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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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의 물질 드리기 10대 원칙
고린도전서 8, 9, 16장과 로마서 15장 등에서 바울은 교회를 위한 연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연보를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령 안에서 하나됨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1, 3, 9번 참조). 이것은 심오한 삼위일체 신학과 실천적 상식의 감동적인 결합이다. 현대 교회에서 크리스천의 드림이란 지극히 중요한 의제이다. 바울은 크리스천의 드리기에 관해 열 가지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1.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다(고후 8:1∼6)
먼저 바울이 마게도냐교회의 아낌없는 연보보다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1)를 언급하고 있는 사실에 유의하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아낌없이 드리게 하는 것은 그분의 아낌없는 은혜로 인한 것이다. 바울은 디도에게도 아가야의 수도 고린도에서 그가 시작한 이 ‘은혜의 일’을 완수할 것을 권하고 있다(6). 이처럼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과 아가야 교회들의 연보와 관련해 하나님의 후하심을 지적하고 있다. 크리스천들의 후하게 베풀기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아낌없는 하사에서 나오는 것이다.
2.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성령의 은사일 수도 있다(고후 8:7)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믿음, 말, 지식, 간절함, 사랑 등 영적 은사가 풍성하듯 ‘드리기의 은혜’도 풍성하기를 권한다. 로마서 12장 8절에서도 ‘구제’의 은사를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하사품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후한 선물인 동시에 일부 성도에게 주어지는 특별 선물(은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모든 성도들은 타인과 복음을 나누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나 전도자의 은사를 받은 성도는 일부이며, 모든 성도들은 타인에 대한 목양적 돌봄을 행해야 하지만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소수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크리스천들은 아낌없이 베풀어야 하지만 ‘베풀기(구제)의 은사’를 받은 크리스천은 일부이다. 그들은 선한 청지기로서 자신이 맡은 상당한 재정적 자원을 이웃과 나눠야 할 특별한 책임이 있다.
3.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더욱 고무된다(고후 8:8∼9)
바울은 명령하거나 위협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비해 고린도 성도들의 사랑이 어떠한지 시험해 보고자 했다. 특히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본 받을 것을 촉구하고 있다(9). 그리스도는 우리의 가난 때문에 자신의 부요를 포기하셨다. 그의 가난을 통해 우리가 부요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가난과 부요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요’는 온갖 축복을 수반하는 구원이다.
4.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균형 잡힌(능력대로 주고 필요대로 받는) 베품이다(고후 8:10∼12)
고린도 성도들은 1년 전부터 드리기의 일을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이를 원했다(10). 그래서 바울은 이런 마음에 보조를 맞춰 자력(資力)에 따라(있는 대로) 드리라고 권한다(11). 소원을 가지고 가진 것으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신다(12). 안디옥교회도 기근을 만난 유대에 있는 성도들에게 “각각 그 힘대로” 기부한 적이 있고(행 11:29), 예루살렘교회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재물을 나눠주었다(행 2, 4장). “힘대로”와 “필요를 따라”는 성경의 원리다. 이처럼 기독교의 베풀기에는 균형이 잡혀 있다.
5.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균등화에 기여한다(고후 8:13∼15)
바울이 원했던 것은, 한 쪽이 구제 받으면 다른 한 쪽이 압박을 받는, 즉 하나의 문제가 풀리면서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 단순한 상황 이동이 아니라 평균화다(13). 고린도 성도들의 풍부함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었다. 바울은 일부의 풍요를 다른 사람들의 궁핍과 비교하면서 어떤 조정, 즉 풍부에 의한 궁핍의 완화를 촉구했다. 평균화(평등)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평균화는 평등주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임금을 받고 동일한 가구를 갖춘 똑같은 집에 살면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이 각각 동등한 것은 사실이고 또 하나님이 선인과 악인에게 공히 비와 햇볕을 내려주신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서로 다르게 만드셨고 체격, 외모, 기질, 개성, 능력 등에 다채로운 색깔을 부여하셨다.
둘째, 우리가 추구하는 평등은 교육적 기회 균등에서 시작된다. 교육은 사람의 잠재력을 최대로 발휘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대로 사람을 빚어내기 때문이다. 균등한 피교육의 기회는 모든 아이가 대학에 가야한다는 뜻이 아니라, 대학 교육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는 모든 아이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교육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공의의 문제이다.
