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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작은 자 하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 하나”(마 25:40)가 우리 목회자들에게는 누구일까? 아마 지금 막 목회 현장으로 투입되는 후배 목회자들 - 특히 교회 개척의 불타는 일념에 사로잡힌 동역자들 - 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실 요즈음만큼 교회 개척이 힘든 시기도 없을 것이다. 벌써 3만 명 이상의 목회자가 사역지 없이 떠돌고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도는가 하면, 여러 지역에서 의욕과 희망으로 시작했다가 어느날 갑자기 막을 내리는 교회가 부지기수요, 근근이 목회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개척 교회들도 불투명한 자립(재정, 출석 인원 등)의 가능성 때문에 패배주의와 자격지심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을 토해 내기가 일쑤다. 이것은 특히 90년대 중반 이후 개척 사역을 시작한 동료 및 후배 목회자들의 전형적 모습이요 현실이다.
왜 이다지도 힘들어졌는가? 어떻게 하여 이토록 고통의 처지로 몰리게 되었는가? 세 가지 서로 맞물린 요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근본적으로 교단의 정책과 연관된 구조적 문제 때문에 교회 개척이 난항을 맞게 되었다. 1970년대에 돌입하면서 한국교회는 부흥의 여세를 타고 각 교단마다 “5,000 교회 운동,” “2,000 교회 운동” 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또 꼭 이렇게 명시적으로 교회 수를 내세우지는 않더라도 각 교단은 소속 교회 수의 증가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더 많은 신학생의 배출과 수급의 필요성을 의미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교회의 수적 성장은 고원 지대의 정체된 형태를 유지하다가 급기야는 서서히 하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각 교단의 정책이 실효를 거둘 때 쯤 해서(즉 목회자 후보생의 양산과 때를 맞추어) 기독교 인구는 반비례적인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사정이 한층 악화되면서 그 후에 배출된 목회자들은 최소한의 일터조차 갖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둘째, 이미 앞에서 밝혔듯이 기독교인의 인구 증가가 퇴보의 국면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개척 사역이 힘들게 되었다. 만일 교단의 목회자 수급이 지금처럼 많다 하더라도, 비신자의 회심 비율 역시 비례적으로 증대되어 왔다면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개척 사역에 따라 교회당이 앞을 다투어 설립된다고 해도 그 공간과 자리는 얼마든지 메꿔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는 반대 현상을 목격한다. 비신자가 신자로 회심하는 일이 적을 뿐 아니라, 교회에 출석하던 이들 중 상당수가 교회를 떠나든지 아니면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다니든지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수적 감소를 가져오고 있다. 이런 감소 추세는 최근 들어 20대 및 그 이하 (대학생 선교 단체, 교회 청년부 및 주일 학교 등)에서 현격히 나타나고 있으며, 심지어는 30대의 경우에도 비슷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셋째, 교회 개척 사역이 어려운 것은 앞에 든 두 가지 큰 이유말고도 개척 사역을 수행하는 사역자 자신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 안팎의 사정이 아직도 1970년대와 똑같은 줄 알고, 신학생 시절의 개인적 열정과 노력이면 과거처럼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라는 착각 가운데 전혀 준비 없이 사역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중소 도시에서의 개척 사역에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들 - 기본 재정의 마련, 개척 사역에 동의하는 최소 몇 가정의 창립 멤버들 확보, 개척 지역의 환경적 적합성 판정 등 - 이 무엇인지 고려조차 하지 않은 채 “맨 땅에 머리를 받는” 식으로 달려든 경우 역시 비일비재하다. 개척 사역에 뛰어든 이들은 이상의 여러 이유 때문에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다. 재정적 여유가 너무 없어 목회자 자신이 비굴해질 뿐만 아니라 부부 관계 역시 상처를 입는다. 많은 경우 개척교회 사역자들의 아내들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의 자녀 역시 열악한 재정 상태와 심리적·물리적 환경에서 저들로서는 원인 모를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어려운 판국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도울 수 있을 것인가? 현재로서는 전망도 별로 밝지 않고, 문제 해결 방식을 쉽사리 찾아내기도 매우 힘든 실정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필자는 다음의 몇 가지 방안을 통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대한 도움의 길을 직·간접적으로 마련하고자 한다.
