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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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를 말하다 '영역 주권론'을 선포한 하나님의 사람
아
브라함 카이퍼는 1837년 8월 29일 얀 프레드딕 카이퍼 목사의 장남으로 마아스슬롸이스에서 태어났다. 1841년에는 제이란트
주의 항구 도시 미덜부르크에서 생활하며 장차 선원이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어린 시절 그는 어머니로부터 홈스쿨링을 받았으며,
훗날 그는 아버지의 목회지인 레이던 시에서 김나지움에 입학함으로써 정식적인 학교 교육을 받았다.
특히 카이퍼는 김나지움 재학 시절 역사 교사인 '로봇 프롸인' 박사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그는 프롸인 박사로부터 '칼뱅주의'가 네덜란드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서 배울 수가 있었다.
레 이던대학에 진학한 카이퍼는 고전 어문학을 전공하여 최우수 성적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어 신학부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당시 레이던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특히 교회사 교수인 라우벤호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였다. 또한 교의학 교수인 스콜턴 역시도 자유주의 신학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학교 내의 분위기는 카이퍼로 하여금 전통적 신앙을 흐리게 만들었다.
1859년 네덜란드 북쪽에 위치한 흐로닝헌 대학 신학부에서 칼뱅과 개혁자 아 라스코의 교회관을 비교하는 주제의 논문 모집이 진행될 때에 카이퍼는 그의 재능을 알아본 교수들의 추천으로 논물을 제출할 수 있었다.
카 이퍼가 아 라스코를 연구하려 할 때에 그에 대한 자료들은 매우 협소하였다. 그런데 우연히 자신의 문학 교수인 드 프리스의 부친이며, 하알렘의 목사였던 드 프리스 목사의 개인 서재에서 그 어디서도 구할 수 없었던 아 라스코 전집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카이퍼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결국 카이퍼의 논문은 최우상으로 이어졌다. 카이퍼는 후에 이 논문을 다듬고 수정하여 박사 논문으로 제출할 수가 있었다. 1862년 9월 20일 그는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카이퍼는 학위 취득 후 1863년 헬더란드 주에 속한 베이스트라는 작은 마을 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곳의 교인들은 영적인 열정이 없었다. 카이퍼는 베이스트 교회 목회 시절에 아 라스코 전집을 간행하는 일을 마칠 수가 있었다. 이어 이때부터 그는 정치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카이퍼는 1867년 중부에 있는 우트레흐트의 돔교회로 목회지를 옮기게 되면서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교단 총회에서 실시하는 형식적인 교회 시찰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게 된다. 1868년 교회 선거에 대한 결과는 카이퍼를 비롯한 정통주의자들인 장로, 집사의 선출로 결과가 드러났다. 또한 당시에 카이퍼가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역은 학교 투쟁이라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국공립 학교로부터 독립하려는 기독교국가교육협회에 참여하여 개혁주의적인 기독교 학교 운동을 벌이는 일이었다.
카이퍼는 1870년 암스테르담 교회의 목회자로 부임을 하게 된다. 이때에 그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신문의 편집 일과 글 쓰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신문에 글을 쓰는 일은 그의 개혁 신학과 사회 개혁을 위한 그의 정치 사상을 전달하는 중요한 사역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874년 목회 사역의 마침표를 찍게 된다. 이유는 그가 1874년 선거를 통하여 하원 의원으로 당선이 되었기 때문에 헌법에 따라 그는 목사직을 내려놓고 장로가 되어야 했다.
정치가가 된 카이퍼는 1878년 1월 1일에 반혁명당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어 정책 결정에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 정치는 순조롭지 않았다. 학교 투쟁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마침내 일부 종교적인 학교들 역시도 국가의 법적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카이퍼는 개혁주의 신학을 실행할 수 있는 학교를 설립코자 하였다. 1880년 자유대학교의 설립은 그의 이와 같은 사상에 의해 탄생하게 되었다. 이 학교의 설립 이념은 쉽게 말해 그의 강연 제목인 영역 주권론으로 축약하여 말해 준다.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모든 피조물들 위에 홀로 주권적이시며,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은 모든 삶의 개별 영역들에서 인정되어야 한다."
