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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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사 43:18-21) 인용
역사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주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다사다난(多事多難) 했던 2006년을 마감하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면서 송구영배를 드리시는 여러분과 가정 그리고 여러분의 사업장과 하시는 모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금년 한해가 별로 만족스럽지 아니했기에 2007년을 맞이하는 것도 그렇게 기대가 되지 않는 분도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혜에 자족하는 마음으로 2006년을 마무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아름다운 마무리입니다. 우리에게 2006년이라는 시간을 허락하심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요 복인 것처럼 우리에게 2007년을 새롭게 허락해 주신 것도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총임을 기억하면서 새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았다면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실망하지 않았다면 실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끝내시지 않으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내일은 계속됩니다. 희망과 미래는 이어질 것입니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어도 밝은 아침이 찾아 올 것입니다. 치욕스런 과거 뒤에 희망에 찬 미래가 있습니다. 약속은 가려질 수 있지만 그 생명력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새해를 기대하면서 맞이해야 합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왜 새해를 기대하면서 맞이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본문 19절 상반 절에서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고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기대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갖고 2007년을 맞이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새해라고 뭐 별스런 날인가 말하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먹고 자고, 먹고 자는 사람에게는 새해라는 것이 별다른 해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사람들에게는 2007년 새해에는 2006년과 전혀 다른 의미 있는 새해요, 희망찬 새해요, 값있는 새해요, 복의 새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해의 시작부터 비상한 각오와 결심을 갖고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2006년을 보내는 우리들의 현실들을 보면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도 왠지 마음이 편치 않는 성도님이 계실 것입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답답한 성도님도 계실 것입니다. 새해를 앞두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아직도 방황하며 불안한 상태에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의 실존입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마치 부러진 상한 갈대와 같은 모습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은 희미한 듯한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신다고 말씀하시고 계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사도 요한이 계시록 21:5에서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하시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사 42:3에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라고 약속(約束)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본문 1-2절에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고 위로와 격려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와 같이 참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내가 새 일을 행한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우리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되, 소망 가운데 새 일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2007년 새해를 희망차게 시작해야 합니다.
▶ 본문의 말씀은 유다 백성들이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유다의 마지막 시드기야와 함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 고생을 하고 있을 때에 그들이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古國)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예언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온갖 고난으로 인하여 전혀 구원받을 소망을 잃고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물론 지금 유다 백성들의 고통과 어려움은 정말 말로 형언(形言)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시편 42:10에서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방인들은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칼로 찌르는 말로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말하면서 비방하고 조롱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왜! 이렇게 포로 생활을 하느냐”라고 하면서 멸시하기에 낙망과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 있는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다시금 소망의 메시지를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비록 포로 생활에 있지만 바벨론에서 해방시키시고 새 일을 행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과거에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18절)
본문 18절에서“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지 말라”고 하고 있는 것처럼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는 과거에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이전 일을 잊어버리라. 과거에 머물러 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려면 과거에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한해의 말미에 선 대다수의 사람은 "보다 나은 한 해로 가꿀 수 있었는데..."라는 아쉬움과 함께 애잔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회한(悔恨)과 아쉬움에만 머문다면 한 해를 의미 있게 보낼 수 없습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려고 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주님 앞에서 부끄러워서 얼굴을 감히 둘 수 없는 분도 계십니다. 사실 한 해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에 "나는 만족하다"라고 말하며 마침표를 찍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이제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에 있는 과거의 장벽을 부셔버려야 합니다. 물론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과 결단의 시간으로 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과거를 기억하면서 그때가 좋았다고 하며 그 때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 지난 과거에 집착케 만드는 마음에 있는 장벽을 부셔버리지 아니하면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패한 사람은 현실에서도 여지없이 패합니다.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꿈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은 헛된 꿈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기에 장벽은 우리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 10:4에서 이 장벽을 “견고한 진”이라고 말했습니다다. 우리가 패배(敗北)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그릇된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과 믿음, 승리 같은 긍정적인 것들을 마음에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 속에서 과거의 장벽을 뚫고 믿음이라는 새로운 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장벽을 부서는 순간 우리의 삶이 변하고 나아가 우리 자손의 삶이 밝아집니다.
그러나 과거의 장벽을 깨지 못한 결과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신세로 전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애굽을 떠났던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수백년 동안 노예로 살던 애굽에서 풀려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났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까지 11일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4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왜 이스라엘 백성은 한 번 두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똑같은 산 주위를 맴돌면서 광야를 헤멜 수밖에 없었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엄청난 풍요와 완벽한 자유가 있는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너무 오랫동안 압제자의 그늘에 있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평생 이용만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살아온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려고 하는 새로운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으로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연약하고 소극적인 마음가짐에 머물렀습니다.