셋째, 균등화는 극단적인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한다. 탄자니아의 전 대통령 줄리우스 니에레레(Julius Nyerere)는 저서 「아루샤 선언」(Arusha Declaration)에서 “아무도 남의 부유함에 비춰 자신의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남의 가난에 비춰 자신의 부유함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될 나라를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경제적 생활 양식의 불균등 때문에 남의 집을 방문하거나 남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는 것이 불편하다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뜻이다. 즉 불평등이 너무 크다는 뜻이다. 그게 교제를 파괴해 왔다. 한 방향이나 양 방향에서 어느 정도의 평균화 작업이 필요하다. 크리스천의 베풀기는 평균화에 기여한다.
6.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주의 깊은 감독이 필요하다(고후 8:16∼24)
돈을 다룬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므로 바울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비판)하지 못하게”(20) 하고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21)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바울은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
첫째, 자신이 직접 재정을 관리하지 않고 디도에게 맡기고(16, 17) 그를 온전히 신뢰했다(23). 둘째,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18) 다른 형제를 디도와 함께 보냈다. 셋째, 두 번째 형제는 연보를 운반하도록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바울과 동행했다(19 고전 16:3).
예루살렘으로 헌물을 운반한 사람들은 교회의 선택과 신뢰를 한몸에 받았다. 오늘날도 비판을 받지 않도록 유사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현명하다. 빌리 그래함은 자기 조직의 재정을 다루지 않는다. 다만 일정한 사례비만 받고 ‘사랑의 헌물’을 일절 거절하며 전도 집회 후에는 항상 회계 감사 결과를 공개한다. 그의 지혜와 고결성은 깊이 새겨둘 만한 일이다.
7.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약간 우호적 경쟁으로 더 고무될 수 있다(고후 9:1∼5)
바울은 북부 헬라의 마게도냐 지방 교회들(빌립보교회 등)에게 남부 헬라의 아가야 지방 교회들(고린도교회 등)이 베풀기에 열성적이라고 자랑하고, 남부의 열정은 북부의 행동 개시에도 자극제가 되었다(2). 이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 대한 자신의 자랑이 헛소리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자랑한 대로 그들이 잘 준비하도록 고린도에 대표자들을 보냈다(3).
만일 일부 마게도냐 성도들이 바울과 함께 아가야에 와서 고린도 성도들이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면, 바울에게는 아주 당혹스럽고 창피한 일이 될 터이다(4). 그래서 바울은 형제들을 미리 보내 준비하도록 했다. 이렇게 준비해야 마음에서 우러난 유쾌한 연보가 되고 인색한 연보가 되지 않는다(5).
먼저 바울은 북부 성도들(빌립보교회 등)도 후하게 드릴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격려하기 위해 남부 성도들(고린도교회 등)의 아낌없는 손길에 대해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북부 성도들이 와서 직접 보고 실망하지 않도록 남부 사람들에게 후하게 줄 것을 권한다. 여기서 바울은 북부와 남부를 서로 경쟁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양자의 후한 연보를 격려하기 위해 서로 자랑하게 하고 있다. 만일 기부자의 이름이나 금액이 공표된다면 경쟁은 위험한 게임이 될 수도 있으나, 적어도 이 구절들은 기부 경쟁 개념의 성경적 근거가 되고 있다. 타인들의 후한 베풀기에 자극 받을 때 우리도 후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8.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추수 법칙과 유사하다(고후 9:6∼11a)
여기서 두 가지 추수 법칙이 크리스천의 드리기에 적용되고 있다. 첫째,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다. 적게 뿌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자는 많이 거둔다(6). ‘뿌리다’는 것은 베풀기나 드리기에 관한 은유적 표현이다. 그러면 무엇을 ‘거둘 것’으로 기대해야 하나? 이 말은 많이 줄수록 많이 받는다거나 수입이 지출에 비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드리고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드려서는 안 되며(7), 주면 다시 되돌려 받을 것이라는 타산으로 드려서도 안 된다(눅 6:34∼35). “하나님은 즐겨(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7).
둘째, 추수 법칙은 수확에 이중적 목적이 있다. 하나는 양식을 얻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뿌릴 씨앗을 얻는 것이다. 추수의 하나님은 현재의 굶주림에 대한 해결뿐 아니라, 미래를 위한 공급에도 관심을 가지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심는 자에게 씨’(다음 계절에 심을 것)와 ‘먹을 양식’(현재에 소비할 것)을 주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10) 하신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기부자의 돈을 늘려 주시는 이른바 ‘종자 돈’ 개념이 나왔다. 여기서 바울은 잘못된 ‘번영 복음’(prosperity gospel)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그는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할” 것이라고 약속하지만, 동시에 “너그럽게 연보를 함”으로써 너희의 베품을 증가시키기 위함이라고 부언하고 있다(11a). 부요는 너그러운 베품에 목적이 있다. 이것이 ‘뿌릴 씨앗을 얻는’ 법칙이다.
