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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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사람인가?”(고전 2:14-3:3)
예수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호칭(呼稱)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약 1년 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후 복음을 믿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에게 처음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바로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부르는 호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영적인 삶이 무엇인지, 참된 영성(靈性)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영적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영성이란 말은 어떤 말입니까? 참된 영성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완전히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해 드린 분은 그리스도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인간은 그렇게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닮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즉 참된 영성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닮아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여러분의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만약 여러분이 영적 신앙인인지 아닌지, 또 어느 정도 영적인지를 알아보기를 원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합니다.
첫째, 내가 그분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여기에서 “안다”라는 것은 막연히 상대방의 배경이나 현실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친숙하게 상대방에 대해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남편이 아내를 알고, 아내가 남편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우리는 스스로에게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많을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새벽기도도 열심히 다니고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에 대해서 열심을 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사이기 때문에, 또는 집사이기 때문에 이 이런 일들에 대해서 열심을 내는 것입니까? 그러나 정작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은 헛된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예언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고전 131-3)
셋째, 내가 얼마나 그 분을 닮았는가?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딸도 어머니를 닮습니다. 아버지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만큼 자기 딸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또 아내는 남편을 알고, 남편은 아내를 압니다. 부부 사이만큼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을 잘 알고 사랑한다면 우리를 우리가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을 닮아 가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참된 영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일 것입니다. 참된 영성이란 예수님을 닮아 가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롬8:29)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2장 14절 이하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구절에는 영성과 관련된 단어가 영적인 사람, 자연인, 육신(肉身)에 속한 사람 등에 대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자연인은 부모로부터 한번 태어난 자연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네가 한번 태어나야 하겠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요 3:6,7)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 말씀이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예수님을 찾아다닌 무리들이 그 전날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을 먹이셨던 것 때문에 다시 찾아온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요6:27) 예수님이 떡을 먹이신 것은 떡을 목적에 두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알게 하려고 행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육신적인 것을 통해 영적인 것을 설명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육신의 삶을 관찰해 보면 도움이 됩니다. 육신의 삶은 영적인 삶에 대한 예화, 시청각적 설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구약은 실제 이스라엘의 역사로 전개되면서 신약의 영적인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영성과 관련하여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인, 육신에 속한 사람, 영적인 사람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지 자문자답(自問自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자연인(natural man)
육으로 한번 태어난 자연인(自然人)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미련하게 보이며,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에게는 영적인 진리들이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깨닫지도 못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214) 여기 “육에 속한 사람”이란 불신 자연인을 말합니다. 자연인은 거듭나지 않은 생태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자연인은 동물적인 사람을 말하는데 이는 곧 감각적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자를 말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이 없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8:9).
그렇다면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어떠합니까?
①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합니다(2:14). 이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 즉 복음의 말씀을 받지도 아니하고 그것을 깨달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저들이 복음을 거절하는 이유는 복음이 저들에게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미련한'이란 말은 '무딘' '재미없는' '맛이 없는'을 뜻하고 또한 '둔한 것' '어리석은 것'이란 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일이 육에 속한 사람에게 미련하게 보인다는 말은 그 일이 그에게는 어리석고, 재미없고, 맛이 없다는 뜻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신령한 일을 마음속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른다는 것 자체가 미련하고 허황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십자가의 도는 멸망 받을 자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고전1:18).
② 성령의 일을 깨닫지 못합니다(2:14). 여기 '깨닫지 못한다'는 말은 경험적 지식, 체험적 지식을 가지지 못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일에 완전 무능력자로써 어떤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육에 속한 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에 대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전혀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요 1장 5절에도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③ 육적인 것에 지배를 받습니다. 이들 영적인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만 관심을 두는 자입니다(요일 2:16). 이들은 본능대로 살뿐입니다. 이들은 자기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롬1:28). 이들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롬8:7-8). 결국 그들의 마침도 사망뿐입니다(롬8:6,13).
