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철원 박사, ˝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

지난 11월 12일 전주 함께하는교회(오명현 목사)에서 개혁신학연구회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본 글은 세미나에서 발표한 전 총신대 신대원장 서철원 박사의 강의를 요약해서 소개한 것이다.

 

프랑스 출신의 개혁자인 칼빈(J. Calvin)은 성경이 적극적으로 명하지 않으면 금한다고 했다. 그래서 성상을 반대하였다. 가톨릭교회는 화란에 개혁교회가 성행하자 가톨릭국가인 벨기에를 만들었다. 화란과 프랑스의 영토 일부를 잘라내 가톨릭국가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벨기에는 화란어와 불어를 함께 사용한다.  

 

화란은 개혁교회 나라로 출발했지만 20세기에 들어와 칼 바르트(K. Barth)의 영향을 받게 된다. 칼 바르트는 개혁파 출신이었으나 신정통신학자였다. 벌카우워(G. C. Berkouver, 1903-1996) 교수는 칼 바르트가 정통은 못되도 신정통은 된다고 했다. 벌카우워는 화란자유대학에서 가르치는 동안 1년에 1명씩 박사를 만들어 총 34명이 박사가 배출했다. 그가 바르트 신학이 좋다고 해서 그의 제자들과 화란개혁교회가 그의 신학을 따르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화란개혁교회가 개혁신학을 버렸다. 

 

화란에는 7개 대학의 신학부가 개신교신학대학를 세웠다. 각 대학의 신학부를 없애고 암스텔담에 하나의 신학교인 개신교(Protestant) 신학교를 만들었다. 그러나 화란자유대학은 신학부를 합치지 못하고 자유대학 안에 개신교 신학교를 두었다. 그러면 현재 그 옆에 있는 본래 아브라함 카이퍼가 세운 자유대학의 신학부는 보수인가? 그렇지 않다. 목사 교수는 얼마 안되고 중, 신부, 그루들이 교수가 되어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럽에 가서 배울 만한 학교가 별로 없다. 

 

종교개혁 때 칼빈은 성경이 적극적으로 명하지 않은 것은 거부한다고 해서 성상숭배를 금지시켰다. 그 일에 가장 앞장선 나라가 화란개혁교회이다. 787년 니케아 2차 공회가 보이는 성상 앞에 경배를 하면 그 배후에 있는 분에게도 경배가 간다고 했다. 그래서 성상숭배를 보편화했다. 로마교회만 아니라 희랍정교회도 성상숭배를 했다. 지금은 로마교회가 완전히 이교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성상 앞에 가면 성호를 긋는다. 

 

칼빈의 개혁신학(이하 소제목은 필자가 붙인 것이다)

 

칼빈이 강조한 개혁신학은 무엇인가?

 

(1)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를 엄격하게 긋는다. 

 

하나님과 피조물 간의 간극은 무한하다. 그래서 인성은 신성이 되지 않는다. 당시 신학은 인성은 은혜를 입어 신화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개혁신학은 이것도 금지시켜 버렸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했어도 인성은 인성대로 남고 하나님(신성)은 하나님으로 계신다고 확정을 했다. 그런데 우리도 신이 될 수 있다는 신학이 생겨났다. 320년 이레니우스(Irenaeus, AD 130-202)가 그리스도가 우리처럼 되신 것은 우리도 자기처럼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이것은 구속에 강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되는 것에 역점을 둔 것이다. 이런 신학을 주장한 사람이 이레니우스였다. 

 

20세기 앙양신학이 등장하는데 그 조상으로 이레니우스가 자리한다. 교회사에서 최초 신학자가 이레니우스라고 불린다. 그의 신학의 강조점이 우리가 신이 되도록 하는데 아버지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단들에 대해 5권의 책을 썼다. 그리고 천년기를 주장했다. 그의 책 후반부에 천년기가 잘 전개되어 있다. 그런데 이 천년기는 교회의 신학이 아니다. 이것은 유대교의 사상이다. 