항상 문제만 바라보고 불평하며, 자신들과 목표 사이에 있는 장애물에 걸려서 안절부절못했습니다. 마침내 노예근성에서 빠져나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신1:6 하반 절에서“너희가 이 산에 거한지 오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현재에 머문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이제는 과거의 상처나 고통, 실패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떠날 때입니다. 더 큰 복을 믿고 나아갈 때입니다. 눈앞에 성장과 초자연적인 복이 우리에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과거의 굴레에서 맴돌며 매년 똑같은 일만 되풀이 한다면 그런 놀라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얻기 위해서는 과거의 장벽을 부셔야 합니다.
그런데 옛날 이스라엘 백성도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 하여 광야에 나왔을 때, 먹을 양식도 모자라고 마실 물도 없을 때 그들은 옛날을 그리워하며 옛날로 돌아가자고 말하였습니다.(민 14:2-3, 출 17:3)
물론 옛날이 현재보다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과거에 매여서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역사는 우리가 뒤로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구(舊) 소련 연방이 망하고 나서 독립된 나라들이 좀 살기 어렵다고 하여 옛날 공산 체제를 그리워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오히려 유신 정권 때가 좋았다고 하면서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어린 시절, 꿈 많고 걱정 없었던 그 때가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옛날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합니다. 과거 속에 안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3-14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에 안주하지 말고 미래로 전진하며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세계관은 과거 지향적인 삶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삶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푯대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도서 7:10에서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묻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수십 년간 포로 생활을 하면서 이제는 그 생활에 젖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시겠다고 하셔도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아시고 그들을 향하여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잊어버려야 할 것들을 잊지 않고 컴퓨터의 메모리에 저장하듯 우리의 기억 속에 다 저장해 두면 큰 손해를 봅니다. 과거에 집착하면 현재는 물론 장래마저도 파멸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과거의 일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잊어야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첫째로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지난 날 좋았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지난 날 우리에게 있었던 과거의 영광에 빠져서 전진할 수 없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물론 과거에 잘 살던 일, 과거에 은혜 받았던 일들은 지금의 나를 존재케 하게 만들었던 일들이기에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붙들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한다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엄천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지난 과거의 그의 모습은 정말 자랑할만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나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니이다"(눅 17:10) 바울은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고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지나온 과거의 실수와 실패를 잊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실패를 잊어버리고 다시 일어섬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연약하기에 매사에 성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누구나 실수와 실패의 쓴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내용과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실수를 모르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지나간 신앙생활도 돌이켜 보면 영적으로 이루어 놓은 것보다 우리의 잘못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일이 참으로 많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에 있었던 실패를 늘 마음속에 새기고 있음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위대한 사람들을 보면 다 과거에 실수와 실패가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 실수와 실패가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 역시도 실수와 실패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실수를 범했을 때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심히 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 실패로 인해 좌절하지 않고 그런 실패를 디딤돌로 삼아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전도자가 되어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격언처럼 “쏟아진 우유에 대하여 슬퍼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지나간 실패나 실수에 대하여 아무리 괴로워해도 다시없었던 것처럼 고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나 가족들이나 그 누구의 실수나 실패에 대하여 즉시 잊어버리는 사람은 현재 축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연필에는 지우개가 달려 있습니다. 마귀는 자꾸 지난날을 기록하여 기억하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바로 서면 과거의 것을 지워 버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이나 미움을 잊어야 합니다.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과 미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면 주님의 사랑으로 원한과 미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원한과 미움을 이기는 방법으로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한군데, 한 말씀도 “다른 사람을 미워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계속해서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미워하는 사람을 그대로 두고 있고, 그로 인해 교회 생활에 기쁨과 감사를 빼앗기고 삽니다. 교회 생활을 어떻게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까? 대부분의 분노는 오해와 잘못된 인식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제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을 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롭고 복되게 사는 길입니다.
