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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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616
예배를 보는 자와 드리는 자
글/채희동 목사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관행을 지적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의 대문에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재판정에서 루터는 말합니다. “하나님,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선택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자의 신앙이며 정신입니다.
그 후 개혁의 횃불을 들고 담대하게 나아가며 만든 찬송이 384장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 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루터는 1483년 광부인 믿음의 아버지로부터 신앙교육을 성실히 받으며 자랐습니다. 대학시절 소나기를 피하다 나무 아래로 숨었는데 두 명의 절친한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고 자신만 살아남은 이후 루터는 큰 충격을 받고 22세에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24세에 신부가 되고 30세에 신학박사학위를 받아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루터에게 있어서 롬 1장 17절은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는 말씀입니다. 당시 수도사들은 빌라도의 계단이라 불리는 28개의 돌계단을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무릎으로 올라갔다가 무릎으로 내려와야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루터 역시 고통스럽게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도무지 평안이 없었습니다. 구원의 확신도 없었습니다.
무릎으로 올라가는 중 롬 1장 17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루터는 견딜 수 없는 감격으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기어 올라갔던 계단을 걸어서 내려왔습니다. 루터는 구원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다는 진리를 확신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분의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믿음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일부 성도들이 여전히 율법주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구원받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소위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어떤 노력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음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구원 얻는 조건에 우리의 노력이 1% 정도라도 들어간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부인하는 자가 있으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엡 2:8-9)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이룩하신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선행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구원을 받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개혁은 사람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가려지고 사람의 뜻이 드러날수록 교회는 부패해지는 것입니다. 교황의 권세가 가장 컸을 때가 교회의 가장 암흑기 였습니다.
케에르케고르는 관객과 배우의 비유로 예배를 보는 자와 드리는 자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관객은 연극을 보는 자요, 배우는 연극을 드리는 자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우리가 드리는 자라면 하나님은 보시며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관객이 아니라 배우입니다. 목사가 배우고 성도는 관객이 아닙니다. 목사도 예배자요 회중도 예배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예배자로서 설교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배우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입니까? 배우는 늦지 않습니다. 늦으면 연극이 되지 않습니다. 예배에 늦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15분전에는 오셔서 준비해야 합니다. 배우는 연극 중에 일찍 가는 법이 없습니다. 연극이 끝나야 갑니다. 예배 중에 먼저 나가시면 안 됩니다. 배우는 졸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객은 졸면서도 봅니다. 예배시간에 조는 분들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극도의 육체의 피곤함이나 목사의 졸린 톤의 설교가 졸음을 불러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습적으로 조는 것은 좋은 일이 결코 아닙니다.
세례요한이 소속되어 있었던 쿰란 공동체에서는 예배 시간에 조는 이에게 한 달 간 예배에 나오지 못하도록 규정을 두었다고 합니다. 배우는 관객의 시선을 바라보며 모든 에너지를 집중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시선은 목사를 응시하고 내 모든 에너지를 다해 예배에 전념해야 합니다. 핸드폰은 꺼놓으시고 집안 생각 등 잡다한 생각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배하는 한 시간은 가장 열정적인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는 책에 보면 교인들의 예배드리는 여러 모습이 나옵니다. 멀거니 강단을 응시하는 딴 생각파(시선만 강단, 생각은 출장 중), 주보에 밑줄 긋고 교정까지 보는 읽기파, 수시로 시계를 보는 안절부절파, 옆 사람과 글로 대화하는 쪽지파, 예배 후에 있는 회의를 준비하는 회의파, 예배시간에 성경 읽기로 시간을 때우는 독서파, 주위에 있는 아기에게 눈을 맞추고 아기에게 집중하는 유모파, 설교 꼬투리 잡는 시험채점파, 처음부터 끝까지 팔장을 낀 채 예배를 구경하는 관람객파, 찬송 부를 때 입만 뻥끗대는 붕어파, 기도시간의 틈을 노려 수면을 보충하는 파, 누가 왔나 안 왔나 두리번거리며 인원을 체크하는 경비파 등 천태만상이 있다고 합니다.