 

AD 70년에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훼파되고 불에 탔고 거민들이 몰살당했다.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 성문을 열고 들어가서 115만의 인구 중 113만을 다 죽였다. 제사장도 다 죽였다. 그리고 성전에 불을 놓았다. 당시 성전 내부를 다 금으로 장식을 해 놓았는데 불에 금이 타서 틈으로 녹아 들어가자 병사들이 그 녹은 금을 보고 돌을 밀고 금을 열심히 꺼내 가져갔다. AD 70년에 예루살렘이 망한 것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는데 그 설명을 제4 에스라서, 예레미야의 비서인 바룩의 이름을 딴 바룩서에서 제시한다. 이 책들에서 예루살렘이 하나님께 범죄했지만 더 악한 로마에 의해 멸망 당한 이유를 설명한다. 

 

현대 톰 라이트(Nicholas Thomas Wright)가 유대교 사상을 많이 강조하면서 두 책을 주로 인용했다. 천년기는 앞에서 말한 두 책에서 나온 것이며, 유대교의 사상이다. 이 사상은 성경의 사상이 아니고 교회 사상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신학자의 영향으로 그것을 정통으로 받아들였다. 교회사를 보면 개혁교회에서 천년기를 주장하면 이단으로 정죄했다. 

 

한국교회는 천년기가 정통이고 무천년설이 자유주의로 가는 첫걸음이라고 위험시했다. 세계개혁교회 중 개혁신학을 한다면서 이 천년기를 받아들여서 휴거 사건으로 시끄러웠던 것은 한국교회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로마교회가 쌓은 신학이 그냥 종교개혁 이전에만 있고 그 이후에는 그 영향이 없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의 신학의 영향이 너무나 커서 종교개혁교회의 신학들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상당히 많이 따르게 되었다. 종교개혁이 끝나고 루터교회와 개혁교회가 주된 교회인데 두 교회가 서로 경쟁을 했다. 

 

누가 더 바른 신학을 정교하게 잘 만들었는가? 그 경쟁을 할 때 루터교회가 지지 않으려고 하고 개혁교회도 지지 않으려 했다. 17세기 들어서 둘 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철학 용어를 가지고 신학 용어를 만들었다. 16세기 일어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세울 때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철학 용어를 채용하려 하다가 많이 모자라서 두 교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용어를 교회의 신학 용어로 채택한다. 

 

15세기에 프랑스의 황제 찰스(Charles the Great)가 르네상스를 일어나게 하고 교육의 혁명을 일으켰다. 그래서 6년 동안 희랍어와 라틴어를 열심히 공부하도록 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사용하는 언어하고 집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데 지금도 로마 바티칸에서는 라틴어를 일상어로 쓴다. 그런데 찰스의 혁명으로 희랍어, 라틴어를 우리가 한자 사용하는 정도가 아닌 완전히 생활 언어로 쓰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17세기 철학자들이 글을 쓸 때 라틴어로 썼다. 

 

그래서 모든 신학책도 라틴어로 써야 했다. 17세기 루터교, 개혁파 신학자들이 모두 라틴어로 글을 썼다. 그런데 17세기 신학자들의 글이 현대어로 번역이 별로 안 되었다. 그것은 다행이다. 루터교회나 개혁교회나 사변을 열심히 일삼았다. 그래도 17세기는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라 불린다. 두 교회 다 라틴어로 열심히 글을 썼다. 그 책들을 요약한 책이 있는데 하인리히 루트비히 율리우스 헤페(Heinrich Ludwig Julius Heppe, 1820-1879)가 쓴 「개혁교회 신학」이다(우리 말로는 「개혁파 정통 교의학」으로 번역했다).  

 

루터교회도 슈미트(Heinrich Schmid)라는 사람이 「복음주의 루터교회의 신학」(The Doctrinal Theology of the Evangelical Lutheran Church)이라는 책을 썼다. 라틴어로 쓴 17세기 책들을 신학자들이 번역해서 책을 냈다. 이런 가운데 그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로마서 주석」을 써서 괴팅겐대학에 교수로 채용된다. 당시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개혁신학을 대변하기 위해 세워진 대학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 대학들의 그런 구분이 다 없어졌다. 모두 자유주의가 되었다. 그가 괴팅게 대학에 가서 교과서가 없어 하인리히 헤페가 쓴 「개혁교회들의 신학들」이라는 책을 가지고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가르쳤다고 한다. 