그렇습니다. 한번 태어난 자연인은 영혼이 죽었기 때문에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영의 세계가 이해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안 믿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욕망하고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연인은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복음에 대해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33)
따라서 안 믿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욕하는 것에 대해 속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해가 안 되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최소한 육의 차원에서라도 설명해 주고 도와줘서 그 시간에 성령께서 그의 눈과 마음과 귀를 열어 주시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그 순간 영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자연인은 복음에 대해서 알 듯 하면서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인의 본성(本性)은 자기중심적입니다. 심지어 선한 일을 해도 그 안에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자아가 마음 보좌에 앉아 있고 예수님은 그의 삶밖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이 공부를 많이 하고 머리고 좋다고 해서 영적인 것을 알게 되느냐 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연인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고전2:14)
이것은 자연인이 무식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텔레비전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느 프로그램이 있고, 거기에 누가 나오는데 어떻고 등등의 이야기를 해 보았자 도무지 통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이 이해하려면 먼저 텔레비전을 사야 할 것입니다.
자연인은 영적인 생명이 없습니다. 교회에만 오면 졸리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자연인들을 먼저 거듭난 자들이 이해해 주고 사랑과 인내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불어넣어 주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육신에 속한 사람(carnal man)
본문 3장 1절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육신에 속한 사람'은 타락한 본성의 영향 아래 있는 자로서 영적으로 충분한 이해력과 분별력이 없는 자를 말합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육신을 따라 처신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는 곧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육신의 표준을 따라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예수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합한 상태의 사람입니다. 즉 영적인 어린이와 같은 자들입니다(고전 3:1-2,히 5:11-14) 자신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생각하고 사는 모습이 예수님을 안 믿는 것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에게 아직도 영적인 신앙인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에게처럼 말해 봤자 못 알아들을 것이므로 그 수준에 맞게 말하겠다고 서신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인데 고린도라는 도시는 엄청난 상업 도시이며 환락가요 세계 여러 사람이 모여들고 우상을 섬기는 신전도 있었습니다. 이런 도시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는 믿되 예전의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이 그대로 남아 마치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영적인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물론 예수 믿은 지 오래 되어도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생활은 오해해서 관록만 늘어 교회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지만 성장이 전혀 없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본성은 자아(自我)가 마음 중심에 자리 잡고 예수님은 한편 구석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거듭났다는 자체가 성화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가끔 혼동되는데, 거듭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지 영적으로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과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다른 것과 같은 이치(理致)입니다.
예수님이 그 마음 중심에 자리하시려면 신앙이 잘 성장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파악해서 다섯 가지 주고 싶어도 한두 가지만 주고 또 잘 키운 뒤 얼마 후에 나머지 것을 주어야 합니다. 야단칠 일이 있어도 처음부터 야단을 쳐버리면 그 사람은 자빠지기 십상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에 속한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① 영적인 어린아이들입니다(3:1). 여기 '어린아이'는 '말이 없는'즉 말을 할 줄 모르는 어린 아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육신에 속한 신자는 거듭나기는 했으나 아직 어린 아이로서 영적인 일에 대해 말할 줄 모르는 자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고 거듭나기는 했으나 영적인 지식과 체험에서 어린아이입니다.
이들은 영적인 미숙아로서 심오한 영적인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자입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영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에 있기에 동물적인 욕구와 인간적인 것에 지배를 받게 될 뿐입니다. 예수를 믿으나 옛날의 습성을 좇아 육욕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바로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거듭났다고 해서 바로 성화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에 속한 자는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아직도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습이 불신자와 같은 사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성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아직도 부패한 인간의 마음의 영향을 받고 있는 자입니다. 영적 미숙아에게는 아직도 하나님을 반항하고, 자기 고집대로 살려는 인간의 죄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사람은 영적으로 미성숙(未成熟)한 사람이기에 어린 아이를 다루듯이 잘 보살피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아무리 믿은 지 오래된 분이라고 할지라도 만약 옆에 믿은 지 얼마 되지 아니해서 성경과 찬송가를 가져오지 않고 옆자리에 앉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찬송을 다 부르도록 바로 옆에 앉은 사람에게 찬송가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자입니다.
② 젖을 먹는 자들입니다(3:2). 저들은 영적인 어린아이들로서 밥을 주식으로 삼지 못하고 젖을 먹는 자들입니다. 여기 '젖'은 그리스도의 초보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기초적인 지식에 머무르는 자를 의미합니다. 저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다고 하지만 삶 속에서 열매로 나타나지 아니합니다.
