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최태연(천안대)

1. 들어가며: 왜 포스트모던 시대인가?

어떤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를 ‘포스트모던’(postmodern) 또는 ‘탈현대’의 시대라고 부른다. 왜 그럴까?

오늘날의 사회는 여전히 산업혁명 이후 끊임없이 발전해 온 현대 과학기술문명 덕으로 점점 더 편리하게, 점점 더 많은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으며 과학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합리성과 효율성을 중시하고 사회적 규범과 질서를 존중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도 현대문명의 연장선 위에 있으며 철저한 합리적 기술의 산물에 불과하다. 도대체 무엇이 변했기에 우리의 역사적 위치를 현대로부터 벗어난 시대라는 뜻의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변했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우리는 현대가 이루어 놓은 문명을 최대한으로 향유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가 만들어낸 혼란과 모순으로 인한 불안을 심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현실의 복잡함, 우연, 불안 속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래의 언제인가는 질서와 규범이 성취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기대에 대한 자신을 잃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 기대를 성취시켜 줄 원동력인 인간의 합리성 자체에 깊고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지식인의 사회에서 더 이상 절대불변의 진리나 필연적인 역사의 목적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소수가 되어가고 있다. 반면에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좀더 솔직해 지고자 한다. 그래서 다시 각광을 받게 된 사상이 니체의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 사상과 프로이트의 ’무의식‘(das Unbewusste) 또는 ’본능‘(Trieb) 이론이다. 이제는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더 이상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본능’이라는 생각이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만일 이러한 시대에 ‘기독교 세계관’을 말하려면 근대의 계몽주의에서 발원한 합리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기독교 세계관’을 새로운 상황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나왔기 때문에 더 이상 계몽주의의 기독교 비판을 반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경험과 논리를 초월하는 세계에 문을 열어준다. 이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 세계관과의 일정한 친화성도 가진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기독교 세계관을 구성하는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진리성을 부정한다는 점이다.

2.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

포스트모던 시대는 모더니즘 문화에 반대하는 일종의 반문화 운동인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성립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이미 1920년대였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하나의 중요한 문화운동이자 문예사조로서 대두된 때는 1950년대 말이었다. 현대의 인간만능의 합리주의와 기능주의에 반대하는 일단의 예술가들에 의해 시작된 이 운동은 1980년대에 이르러 근대 이후 200년간 서구의 지배적 사상이었던 ‘모더니즘’(계몽주의, 합리주의, 실증주의, 기능주의)의 허구성과 지배이데올로기적 성격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사상운동으로 발전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자본주의 또는 후기산업사회로 규정되는 20세기 후반의 서구사회가 만들어 낸 거대한 문화운동이며 사회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현대사회에서 감추어졌거나 무의미하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 속에 잠재해 있던 모순과 갈등을 도발적으로 드러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 운동은 서구가 계몽주의 이후 인간의 합리성에 의해 이룩한 모든 문명을 하나의 착각과 조작 위에 건설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들은 진리/비진리, 현실/비현실, 정상/비정상, 유용/무용을 구분하는

원칙을 부정하고 이 세계와 인간의 다양하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긍정하고자 한다. 이들에게 ‘진리의 절대기준’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이성이라는 가면 속에 숨겨진 욕구와 의지가 인간의 마지막 근거이다. 그들은 이러한 원초적 본능이 때로는 정신분열적으로, 때로는 장난기 어린 유희로, 또는 도발적인 예술행위로 표현되는 것을 즐긴다. 그들은 모더니즘적 사고가 만들어 낸 사각형의 질서와 최고의 기능과 효율을 자랑하는 시스템을 비웃고 조금은 우스꽝스럽고, 조금은 산뜻하고, 또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음악과 미술작품과 건축양식을 만들어 냈다. 연극과 영화에서는 헐리우드에 의해 대변되는 상업영화에서의 잘 짜여진 이야기와 매력적인 주인공들이 벌이는 긴장 어린 사건들 대신에 사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주인공인 누구인지 스토리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장면들의 연속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실제로 살고있는 현실이 질서보다는 정신병적인 혼돈과 무질서에 가깝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은 과거의 전근대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오늘날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 현대의 질서를 다시 해체한다. 이 사상은 그 선구자를 형이상학적 진리와 윤리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생의 맹목적인 의지’를 설파했던 광기어린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이체에게서 발견한다. 또한 합리적 인식론을 부정하고 시를 통해 표현된 ‘존재’의 진리를 찾기 위해 서양사상의 근원으로 되돌아 가려했던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들의 좋은 선배가 되었다.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일군의 자극적인 사상가들이 60년대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로이트를 따라 정신이 아닌 무의식적 욕망과 본능이 인간의 진정한 주인임을 재해석한 라깡, 사회의 효율적 통제와 지배를 위해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나누고 정신병원과 감옥을 통해 이러한 분리를 실행한 근대사회를 고발한 푸코, 서양의 형이상학을 백인들의 신화로 간주하고 서양문화사를 근원적인 존재의 드러남과 감추임이라는 역설의 논리로 풀어 나가는 데리다, 더 이상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닌 실제보다 더 그럴듯한 가상(시뮬라크르)이 지배하는 첨단 기술사회의 미래현실을 어둡게 내다 본 보드리야르, 등의 사상가들은 인간지식과 기술의 축적과 함께 밝은 미래와 이상적인 사회가 도래하리라는 현대인의 장미빛 기대를 여지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2.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 세계관의 충돌