 

바르트의 신학을 보면 사변이 아주 많다. 그렇게 사변이 많아도 정통신학을 대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도 바르트가 나오기 전까지 화란의 개혁교회는 신학을 잘 지키고 신앙생활을 잘했다. 1948년 WCC 대회를 암스텔담에서 개최했는데 바르트가 주관자였다. WCC를 만든 장본인들이 화란개혁파 신학자들이었다. 

 

그런 전통에서 벌카우워가 바르트 신학이 신정통이라고 해서 많은 신학자들, 목회자들이 자유주의 신학으로 넘어갔다. 자유주의 신학은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구약의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보면 자유주의는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한다. 그러면 인간 예수만 남는다.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가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인데 17세기 신학자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는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내용으로 책을 썼다. 

 

둘째, 삼위일체도 부정한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니 신 존재가 없어진다. 자유주의 신학에는 신 존재가 없다. 내가 아는 바로는 20세기 많은 신학자들이 전통적인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하는 글을 찾아보지 못했다. 하나님이 없다. 칸트(Kant)가 감각기관으로 보고, 접촉가능한 것만 존재한다고 했다. 눈으로 보고 드러나는 것이 현상인데 그 현상이 되게 하는 것이 현상 배후에 있다고 본다. 그것을 물 자체라 부른다. 물 자체는 말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알 수 있는 바가 아무것도 없다. 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므로 존재할 수 없다. 그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슐라이허마허는 신학을 했고 그를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 부른다. 

 

그런데 칼 바르트가 슐라이어마허에 대해 극찬을 했다. 그는 새로운 기독교를 일어나게 했으며, 19세기 교부라고 했다. 19세기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늦게 잡아 3-4세기부터 시작해서 7세기에 교리가 끝난다고 본다. 그때까지 일한 분들을 교부라고 하는데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를 19세기 교부라고 한다. 

 

보수는 자꾸 줄어 들지만 자유주의는 없어지지 않고 자꾸 늘어난다. 우리 교단이 합동과 통합으로 나뉠 때 제가 총신을 간 이유 중 하나는 통합 사람들이 갈라지면서 합동측을 비난했다. 과도하게 보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신학적으로 합동과 통합이 거의 차이가 없다. 그들은 신비주의와 자유주의가 가득했지만 교단은 나누지 말자고 합의를 했다. 그들이 합동측의 목사들이 교단 탈퇴를 하도록 하기 위해 만든 작전이 여성안수였다. 이번 총회에 여성강도사 제도가 헌의안으로 올라온 것으로 안다. 내가 그것을 ‘폐기하면 안되는가?’ 물으니 ‘우리는 목사가 안 되도록 법을 만드니까 괜찮다’고 했다. 

 

제가 총신에 들어갔을 때도 여학생들이 있었다. 그런데 여학생들은 2학년을 마치고 나면 3학년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녀들이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를 찾아가서 목사가 안 될 테니 3학년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했고 박형룡 박사가 허락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 공부한다. 그리고 강도사가 되었는데 목사 안수를 안 주면 되는가?라고 하면서 법에 호소하면 막을 수 있는가? 

 

영남쪽의 한 노회는 거수로 하면 장로님들이 다 보니까 전자 투표를 한다고 한다. 그러면 누가 눌렀는지 찬성했는지 알 수가 없다. 지난 장충교회에서 박형룡 박사 보수신학 세미나를 했다. 저에게도 한 강좌를 강의하라고 해서 갔다. 밥을 먹을 때 내 옆에서 김길성 교수, 서기행 목사, 김동권 목사가 함께 먹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상당히 비판들을 했다. 나는 통과가 안될 것이라고 했다.  