(예화)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연설 가운데서 “원수는 우리 마음에서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어느 늙은 여인이 항상 원수에 대하여 좋은 말만 하는 링컨 대통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항의를 했습니다. “원수는 없애야 하지 않습니까?” 링컨은 웃으면서 “옳습니다. 없애야 하구 말고요. 저도 바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원수를 친구로 만들어 바로 원수를 없애 버립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대인관계(對人關係)에서 화나는 일, 친척이나 친구 또는 이웃 간에 말다툼을 한 일, 부모와 자식간에 원망스러운 일, 부부간에 갈등, 직장 상사에 대한 불만 등 원한이나 미움을 우리의 생각 속에서 잊어버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도 간에 미워하는 일들을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무서운 심리적 암인 ‘미움’을 잘 알고 계시기에 무한정으로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속의 원한이나 미움은 상대방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죽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남에 대한 원한이나 불만 또는 미운 생각을 가급적 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신앙은 지금보다 훨씬 더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되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우리 자신의 약점과 불리한 조건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완벽해 보여도 그 자신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핸디캡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세상에 태어날 때 약점 즉 핸디캡을 갖고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살다 보면 자신에게 더 많은 핸디캡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핸디캡을 잊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불리한 조건들에 얽매여 고민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공헌을 한 사람들은 거의가 다 자기들이 타고난 악조건을 멋지게 이용하여 그 핸디캡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에홋은 왼손잡이였습니다. 그는 오른 손에 장애가 있는 비정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드보라는 여자사사였습니다. 지금은 여자라는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그런 사회에서 사사의 일을 한다는 것은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드보라를 사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불리한 약점이나 조건에 매이지 말고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화) 인도 선교사로 유명한 윌리엄 캐리도 본래 구두 수선공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당신은 옛날에 구두 만드는 사람에 불과했다"고 평가절하(平價切下)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길 "아닙니다. 저는 구두를 만들지 못하고 겨우 수선하던 사람이었습니다."라고 겸손히 말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서 과거를 극복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많은 핸디캡이 있었습니다. 키도 작고, 얼굴도 못 생기고, 불치의 지병으로 평생을 고생하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핸디캡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핸디캡을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극복하고 주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자기 몸에 있는 가시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할 수 있는 은혜를 발견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악조건들을 유리하게 바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건강도 없고, 명예도 없고, 재물도 없을지라도 ‘내게 능력 주시는 주님 한 분’을 모시는 성도라면 사도 바울처럼 어려운 악조건을 딛고 건강한 자, 돈 많은 재벌, 최상의 권력을 가진 어느 정치가도 갖지 못한 위로와 찬양과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잊어야 할 것들을 반드시 잊어버려야 합니다. 지난날의 실수나 실패의 쓴잔, 원한이나 미움, 자신의 불리한 약점이나 조건을 잊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힘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언제나 예수를 의지함으로 늘 승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2. 나를 위해 좋은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본문 19-20절에서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위해 좋은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여기의 “새 일”이란 파사 왕 고레스에 의하여 바벨론 포로에서 팔레스타인 고향 땅으로 귀환하게 됨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생활에서 해방되는 날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이방 사람들을 들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징계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북조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살만에셀 3세에 의하여 망하였고, 남조 유다는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 의하여 몰락하였는데, 앗수르나 바벨론은 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기 위하여 쓰시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하시기 위해서 고레스를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이방의 왕이었지만 고레스는 성전재건과 예루살렘 성 재건을 허락하고 격려하였으며(대하 36:22, 23), 솔로몬 성전에서 탈취해온 금, 은, 기명과 5만명 가량의 유대인을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지휘아래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토록 조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새 일은 궁극적으로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질 일에 대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장차 전 인류의 메시아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민의 구원과 장차 완성될 구원에 대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 그렇습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셔서 우리의 영적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신다고 약속하시고 있습니다.
(예화) 얼마 전 대형매장 카르푸를 인수한 회사가 있는데, 이랜드입니다. 이랜드의 박성수의 회장은 서울 사랑의 교회 장로님이신데, 그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기업가였습니다. 박성수 회장은 1980년대 의류프랜차이즈로 시작하여 성장하여 지금은 전국에 매장 4000개가 있다는 대기업의 회장입니다.
물론 그에게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때에 이랜드 사목께서 설교를 했는데,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신다.”라는 본문의 말씀을 듣고 큰 도전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주거래 은행에서 박성수 회장에게 연락이 왔는데, 은행에서 부도를 내려고 하니 피하려고 연락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성수 회장은 피하지 않고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을 강을 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자리를 지켰다고 합니다. 바로 그때에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주에 외국인 투자자가 5억 달러를 가지고 와서 부도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외국인들이 한국 기업들이 싸다는 것 알고 있었지만 투자도 주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기업들이 장부가 2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랜드는 장부가 1개로 정직한 기업이기 때문에 외국인이 투자를 한 것입니다. 카르푸를 인수할 때도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카르푸를 인수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맡기신다는 증거를 보여 주시면 저희가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증거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경쟁사가 1조 9300억원을 썼고, 이랜드는 1조 7000억원을 썼다고 합니다. 경쟁사보다도 2000억을 적게 썼습니다. 그런데 이랜드가 낙차를 받았습니다. 2001아웃렛 분당은 주일에 쉬는데, 주일 매출이 30%정도로 예상하는데 매출 2000억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을 쉰다고 합니다. 이랜드는 순이익 10%를 사회사업 선교 사업에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박성수 회장이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싶은 있다면 믿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다녔던 자신의 삶을 물려주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광야에서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시 34:10에서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시 84:11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십니다. 나를 위해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나를 좋게 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유대인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하시는 선지자로 예레미야가 있습니다. 