저들은 영적인 이해력과 분별력에 어떤 변화와 성장과정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은 고기를 먹을 수 있는데 고린도 교인들은 아직도 젖을 먹고사는 초보단계에서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십자가를 지는 헌신의 삶보다는 기복적인 신앙에 머물렀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보다는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사람은 영적인 진리(眞理)를 아직도 이해(理解)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오랫동안 믿은 분들도 성경을 어떻게 이해할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느 본문을 정해서 읽은 후 그 본문의 중심 단어가 무엇인지, 중심 사랑이 무엇인지 찾아보게 하는 훈련을 해 주어야 합니다.
③ 시기와 분쟁을 일으킵니다(3:3). 저들은 육신에 속하여 시기와 분쟁을 일으키며 사람을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사실 교회 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교회밖에 있는 불신자가 아니라 육신에 속한 자 즉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입니다.
이들은 어린아이들처럼 바울파, 아볼로파 하며 당파심을 조장하여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저들은 사람을 따라 행하였는데 이는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고 자연인의 세상적인 표준을 따라 행동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다른 교인들에 대해 질투심(嫉妬心)이 많고 비판(批判)를 잘합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남에 대해 못마땅한 것이 많습니다. 옷 색깔이 어떻고, 머리 모양은 어떻고, 말하는 것이 어떻고 하면서 늘 꼬투리를 잘 잡습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아하, 영적으로 어린아이구나’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들을 무조건 야단치면 안 되고 잘 살펴 주고, 잘 키워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상태가 계속됩니다.
교회적인 모든 어려움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세상적 방법을 추구할 때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이 아닌 자신의 경험이나 방법으로 교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더 큰 문제가 야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기와 분쟁! 이것은 아직도 영적으로 성숙치 못한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문제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영에 속한 사람(spiritual man) = 신령한 사람
본문 2장 15절에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했다. 여기 '신령한 자'란 영에 속한 사람이요, 영적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인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6절에서는 신령한 자를 '온전한 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 온전한 자란 영적으로 성숙한 상태에 있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성령의 지배와 인도를 받는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참된 이해와 분별력을 가지도 복음의 깊은 뜻을 깨닫기 때문에 날마다 성장하고 성숙해 갑니다. 저들은 구원받은 상태에서 머무르지 않고 영적으로 성숙하고, 영적 통찰력을 가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사람, 마음의 중심 보좌에 예수님이 앉아 계시고 나는 그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고후 2:15) 이런 사람은 어떡하든지 나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그 대신 예수님이 점점 내 삶을 점령하시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한참 예수님 잘 믿다가도 가끔 육(育)적인 생각이 날 때 가만히 나 자신을 돌아보면 조금 섭섭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내 주장, 내 권리, 내 생각이 점점 없어지게 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매순간 나의 생각, 행동, 말을 통제하고 관할하셔서 나를 통해 예수님만이 늘 나타나는 사람이기에 이 사람은 행복하다는 깨닫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신령한 자에게도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①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자입니다.(2:15) 여기 '모든 것'은 신령한 일을 말합니다. 또한 '판단하다'는 뜻은 '분별하다', '식별하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가치 기준이 영적이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에 의존하여 판단하게 됩니다. 신령한 자들은 이미 진리와 비진리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성령과 악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② 주의 마음을 소유한 자입니다(2:15).
여기 '주의 마음'은 이사야 40:13을 인용한 것인데 이사야서에는 여호와의 영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의 뜻을 안다는 것입니다. 주의 마음! 이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사정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알 수 없듯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는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깨닫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어떤 사람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 하시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다 성령이 임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3:16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심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재하시되 얼마만큼 ‘성령이 내 삶을 점령하셨는가?’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만약 내 가슴속에 질투, 분노, 욕심 등이 꽉 차 있다면 성령께서 활동하시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자마자 마음속의 욕심(慾心), 악독(惡毒), 분노(忿怒), 질투(嫉妬) 같은 것을 자꾸 내버려서 비워 드릴 때 성령께서 더 강하게 역사 하실 것입니다. “성령을 근심케 말라”(엡430)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화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딤후 3:16) 말씀만 철저히 알아도 성령의 뜻을 대부분 알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외에는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성령은 기도를 통해서 역사 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다만 성경에 없는 얘기를 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가 아무리 신비한 얘기를 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진리처럼 생각했다가는 큰일 납니다.