첫째, 이 문제의 발전 과정에는 구조적 양상이 명백히 개재되어 있으므로 각 교단은 이에 걸맞는 정책 수립을 통해 불필요한 고통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단끼리의 경쟁이나 현실을 모르는 교단 정책의 수립 및 방향의 설정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교 역시 재정적 안정이 주 동기가 되어 정원 이상의 신학생을 입학시키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둘째, 교회개척 활동을 더 이상 개인의 사명감과 열정의 문제로 축소하지 말고 공동체적 시각과 안목으로 파악해야 한다. 각 교단의 전문화된 기관(예를 들어, 국내 선교부)이나 노회의 담당 부서가 주도권을 잡고 한국교회 전체를 내다보는 가운데 교회개척 사역을 공동체적(교단별, 노회별)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개척지역 선정, 개척교회 사역자의 훈련 및 파송, 재정적·인적 사항의 후원 등이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초문화적 사역을 공동체적으로 접근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회의 교단 및 노회 실정을 아는 이들은 언제 그런 일이 가능해지겠느냐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것이다. 따라서 노회나 교단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현재로서는 하나의 기존 교회 - 재정 및 회중의 수가 어느 정도 되는 경우 - 가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는 방식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목회자가 되기 전에 목회자로서의 소명이 확실한지 거듭 확인하는 일이 필요하다. 왜 다른 직분(장로, 집사, 간사 등)을 보유하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데, 하필이면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지 점검해야 한다. 처음부터 자격을 완벽히 갖추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말씀의 훈련(엡 4:11), 인격적 면모(엡 4:11), 영적 리더십(롬 12:7 고전 12:27) 등 예비 목회자로서의 자질이 엿보이는지 공적 검증을 받아야 한다. 또 현재의 열악하고 불리한 상황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에 따르는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는지 꼼꼼히 평가해 보아야 한다.
넷째, 만일 이 시대에 개척교회 사역을 목표한다면 개인적인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 우선, 재정 문제에 대한 어느 정도의 대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미명 하에 “어떻게 되겠지…” 하고 나서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 또 목회자로서의 기본기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본적 이해, 강해 설교, 소그룹 활동, 제자 훈련, 전도 이론, 상담과 음악 사역 등 - 를 제대로 구비하여야 한다. 더욱이, 늘 하나님의 면전에서 목회를 하겠다는 결심 - 목회의 “성공”을 양적 성장이나 유명세에 두지 않고 또 조급함, 남과의 비교, 경쟁 의식, 허영심 등을 지속적으로 경계하는 자세 - 이 사역의 시작부터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함께 한국교회를 세워 가는 지체들이다. 만일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을 주님의 소원이라고 인정한다면, 우리의 주위에서 고통하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결코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목회와 신학/ 송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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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 하나”(마 25:40)가 우리 목회자들에게는 누구일까? 아마 지금 막 목회 현장으로 투입되는 후배 목회자들 - 특히 교회 개척의 불타는 일념에 사로잡힌 동역자들 - 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실 요즈음만큼 교회 개척이 힘든 시기도 없을 것이다. 벌써 3만 명 이상의 목회자가 사역지 없이 떠돌고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도는가 하면, 여러 지역에서 의욕과 희망으로 시작했다가 어느날 갑자기 막을 내리는 교회가 부지기수요, 근근이 목회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개척 교회들도 불투명한 자립(재정, 출석 인원 등)의 가능성 때문에 패배주의와 자격지심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을 토해 내기가 일쑤다. 이것은 특히 90년대 중반 이후 개척 사역을 시작한 동료 및 후배 목회자들의 전형적 모습이요 현실이다.
왜 이다지도 힘들어졌는가? 어떻게 하여 이토록 고통의 처지로 몰리게 되었는가? 세 가지 서로 맞물린 요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근본적으로 교단의 정책과 연관된 구조적 문제 때문에 교회 개척이 난항을 맞게 되었다. 1970년대에 돌입하면서 한국교회는 부흥의 여세를 타고 각 교단마다 “5,000 교회 운동,” “2,000 교회 운동” 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또 꼭 이렇게 명시적으로 교회 수를 내세우지는 않더라도 각 교단은 소속 교회 수의 증가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더 많은 신학생의 배출과 수급의 필요성을 의미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교회의 수적 성장은 고원 지대의 정체된 형태를 유지하다가 급기야는 서서히 하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각 교단의 정책이 실효를 거둘 때 쯤 해서(즉 목회자 후보생의 양산과 때를 맞추어) 기독교 인구는 반비례적인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사정이 한층 악화되면서 그 후에 배출된 목회자들은 최소한의 일터조차 갖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둘째, 이미 앞에서 밝혔듯이 기독교인의 인구 증가가 퇴보의 국면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개척 사역이 힘들게 되었다. 