혹은 교회 직분을 안 주면 교회에 안나오는 감투교인이 있습니다. 인력거 교인 - 심방을 가서 사정해야만 겨우 나오는 교인, 핑계교인 - 이 핑계, 저 핑계되는 교인, 유람선교인 - 이 교회 저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교인, 국회의원교인 - 한 가정에서 대표로 나오는 교인, 광고교인 - 사업목적으로 나오는 교인, 참 안타까운 이름들입니다. 오늘 진정한 개혁의 시작은 예배의 회복에서부터입니다. 구경꾼의 자세가 아니라 예배자의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제사장직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은혜가 떨어지면 예배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국방, 납세, 교육, 병역의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의무를 다할 때 신앙의 기초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청교도 신앙은 의무를 감당하는 신앙입니다. 의무를 다하는 신앙인은 아름답습니다. 남편으로서 의무, 아내로서 의무, 학생으로서 의무, 목사와 성도로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은혜를 받은 그 다음에 예배드려라”, “사업이 한가하면 예배드려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연민의 정이 생기면 그 다음에 나가서 전도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아주 단순하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예배하라, 너희는 기도하라, 너희는 전도하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상황에 맞게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상황에 상관없는 예배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한국교회에 수많은 등록교인들 중에 50%도 주일예배에 출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예배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배는 좁은 의미의 공적인 예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삶으로 드리는 광의의 예배가 있습니다. 공적인 예배가 무너지면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예배를 통하여 은혜와 능력을 받아 삶으로 드리는 예배에 적용하여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적예배가 무너지면 우리의 삶으로 드리는 예배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예배의 성공자가 인생의 성공자이기에 예배의 회복, 그것이 우리의 신앙회복의 시작이요 출발점입니다. 상한 심령의 예배를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종교개혁의 원리는 크게 세 자기입니다.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오직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느혜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면서 가장 먼저 예배(양문)를 회복하였습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우리의 삶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배를 통하여 참된 개혁자의 신앙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배를 찾는 분이 아니라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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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채희동 목사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관행을 지적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의 대문에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재판정에서 루터는 말합니다. “하나님,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선택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자의 신앙이며 정신입니다.
그 후 개혁의 횃불을 들고 담대하게 나아가며 만든 찬송이 384장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 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루터는 1483년 광부인 믿음의 아버지로부터 신앙교육을 성실히 받으며 자랐습니다. 대학시절 소나기를 피하다 나무 아래로 숨었는데 두 명의 절친한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고 자신만 살아남은 이후 루터는 큰 충격을 받고 22세에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24세에 신부가 되고 30세에 신학박사학위를 받아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루터에게 있어서 롬 1장 17절은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는 말씀입니다. 당시 수도사들은 빌라도의 계단이라 불리는 28개의 돌계단을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무릎으로 올라갔다가 무릎으로 내려와야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루터 역시 고통스럽게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도무지 평안이 없었습니다. 구원의 확신도 없었습니다.
무릎으로 올라가는 중 롬 1장 17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루터는 견딜 수 없는 감격으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기어 올라갔던 계단을 걸어서 내려왔습니다. 루터는 구원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다는 진리를 확신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분의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믿음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일부 성도들이 여전히 율법주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구원받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소위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어떤 노력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음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구원 얻는 조건에 우리의 노력이 1% 정도라도 들어간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부인하는 자가 있으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엡 2:8-9)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이룩하신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선행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구원을 받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개혁은 사람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가려지고 사람의 뜻이 드러날수록 교회는 부패해지는 것입니다. 교황의 권세가 가장 컸을 때가 교회의 가장 암흑기 였습니다.