또한 성경에서 불확실하게 언급한 것을 너무 자세하게 확실히 설명한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환상을 통해서 그것을 풀이해 주셨다”라고 주장한다든지, 처음으로 그러한 사항에 대해 자세한 해석을 하는 사람을 보면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불확실하게 둔 것은 그럴 필요가 있어서 불확실하게 두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령한 사람은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까?
① 영적인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싶어 할 뿐 아니라 이해를 잘하려고 몸부림칩니다.
설교를 들은 후 그 설교가 귀에 쏙쏙 들어오며 참 좋은 것 배웠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자가 특별히 설교를 잘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 사람에게 들을 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들은 것들이 금방 가슴으로 전해집니다.
② 영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를 닮아 갑니다. 그것이 지식이 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를 닮는 것과 지식이 느는 것이 비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는다고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結論)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인생을 세 종류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전혀 영적인 일에 문외한으로서 거듭남의 체험이 없는 육에 속한 자연인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자입니다. 하나님도, 천국도 부정한 체 육체적 욕구를 따라 살아가는 자입니다.
혹시 이러한 모습이 당신의 모습은 아닙니까?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중생 체험의 은총을 입어야만 영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육신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거듭남의 체험은 했지만 영적인 아이로서 성장하지 못하고 젖만 먹는 성도를 의미한다고 말씀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는 이들 때문에 항상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또한 신령한 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것에 대하여 분별력이 있고, 모든 것을 판단하며 그리스도의 마음의 가짐으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못하여 육에 속한 사람이라면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남의 체험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거듭나기는 했으나 영적 미숙아로 있는 성도들은 신령한 일을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축복의 자리에까지 오르기를 바랍니다. 신령한 사람으로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라면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기쁨으로 걷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목사나 신학 박사가 될 수 없어도 예수님을 닮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며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만약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성숙한 성화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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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호칭(呼稱)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약 1년 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후 복음을 믿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에게 처음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바로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부르는 호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영적인 삶이 무엇인지, 참된 영성(靈性)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영적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영성이란 말은 어떤 말입니까? 참된 영성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완전히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해 드린 분은 그리스도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인간은 그렇게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닮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즉 참된 영성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닮아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여러분의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만약 여러분이 영적 신앙인인지 아닌지, 또 어느 정도 영적인지를 알아보기를 원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합니다.
첫째, 내가 그분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여기에서 “안다”라는 것은 막연히 상대방의 배경이나 현실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친숙하게 상대방에 대해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남편이 아내를 알고, 아내가 남편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우리는 스스로에게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많을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새벽기도도 열심히 다니고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에 대해서 열심을 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사이기 때문에, 또는 집사이기 때문에 이 이런 일들에 대해서 열심을 내는 것입니까? 그러나 정작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은 헛된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예언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고전 131-3)
셋째, 내가 얼마나 그 분을 닮았는가?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딸도 어머니를 닮습니다. 아버지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만큼 자기 딸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또 아내는 남편을 알고, 남편은 아내를 압니다. 부부 사이만큼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을 잘 알고 사랑한다면 우리를 우리가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을 닮아 가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참된 영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일 것입니다. 참된 영성이란 예수님을 닮아 가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롬8:29)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2장 14절 이하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구절에는 영성과 관련된 단어가 영적인 사람, 자연인, 육신(肉身)에 속한 사람 등에 대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자연인은 부모로부터 한번 태어난 자연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네가 한번 태어나야 하겠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요 3:6,7)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 말씀이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예수님을 찾아다닌 무리들이 그 전날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을 먹이셨던 것 때문에 다시 찾아온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요6:27) 예수님이 떡을 먹이신 것은 떡을 목적에 두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알게 하려고 행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육신적인 것을 통해 영적인 것을 설명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육신의 삶을 관찰해 보면 도움이 됩니다. 육신의 삶은 영적인 삶에 대한 예화, 시청각적 설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구약은 실제 이스라엘의 역사로 전개되면서 신약의 영적인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영성과 관련하여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인, 육신에 속한 사람, 영적인 사람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지 자문자답(自問自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자연인(natural man)
육으로 한번 태어난 자연인(自然人)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미련하게 보이며,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에게는 영적인 진리들이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깨닫지도 못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214) 여기 “육에 속한 사람”이란 불신 자연인을 말합니다. 자연인은 거듭나지 않은 생태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자연인은 동물적인 사람을 말하는데 이는 곧 감각적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자를 말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이 없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8:9).