그는 바벨론 포로에서 70년이 지나면 돌아온다고 하시면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통하여 하실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새 시대를 위한 새 일을 구상하시고 실천하시고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험한 광야를 지나야 하는데,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새 일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결코 마라의 고통에서서 머물지 않고 엘림의 오와스시의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이 마라라고 해서 언제나 우리 인생이 마라로만 끝나지 않고 엘림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기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전혀 불가능한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 일을 준비하시고 행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믿고 전진해야 합니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하여 보인다고 해도,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눅 1:37에서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눅 18:27에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18:14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 3:13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부름을 상을 위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알파와 오매가 되시는 주님께서 제시해 놓으신 영원한 목표를 향하여 전진해야 합니다. 히브리 기자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히 12:2)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전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예비하신 구원의 길을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특별히 심판과 상급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의 모든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고,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위해 좋은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3.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21절)
본문 21절에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나를 위해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찬양을 받으시기를 기대하시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피조물보다 가장 기뻐하시는 걸작품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창 1:31)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43:7에서도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고전 10: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는 나를 위해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해를 주신 것은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그 일을 잘 감당하려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그것은 본문 15절에서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창조자요, 우리의 삶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18-19절에서 "바다 가운데 길을, 큰 물 가운데 첩경을 내고, 병거와 말과 군대를 이끌어 내어서, 그들로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 가는 등불과 같게 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길에 동행하신 하나님의 자애로운 손길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해를 살아오는 동안 어려움 가운데서 해결의 길을 보여 주시고, 고통의 짐을 지고 바다를 건널 때에는 우리의 다리를 든든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한 여러가지 어려움들도 능히 해치며 나갈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실패한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때에도, 우리가 기쁨에 겨워 환호성을 지르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셨다는 사실을 뜨거운 가슴으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울부짖던 고통의 순간에는 그 고통을 이기고 일어서기를 기다리시는 모습으로, 행복에 겨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순간에는 그 기쁨의 온전한 연장을 조성하시는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셨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감사하며 새해를 시작하시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들은 하나님께 청구서를 제출하는 일에는 익숙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헤아려 감사하며 찬양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무엇 무엇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합니다."라는 청구서 작성에는 세밀하고 능숙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구체적인 내용들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영수증을 쓰는 일에는 미숙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은혜와 축복을 베푸시는 쪽이고, 나는 당연히 그 은혜와 축복의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우리에게 일반화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불행은 하나님을 은혜와 축복의 공급자로만 여긴 데서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도무지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총을 기억하고 간직하면서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유언과도 같은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축복을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또 가르치라고 말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표를 삼으며,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씀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일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까?
첫째로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감각과 환경과 이성을 따라 사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사느냐? 이것이 신앙인의 갈등이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기대에 맞는 삶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함과 같이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엘리야는 "바알이 하나님이면 바알을 섬기고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여호와를 섬기라 너희가 이 둘 사이에서 어느 때까지 머뭇거리겠느냐?"하고 선택을 촉구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 11:6).
둘째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는 삶입니다. 여기서 “좇아가다”라는 뜻은 사냥개가 먹이를 향하여 각박하게 추구하는 모습입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달리기 선수들이 금메달을 획득하기 위해서 엄청난 훈련을 받습니다. 세상의 면류관을 위하여도 이토록 노력한다면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애써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롬 12:11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하였고, 고전 15:58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열매 맺고 영광 돌리는 생활입니다. 전도의 열매(행 1:8), 성령과 사랑의 열매(갈 5:22), 기도 응답의 열매(요 15:7), 선한 봉사의 열매(눅 19:16, 엡 2:10, 마 25), 감사와 찬양의 열매(골 2:7, 히 13:15)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라"(21절)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찬송이 되겠다고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나가면 우리의 모든 사업, 물질, 시간, 건강도 중요한 목적을 위하여 집중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새해를 통하여 부르시고 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좋은 일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여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위하여 살고, 이것을 위하여 생을 마칠 수 있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각오로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결단하고 결심하면 새해를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새해에 여러분과 동행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새해에는 나를 위해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되 ① 과거에 머물지 말고 ② 좋은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을 붙잡고 살고 ③ 새 일을 행하시는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새해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지 못하면 그 삶은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 삶은 절망입니다. 비극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실 축복은 사막에 강을 내심과 같고 광야에 길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축복은 우리의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여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일을 나타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마시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송구영신(送舊迎新)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이 이 이상을 보게 되기를 소원하시고 계십니다. 새로운 환상을 보게 되기를 소원하시고 계십니다. 