9.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후 9:13 엡 3:1∼9 롬 15:25∼28)
크리스천의 드리기 이면에는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있다. 헬라 교회들의 물질적 드림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있는 상징적 행위이다(13). 이 모금은 단지 지리적인 차원(헬라에서 유대로 현금 이동)이나 경제적인 의미(부자에서 빈자에게로)뿐 아니라, 특별한 신학적 의미도 담고 있다(이방 크리스천에서 유대 크리스천에게로).
그의 모금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로 연대해 있음을 자의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같은 조건으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지체와 동참자가 된다는 진리는 일찍이 바울에게 계시된 ‘비밀’이었다(엡 3:1∼9 ).
바울은 로마서 15장 25∼28절에서 이를 좀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헬라의 이방인 교회들은 유대의 곤궁한 교회들을 위해 ‘기쁘게’ 얼마를 기부했다. 사실 “저희(헬라의 성도들)는 그들에게 빚진 자”이다.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신령한 것”(그 정점은 메시아다)을 나눠가졌다면, 자신들의 물질적인 복을 유대인들과 나누는 것은 당연하다(롬 15:27). 마찬가지로 우리의 드리기도 신학에 대한 현실적 표현이다. 일례로 교회의 성장을 위해 헌금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분께서 이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10.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진작시킨다(고후 9:11b∼15)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의 종결 단락에서 네 번에 걸쳐(11절b, 12절b, 13절b, 15절) 드림으로 인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증대될 것이라는 확신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기부가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것인가 아닌가 판가름해 주는 중대한 시금석이 된다.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기부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부자인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또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드림을 하나님의 베푸심(독생자까지 주신 말할 수 없는 은혜)에 반추해 보도록 도와준다.이 연구가 더욱 사려 깊게 조직적이고 헌신적인 드리기를 고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미 나도 개인적으로 베풀기를 검토하고 앙양시켰다. 감히 당신도 나와 같이 해보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 글은 “Ten Principles of Christian Giving”이란 제목의 글로, 저자와 John Stott Ministries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2002 by John Stott Ministries. All rights reserved. Used by permission. -빛과 소금지-
글 / 존 스토트(John R. W. Sto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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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8, 9, 16장과 로마서 15장 등에서 바울은 교회를 위한 연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연보를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령 안에서 하나됨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1, 3, 9번 참조). 이것은 심오한 삼위일체 신학과 실천적 상식의 감동적인 결합이다. 현대 교회에서 크리스천의 드림이란 지극히 중요한 의제이다. 바울은 크리스천의 드리기에 관해 열 가지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1.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다(고후 8:1∼6)
먼저 바울이 마게도냐교회의 아낌없는 연보보다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1)를 언급하고 있는 사실에 유의하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아낌없이 드리게 하는 것은 그분의 아낌없는 은혜로 인한 것이다. 바울은 디도에게도 아가야의 수도 고린도에서 그가 시작한 이 ‘은혜의 일’을 완수할 것을 권하고 있다(6). 이처럼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과 아가야 교회들의 연보와 관련해 하나님의 후하심을 지적하고 있다. 크리스천들의 후하게 베풀기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아낌없는 하사에서 나오는 것이다.
2.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성령의 은사일 수도 있다(고후 8:7)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믿음, 말, 지식, 간절함, 사랑 등 영적 은사가 풍성하듯 ‘드리기의 은혜’도 풍성하기를 권한다. 로마서 12장 8절에서도 ‘구제’의 은사를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하사품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후한 선물인 동시에 일부 성도에게 주어지는 특별 선물(은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모든 성도들은 타인과 복음을 나누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나 전도자의 은사를 받은 성도는 일부이며, 모든 성도들은 타인에 대한 목양적 돌봄을 행해야 하지만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소수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크리스천들은 아낌없이 베풀어야 하지만 ‘베풀기(구제)의 은사’를 받은 크리스천은 일부이다. 그들은 선한 청지기로서 자신이 맡은 상당한 재정적 자원을 이웃과 나눠야 할 특별한 책임이 있다.
3.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더욱 고무된다(고후 8:8∼9)
바울은 명령하거나 위협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비해 고린도 성도들의 사랑이 어떠한지 시험해 보고자 했다. 특히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본 받을 것을 촉구하고 있다(9). 그리스도는 우리의 가난 때문에 자신의 부요를 포기하셨다. 그의 가난을 통해 우리가 부요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가난과 부요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요’는 온갖 축복을 수반하는 구원이다.