그렇다면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어떠합니까?
①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합니다(2:14). 이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 즉 복음의 말씀을 받지도 아니하고 그것을 깨달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저들이 복음을 거절하는 이유는 복음이 저들에게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미련한'이란 말은 '무딘' '재미없는' '맛이 없는'을 뜻하고 또한 '둔한 것' '어리석은 것'이란 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일이 육에 속한 사람에게 미련하게 보인다는 말은 그 일이 그에게는 어리석고, 재미없고, 맛이 없다는 뜻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신령한 일을 마음속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른다는 것 자체가 미련하고 허황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십자가의 도는 멸망 받을 자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고전1:18).
② 성령의 일을 깨닫지 못합니다(2:14). 여기 '깨닫지 못한다'는 말은 경험적 지식, 체험적 지식을 가지지 못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일에 완전 무능력자로써 어떤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육에 속한 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에 대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전혀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요 1장 5절에도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③ 육적인 것에 지배를 받습니다. 이들 영적인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만 관심을 두는 자입니다(요일 2:16). 이들은 본능대로 살뿐입니다. 이들은 자기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롬1:28). 이들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롬8:7-8). 결국 그들의 마침도 사망뿐입니다(롬8:6,13).
그렇습니다. 한번 태어난 자연인은 영혼이 죽었기 때문에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영의 세계가 이해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안 믿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욕망하고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연인은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복음에 대해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33)
따라서 안 믿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욕하는 것에 대해 속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해가 안 되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최소한 육의 차원에서라도 설명해 주고 도와줘서 그 시간에 성령께서 그의 눈과 마음과 귀를 열어 주시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그 순간 영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자연인은 복음에 대해서 알 듯 하면서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인의 본성(本性)은 자기중심적입니다. 심지어 선한 일을 해도 그 안에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자아가 마음 보좌에 앉아 있고 예수님은 그의 삶밖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이 공부를 많이 하고 머리고 좋다고 해서 영적인 것을 알게 되느냐 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연인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고전2:14)
이것은 자연인이 무식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텔레비전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느 프로그램이 있고, 거기에 누가 나오는데 어떻고 등등의 이야기를 해 보았자 도무지 통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이 이해하려면 먼저 텔레비전을 사야 할 것입니다.
자연인은 영적인 생명이 없습니다. 교회에만 오면 졸리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자연인들을 먼저 거듭난 자들이 이해해 주고 사랑과 인내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불어넣어 주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육신에 속한 사람(carnal man)
본문 3장 1절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육신에 속한 사람'은 타락한 본성의 영향 아래 있는 자로서 영적으로 충분한 이해력과 분별력이 없는 자를 말합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육신을 따라 처신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는 곧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육신의 표준을 따라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예수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합한 상태의 사람입니다. 즉 영적인 어린이와 같은 자들입니다(고전 3:1-2,히 5:11-14) 자신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생각하고 사는 모습이 예수님을 안 믿는 것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에게 아직도 영적인 신앙인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에게처럼 말해 봤자 못 알아들을 것이므로 그 수준에 맞게 말하겠다고 서신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인데 고린도라는 도시는 엄청난 상업 도시이며 환락가요 세계 여러 사람이 모여들고 우상을 섬기는 신전도 있었습니다. 이런 도시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는 믿되 예전의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이 그대로 남아 마치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영적인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물론 예수 믿은 지 오래 되어도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생활은 오해해서 관록만 늘어 교회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지만 성장이 전혀 없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본성은 자아(自我)가 마음 중심에 자리 잡고 예수님은 한편 구석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거듭났다는 자체가 성화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가끔 혼동되는데, 거듭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지 영적으로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과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다른 것과 같은 이치(理致)입니다.