 

이레니우스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으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 신학에 근거해서 신존재에 동참하여 신이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피조물이 신이 되는 것을 앙양신학이라고 했다. 칼빈은 희랍정교회가 주장하는 신이 되는 길을 성례전이라고 보았다. 떡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실제 몸이 되고 피라고 할 때 피가 된다. 그래서 떡과 포도주를 먹으면 신성을 갖게 되고 종말에 가서 신이 된다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부활하여 하나님 앞에 서면 특별한 빛을 받고, 그 영광의 빛을 받으면 영혼의 합리적인 부분이 신을 직관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을 직관한다. 하나님의 본질은 무엇인가? 삼위일체이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면 신이 된다는 것이다. 로마교회의 구원 과정의 목표는 신이 되는 것이다. 개혁신학은 우리가 종말에 가서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2) 성상숭배에 대해 철저히 반대했다.

 

그리고 성상숭배를 개혁교회는 적극 반대했다. 바르트(K. Barth)는 성상숭배를 좋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로마교회는 바르트를 좋게 보고 보편 가톨릭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바르트에게는 하나님이 없다.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2024),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1965)에게도 하나님이 없다. 현대신학에는 하나님이 없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화 시키는데 열성적이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보수주의를 지키는데 열성적이지 않다. 

 

서울대 동기 중 오강남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종교학과에서 공부하고 나는 철학과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 사람이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캐나다에 가서 불교를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했다. 그런데 자기 말로는 불교도는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지만 기도하면 아멘은 한다. 자기 열성이 아주 대단하다. 자기 열심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한다. 

 

한동안 논쟁이 되었던 능동적 순종은 인간의 열심을 강조한다. 인간의 노력 즉 율법의 준수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사상이다. 갈 5:4절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라고 했다. 

 

행위언약을 강조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바울이 말했다. 성경이다. 바르트는 20세기 기독교에 큰 해악을 끼쳤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말 성경은 장신대 교수들에 의해 증거를 증언으로 바꾸었다. 미국 장로교회가 신앙고백서를 다시 만들었다. 바르트는 화해를 말하는데 우리가 말하는 화해가 아니다. 바르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 존재와 동참해서 화해를 이루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화해이다. 

 

(3) 이중예정을 강조한다.

 

현대신학은 부활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려 한다. 그것은 기독교 신학이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육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러면 내세도 심판도 없다. 얼마나 좋은가? 내 지도 교수도 바르트를 천재라고 했다. 유럽 신학자들이 다 그렇게 극찬한다. 우리는 칼빈주의 신학을 따라 이중예정을 말한다. 선택과 유기가 그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선택교리는 어떻게 저런 사람도 선택받았는가? 그렇게 보면 안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증거가 선택교리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인류를 향한 뜻을 가지셨다고 한다. 하나님이 피조물로 만드셨으나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여 신이 되게 하는 것이 창조 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한다. 

 

벌카우워는 수학을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 머리가 좋은 줄 알았는데 바르트를 극찬하기에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했다. 나는 논문을 쓸 때 79세가 넘은 그에게 찾아가서 논한 적이 있다. 삼위일체에 대해 논할 때 그가 화를 내었다. 그는 나의 견해에 대해 반틸의 견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내가 벌카우워에게 바르트의 책 중 어떤 것을 읽어야 삼위일체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그가 가서 책장에서 요약본을 소개해주면서 그것을 읽으라고 했다. 얼마 후 바르트의 삼위일체를 비판하는 논문을 써서 보내주었더니 그가 한 줄로 잘 썼다고 답변을 해왔다.  

 

바르트는 예정에 대해 피조물을 창조하여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게 하신 것이라 설명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라는 것이다. 그 예수를 통해서 신존재에 동참하게 정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인합일을 통해 사람을 신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회는 금요 기도회, 새벽기도를 열심히 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렇게 열심히 고생하고 예배하고 기도하여도 교회 안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다 신존재에 동참한다. 바르트의 선택교리에는 유기가 없다. 그러면 예수를 믿을 이유가 없다. 예수 안 믿어도 된다는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바르트 신학이다. 

 

내 지도교수도 자유대학 교수가 되기 전에 바젤에서 목회를 할 때 바르트에게 배웠고 인격적으로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그에 대해 칭찬이 대단했다. 바르트를 비판하는 논문을 쓰면 졸업을 안 시킬 줄 알았는데 내가 바르트를 비판하는 논문을 써서 제출했더니 지도교수가 잘 썼다고 했다. 바르트는 예수를 안 믿어도 구원받는다고 했고, 성경으로 자신을 비판하지 못하게 만든 사람이다. 

