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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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부재하신 하나님 - 정영택목사/경주제일교회
예레미야 23 : 23~24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밀접하게 관계된 하나님의 속성을 보통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전지(全知, Omniscience), 전능(全能, Omnipotence), 전재(全在, Omnipresence)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일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전지전능’이라고 하며 어느 곳에나 계심을 전재라고 하면서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무심결에 이렇게 묻곤 합니다. ‘하나님(신)은 어디 계실까?’ 그러면서 신을 찾아 방황하기도 하고 신을 만들어 놓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늘에 계신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지 공간적이거나 시간에 한계를 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에 관심을 갖고 있을까요?아주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그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면 자신의 입장이 곤란해지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그때 하나님이 안 계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숨어서 몰래 정당하지 못한 것을 하면서 ‘하나님은 내가 여기 계신 줄도 모르겠지?’ 하면서 방자하게 사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연 그것을 믿을 때 내 삶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생각해 보니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는 것도, 안 계시는 것도 우리 인간들에게는 상당히 당혹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되 그것도 충만히 계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우리의 측량 범위 안에 계시거나, 우리의 어떤 힘으로 제한시킬 수 없으며, 어느 한 시간이나 지역에 국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신들이 원하는 시간에 그 장소에 있기를 원해서 하나님의 무소부재 하심을 손상시키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도 제사장이나 선지자 왕 같은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는 이런 모습에 대해서 통렬히 비난 했습니다. 그런 것은 거짓된 모습이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무소부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이 아니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바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곳에 편재해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가깝고 먼 곳에 차이가 있게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의 하나님이시며 먼 곳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은폐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십니다. 행여나 하나님의 눈길, 하나님의 숨길, 하나님의 전지, 하나님의 전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매우 큰 죄악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부정과 부패, 뇌물 때문에 어수선했던 일이 많았습니다. 처음에 어떤 소문이 나면 절대로 관계 없다고, 음해하는 일이라고,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했다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다른 사람이 받았기에 모른다고 하고 대가성 없이 받았다고 합니다. 세상에서도 다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 과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앞에서야 어떠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출세를 하려고 뇌물을 가지고 찾아가서 뇌물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못 받겠다고 거절하니까 뇌물을 가져간 사람이 아무도 안 보기에 받으셔도 괜찮다고 했더니 뇌물을 거절한 사람이, “이놈, 아무도 안 보다니? 네가 보고 내가 보고, 땅이 보고 하늘이 본다.” 호통을 치면서 내쫓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셔서 보고 계심을 늘 생각하고 방자한 모습이나 경거망동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무소부재를 믿고 사는 삶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예를 들어, 어머니와 나와의 관계는 떨어질 수 없습니다. 언제나 함께하는 관계로 존재합니다.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떨어질 수 없는 절대적 관계이며 이는 어디서나 가능하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무소부재의 능력 아래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루며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과 언제나 인격적 관계를 이룸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소명을 깨닫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상황 속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심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때로는 안 계신 것 같고, 부르짖음에 응답이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 속에 개입하셔서 들으시고, 아시고, 찾아오시고, 건져내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즉 인격적으로 구체적 관계를 이루시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체험 속에서 증거되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의 모든 일에 경건과 예배자의 삶을 사는 것을 가능케 합니다.
현재는 자신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삶을 좋아하는 소위 무명성 시대입니다. 그래서 은밀하게 죄를 범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특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무소부재 하심의 신앙이 우리에게는 더욱 귀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하여 계셔서 우리를 살피시고 은혜를 주시며 동시에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만일 이 무소부재의 신앙을 우습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권위는 무너지고 교회의 권위도 무너지게 되고 결국은 멸망을 자초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 섭리, 사랑, 그 모든 존재하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다만 사람들이 다르게, 가볍게 생각할 뿐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에 따라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능력을 선포하면서 사는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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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3 : 23~24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밀접하게 관계된 하나님의 속성을 보통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전지(全知, Omniscience), 전능(全能, Omnipotence), 전재(全在, Omnipresence)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일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전지전능’이라고 하며 어느 곳에나 계심을 전재라고 하면서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무심결에 이렇게 묻곤 합니다. ‘하나님(신)은 어디 계실까?’ 그러면서 신을 찾아 방황하기도 하고 신을 만들어 놓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늘에 계신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지 공간적이거나 시간에 한계를 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에 관심을 갖고 있을까요?아주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그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면 자신의 입장이 곤란해지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그때 하나님이 안 계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숨어서 몰래 정당하지 못한 것을 하면서 ‘하나님은 내가 여기 계신 줄도 모르겠지?’ 하면서 방자하게 사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연 그것을 믿을 때 내 삶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생각해 보니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는 것도, 안 계시는 것도 우리 인간들에게는 상당히 당혹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되 그것도 충만히 계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우리의 측량 범위 안에 계시거나, 우리의 어떤 힘으로 제한시킬 수 없으며, 어느 한 시간이나 지역에 국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신들이 원하는 시간에 그 장소에 있기를 원해서 하나님의 무소부재 하심을 손상시키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도 제사장이나 선지자 왕 같은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는 이런 모습에 대해서 통렬히 비난 했습니다. 그런 것은 거짓된 모습이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무소부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이 아니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바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곳에 편재해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가깝고 먼 곳에 차이가 있게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의 하나님이시며 먼 곳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은폐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십니다. 행여나 하나님의 눈길, 하나님의 숨길, 하나님의 전지, 하나님의 전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매우 큰 죄악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부정과 부패, 뇌물 때문에 어수선했던 일이 많았습니다. 처음에 어떤 소문이 나면 절대로 관계 없다고, 음해하는 일이라고,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했다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다른 사람이 받았기에 모른다고 하고 대가성 없이 받았다고 합니다. 세상에서도 다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 과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앞에서야 어떠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출세를 하려고 뇌물을 가지고 찾아가서 뇌물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못 받겠다고 거절하니까 뇌물을 가져간 사람이 아무도 안 보기에 받으셔도 괜찮다고 했더니 뇌물을 거절한 사람이, “이놈, 아무도 안 보다니? 네가 보고 내가 보고, 땅이 보고 하늘이 본다.” 호통을 치면서 내쫓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셔서 보고 계심을 늘 생각하고 방자한 모습이나 경거망동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무소부재를 믿고 사는 삶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예를 들어, 어머니와 나와의 관계는 떨어질 수 없습니다. 언제나 함께하는 관계로 존재합니다.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떨어질 수 없는 절대적 관계이며 이는 어디서나 가능하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무소부재의 능력 아래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루며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과 언제나 인격적 관계를 이룸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소명을 깨닫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상황 속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심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때로는 안 계신 것 같고, 부르짖음에 응답이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 속에 개입하셔서 들으시고, 아시고, 찾아오시고, 건져내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즉 인격적으로 구체적 관계를 이루시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체험 속에서 증거되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의 모든 일에 경건과 예배자의 삶을 사는 것을 가능케 합니다.
현재는 자신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삶을 좋아하는 소위 무명성 시대입니다. 그래서 은밀하게 죄를 범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특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무소부재 하심의 신앙이 우리에게는 더욱 귀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하여 계셔서 우리를 살피시고 은혜를 주시며 동시에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만일 이 무소부재의 신앙을 우습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권위는 무너지고 교회의 권위도 무너지게 되고 결국은 멸망을 자초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 섭리, 사랑, 그 모든 존재하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다만 사람들이 다르게, 가볍게 생각할 뿐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에 따라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능력을 선포하면서 사는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