예수님이 그 마음 중심에 자리하시려면 신앙이 잘 성장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파악해서 다섯 가지 주고 싶어도 한두 가지만 주고 또 잘 키운 뒤 얼마 후에 나머지 것을 주어야 합니다. 야단칠 일이 있어도 처음부터 야단을 쳐버리면 그 사람은 자빠지기 십상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에 속한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① 영적인 어린아이들입니다(3:1). 여기 '어린아이'는 '말이 없는'즉 말을 할 줄 모르는 어린 아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육신에 속한 신자는 거듭나기는 했으나 아직 어린 아이로서 영적인 일에 대해 말할 줄 모르는 자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고 거듭나기는 했으나 영적인 지식과 체험에서 어린아이입니다.
이들은 영적인 미숙아로서 심오한 영적인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자입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영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에 있기에 동물적인 욕구와 인간적인 것에 지배를 받게 될 뿐입니다. 예수를 믿으나 옛날의 습성을 좇아 육욕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바로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거듭났다고 해서 바로 성화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에 속한 자는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아직도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습이 불신자와 같은 사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성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아직도 부패한 인간의 마음의 영향을 받고 있는 자입니다. 영적 미숙아에게는 아직도 하나님을 반항하고, 자기 고집대로 살려는 인간의 죄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사람은 영적으로 미성숙(未成熟)한 사람이기에 어린 아이를 다루듯이 잘 보살피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아무리 믿은 지 오래된 분이라고 할지라도 만약 옆에 믿은 지 얼마 되지 아니해서 성경과 찬송가를 가져오지 않고 옆자리에 앉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찬송을 다 부르도록 바로 옆에 앉은 사람에게 찬송가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자입니다.
② 젖을 먹는 자들입니다(3:2). 저들은 영적인 어린아이들로서 밥을 주식으로 삼지 못하고 젖을 먹는 자들입니다. 여기 '젖'은 그리스도의 초보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기초적인 지식에 머무르는 자를 의미합니다. 저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다고 하지만 삶 속에서 열매로 나타나지 아니합니다.
저들은 영적인 이해력과 분별력에 어떤 변화와 성장과정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은 고기를 먹을 수 있는데 고린도 교인들은 아직도 젖을 먹고사는 초보단계에서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십자가를 지는 헌신의 삶보다는 기복적인 신앙에 머물렀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보다는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사람은 영적인 진리(眞理)를 아직도 이해(理解)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오랫동안 믿은 분들도 성경을 어떻게 이해할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느 본문을 정해서 읽은 후 그 본문의 중심 단어가 무엇인지, 중심 사랑이 무엇인지 찾아보게 하는 훈련을 해 주어야 합니다.
③ 시기와 분쟁을 일으킵니다(3:3). 저들은 육신에 속하여 시기와 분쟁을 일으키며 사람을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사실 교회 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교회밖에 있는 불신자가 아니라 육신에 속한 자 즉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입니다.
이들은 어린아이들처럼 바울파, 아볼로파 하며 당파심을 조장하여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저들은 사람을 따라 행하였는데 이는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고 자연인의 세상적인 표준을 따라 행동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다른 교인들에 대해 질투심(嫉妬心)이 많고 비판(批判)를 잘합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남에 대해 못마땅한 것이 많습니다. 옷 색깔이 어떻고, 머리 모양은 어떻고, 말하는 것이 어떻고 하면서 늘 꼬투리를 잘 잡습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아하, 영적으로 어린아이구나’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들을 무조건 야단치면 안 되고 잘 살펴 주고, 잘 키워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상태가 계속됩니다.
