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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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1월 03일 (월) 10:03:25 | 기독신문 ekd@kidok.com |
▲ 김근수 목사 |
야고보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곧 “자유의 율법”을 언급한다. “자유”와 “율법”은 반대개념 같다. 그러나 이것은 한 본질의 양면성과도 같다. 율법을 듣기만 하는 자나 그것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에게는 율법의 정죄와 구속이 따르지만, 율법을 듣고 행하는 자에게는 율법이 제시하는 삶의 원리와 규범과 질서 안에서의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까닭이다.
율법에서의 자유
율법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인간의 삶의 제일차적 제도는 아니다. 율법보다 430년 전에 하나님께서 제 1차적 제도로서 인간에게 “언약”을 주셨다. 태초에 인간은 “언약”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저버리고 타락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이 막혔다. 언약제도에 실패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2차적 제도인 율법제도로서 다시 아버지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바로 율법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는 제사제도이다. 제사제도에 있어 무게가 집중하는데는 제사장 제도도 아니요, 성전제도도 아니요, 제물 자체이다. 바로 이 제물이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실 때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다. 이는 이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써 아버지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린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율법의 정죄에서 자유한다. 이런 면에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아버지께로 나가는 길을 보여주는 거룩하며 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신실한 성도들은 율법을 통하여 특히 제사제도를 통하여 메시야의 은총을 내다보았다(롬 10:4).
사랑의 종노릇
율법은 구원의 방편이 아니라 정죄의 방편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에 나타난 율법주의자들은 주로 율법학자들의 율법해석집이었던 “할라카” 곧 “장로의 유전”을 지킴으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율법의 행위”로서는 구원이 불가함을 교훈 하였다. 바울 사도는 단순히 “율법”이 아니라 언제나 “율법의 행위”라고 언급함으로써 유대 사회의 통념인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는 율법주의를 정죄한 것이다. 율법 안에 머물려고 하는 행위가 구원의 공로가 된다면 이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칭의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야고보는 “율법의 행위”란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단지 “행위”만을 언급한다. 이는 진정한 믿음, 생명력 있는 신앙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율법 무용론자나 폐지론자가 아니라 율법의 정신인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참된 행위를 가져온다.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을 받아 율법에서 자유한 사람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이다. 이제는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사랑의 종이 된 사람이다(갈 5:13). “서로 사랑하는 것”이 새 계명이요, 율법 중의 율법이다(요 13:34). 그러므로 사랑을 실천하는 자는 율법의 정신을 바로 이해한 참 자유인이요 그에게 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