이 축복의 환상을 보게 되기를 소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며 살되 새로운 삶을 기대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말미암아 정말 새해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아름답고 놀라운 일들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생생하게 펼쳐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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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주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다사다난(多事多難) 했던 2006년을 마감하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면서 송구영배를 드리시는 여러분과 가정 그리고 여러분의 사업장과 하시는 모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금년 한해가 별로 만족스럽지 아니했기에 2007년을 맞이하는 것도 그렇게 기대가 되지 않는 분도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혜에 자족하는 마음으로 2006년을 마무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아름다운 마무리입니다. 우리에게 2006년이라는 시간을 허락하심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요 복인 것처럼 우리에게 2007년을 새롭게 허락해 주신 것도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총임을 기억하면서 새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았다면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실망하지 않았다면 실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끝내시지 않으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내일은 계속됩니다. 희망과 미래는 이어질 것입니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어도 밝은 아침이 찾아 올 것입니다. 치욕스런 과거 뒤에 희망에 찬 미래가 있습니다. 약속은 가려질 수 있지만 그 생명력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새해를 기대하면서 맞이해야 합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왜 새해를 기대하면서 맞이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본문 19절 상반 절에서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고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기대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갖고 2007년을 맞이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새해라고 뭐 별스런 날인가 말하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먹고 자고, 먹고 자는 사람에게는 새해라는 것이 별다른 해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사람들에게는 2007년 새해에는 2006년과 전혀 다른 의미 있는 새해요, 희망찬 새해요, 값있는 새해요, 복의 새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해의 시작부터 비상한 각오와 결심을 갖고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2006년을 보내는 우리들의 현실들을 보면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도 왠지 마음이 편치 않는 성도님이 계실 것입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답답한 성도님도 계실 것입니다. 새해를 앞두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아직도 방황하며 불안한 상태에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의 실존입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마치 부러진 상한 갈대와 같은 모습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은 희미한 듯한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신다고 말씀하시고 계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사도 요한이 계시록 21:5에서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하시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사 42:3에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라고 약속(約束)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본문 1-2절에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고 위로와 격려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와 같이 참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내가 새 일을 행한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우리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되, 소망 가운데 새 일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2007년 새해를 희망차게 시작해야 합니다.
▶ 본문의 말씀은 유다 백성들이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유다의 마지막 시드기야와 함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 고생을 하고 있을 때에 그들이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古國)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예언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온갖 고난으로 인하여 전혀 구원받을 소망을 잃고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물론 지금 유다 백성들의 고통과 어려움은 정말 말로 형언(形言)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시편 42:10에서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방인들은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칼로 찌르는 말로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말하면서 비방하고 조롱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왜! 이렇게 포로 생활을 하느냐”라고 하면서 멸시하기에 낙망과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 있는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다시금 소망의 메시지를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비록 포로 생활에 있지만 바벨론에서 해방시키시고 새 일을 행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과거에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18절)
본문 18절에서“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지 말라”고 하고 있는 것처럼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는 과거에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이전 일을 잊어버리라. 과거에 머물러 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려면 과거에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한해의 말미에 선 대다수의 사람은 "보다 나은 한 해로 가꿀 수 있었는데..."라는 아쉬움과 함께 애잔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회한(悔恨)과 아쉬움에만 머문다면 한 해를 의미 있게 보낼 수 없습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려고 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주님 앞에서 부끄러워서 얼굴을 감히 둘 수 없는 분도 계십니다. 사실 한 해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에 "나는 만족하다"라고 말하며 마침표를 찍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이제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에 있는 과거의 장벽을 부셔버려야 합니다. 물론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과 결단의 시간으로 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과거를 기억하면서 그때가 좋았다고 하며 그 때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 지난 과거에 집착케 만드는 마음에 있는 장벽을 부셔버리지 아니하면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패한 사람은 현실에서도 여지없이 패합니다.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꿈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은 헛된 꿈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기에 장벽은 우리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 10:4에서 이 장벽을 “견고한 진”이라고 말했습니다다. 우리가 패배(敗北)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그릇된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과 믿음, 승리 같은 긍정적인 것들을 마음에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 속에서 과거의 장벽을 뚫고 믿음이라는 새로운 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장벽을 부서는 순간 우리의 삶이 변하고 나아가 우리 자손의 삶이 밝아집니다.
그러나 과거의 장벽을 깨지 못한 결과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신세로 전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애굽을 떠났던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수백년 동안 노예로 살던 애굽에서 풀려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났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까지 11일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4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왜 이스라엘 백성은 한 번 두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똑같은 산 주위를 맴돌면서 광야를 헤멜 수밖에 없었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엄청난 풍요와 완벽한 자유가 있는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너무 오랫동안 압제자의 그늘에 있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평생 이용만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살아온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려고 하는 새로운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으로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연약하고 소극적인 마음가짐에 머물렀습니다.
