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조직신학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새 사람”
에드먼드 클라우니(Edmund Prosper Clowney, 1917-2005)는 1939년 휘튼 대학에서 학사, 1942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석사, 1942년 예일 대학교에서 Th.M. 그리고 1966년 휘튼 대학교에서 신학박사(Doctor of Divinity)를 받았다. 정통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42년부터 1946년까지 코네팃커트와 뉴저지의 교회 목회를 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1952년부터 실천 신학 교수로 사역했고, 1966년에 총장이 되었고, 1990년에는 캘리포니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수로 사역했다.
에드먼드 클라우니 박사는 그의 저서인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 The Unfolding Mystery: Discovering Christ in the Old Testament 라는 책에서 “새 사람”이라는 주제로 새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연관성을 제시하였다. 저자는 구약을 그리스도에 대한 관점으로 해석하고 이해하였다. 이에 그의 글을 소개해 본다.
먼저 기록된 성경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부터 나왔다. 하나님께서 두 돌판 위에 친히 그의 율법을 새기셨다(출 31:18). 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밝히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의 부족신이 아니었다. 그분은 열방의 왕이시며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 속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삶과 예배의 규범이 되는 율법만 아니라 훨씬 그 이상의 것이 들어있었다.
여호와를 그들의 하나님으로 알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그분을 창조주로서 알아야만 했다. 이스라엘이 자기의 부르심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야만 했다. 하나님께서 열방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들에게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열방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부터 시작된 새 민족을 통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모세의 첫 번째 책 창세기는 이스라엘의 부르심과 그들의 출애굽 이야기를 하기 위해 태초의 창조 이야기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창세기는 “계보의 책”으로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이야기를 추적할 뿐만 아니라 창조 시부터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어떻게 다루시는가에 대한 맥락 속에서 이스라엘의 부르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온 땅이 하나님의 것이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며 그분의 귀중한 소유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부르심은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열방 중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것은 열방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노아를 아끼시고 아담을 동산에 두신 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해야만 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됨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창세기 1장은 우리를 창조의 절정으로 인도한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다른 민족들의 모든 신화는 일축된다. 인간은 남신과 여신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도 아니며, 죽임을 당한 어떤 신의 피에서 생긴 것도 아니며, 어떤 신의 일부도 아니며, 신과 짐승의 결합체도 아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되, 하나님의 모습을 지닌 피조물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그들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따로 어느 한 날을 잡아서 하신 것이 아니다. 동물들과 사람은 똑같이 창조의 여섯째 날에 지음을 받았다.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도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다.
바다의 고기나 공중의 새나 사람이나 모두 생육하고 번성하는 피조물들이다.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는 천지의 창조된 "대략(계보)"을 적고 있는 2장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그 만드신 땅에 나게 하신 것들이 나온다. 땅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아 있는 피조물들을 낳았다. 사람도 역시 땅으로부터 나왔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흙으로 지으시고, 하와는 아담의 몸에서 지음을 받는다.
반면, 1장과 2장은 모두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면서 인간 창조의 특이성을 강조한다. 1장에서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결정에 의한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26) 1장 서두에 "하나님의 신"이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과 의논하셨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영혼에게 말하는 것과는 다른,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 것이다.
2장에서 인간 창조의 괄목할 만한 특이성은 맨 먼저 하나님께서 흙에서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취하신 특별한 행동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손의 접촉 외에 그분의 입술의 숨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코에 생명의 숨(생기)을 불어 넣으신다. 이것은 친밀한 교제의 모습을 그려 주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피조물이다. 그러나 인간은 독특한 피조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형상"이라는 말은 나중에 구약성경에서 우상들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배할 목적으로 어떤 형상들을 만드는 것을 금하신다. 심지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형상까지도 예배할 목적으로 만드는 것은 절대 금하셨다.
