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풀며 살리라

-우제돈목사/ 상원교회


사무엘하 9 : 1~7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 되었을 때 처음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권좌에 오래 앉아 있다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부패와 타락의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중의 한 가지가 소년 다윗이 사울과 이스라엘을 위해 숙적 골리앗을 제거 했는데도 오히려 자기의 정적으로 알고 10여 년간 다윗을 없애려고 온갖 계교를 다 꾸미다가 결국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부자가 함께 불행한 최후를 당하고 말았습니다(삼상 31:2­8).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우정(삼상 19:1­7, 20­34)은 두고두고 역사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으며 그와 맺은 언약(삼상 20:15­17)을 기억하고 요나단의 불구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은혜를 베푼 사실은 만고불변의 사표가 되고 있습니다.

고대 군동 지방에는 새 임금이 들어서면 전 왕의 가족이나 전 정권의 세력자들을 모두 제거시키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가슴깊이 애도하면서 그 후손들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여러분은 다윗처럼 은혜를 끼치고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1. 용서와 사랑을 베푸는 삶다윗이 모비보셋을 찾을 때는 용서와 사랑을 베풀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사무엘의 제사장권을 침해 하였고(삼상 13:8­14) 전쟁에 혈안이 되어 독선적 권력 유지에만 급급하였으며(삼상 14:24) 아멜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삼상 15:8­9) 하나님의 금하신 노략물을 탈취하였고(삼상 15:20­21) 급기야는 제사장 아히멜렉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삼상 22:19­20).

무엇보다도 소년 다윗이 적장 골리앗을 단칼에 죽였다면 마땅히 공(功)을 물어 다윗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 주어야 마땅한 대우였을 것인데도 “사울의 죽인 자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말에만 옹졸한 질투심을 발동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온갖 계책을 꾸몄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하였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사울을 처치할 기회가 더 많았지만(삼상 24:6, 26:11, 21) 하나님의 기름 부어 세운 종이기 때문에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사울 부자는 브레셋 전쟁에서 전사하였고 다윗은 단 한 명의 생존자, 므비보셋을 선대하였습니다. 이는 첫째, 몬드발 촌구석에 숨어 있는 므비보셋은 왕의 용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둘째, 다윗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그를 찾거나 용서하거나 사랑을 바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 아비 요나단과의 우정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삼상 20:14­17). 셋째, 다윗은 두려워 떠는 무비보셋을 안심 시키고 위로 격려하였습니다(7절).

이상과 같은 다윗의 용서와 사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만인류를 향하신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자기 편에서 먼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삶다윗이 므비보셋을 찾은 것은 긍휼과 자비를 베풀겠다는 뜻입니다.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은 길보아 전투에서 절뚝발이가 되었고(삼하 4:4) 마길의 집에서 숨어 죽은 개같은 삶을 살다가 다윗에게 알려져서 용서와 사랑 그리고 긍휼과 자비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미국 알칸사스 주 위츠스프리 중학교는 전교생이 백 수 십 명에 불과한 시골학교입니다. 한번은 이웃 레슬리 학교와 농구 시합을 하는데 위즈스프링 팀이 30점차로 많이 뒤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관중석에서는 “스카티, 스카티”를 외쳤고 내쉬 감독은 뇌성마비 스카티 선수를 투입시켰습니다. 스카티는 곧 패스를 받아 볼을 던졌지만 바스켓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순간 그의 팀 멤버들이 리바운드 볼을 만들어 다시 스카티에게 패스했으나 역시 노골이었습니다. 그러기를 네 번 만에 3점 롱 슛을 성공시켰습니다.

양 팀의 관중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기립 박수를 보냈습니다. 점수판에는 레슬리 89점 위치스프링 58점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경기장의 모든 관중들은 지고도 이긴 스카티의 투혼에 격려의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소감을 묻는 기자 질문에서 감독은 “선수들은 스카티가 들어가면 경기가 질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스카티와 함께 열심히 뛰어 경기의 분위기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하나의 장애자에게 기쁨과 자신감을 안겨 주기 위해 팀 멤버 모두가 네 번씩이나 슛을 시도했다는 것은 게임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자기 팀의 연약한 지체를 돌보는 아름다운 마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서울 명덕 초등학교 4학년 1반 아이들이 목발 잡고 다니는 한 아이 때문에 1층의 1학년 4반과 자리바꿈을 했다는 미담은 우리들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3. 선행을 베푸는 삶다윗이 므비보셋을 찾은 것은 구제와 선행을 베풀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 9절 이하에 보면 다윗왕이 므비보셋을 선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첫째, 므비보셋의 신분을 회복해 주었습니다. 죽은 개같이 천박해진 모드발의 절름발이를 일약 왕자의 신분으로 격상시켜 준 것입니다(11절). 이는 실로 구원받은 우리들이 경험하는 회복과도 같습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결과 모든 사람이 다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출 5:12). 그런데 오늘 우리는 또 다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생을 얻게 되어 죄의 종에서 의의 자녀로 격상되었습니다(출 8:21). 그러므로 우리는 므비보셋처럼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주께 영광 돌려야겠습니다.

둘째, 므비보셋의 사람들은 사실상 낙원에서 추방되었을 뿐만 아니라(창 3:24) 모든 행복을 상실했습니다. 따라서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제반 주도권을 잃어버린 인간은 그후 자연과 생존의 방해요소로부터 수많은 고난을 받아왔습니다. 이런 인간에게 주님이 찾아와서 모든 소유의 권세(롬 11:36)를 되찾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다시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셋째, 므비보셋의 처소가 회복되었습니다. 즉, 그가 살던 원래의 왕궁에 다시 거하게 되었습니다(13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지난날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낙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인해 되찾게 되었습니다. 실로 절뚝발이와 다름없는 우리들을 위해 주님께서 직접 우리 곁으로 찾아오셔서 다윗 궁보다 더 훌륭한, 에덴동산보다 더 영화로운 처소를 안식처로 주셨습니다(요 14:2­3).

이 처소를 가리켜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계 21:1)”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 땅에다 육신을 파묻겠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공의와 질서가 통치하는 신천신지에 갈 것을 생각하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실로 우리는 ‘베풀며 사는 일’에 너무나 인색하였습니다. 바라기는 다윗처럼 용서와 사랑을 베풀고, 긍휼과 자비를 베풀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