항상 문제만 바라보고 불평하며, 자신들과 목표 사이에 있는 장애물에 걸려서 안절부절못했습니다. 마침내 노예근성에서 빠져나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신1:6 하반 절에서“너희가 이 산에 거한지 오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현재에 머문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이제는 과거의 상처나 고통, 실패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떠날 때입니다. 더 큰 복을 믿고 나아갈 때입니다. 눈앞에 성장과 초자연적인 복이 우리에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과거의 굴레에서 맴돌며 매년 똑같은 일만 되풀이 한다면 그런 놀라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얻기 위해서는 과거의 장벽을 부셔야 합니다.
그런데 옛날 이스라엘 백성도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 하여 광야에 나왔을 때, 먹을 양식도 모자라고 마실 물도 없을 때 그들은 옛날을 그리워하며 옛날로 돌아가자고 말하였습니다.(민 14:2-3, 출 17:3)
물론 옛날이 현재보다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과거에 매여서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역사는 우리가 뒤로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구(舊) 소련 연방이 망하고 나서 독립된 나라들이 좀 살기 어렵다고 하여 옛날 공산 체제를 그리워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오히려 유신 정권 때가 좋았다고 하면서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어린 시절, 꿈 많고 걱정 없었던 그 때가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옛날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합니다. 과거 속에 안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3-14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에 안주하지 말고 미래로 전진하며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세계관은 과거 지향적인 삶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삶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푯대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도서 7:10에서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묻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수십 년간 포로 생활을 하면서 이제는 그 생활에 젖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시겠다고 하셔도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아시고 그들을 향하여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잊어버려야 할 것들을 잊지 않고 컴퓨터의 메모리에 저장하듯 우리의 기억 속에 다 저장해 두면 큰 손해를 봅니다. 과거에 집착하면 현재는 물론 장래마저도 파멸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과거의 일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잊어야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첫째로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지난 날 좋았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지난 날 우리에게 있었던 과거의 영광에 빠져서 전진할 수 없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물론 과거에 잘 살던 일, 과거에 은혜 받았던 일들은 지금의 나를 존재케 하게 만들었던 일들이기에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붙들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한다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엄천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지난 과거의 그의 모습은 정말 자랑할만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나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니이다"(눅 17:10) 바울은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고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지나온 과거의 실수와 실패를 잊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실패를 잊어버리고 다시 일어섬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연약하기에 매사에 성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누구나 실수와 실패의 쓴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내용과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실수를 모르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지나간 신앙생활도 돌이켜 보면 영적으로 이루어 놓은 것보다 우리의 잘못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일이 참으로 많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에 있었던 실패를 늘 마음속에 새기고 있음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위대한 사람들을 보면 다 과거에 실수와 실패가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 실수와 실패가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 역시도 실수와 실패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실수를 범했을 때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심히 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 실패로 인해 좌절하지 않고 그런 실패를 디딤돌로 삼아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전도자가 되어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격언처럼 “쏟아진 우유에 대하여 슬퍼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지나간 실패나 실수에 대하여 아무리 괴로워해도 다시없었던 것처럼 고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나 가족들이나 그 누구의 실수나 실패에 대하여 즉시 잊어버리는 사람은 현재 축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연필에는 지우개가 달려 있습니다. 마귀는 자꾸 지난날을 기록하여 기억하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바로 서면 과거의 것을 지워 버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이나 미움을 잊어야 합니다.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과 미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면 주님의 사랑으로 원한과 미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원한과 미움을 이기는 방법으로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한군데, 한 말씀도 “다른 사람을 미워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계속해서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미워하는 사람을 그대로 두고 있고, 그로 인해 교회 생활에 기쁨과 감사를 빼앗기고 삽니다. 교회 생활을 어떻게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까? 대부분의 분노는 오해와 잘못된 인식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제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을 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롭고 복되게 사는 길입니다.
