았으며 그를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더욱 많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내가 드러나는 것을 더 좋아했고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생각으로만 하려 했던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내 마음대로 살았던 탕자와도 같았습니다. 호세아의 품을 한번 두 번 계속 반복하여서 떠나 세상 향락을 추구했던 고멜과도 같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소명을 외면한 채, 「다시스」로 도망하던 요나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과 은혜는 측량할 수 없는 절대적인 사랑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인 것 입니다.이 충만한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교회와 그리고 우리의 심령에 차고 넘쳐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로,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충만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21절) 
본문 21절에서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충만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충만한 주님의 은혜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충만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교회 안에서>라는 말을 아주 유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충만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함께 나누며 함께 간직하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감격하고 함께 축제를 벌이는 한 가족이요,한 식구요, 그대로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언제나 충만한 은혜가 충만하게 넘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넘치는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밤에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영원무궁토록 충만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3.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20절)
 본문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으신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하여도 이러한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를 믿지 못하고 막연하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밤에 막연하게 기도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기도함으로 이와같은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는 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고 겸손하게 심령의 무릎을 꿇고 기도하되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기를 기도해야 합시다. ② 우리의 속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강건하기를 기도해야 합시다. ③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기를 기도해야 합시다. ④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기도해야 합시다. ⑤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충만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21절)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구하되 우리가 기도하기만 하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이 밤에 공기만 진동시키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가 움직이는 놀라운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