위에서 정리했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이후 서구문명의 정신적 기초인 합리주의에 대한 반발이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의 일차적 관심사가 인간중심주의와 합리주의이므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사상은 아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수 천년 동안에 걸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기록된 성경이 세계와 인간과 역사와 사회와 가치에 대해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관점이다. 그러나 세계관을 가리키는 독일말인 ‘벨트-안샤웅’(Welt-Anschauung)의 의미처럼 아직 경험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정밀하게 논증되기 이전의 직관성(intuitivenesss)이 강조된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해 학문적으로 정밀하게 논증되기 이전의 다분이 직관적이고 신념적인 기독교적 관점을 말한다. 그래서 양승훈 교수는 세계관을 ‘공기’에 비유한다:

“세계관은 과학과 철학에 비해서는 논리적이지 못하며, 신념에 비해서는 의지적이지 못하고, 신앙에 비해서는 초월적인 면이 부족하지만 철학, 상식, 신념, 신앙 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기독교 세계관의 또 다른 측면은 ‘개방성’(openess)이다. 여기서 개방성이란 말은 현실(차안)의 세계만 고집하는 무신론적 실증주의 세계관도 아니요, 피안과 내세만 주장하는 초월적 세계관도 아니요 양자가 서로 열려 있어서 교통이 가능한 세계관을 말한다. 이에 대해 전광식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단순히 지상 차원, 현실 차원, 역사 차원 속에 닫혀있는 세계를 말하는 게 아니라, 지상을 넘어 천성, 현실을 넘어 내세, 역사를 넘어 피안의 세계를 말하고 수용하므로 ‘열린 세계관’을 얘기한다. 닫힌 세계관에서는 세계와 역사 바깥에 있는 신이 역사와 세계에 간섭하는 것을 부인하지만, 열린 세계관에서는 내세와 초월계를 인정할 뿐 아니라 그 세계가 이 역사와 세계에 영향을 주고 관계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에 하나의 도전이며 동시에 기회이다.

도전: 포트스모던 사고는 인간이 믿을만한 절대진리는 더 이상 없으며 불필요하다는 현대인의 회의와 절망을 대변하고 있다. 여기서는 어떤 권위와 합리적 근거도 부정되며 그렇다고 인류사회를 이끌고 나갈 적극적인 새로운 가치와 원칙은 제시되지 않는다. 다양성과 무질서와 혼돈을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상당수의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비관주의자들이거나 허무주의자에 가깝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주어진 기독교의 진리이건 성숙한 이성에 근거한 계몽주의의 확신이건 간에 이 우주와 세계와 인간을 일관되고 명쾌하게 해명하고 설명하는 모든 담론들을 터무니없다고 여긴다. 심지어 그들은 인류의 미래는 밝다는 게몽주의의 슬로건이나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존엄성이나 가정을 지키자는 보수적 가치가 모두 사람들을 조작하고 억압하기 위한 허구적 이론장치로 간주한다. 그들은 여태까지 무시되었고 감추어졌던 현상이나 의미를 발굴해 내는 데는 유능하지만 새로운 질서와 관계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뉴에이지나 사탄주의같은 유사종교, 펑크나 컬트영화, 힙합음악이나 메탈음악,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의 대중문화, 신학적 해체주의와 종교다원주의의 형태로 기독교에 도전하고 있다.

기회: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동안 기독교를 비지성적이고 비과학적인 과거의 종교로 치부하고 무시해 온 현대의 합리주의와 지성주의, 기술만능주의와 낙관주의를 안으로부터 허물고 있다. 인간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잘되리라는 생각이 자기기만과 착각이라는 사실을 현대주의가 부인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성장의 한계, 생태계의 위기, 자본주의의 끊임없는 불안정, 선진 산업사회의 인간소외현상과 정신병 및 자살의 증가, 뉴미디어와 첨단기술을 통해 일어나는 부작용 등은 과학기술이 가장 발달한 20세기 후반이나 다가올 21세기의 세상 역시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죄에 의해 타락하고 혼돈이 지배하는 현실임을 인정하게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치부가 드러난 모더니즘의 무신론을 형편을 이미 시편기자는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리로다”(시편 2: 4)라고 노래하지 않았는가?

대안: 포스트모던 문화가 범람하는 사회에서는 기독교의 진리를 논리적 변증을 통해 설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포스트모던의 회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문화에 길들은 세대에게는 자신을 비워 죽기까지 낮추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느끼게 하고 실제로 경험하게해야 한다. 미래의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을 체험케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을 무조건 정죄하기 전에 상처받은 후기현대인의 자기분열적 상태를 이해하면서 복음을 통한 치유를 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기독교의 논리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게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요한일서 3:18) 해야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문화의 특성과 포스트모던 세대의 상상력과 느낌과 체험의 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성령의 능력안에서 진리와 사랑을 보여줄 때 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3.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기독교 세계관의 대답

1) 죽은 체계가 아니 살아있는 체계를 보여줌

2) 현상에 대한 겸손

3) 진리의 열정을 보여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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