(예화)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연설 가운데서 “원수는 우리 마음에서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어느 늙은 여인이 항상 원수에 대하여 좋은 말만 하는 링컨 대통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항의를 했습니다. “원수는 없애야 하지 않습니까?” 링컨은 웃으면서 “옳습니다. 없애야 하구 말고요. 저도 바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원수를 친구로 만들어 바로 원수를 없애 버립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대인관계(對人關係)에서 화나는 일, 친척이나 친구 또는 이웃 간에 말다툼을 한 일, 부모와 자식간에 원망스러운 일, 부부간에 갈등, 직장 상사에 대한 불만 등 원한이나 미움을 우리의 생각 속에서 잊어버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도 간에 미워하는 일들을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무서운 심리적 암인 ‘미움’을 잘 알고 계시기에 무한정으로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속의 원한이나 미움은 상대방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죽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남에 대한 원한이나 불만 또는 미운 생각을 가급적 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신앙은 지금보다 훨씬 더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되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우리 자신의 약점과 불리한 조건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완벽해 보여도 그 자신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핸디캡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세상에 태어날 때 약점 즉 핸디캡을 갖고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살다 보면 자신에게 더 많은 핸디캡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핸디캡을 잊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불리한 조건들에 얽매여 고민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공헌을 한 사람들은 거의가 다 자기들이 타고난 악조건을 멋지게 이용하여 그 핸디캡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에홋은 왼손잡이였습니다. 그는 오른 손에 장애가 있는 비정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드보라는 여자사사였습니다. 지금은 여자라는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그런 사회에서 사사의 일을 한다는 것은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드보라를 사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불리한 약점이나 조건에 매이지 말고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화) 인도 선교사로 유명한 윌리엄 캐리도 본래 구두 수선공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당신은 옛날에 구두 만드는 사람에 불과했다"고 평가절하(平價切下)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길 "아닙니다. 저는 구두를 만들지 못하고 겨우 수선하던 사람이었습니다."라고 겸손히 말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서 과거를 극복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많은 핸디캡이 있었습니다. 키도 작고, 얼굴도 못 생기고, 불치의 지병으로 평생을 고생하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핸디캡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핸디캡을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극복하고 주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자기 몸에 있는 가시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할 수 있는 은혜를 발견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악조건들을 유리하게 바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건강도 없고, 명예도 없고, 재물도 없을지라도 ‘내게 능력 주시는 주님 한 분’을 모시는 성도라면 사도 바울처럼 어려운 악조건을 딛고 건강한 자, 돈 많은 재벌, 최상의 권력을 가진 어느 정치가도 갖지 못한 위로와 찬양과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잊어야 할 것들을 반드시 잊어버려야 합니다. 지난날의 실수나 실패의 쓴잔, 원한이나 미움, 자신의 불리한 약점이나 조건을 잊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힘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언제나 예수를 의지함으로 늘 승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2. 나를 위해 좋은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본문 19-20절에서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위해 좋은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여기의 “새 일”이란 파사 왕 고레스에 의하여 바벨론 포로에서 팔레스타인 고향 땅으로 귀환하게 됨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생활에서 해방되는 날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이방 사람들을 들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징계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북조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살만에셀 3세에 의하여 망하였고, 남조 유다는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 의하여 몰락하였는데, 앗수르나 바벨론은 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기 위하여 쓰시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하시기 위해서 고레스를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이방의 왕이었지만 고레스는 성전재건과 예루살렘 성 재건을 허락하고 격려하였으며(대하 36:22, 23), 솔로몬 성전에서 탈취해온 금, 은, 기명과 5만명 가량의 유대인을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지휘아래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토록 조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새 일은 궁극적으로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질 일에 대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장차 전 인류의 메시아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민의 구원과 장차 완성될 구원에 대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 그렇습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셔서 우리의 영적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신다고 약속하시고 있습니다.
(예화) 얼마 전 대형매장 카르푸를 인수한 회사가 있는데, 이랜드입니다. 이랜드의 박성수의 회장은 서울 사랑의 교회 장로님이신데, 그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기업가였습니다. 박성수 회장은 1980년대 의류프랜차이즈로 시작하여 성장하여 지금은 전국에 매장 4000개가 있다는 대기업의 회장입니다.
물론 그에게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때에 이랜드 사목께서 설교를 했는데,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신다.”라는 본문의 말씀을 듣고 큰 도전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주거래 은행에서 박성수 회장에게 연락이 왔는데, 은행에서 부도를 내려고 하니 피하려고 연락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성수 회장은 피하지 않고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을 강을 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자리를 지켰다고 합니다. 바로 그때에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주에 외국인 투자자가 5억 달러를 가지고 와서 부도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외국인들이 한국 기업들이 싸다는 것 알고 있었지만 투자도 주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기업들이 장부가 2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랜드는 장부가 1개로 정직한 기업이기 때문에 외국인이 투자를 한 것입니다. 카르푸를 인수할 때도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카르푸를 인수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맡기신다는 증거를 보여 주시면 저희가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증거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경쟁사가 1조 9300억원을 썼고, 이랜드는 1조 7000억원을 썼다고 합니다. 경쟁사보다도 2000억을 적게 썼습니다. 그런데 이랜드가 낙차를 받았습니다. 2001아웃렛 분당은 주일에 쉬는데, 주일 매출이 30%정도로 예상하는데 매출 2000억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을 쉰다고 합니다. 이랜드는 순이익 10%를 사회사업 선교 사업에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박성수 회장이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싶은 있다면 믿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다녔던 자신의 삶을 물려주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광야에서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시 34:10에서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시 84:11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십니다. 나를 위해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나를 좋게 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유대인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하시는 선지자로 예레미야가 있습니다. 