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 메시지

“아사헬의 죽음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삼하 2:18-32)
 
본문의 말씀은 다윗 왕가와 사울 왕가의 대립에 대한 말씀으로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군장 아브넬과 다윗의 군장 요압이 서로의 공명심으로 말미암아 장난하게 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부하 24명이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난을 먼저 걸었던 아브넬의 사람들이 오히려 많이 죽고, 요압의 사람들 다윗의 사람들은 조금 덜 죽었지만 그날에 큰 싸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 다윗 왕가와 사울 왕가와의 전쟁이 돌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간단하게 살펴보면서 기도의 제목을 삼기를 원합니다.  

1.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하지 말고 함께 동역해야 합니다.(18-23절)
이스보셋의 군장 아브넬은 자신의 생명이 위태하게 되자 도망을 치게 됩니다. 바로 이때에 다윗의 군장 요압의 형제 중 막내였던 아사헬이 아브넬을 쫓아가다가 죽임을 당합니다.(23절) 본문 1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사헬은 들 노루 같이 빠른 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아브넬의 창에 의해서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아사헬은 자신의 발 빠름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아사헬은 자신의 빠른 발을 과신함으로 만용을 부렸던 것입니다. 아사헬이 아브넬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자신의 빠른 발만 믿고 아브넬을 쫓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사헬의 무모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아사헬이 도망치는 아브넬을 좇아가는 것은 용맹스런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사헬 혼자가 아브넬을 잡겠다는 좇아가는 모습은 무모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용맹한 사람이라도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회생활을 하고,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아사헬과 같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아주 재능이 많습니다. 똑똑합니다. 그런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공동체의 뜻을 이루는 것도 힘들게 되고, 본인도 결국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들 노루처럼 발 빠른 사람이 되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겠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동역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알게 하시고 함께 있게 하신 동역자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 가족만큼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도 이탈하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슴이 그 자랑거리인 뿔로 인해서 가시덤불에 걸리듯, 자신을 과신하는 사람은 결국 그것으로 인하여 망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남보다 뛰어난 자랑거리가 있다면 그것을 세속의 도구로 삼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와 그 일을 위해서 올바로 사용해야 합니다. 

2. 미움과 원한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왜 아사헬이 아브넬을 기를 쓰고 쫓아갔습니까? 그것은 아브넬에 대한 미움과 원한 때문이었습니다. 아사헬은 아브넬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상 오늘 본문 22절 말씀을 보면 아브넬은 아사헬과 싸우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26절 상반 절의 말씀처럼 칼은 결국 참혹한 일만 만듭니다. 설혹 아사헬이 아브넬을 죽인다면 그것은 또 다른 참혹한 일을 만들어 내는 시발점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검으로 사는 자는 검으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마 26:52) 아브넬은 동족끼리 서로 죽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사헬을 미움을 이기지 못하고 이성을 잃고 아브넬을 뒤쫓다가 결국 자기 자신이 죽게 됩니다. 칼은 칼을 부르는 것처럼 미움은 미움을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면 미움은 미워하는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영혼을 죽입니다. 