4.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균형 잡힌(능력대로 주고 필요대로 받는) 베품이다(고후 8:10∼12)
고린도 성도들은 1년 전부터 드리기의 일을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이를 원했다(10). 그래서 바울은 이런 마음에 보조를 맞춰 자력(資力)에 따라(있는 대로) 드리라고 권한다(11). 소원을 가지고 가진 것으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신다(12). 안디옥교회도 기근을 만난 유대에 있는 성도들에게 “각각 그 힘대로” 기부한 적이 있고(행 11:29), 예루살렘교회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재물을 나눠주었다(행 2, 4장). “힘대로”와 “필요를 따라”는 성경의 원리다. 이처럼 기독교의 베풀기에는 균형이 잡혀 있다.
5.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균등화에 기여한다(고후 8:13∼15)
바울이 원했던 것은, 한 쪽이 구제 받으면 다른 한 쪽이 압박을 받는, 즉 하나의 문제가 풀리면서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 단순한 상황 이동이 아니라 평균화다(13). 고린도 성도들의 풍부함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었다. 바울은 일부의 풍요를 다른 사람들의 궁핍과 비교하면서 어떤 조정, 즉 풍부에 의한 궁핍의 완화를 촉구했다. 평균화(평등)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평균화는 평등주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임금을 받고 동일한 가구를 갖춘 똑같은 집에 살면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이 각각 동등한 것은 사실이고 또 하나님이 선인과 악인에게 공히 비와 햇볕을 내려주신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서로 다르게 만드셨고 체격, 외모, 기질, 개성, 능력 등에 다채로운 색깔을 부여하셨다.
둘째, 우리가 추구하는 평등은 교육적 기회 균등에서 시작된다. 교육은 사람의 잠재력을 최대로 발휘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대로 사람을 빚어내기 때문이다. 균등한 피교육의 기회는 모든 아이가 대학에 가야한다는 뜻이 아니라, 대학 교육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는 모든 아이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교육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공의의 문제이다.
셋째, 균등화는 극단적인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한다. 탄자니아의 전 대통령 줄리우스 니에레레(Julius Nyerere)는 저서 「아루샤 선언」(Arusha Declaration)에서 “아무도 남의 부유함에 비춰 자신의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남의 가난에 비춰 자신의 부유함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될 나라를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경제적 생활 양식의 불균등 때문에 남의 집을 방문하거나 남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는 것이 불편하다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뜻이다. 즉 불평등이 너무 크다는 뜻이다. 그게 교제를 파괴해 왔다. 한 방향이나 양 방향에서 어느 정도의 평균화 작업이 필요하다. 크리스천의 베풀기는 평균화에 기여한다.
6.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주의 깊은 감독이 필요하다(고후 8:16∼24)
돈을 다룬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므로 바울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비판)하지 못하게”(20) 하고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21)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바울은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
첫째, 자신이 직접 재정을 관리하지 않고 디도에게 맡기고(16, 17) 그를 온전히 신뢰했다(23). 둘째,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18) 다른 형제를 디도와 함께 보냈다. 셋째, 두 번째 형제는 연보를 운반하도록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바울과 동행했다(19 고전 16:3).
예루살렘으로 헌물을 운반한 사람들은 교회의 선택과 신뢰를 한몸에 받았다. 오늘날도 비판을 받지 않도록 유사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현명하다. 빌리 그래함은 자기 조직의 재정을 다루지 않는다. 다만 일정한 사례비만 받고 ‘사랑의 헌물’을 일절 거절하며 전도 집회 후에는 항상 회계 감사 결과를 공개한다. 그의 지혜와 고결성은 깊이 새겨둘 만한 일이다.
7.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약간 우호적 경쟁으로 더 고무될 수 있다(고후 9:1∼5)
바울은 북부 헬라의 마게도냐 지방 교회들(빌립보교회 등)에게 남부 헬라의 아가야 지방 교회들(고린도교회 등)이 베풀기에 열성적이라고 자랑하고, 남부의 열정은 북부의 행동 개시에도 자극제가 되었다(2). 이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 대한 자신의 자랑이 헛소리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자랑한 대로 그들이 잘 준비하도록 고린도에 대표자들을 보냈다(3).
만일 일부 마게도냐 성도들이 바울과 함께 아가야에 와서 고린도 성도들이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면, 바울에게는 아주 당혹스럽고 창피한 일이 될 터이다(4). 그래서 바울은 형제들을 미리 보내 준비하도록 했다. 이렇게 준비해야 마음에서 우러난 유쾌한 연보가 되고 인색한 연보가 되지 않는다(5).