그는 바벨론 포로에서 70년이 지나면 돌아온다고 하시면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통하여 하실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새 시대를 위한 새 일을 구상하시고 실천하시고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험한 광야를 지나야 하는데,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새 일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결코 마라의 고통에서서 머물지 않고 엘림의 오와스시의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이 마라라고 해서 언제나 우리 인생이 마라로만 끝나지 않고 엘림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기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전혀 불가능한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 일을 준비하시고 행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믿고 전진해야 합니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하여 보인다고 해도,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눅 1:37에서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눅 18:27에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18:14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 3:13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부름을 상을 위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알파와 오매가 되시는 주님께서 제시해 놓으신 영원한 목표를 향하여 전진해야 합니다. 히브리 기자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히 12:2)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전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예비하신 구원의 길을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특별히 심판과 상급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의 모든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고,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위해 좋은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3.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21절)
본문 21절에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나를 위해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찬양을 받으시기를 기대하시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피조물보다 가장 기뻐하시는 걸작품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창 1:31)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43:7에서도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고전 10: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는 나를 위해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해를 주신 것은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그 일을 잘 감당하려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그것은 본문 15절에서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창조자요, 우리의 삶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18-19절에서 "바다 가운데 길을, 큰 물 가운데 첩경을 내고, 병거와 말과 군대를 이끌어 내어서, 그들로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 가는 등불과 같게 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길에 동행하신 하나님의 자애로운 손길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해를 살아오는 동안 어려움 가운데서 해결의 길을 보여 주시고, 고통의 짐을 지고 바다를 건널 때에는 우리의 다리를 든든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한 여러가지 어려움들도 능히 해치며 나갈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실패한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때에도, 우리가 기쁨에 겨워 환호성을 지르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셨다는 사실을 뜨거운 가슴으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울부짖던 고통의 순간에는 그 고통을 이기고 일어서기를 기다리시는 모습으로, 행복에 겨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순간에는 그 기쁨의 온전한 연장을 조성하시는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셨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감사하며 새해를 시작하시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들은 하나님께 청구서를 제출하는 일에는 익숙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헤아려 감사하며 찬양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무엇 무엇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합니다."라는 청구서 작성에는 세밀하고 능숙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구체적인 내용들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영수증을 쓰는 일에는 미숙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은혜와 축복을 베푸시는 쪽이고, 나는 당연히 그 은혜와 축복의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우리에게 일반화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불행은 하나님을 은혜와 축복의 공급자로만 여긴 데서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도무지 하나님의 돌보시는 은총을 기억하고 간직하면서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유언과도 같은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축복을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또 가르치라고 말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표를 삼으며,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씀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일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까?
첫째로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감각과 환경과 이성을 따라 사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사느냐? 이것이 신앙인의 갈등이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기대에 맞는 삶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함과 같이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엘리야는 "바알이 하나님이면 바알을 섬기고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여호와를 섬기라 너희가 이 둘 사이에서 어느 때까지 머뭇거리겠느냐?"하고 선택을 촉구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 11:6).
둘째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는 삶입니다. 여기서 “좇아가다”라는 뜻은 사냥개가 먹이를 향하여 각박하게 추구하는 모습입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달리기 선수들이 금메달을 획득하기 위해서 엄청난 훈련을 받습니다. 세상의 면류관을 위하여도 이토록 노력한다면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애써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롬 12:11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하였고, 고전 15:58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열매 맺고 영광 돌리는 생활입니다. 전도의 열매(행 1:8), 성령과 사랑의 열매(갈 5:22), 기도 응답의 열매(요 15:7), 선한 봉사의 열매(눅 19:16, 엡 2:10, 마 25), 감사와 찬양의 열매(골 2:7, 히 13:15)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라"(21절)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찬송이 되겠다고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나가면 우리의 모든 사업, 물질, 시간, 건강도 중요한 목적을 위하여 집중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새해를 통하여 부르시고 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좋은 일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여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위하여 살고, 이것을 위하여 생을 마칠 수 있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각오로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결단하고 결심하면 새해를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새해에 여러분과 동행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새해에는 나를 위해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되 ① 과거에 머물지 말고 ② 좋은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을 붙잡고 살고 ③ 새 일을 행하시는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새해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지 못하면 그 삶은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 삶은 절망입니다. 비극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실 축복은 사막에 강을 내심과 같고 광야에 길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축복은 우리의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여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일을 나타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마시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송구영신(送舊迎新)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이 이 이상을 보게 되기를 소원하시고 계십니다. 새로운 환상을 보게 되기를 소원하시고 계십니다. 이 축복의 환상을 보게 되기를 소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며 살되 새로운 삶을 기대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말미암아 정말 새해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아름답고 놀라운 일들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생생하게 펼쳐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