다시 말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창세기의 설명은 다른 민족들의 신화들과는 상치된다. 그 신화들을 보면 어느 한 개인이나 부족이나 민족을 신들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따로 구별하고 있다. 왕조의 신화들은 왕만이 홀로 신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설형문자로 된 고대 비문에 보면, “나의 주이신 왕의 부친은 벨의 형상이었고, 나의 주이신 왕은 벨의 형상이다"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창세기에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창조 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본성과 역할이 독특하다. 인간은 생명을 가진 다른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유기체적인 신체적 생명을 지니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대표할 자격을 얻게 된다. 인간을 통하여 신체를 가진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가 있다. 창조의 절정인 인간에게는 수행해야 할 하나의 역할이 있다.
인간은 피조물의 하나이면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세계 사이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조물을 개인적으로 다루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은 그 입술로 피조물의 머리로서 피조물을 위하여 대신 하나님께 응답한다.
인간은 창조된 형태에서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는 또한 피조물을 지배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과 연관되어 있다(창 1:26-27).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재미있는 장면은 단지 어린아이들의 즐거움을 위하여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담이 피조물의 형태를 이해하고 그들에게 명령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어떤 동물도 아무리 충성스럽게 인간을 섬기는 동물들도-인간의 반려자가 될 수 없고, 인간과 동등한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모두가 아는 대로 양자가 서로 구별되면서도 서로 놀라운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그런 관계가 있다. 곧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우리는 흔히 “저 아이는 그 아버지를 꼭 빼닮았어"라고 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셋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것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담이...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3)
이 구절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아담은 범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였기 때문에, 아담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형상은 타락 시에 상실했으며, 따라서 아담 안에 남아 있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아담 안에 있었던 그 형상의 희미한 반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은 인간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 위에 확립되는 것이다(창 9:6, 약 3:9).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인간과 동물을 계속 구별해 주는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우리는 아담이 자기 형상대로 낳은 아들 셋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하여 누가복음은 그리스도의 계보를 셋, 아담, 하나님으로까지 소급하는 것이다. 창세기는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계속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셋은 그의 아버지 아담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누가가 그 계보에서 의미하고자 한 바는 분명하다. 즉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수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창세기에서 그 아버지 아담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가인이 아니라 셋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셋의 계보에게 주어졌지 가인의 계보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바로 셋의 계보에서 참된 아들 직분이 실현될 것이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의 모양대로 그를 지으시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동산에 살게 하셨다. 그곳은 생명의 활기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열심히 뛰어 노는 동물들,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나무들, 햇빛이 찬란하게 비치는 파란 하늘, 나지막이 안개를 드리운 아름다운 계곡. 이 첫 번째 사람은 만물의 주님이시다.
그를 통하여 피조물은그 눈을 창조주께로 향하여 들며,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아담은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는 자였고, 그 동산의 부요함을 탐구하고 세계를 발전시킬 자유가 있었다. 하윌라에는 금이 있었고, 큰 강들이 동산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흘러갔다.(계속)
아담의 자유에는 단 한 가지 제한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에 있는 한 나무를 가리키시며 그 나무의 실과는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보다 더 작은 제한이 있을까? 아담은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다. 모든 나무가 다 그의 것이었고, 모든 동물들이 그의 것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명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인 아담은 그의 아버지시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대한 그의 순종에서 시험을 받고 있었다. 첫 번째 사람 아담은 그의 모든 자손들의 운명을 쥐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그의 형상대로 태어날 모든 자들의 아버지였다. 그는 그로부터 나올 모든 인류를 대표했다. 사탄의 시험 가운데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을 택함으로써 선과 악을 알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는 하나님의 의로운 아들로서 확정되고, 영원히 자유롭게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담은 낙원에서 혼자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그와 함께 살 여자, 곧 그의 생의 반려자요 돕는 배필이 될 하와를 만드셨다. 이렇게 하여 피조물의 머리로서의 아담의 역할에 그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그 여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 여자의 머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새로운 역할이 첨가된다. 그들은 함께 생육하고 번성하여 그들의 소유인 땅에 충만할 수 있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기사 이전에 이미, 창세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 가운데서 하실 역할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인류 역사 여명기에 아담의 모습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다루신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아담은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오셨다(롬 5:12-21, 고전 15:2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때늦은 방편으로서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그것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나타내 보여 주기 위하여 창세 전부터 택하심을 받은 분으로서 오셨다.