필자가 볼 때에 카이퍼의 '영역 주권론'은 앞서 필자가 기사화한 프랜스시 A. 쉐퍼 박사의 신학(철학 및 세계관)과 흡사하다. 카이퍼는 자유대학교의 개교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인간 존재의 전 영역 중에서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시는 곳은 단 한 치도 없다."
그 런데 카이퍼가 자유대학을 설립하여 열정을 다해 헌신하던 때에 총회에서는 지교회들에게 신임 목회자들이 어떠한 신학을 추구하든 그것과 무관하게 그들을 무조건 받아들일 것을 권했다. 결국 이를 계기로 카이퍼와 그와 함께한 지도자들은 화란 기독교 개혁 교회 측과 연합 운동을 통해 화란개혁교회라는 새로운 교단을 창립하게 된다. 이를 통해 화란개혁교회는 자유대학교와 캄펜신학교를 교역자 양성 기관으로 가지게 되었다. 이때 캄펜신학교에는 헤르만 바빙크 박사가 교의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1989년은 카이퍼 자신에게 뜻깊은 해였다.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으로부터 명예 법학사 학위를 수여받은 것과 동시에 그에게 칼뱅주의 강연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카이퍼는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향했다. 그는 총 6가지 주제의 강연을 준비했다. 이때에 행한 강연이 바로 <칼뱅주의 강연>이다. 이 강연의 주제는 이렇다.
1. 삶의 체계로서의 칼뱅주의
2. 칼뱅주의와 종교
3. 칼뱅주의와 정치
4. 칼뱅주의와 학문
5. 칼뱅주의와 예술
6. 칼뱅주의와 미래
카 이퍼는 칼뱅주의 강연을 통해 무엇보다 칼뱅주의는 교파나, 신학 체계를 넘어서서 하나의 세계관임을 강력하게 호소했다. 이와 같은 카이퍼의 사상이 바로 필자로 하여금 그를 주목하게 만드는 이유다. 그는 칼뱅주의를 하나의 신학, 교파, 교리 등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카이퍼 자신에게 있어서 칼뱅주의는 성경의 진리에 대한 삶의 체계(방식), 그 자체였다. 바로 이것이 필자로 하여금 그의 사상을 대할 때마다 흥분하게 되는 원인이다.
1901년은 카이퍼의 생애에 있어서 어찌 보면 가장 뜻깊은 해이다. 가톨릭과의 연합 전선을 통해 반혁명당이 선거전에서 승리하게 된 것이다. 그가 네덜란드의 수상이 된 것이다. 이는 카이퍼 자신에게 있어서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정치 체계를 실험할 수 있는 너무나도 좋은 기회였다. 그가 수상이 됨으로 말미암아 자유대학교의 교수직은 헤르만 바빙크가 맡게 되었다.
카이퍼는 생애 말년에 반혁명인 정치학이라는 두 권의 방대한 저서를 출판함과 동시에 성경 66권 가운데 한 권(요한계시록)을 주석하고자 했던 소원을 이루었다. 카이퍼는 84세의 나이로 1920년 11월 8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아브라함 카이퍼. 그는 필자가 존경하고 따르고 싶은 기독교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는 결코 종교적인 영역에서만 활약했던 그러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말대로 삶의 전 영역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고,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진리를 삶을 통한 진리로 증거코자 몸부림쳤던 하나님의 사람이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무엇보다 삶을 통해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그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필요로 한다. 더 이상 사랑이 결핍되고 삶이 없는 딱딱하고 메마른 교리와 신학 등으로 나라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려는 운동은 결코 해답이 아님을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나라, 교회, 주변 이웃들을 살리고 싶다면 그 방법은 오직 하나다.