요나 선지자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니느웨를 미워하고 망하기를 바라서 정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탑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가 탄 배에 풍랑을 만나게 하시고, 물고기에게 삼키게 하십니다. 남을 미워하니까 자신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니까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9절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스스로 원수를 갚으려고 하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지만,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 하나님께서 다 멋있게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면 내 영혼이 점차 마르게 됩니다. 미워하는 사람의 마음은 굴뚝과 같습니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가면 옆집도 까맣게 되지만 그 전에 자신의 마음의 연통이 까맣게 됩니다. 그처럼 무슨 억울한 사연이 있든지 상관없이 이웃을 미워하면 내가 먼저 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겸손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인간관계의 승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쓸데없는 말도 하지도 말아야 하고, 이것에 휩쓸리지도 말아야 합니다.(24-29절)
요압은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을 추격합니다. 그런데 아브넬은 요압에게 쫓아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나 무리에게 그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하겠느냐" (26절) 이에 요압이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사시거니와 네가 흔단의 말을 내지 아니하였더라면 무리가 아침에 다 돌아갈 것이요. 그 형제를 좇지 아니하였으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흔단의 말”이란 말은 “틈 흔, 끝 단”이란 한문을 사용하는데, 그 정확한 뜻은 '틈이 생기는 실마리' 또 '분열이 생기는 게기' 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괜히 소년을 뽑아 싸우게 분열만 조장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넬의 쓸데없는 말이 결국 부하 24명을 죽였고, 요압의 동생 아사헬은 죽고 서로 간에 명목 없는 싸움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감정싸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압은 아브넬에게 이런 말을 정신을 바짝 차립니다. 아무리 동생이 죽었지만 쫓아가서 원수 갚으면 무엇 하겠는가 생각합니다. 자기가 섬기는 다윗은 처신을 그렇게 않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요압은 나팔을 불고 아브넬을 추격하는 정지시키고, 다시는 추격하지도,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압의 생각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싸움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아브넬의 흔단의 말로 인해서 이런 결과가 맞이했지만 결국 이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요압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생각도 해 보지 않고 감정 때문에 좌편으로나, 우편으로나 치우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21절) 

우리가 여기에서 한번 생각해 볼 수가 있는데, 우리는 아브넬과 같이 “흔단의 말”을 말할 수 있으니 매사에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무심코 한 말이 무심코 한 행동이 상대에게 큰 상처를 줄 수가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간단한 문제 때문에 감정이 격해져서 결국 비극적인 결과는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생각 없이 한 말이나 행동이 흔단의 요인이 되어 가지고서 큰일을 저지르는 것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을 주의하고 행동을 주의하고 그리고 그 쓸데없는 가치 없는 장난 때문에 죽이고 쫓기고 또 죽이고 하는 일 더 이상 소모적인 행동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요압처럼 아니다 싶을 때 바로 돌아서기 바랍니다. 아무 것도 아닌데서 출발해서 나중에는 큰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질은 어떠합니까? 어떤 사람은 한번 성낸 것을 식히기가 싫어서, 한 번 열 받았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려고 기질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습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요압처럼 나팔을 불어서 쫓아가던 걸음을 멈추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은 사회생활을 할 때는 물론이고 교회 안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흔단의 말이 될 수 있다면, 서로 틈이 크게 갈라질 수 있는 그런 요인이 될 수 있는 말이라면 참말이라도 조심해서 합니다. 특히 장난하는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그런 말들로 인해서 감정이 상할 수 있고, 결국 그 일로 인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 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사사로운 말로 인하여 마음 중심을 갖지 못하고 흔들려 돌이키지 못하는 비극적인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4. 우리의 번영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본문 30-32절의 말씀은 다윗 왕가의 번영과 사울 왕가의 쇠퇴에 대한 말씀입니다. 기브온의 전쟁의 결과는 다윗 왕가의 승리로 결말이 났습니다. 사상자(死傷者)의 숫자가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압의 군사는 아사헬을 포함하여 도합 20명이 죽었으나 아브넬의 군사는 모두 360명이나 죽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력이나 용맹성은 양측 모두 막상막하(莫上莫下)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윗 왕가는 베냐민 지파 한 지파의 왕이었고, 이스보셋의 다른 여러 지파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왜 다윗 왕가가 승리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다윗 왕가 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하 3:1에서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삼하 5:10에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는 싸움에서는 언제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번영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억할 것은 사울 왕가가 쇠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예견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할 때에 사울 왕가를 쇠퇴를 이미 예언하셨습니다.(삼상 1314,1528) 
그렇습니다. 얼핏 보기에 기브온 전쟁의 결과는 요압과 아브넬의 의해 좌우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사울 왕가를 물리치고 다윗 왕가를 세우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번영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중에 영육간에 승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기도) 우리 주위에는 자신의 능력만을 믿고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의를 위해서 드러내는 어리석은 용기와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며 살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