케에르케고르는 관객과 배우의 비유로 예배를 보는 자와 드리는 자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관객은 연극을 보는 자요, 배우는 연극을 드리는 자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우리가 드리는 자라면 하나님은 보시며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관객이 아니라 배우입니다. 목사가 배우고 성도는 관객이 아닙니다. 목사도 예배자요 회중도 예배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예배자로서 설교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배우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입니까? 배우는 늦지 않습니다. 늦으면 연극이 되지 않습니다. 예배에 늦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15분전에는 오셔서 준비해야 합니다. 배우는 연극 중에 일찍 가는 법이 없습니다. 연극이 끝나야 갑니다. 예배 중에 먼저 나가시면 안 됩니다. 배우는 졸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객은 졸면서도 봅니다. 예배시간에 조는 분들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극도의 육체의 피곤함이나 목사의 졸린 톤의 설교가 졸음을 불러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습적으로 조는 것은 좋은 일이 결코 아닙니다.
세례요한이 소속되어 있었던 쿰란 공동체에서는 예배 시간에 조는 이에게 한 달 간 예배에 나오지 못하도록 규정을 두었다고 합니다. 배우는 관객의 시선을 바라보며 모든 에너지를 집중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시선은 목사를 응시하고 내 모든 에너지를 다해 예배에 전념해야 합니다. 핸드폰은 꺼놓으시고 집안 생각 등 잡다한 생각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배하는 한 시간은 가장 열정적인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는 책에 보면 교인들의 예배드리는 여러 모습이 나옵니다. 멀거니 강단을 응시하는 딴 생각파(시선만 강단, 생각은 출장 중), 주보에 밑줄 긋고 교정까지 보는 읽기파, 수시로 시계를 보는 안절부절파, 옆 사람과 글로 대화하는 쪽지파, 예배 후에 있는 회의를 준비하는 회의파, 예배시간에 성경 읽기로 시간을 때우는 독서파, 주위에 있는 아기에게 눈을 맞추고 아기에게 집중하는 유모파, 설교 꼬투리 잡는 시험채점파, 처음부터 끝까지 팔장을 낀 채 예배를 구경하는 관람객파, 찬송 부를 때 입만 뻥끗대는 붕어파, 기도시간의 틈을 노려 수면을 보충하는 파, 누가 왔나 안 왔나 두리번거리며 인원을 체크하는 경비파 등 천태만상이 있다고 합니다.
혹은 교회 직분을 안 주면 교회에 안나오는 감투교인이 있습니다. 인력거 교인 - 심방을 가서 사정해야만 겨우 나오는 교인, 핑계교인 - 이 핑계, 저 핑계되는 교인, 유람선교인 - 이 교회 저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교인, 국회의원교인 - 한 가정에서 대표로 나오는 교인, 광고교인 - 사업목적으로 나오는 교인, 참 안타까운 이름들입니다. 오늘 진정한 개혁의 시작은 예배의 회복에서부터입니다. 구경꾼의 자세가 아니라 예배자의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제사장직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은혜가 떨어지면 예배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국방, 납세, 교육, 병역의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의무를 다할 때 신앙의 기초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청교도 신앙은 의무를 감당하는 신앙입니다. 의무를 다하는 신앙인은 아름답습니다. 남편으로서 의무, 아내로서 의무, 학생으로서 의무, 목사와 성도로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은혜를 받은 그 다음에 예배드려라”, “사업이 한가하면 예배드려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연민의 정이 생기면 그 다음에 나가서 전도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아주 단순하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예배하라, 너희는 기도하라, 너희는 전도하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상황에 맞게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상황에 상관없는 예배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한국교회에 수많은 등록교인들 중에 50%도 주일예배에 출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예배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배는 좁은 의미의 공적인 예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삶으로 드리는 광의의 예배가 있습니다. 공적인 예배가 무너지면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예배를 통하여 은혜와 능력을 받아 삶으로 드리는 예배에 적용하여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적예배가 무너지면 우리의 삶으로 드리는 예배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예배의 성공자가 인생의 성공자이기에 예배의 회복, 그것이 우리의 신앙회복의 시작이요 출발점입니다. 상한 심령의 예배를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종교개혁의 원리는 크게 세 자기입니다.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오직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느혜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면서 가장 먼저 예배(양문)를 회복하였습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우리의 삶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배를 통하여 참된 개혁자의 신앙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배를 찾는 분이 아니라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