"성경의 총체적인 진리를 종교의 영역을 넘어서 삶을 통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으로 밝히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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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브라함 카이퍼가 강연한 <칼빈주의 강연>(김기찬 옮김, 크리스천다이제스티 펴냄, 242면, 7,000원) | ||
특히 카이퍼는 김나지움 재학 시절 역사 교사인 '로봇 프롸인' 박사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그는 프롸인 박사로부터 '칼뱅주의'가 네덜란드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서 배울 수가 있었다.
레 이던대학에 진학한 카이퍼는 고전 어문학을 전공하여 최우수 성적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어 신학부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당시 레이던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특히 교회사 교수인 라우벤호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였다. 또한 교의학 교수인 스콜턴 역시도 자유주의 신학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학교 내의 분위기는 카이퍼로 하여금 전통적 신앙을 흐리게 만들었다.
1859년 네덜란드 북쪽에 위치한 흐로닝헌 대학 신학부에서 칼뱅과 개혁자 아 라스코의 교회관을 비교하는 주제의 논문 모집이 진행될 때에 카이퍼는 그의 재능을 알아본 교수들의 추천으로 논물을 제출할 수 있었다.
카 이퍼가 아 라스코를 연구하려 할 때에 그에 대한 자료들은 매우 협소하였다. 그런데 우연히 자신의 문학 교수인 드 프리스의 부친이며, 하알렘의 목사였던 드 프리스 목사의 개인 서재에서 그 어디서도 구할 수 없었던 아 라스코 전집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카이퍼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결국 카이퍼의 논문은 최우상으로 이어졌다. 카이퍼는 후에 이 논문을 다듬고 수정하여 박사 논문으로 제출할 수가 있었다. 1862년 9월 20일 그는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카이퍼는 학위 취득 후 1863년 헬더란드 주에 속한 베이스트라는 작은 마을 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곳의 교인들은 영적인 열정이 없었다. 카이퍼는 베이스트 교회 목회 시절에 아 라스코 전집을 간행하는 일을 마칠 수가 있었다. 이어 이때부터 그는 정치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카이퍼는 1867년 중부에 있는 우트레흐트의 돔교회로 목회지를 옮기게 되면서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교단 총회에서 실시하는 형식적인 교회 시찰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게 된다. 1868년 교회 선거에 대한 결과는 카이퍼를 비롯한 정통주의자들인 장로, 집사의 선출로 결과가 드러났다. 또한 당시에 카이퍼가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역은 학교 투쟁이라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국공립 학교로부터 독립하려는 기독교국가교육협회에 참여하여 개혁주의적인 기독교 학교 운동을 벌이는 일이었다.
카이퍼는 1870년 암스테르담 교회의 목회자로 부임을 하게 된다. 이때에 그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신문의 편집 일과 글 쓰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신문에 글을 쓰는 일은 그의 개혁 신학과 사회 개혁을 위한 그의 정치 사상을 전달하는 중요한 사역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874년 목회 사역의 마침표를 찍게 된다. 이유는 그가 1874년 선거를 통하여 하원 의원으로 당선이 되었기 때문에 헌법에 따라 그는 목사직을 내려놓고 장로가 되어야 했다.
정치가가 된 카이퍼는 1878년 1월 1일에 반혁명당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어 정책 결정에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 정치는 순조롭지 않았다. 학교 투쟁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마침내 일부 종교적인 학교들 역시도 국가의 법적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카이퍼는 개혁주의 신학을 실행할 수 있는 학교를 설립코자 하였다. 1880년 자유대학교의 설립은 그의 이와 같은 사상에 의해 탄생하게 되었다. 이 학교의 설립 이념은 쉽게 말해 그의 강연 제목인 영역 주권론으로 축약하여 말해 준다.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모든 피조물들 위에 홀로 주권적이시며,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은 모든 삶의 개별 영역들에서 인정되어야 한다."