 

조직신학은 다 연결되어 있다. 현대신학까지 다 연결되어 있다. 모든 고대 교회가 이레니우스 이후로 신존재를 목표로 삼고 신학을 했다. 그러나 칼빈은 이것을 반대했다. 그리스도의 신격에 인격이 연합되었으니 인성이 신이 되는 것이라고 고대교회는 주장했다. 그런데 칼빈은 그 경우에도 인성이 신성이 되는 일은 없다고 한다. 

 

피조물과 그리스도의 인성은 다르다고 했다. 인성과 신성이 동등하게 연합되면 성육신이 설명이 안된다. 신적인격이 인성을 연합하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어도 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나님의 제2위격이 인성과 결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4) 창조 사역,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단독사역이라고 강조한다.

 

창조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다. 유대교 신학은 희랍철학의 영향으로 하나님이 물질을 창조하면 그 신은 천한 신이 된다. 물질은 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사가 창조의 주도자가 된다. 라오디게아교회에 그 이단이 들어온다. 천사숭배가 교회 안에 들어온 것이다. 창조중보자는 경배받을만한데 그가 천사라는 것이다. 창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단독사역이라고 보는 것이 개혁신학이다. 

 

현대신학은 구원도 신인협동 구원설에 영향을 받는다. 예정, 중생까지는 은혜로 되지만 구원받고 난 후 성화는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에 우리의 죄 용서는 하나님이 하시고 그 다음에는 우리가 믿음이 생겨서 우리 힘으로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구절이 있는가? 

 

구원은 우리가 부활해서 영생에 이름으로 끝난다. 모든 구원의 과정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죽으셨다. 구원받은 우리가 그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 온갖 모독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다. 히브리서가 그 진리를 말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우리를 용서하시도록 하셨다. 하나님 얼굴 앞에서 용서함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신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는 그리스도 앞에서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러나 현대신학은 이 구원의 은혜를 버리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비주의가 내재주의가 되어 자유주의가 된다. 성화를 이렇게 오해한다. 우리가 기도하고 금식하고 금욕하고 고행하면 거룩해진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글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죄의 욕망이 있다. 육에 거하기 때문에 그 육의 욕망이 일어날 때 그 욕망을 흐트러뜨리는 것이 거룩이다. 사탄에게 우리가 물러가라고 하면 물러가는가? 사탄은 우리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피만 무서워한다. 우리 안의 죄의 욕망은 내 힘으로 불가능하고 요일 1:7절에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한다. 

 

요일 1:7절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주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 모든 욕망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예수의 피이다. 신학교에서 성화의 길을 안 가르친다. 일일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도매금으로 ‘나는 죄입니다. 주 예수의 피로 씻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성령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 성령을 주신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시작이다. 

 

‘주 예수님 내가 주를 믿습니다.’ 이 믿음 고백을 하면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거주하신다. 내 맘에 계신 주 예수로 기쁨이 충만한 것이다. 주님을 어떻게 내 안에 모시는가? 그것은 믿음 고백이다. 그 믿음 고백을 하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주하신다. 목사, 장로라고 해서 자연히 내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반역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믿음 고백을 별로 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핑계를 댄다. 주님은 창조주이시고 하나님이시고 내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다. 나는 질그릇보다 못하다. 그래서 주님을 못 모신다고 그렇게 변명한다. 그래도 믿음 고백을 해야 한다. 쉼 없이 고백해야 한다. 

 

롬 10: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여기 시인하다라는 말은 믿음 고백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성경은 번역을 잘못했다. 그러나 원문의 의미는 신앙 고백이다. 마음으로 믿으면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 즉 고백해야 한다.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원문은 되어 있는데 우리 성경은 이를 입으로 시인하는 것으로 번역했다. 죄의 욕망이 있을 때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면 욕망이 사라진다. 이것이 성화이다. 

 

구원받을 때만 믿고 성화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로 지속되는 것도 그리스도가 하신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오심은 믿음 고백으로 된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전적으로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개혁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