먼저 바울은 북부 성도들(빌립보교회 등)도 후하게 드릴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격려하기 위해 남부 성도들(고린도교회 등)의 아낌없는 손길에 대해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북부 성도들이 와서 직접 보고 실망하지 않도록 남부 사람들에게 후하게 줄 것을 권한다. 여기서 바울은 북부와 남부를 서로 경쟁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양자의 후한 연보를 격려하기 위해 서로 자랑하게 하고 있다. 만일 기부자의 이름이나 금액이 공표된다면 경쟁은 위험한 게임이 될 수도 있으나, 적어도 이 구절들은 기부 경쟁 개념의 성경적 근거가 되고 있다. 타인들의 후한 베풀기에 자극 받을 때 우리도 후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8.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추수 법칙과 유사하다(고후 9:6∼11a)
여기서 두 가지 추수 법칙이 크리스천의 드리기에 적용되고 있다. 첫째,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다. 적게 뿌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자는 많이 거둔다(6). ‘뿌리다’는 것은 베풀기나 드리기에 관한 은유적 표현이다. 그러면 무엇을 ‘거둘 것’으로 기대해야 하나? 이 말은 많이 줄수록 많이 받는다거나 수입이 지출에 비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드리고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드려서는 안 되며(7), 주면 다시 되돌려 받을 것이라는 타산으로 드려서도 안 된다(눅 6:34∼35). “하나님은 즐겨(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7).
둘째, 추수 법칙은 수확에 이중적 목적이 있다. 하나는 양식을 얻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뿌릴 씨앗을 얻는 것이다. 추수의 하나님은 현재의 굶주림에 대한 해결뿐 아니라, 미래를 위한 공급에도 관심을 가지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심는 자에게 씨’(다음 계절에 심을 것)와 ‘먹을 양식’(현재에 소비할 것)을 주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10) 하신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기부자의 돈을 늘려 주시는 이른바 ‘종자 돈’ 개념이 나왔다. 여기서 바울은 잘못된 ‘번영 복음’(prosperity gospel)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그는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할” 것이라고 약속하지만, 동시에 “너그럽게 연보를 함”으로써 너희의 베품을 증가시키기 위함이라고 부언하고 있다(11a). 부요는 너그러운 베품에 목적이 있다. 이것이 ‘뿌릴 씨앗을 얻는’ 법칙이다.
9.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후 9:13 엡 3:1∼9 롬 15:25∼28)
크리스천의 드리기 이면에는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있다. 헬라 교회들의 물질적 드림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있는 상징적 행위이다(13). 이 모금은 단지 지리적인 차원(헬라에서 유대로 현금 이동)이나 경제적인 의미(부자에서 빈자에게로)뿐 아니라, 특별한 신학적 의미도 담고 있다(이방 크리스천에서 유대 크리스천에게로).
그의 모금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로 연대해 있음을 자의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같은 조건으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지체와 동참자가 된다는 진리는 일찍이 바울에게 계시된 ‘비밀’이었다(엡 3:1∼9 ).
바울은 로마서 15장 25∼28절에서 이를 좀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헬라의 이방인 교회들은 유대의 곤궁한 교회들을 위해 ‘기쁘게’ 얼마를 기부했다. 사실 “저희(헬라의 성도들)는 그들에게 빚진 자”이다.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신령한 것”(그 정점은 메시아다)을 나눠가졌다면, 자신들의 물질적인 복을 유대인들과 나누는 것은 당연하다(롬 15:27). 마찬가지로 우리의 드리기도 신학에 대한 현실적 표현이다. 일례로 교회의 성장을 위해 헌금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분께서 이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10. 크리스천의 드리기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진작시킨다(고후 9:11b∼15)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의 종결 단락에서 네 번에 걸쳐(11절b, 12절b, 13절b, 15절) 드림으로 인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증대될 것이라는 확신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기부가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것인가 아닌가 판가름해 주는 중대한 시금석이 된다.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기부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부자인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또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드림을 하나님의 베푸심(독생자까지 주신 말할 수 없는 은혜)에 반추해 보도록 도와준다.이 연구가 더욱 사려 깊게 조직적이고 헌신적인 드리기를 고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미 나도 개인적으로 베풀기를 검토하고 앙양시켰다. 감히 당신도 나와 같이 해보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 글은 “Ten Principles of Christian Giving”이란 제목의 글로, 저자와 John Stott Ministries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2002 by John Stott Ministries. All rights reserved. Used by permission. -빛과 소금지-
글 / 존 스토트(John R. W. Sto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