필자가 볼 때에 카이퍼의 '영역 주권론'은 앞서 필자가 기사화한 프랜스시 A. 쉐퍼 박사의 신학(철학 및 세계관)과 흡사하다. 카이퍼는 자유대학교의 개교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인간 존재의 전 영역 중에서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시는 곳은 단 한 치도 없다."
그 런데 카이퍼가 자유대학을 설립하여 열정을 다해 헌신하던 때에 총회에서는 지교회들에게 신임 목회자들이 어떠한 신학을 추구하든 그것과 무관하게 그들을 무조건 받아들일 것을 권했다. 결국 이를 계기로 카이퍼와 그와 함께한 지도자들은 화란 기독교 개혁 교회 측과 연합 운동을 통해 화란개혁교회라는 새로운 교단을 창립하게 된다. 이를 통해 화란개혁교회는 자유대학교와 캄펜신학교를 교역자 양성 기관으로 가지게 되었다. 이때 캄펜신학교에는 헤르만 바빙크 박사가 교의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1989년은 카이퍼 자신에게 뜻깊은 해였다.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으로부터 명예 법학사 학위를 수여받은 것과 동시에 그에게 칼뱅주의 강연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카이퍼는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향했다. 그는 총 6가지 주제의 강연을 준비했다. 이때에 행한 강연이 바로 <칼뱅주의 강연>이다. 이 강연의 주제는 이렇다.
1. 삶의 체계로서의 칼뱅주의
2. 칼뱅주의와 종교
3. 칼뱅주의와 정치
4. 칼뱅주의와 학문
5. 칼뱅주의와 예술
6. 칼뱅주의와 미래
카 이퍼는 칼뱅주의 강연을 통해 무엇보다 칼뱅주의는 교파나, 신학 체계를 넘어서서 하나의 세계관임을 강력하게 호소했다. 이와 같은 카이퍼의 사상이 바로 필자로 하여금 그를 주목하게 만드는 이유다. 그는 칼뱅주의를 하나의 신학, 교파, 교리 등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카이퍼 자신에게 있어서 칼뱅주의는 성경의 진리에 대한 삶의 체계(방식), 그 자체였다. 바로 이것이 필자로 하여금 그의 사상을 대할 때마다 흥분하게 되는 원인이다.
1901년은 카이퍼의 생애에 있어서 어찌 보면 가장 뜻깊은 해이다. 가톨릭과의 연합 전선을 통해 반혁명당이 선거전에서 승리하게 된 것이다. 그가 네덜란드의 수상이 된 것이다. 이는 카이퍼 자신에게 있어서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정치 체계를 실험할 수 있는 너무나도 좋은 기회였다. 그가 수상이 됨으로 말미암아 자유대학교의 교수직은 헤르만 바빙크가 맡게 되었다.
카이퍼는 생애 말년에 반혁명인 정치학이라는 두 권의 방대한 저서를 출판함과 동시에 성경 66권 가운데 한 권(요한계시록)을 주석하고자 했던 소원을 이루었다. 카이퍼는 84세의 나이로 1920년 11월 8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아브라함 카이퍼. 그는 필자가 존경하고 따르고 싶은 기독교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는 결코 종교적인 영역에서만 활약했던 그러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말대로 삶의 전 영역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고,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진리를 삶을 통한 진리로 증거코자 몸부림쳤던 하나님의 사람이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무엇보다 삶을 통해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그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필요로 한다. 더 이상 사랑이 결핍되고 삶이 없는 딱딱하고 메마른 교리와 신학 등으로 나라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려는 운동은 결코 해답이 아님을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나라, 교회, 주변 이웃들을 살리고 싶다면 그 방법은 오직 하나다.
"성경의 총체적인 진리를 종교의 영역을 넘어서 삶을 통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으로 밝히 드러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