교회적인 모든 어려움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세상적 방법을 추구할 때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이 아닌 자신의 경험이나 방법으로 교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더 큰 문제가 야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기와 분쟁! 이것은 아직도 영적으로 성숙치 못한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문제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영에 속한 사람(spiritual man) = 신령한 사람
본문 2장 15절에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했다. 여기 '신령한 자'란 영에 속한 사람이요, 영적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인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6절에서는 신령한 자를 '온전한 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 온전한 자란 영적으로 성숙한 상태에 있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성령의 지배와 인도를 받는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참된 이해와 분별력을 가지도 복음의 깊은 뜻을 깨닫기 때문에 날마다 성장하고 성숙해 갑니다. 저들은 구원받은 상태에서 머무르지 않고 영적으로 성숙하고, 영적 통찰력을 가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사람, 마음의 중심 보좌에 예수님이 앉아 계시고 나는 그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고후 2:15) 이런 사람은 어떡하든지 나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그 대신 예수님이 점점 내 삶을 점령하시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한참 예수님 잘 믿다가도 가끔 육(育)적인 생각이 날 때 가만히 나 자신을 돌아보면 조금 섭섭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내 주장, 내 권리, 내 생각이 점점 없어지게 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매순간 나의 생각, 행동, 말을 통제하고 관할하셔서 나를 통해 예수님만이 늘 나타나는 사람이기에 이 사람은 행복하다는 깨닫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신령한 자에게도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①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자입니다.(2:15) 여기 '모든 것'은 신령한 일을 말합니다. 또한 '판단하다'는 뜻은 '분별하다', '식별하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가치 기준이 영적이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에 의존하여 판단하게 됩니다. 신령한 자들은 이미 진리와 비진리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성령과 악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② 주의 마음을 소유한 자입니다(2:15).
여기 '주의 마음'은 이사야 40:13을 인용한 것인데 이사야서에는 여호와의 영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의 뜻을 안다는 것입니다. 주의 마음! 이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사정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알 수 없듯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는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깨닫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어떤 사람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 하시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다 성령이 임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3:16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심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재하시되 얼마만큼 ‘성령이 내 삶을 점령하셨는가?’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만약 내 가슴속에 질투, 분노, 욕심 등이 꽉 차 있다면 성령께서 활동하시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자마자 마음속의 욕심(慾心), 악독(惡毒), 분노(忿怒), 질투(嫉妬) 같은 것을 자꾸 내버려서 비워 드릴 때 성령께서 더 강하게 역사 하실 것입니다. “성령을 근심케 말라”(엡430)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화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딤후 3:16) 말씀만 철저히 알아도 성령의 뜻을 대부분 알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외에는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성령은 기도를 통해서 역사 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다만 성경에 없는 얘기를 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가 아무리 신비한 얘기를 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진리처럼 생각했다가는 큰일 납니다.
또한 성경에서 불확실하게 언급한 것을 너무 자세하게 확실히 설명한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환상을 통해서 그것을 풀이해 주셨다”라고 주장한다든지, 처음으로 그러한 사항에 대해 자세한 해석을 하는 사람을 보면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불확실하게 둔 것은 그럴 필요가 있어서 불확실하게 두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령한 사람은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까?
① 영적인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싶어 할 뿐 아니라 이해를 잘하려고 몸부림칩니다.
설교를 들은 후 그 설교가 귀에 쏙쏙 들어오며 참 좋은 것 배웠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자가 특별히 설교를 잘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 사람에게 들을 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들은 것들이 금방 가슴으로 전해집니다.
② 영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를 닮아 갑니다. 그것이 지식이 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를 닮는 것과 지식이 느는 것이 비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는다고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結論)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인생을 세 종류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전혀 영적인 일에 문외한으로서 거듭남의 체험이 없는 육에 속한 자연인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자입니다. 하나님도, 천국도 부정한 체 육체적 욕구를 따라 살아가는 자입니다.
혹시 이러한 모습이 당신의 모습은 아닙니까?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중생 체험의 은총을 입어야만 영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육신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거듭남의 체험은 했지만 영적인 아이로서 성장하지 못하고 젖만 먹는 성도를 의미한다고 말씀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는 이들 때문에 항상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또한 신령한 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것에 대하여 분별력이 있고, 모든 것을 판단하며 그리스도의 마음의 가짐으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못하여 육에 속한 사람이라면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남의 체험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거듭나기는 했으나 영적 미숙아로 있는 성도들은 신령한 일을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축복의 자리에까지 오르기를 바랍니다. 신령한 사람으로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라면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기쁨으로 걷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목사나 신학 박사가 될 수 없어도 예수님을 닮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며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만약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성숙한 성화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