만일 교단의 목회자 수급이 지금처럼 많다 하더라도, 비신자의 회심 비율 역시 비례적으로 증대되어 왔다면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개척 사역에 따라 교회당이 앞을 다투어 설립된다고 해도 그 공간과 자리는 얼마든지 메꿔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는 반대 현상을 목격한다. 비신자가 신자로 회심하는 일이 적을 뿐 아니라, 교회에 출석하던 이들 중 상당수가 교회를 떠나든지 아니면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다니든지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수적 감소를 가져오고 있다. 이런 감소 추세는 최근 들어 20대 및 그 이하 (대학생 선교 단체, 교회 청년부 및 주일 학교 등)에서 현격히 나타나고 있으며, 심지어는 30대의 경우에도 비슷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셋째, 교회 개척 사역이 어려운 것은 앞에 든 두 가지 큰 이유말고도 개척 사역을 수행하는 사역자 자신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 안팎의 사정이 아직도 1970년대와 똑같은 줄 알고, 신학생 시절의 개인적 열정과 노력이면 과거처럼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라는 착각 가운데 전혀 준비 없이 사역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중소 도시에서의 개척 사역에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들 - 기본 재정의 마련, 개척 사역에 동의하는 최소 몇 가정의 창립 멤버들 확보, 개척 지역의 환경적 적합성 판정 등 - 이 무엇인지 고려조차 하지 않은 채 “맨 땅에 머리를 받는” 식으로 달려든 경우 역시 비일비재하다. 개척 사역에 뛰어든 이들은 이상의 여러 이유 때문에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다. 재정적 여유가 너무 없어 목회자 자신이 비굴해질 뿐만 아니라 부부 관계 역시 상처를 입는다. 많은 경우 개척교회 사역자들의 아내들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의 자녀 역시 열악한 재정 상태와 심리적·물리적 환경에서 저들로서는 원인 모를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어려운 판국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도울 수 있을 것인가? 현재로서는 전망도 별로 밝지 않고, 문제 해결 방식을 쉽사리 찾아내기도 매우 힘든 실정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필자는 다음의 몇 가지 방안을 통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대한 도움의 길을 직·간접적으로 마련하고자 한다.
첫째, 이 문제의 발전 과정에는 구조적 양상이 명백히 개재되어 있으므로 각 교단은 이에 걸맞는 정책 수립을 통해 불필요한 고통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단끼리의 경쟁이나 현실을 모르는 교단 정책의 수립 및 방향의 설정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교 역시 재정적 안정이 주 동기가 되어 정원 이상의 신학생을 입학시키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둘째, 교회개척 활동을 더 이상 개인의 사명감과 열정의 문제로 축소하지 말고 공동체적 시각과 안목으로 파악해야 한다. 각 교단의 전문화된 기관(예를 들어, 국내 선교부)이나 노회의 담당 부서가 주도권을 잡고 한국교회 전체를 내다보는 가운데 교회개척 사역을 공동체적(교단별, 노회별)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개척지역 선정, 개척교회 사역자의 훈련 및 파송, 재정적·인적 사항의 후원 등이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초문화적 사역을 공동체적으로 접근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회의 교단 및 노회 실정을 아는 이들은 언제 그런 일이 가능해지겠느냐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것이다. 따라서 노회나 교단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현재로서는 하나의 기존 교회 - 재정 및 회중의 수가 어느 정도 되는 경우 - 가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는 방식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목회자가 되기 전에 목회자로서의 소명이 확실한지 거듭 확인하는 일이 필요하다. 왜 다른 직분(장로, 집사, 간사 등)을 보유하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데, 하필이면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지 점검해야 한다. 처음부터 자격을 완벽히 갖추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말씀의 훈련(엡 4:11), 인격적 면모(엡 4:11), 영적 리더십(롬 12:7 고전 12:27) 등 예비 목회자로서의 자질이 엿보이는지 공적 검증을 받아야 한다. 또 현재의 열악하고 불리한 상황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에 따르는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는지 꼼꼼히 평가해 보아야 한다.
넷째, 만일 이 시대에 개척교회 사역을 목표한다면 개인적인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 우선, 재정 문제에 대한 어느 정도의 대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미명 하에 “어떻게 되겠지…” 하고 나서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 또 목회자로서의 기본기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본적 이해, 강해 설교, 소그룹 활동, 제자 훈련, 전도 이론, 상담과 음악 사역 등 - 를 제대로 구비하여야 한다. 더욱이, 늘 하나님의 면전에서 목회를 하겠다는 결심 - 목회의 “성공”을 양적 성장이나 유명세에 두지 않고 또 조급함, 남과의 비교, 경쟁 의식, 허영심 등을 지속적으로 경계하는 자세 - 이 사역의 시작부터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함께 한국교회를 세워 가는 지체들이다. 만일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을 주님의 소원이라고 인정한다면, 우리의 주위에서 고통하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결코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목회와 신학/ 송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