3장의 구속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자로서의 아담의 모습이 1, 2장에 나타나 있다. 그는 하와가 그에게 주어지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받는다. 이 모든 것은 인류 역사의 시작뿐 아니라 그 정점에 대하여도 의미를 갖는다.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그림자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아담의 대체자가 아니다. 즉 말하자면 아담이 실패한 것을 대신할 사람 그 이상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오메가요 인류 역사의 목표이며, 피조된 인간의 목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알파요, 참 아담이요, 새롭고 참된 인간의 머리이시다.
그분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시다(골 1:15). 그분은 모든 창조물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을 만드신 창조주이시다. 그분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아담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무한히 초월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영원하신 아들로서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피조물인 아담의 아들 직분은 그리스도의 위대하고 영원한 아들 직분을 반영할 수 있을 뿐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아들 직분이 우리가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아들 직분을 훨씬 능가한다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롬 8:14-17).
그러한 이유로 해서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배할 목적으로 하나님의 형상들을 만드는 것을 금하셨다(신 4:15-24).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신들의 형상인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셨을 뿐만 아니라,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들이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음을 기억하고 참된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드는 것을 시도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어떤 표현물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이 예배할 목적으로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신 인간 자신의 형상까지도 예배할 목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성막의 제도에서, 언약궤는 바로 하나님의 보좌를 나타냈다. 이 궤의 황금 뚜껑이 시은좌,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보좌에 앉아 계시는 곳이었다. 날개를 펼치고 있는 그룹들이 그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시중들었다. 그러나 그 보좌 위에는 아무 형상도 없었다. 오직 영광의 광채만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고 있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기의 형상으로 만드시나, 사람은 그러한 형상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언약궤 위에 아무 형상도 없다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시는 영이시라는 것을 배워야 했지만 거기에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기계시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원하거나 상상한 대로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으실 것이다. 언약궤 위의 빈 자리는 장차 오실 분을 위하여 예비되었다.
빌립이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말씀드렸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8-10).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얼마 전 마리아가 자기에게 향유를 붓고 경배하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요 12:1-8).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것은 우상 숭배가 아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이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고전 1:2). 그들은, 인간의 육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계시며, 따라서 발 아래 엎드려 경배해야 할 분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골 2:9, 계 1:17). 아들을 공경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를 공경한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요일 5:20-21)
아담의 모습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고 있다. 신약성경 또한 하와의 창조 기사 속에 들어 있는 비유적인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올바른 관계를 가르치기 위하여 창조 기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담은 하와가 자기의 몸에서 취함을 입었기 때문에 하와를 자기 몸처럼 보살펴야만 한다. 아름다운 창조 기사는, 결혼이란 두 사람이 하나로 연합되는 것일 뿐 아니라, 두 사람이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들은 서로 속하여 있다.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것을 언급할 때 단순히 아담과 하와에 대하여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어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에베소서 5:28-33)
바울은 결혼에 관한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남편과 아내의 올바른 관계를 이야기할 뿐 아니라, 그 말씀을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도 적용하고 있다. 바울은 창세기의 결혼 제정에 대한 기사를 인위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 억지로 관련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정말 깊은 관련이 있는가? 창 2:24의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한 말씀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그림자로 보여 주는 하나의 모형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 왜냐하면 창세기 2:20-25에 선언된 결혼에 관한 원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기 때문이다. 결혼 관계 안에서 창조된 친밀한 연합과 유대는 다른 어떤 인간 관계보다 앞선다. 남자는 그 아내와 연합하기 위하여 그 부모를 떠나야만 한다.
창세기에서 이 명령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아담의 말 다음에 나온다. 하나님의 명령은 자신의 창조 행위에 근거하고 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배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들을 결합시키는 사랑은 필연적으로 질투하는 사랑이다. 그것은 한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사랑으로서 간음에 의하여 깨진다. 이 원리는 후에 하나님께서 구속받은 자기 백성에게 주신 언약의 법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 “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4)는 계명은 단지 이스라엘 사회에 안정된 가정 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이웃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는 특별하고 강한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계속)
<저작권자 ⓒ 리폼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