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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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우찌무라(內村鑑三)의 ‘두 개의 J’
양현혜(전주대학교 기독교학부 겸임교수)
1. 들어가는 말
2. 우찌무라의 ‘두 개의 J’
3. 함석헌의 우찌무라 사상 이해와 그 계승 양식
4. 함석헌의 역사철학 : 창조적 수고자(受苦者)로서의 조선의 사명
5. 결론을 대신하여
1. 들어가는 말
함 석헌(1901-1989)은 종교 사상가, 언론인, 민주화 운동가 등의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면모는 그가 기독교 사상을 동양의 여러 종교철학 사상과 소통시키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 고난의 한국 근현대사의 한복판에서 역사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과정에서 표출된 것이었다. 그는 한국 기독교에게 부박(浮薄)한 수입 종교로서의 ‘서구적 기독교’의 편협한 틀을 벗어 던지기를 요구하며 독창적인 기독교 사상을 전개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함석헌을 한국 개신교사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기독교적 인물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 하는 것에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함석헌은 일본인 우찌무라 간죠(內村鑑三 : 1861-1930)를 스승으로 자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던 1928년 우찌무라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지금도 자기 안에 “우찌무라는 영원히 살아있다”고 당당히 밝히고 있다. 근대 한국의 민족적 자각은 무엇보다도 우선 일본과의 대결에서 형성되는 측면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함석헌과 우찌무라의 사제 관계는 일견 불가해해 보인다.
이에 본고에서는 함석헌이 우찌무라의 사상적 독창성이라고 불리는 ‘두 개의 J’라는 사상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으며, 그것을 어떻게 주체적으로 전개해 갔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여지는 함석헌의 사상적 독창성은 무엇이며 이것이 우찌무라의 사상적 틀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를, ??성서조선??을 중심으로 분석하려고 한다.
2. 우찌무라의 ‘두 개의 J’
일본의 전통적인 지배계급이었던 사무라이 계급의 후예로서 우찌무라는 평생 일본인임에 강한 자긍심을 가졌다. 그에게 있어서 일본은 “나의 기도와 기대와 봉사를 아낌없이 바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였다. 이 점은 우찌무라가 250년 동안 사교(邪敎)로서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을 위협하는 서양의 종교로 간주되었던 기독교에 입교한 1878년 이후에도 일본인이란 자각은 그의 삶의 중심축의 하나였다. 그는 일본인이라는 자긍심을 지키면서 기독교인이고자 했다. 삿뽀로(札幌)농업학교를 졸업하면서 우찌무라는 자신을 예수와 일본(Jesus and Japan)에 헌신할 것을 맹세했는데, 이 ‘두 개의 J’에 대한 헌신이 그의 일생의 과제가 되었다. 후일 우찌무라는 이 ‘두 개의 J’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나 는 두 개의 J를 사랑하고 그 외의 다른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는 예수 (Jesus)이고 또 하나는 일본(Japan)이다. 예수인가 일본인가, 나는 그 중 어느 쪽을 보다 더 사랑하는지 알지 못한다.……나는 모든 친구를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예수와 일본을 잃는 것은 없을 것이다.……예수와 일본, 나의 신앙은 하나의 중심을 가진 원이 아니다. 그것은 두 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이다. 나의 심정과 지성은 이 두 개의 사랑하는 이름 주위를 회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강하게 하는 것을 안다. 예수는 일본에 대한 나의 사랑을 강하게 하고 고결하게 한다. 그리고 일본은 예수에 대한 나의 사랑에 명확한 목표를 부여한다. 이 두 개가 없다면 나는 단순한 몽상가가 되거나 광신자가 되어 무정형(無定形)의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일 본 개신교의 초기 신자들뿐만 아니라 비서구의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애국심과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가는 보편적인 사상적 과제의 하나였다. 우찌무라가 이 문제를 해결한 방식은 기독교 신앙과 애국심이 상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각이 하나의 고유한 극점으로서 서로를 상대화 내지 구체화한다는 변증법적인 총합관계였다. 따라서 이 양자에 대한 우찌무라의 사랑이 상호 극적인 긴장관계를 이루는 곳에 그의 고유한 사상과 행동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우찌무라의 사상적 틀은 그의 기독교 사상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기독교로부터 형식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을 구별하여 그 본질적인 것에 자신을 직결시키고자 하였다. 우찌무라는 1878년 세례를 받은 이후에도 깊은 죄의식에 시달렸다. 그가 본격적인 회심을 체험한 것은 애머스트대학(Amast University)에서 유학생활을 보낸 때였다. 자기중심적 경향을 극복하고자 괴로워하던 우찌무라에게 씨리(J. H. Seelye) 총장은 어느날 “우찌무라, 너는 네 자신의 마음속만 보니까 안 되는 거야. 너는 네 밖을 보아야 해. 왜 자기 성찰을 그만두고 십자가에 달려서 네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가. 너는 어린 아이가 나무를 화분에 심어놓고 그 성장을 보려고 매일 그 놈을 뿌리채 뽑아 보는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있어. 왜 하나님과 햇빛에 맡기고 안심하고 너의 성장을 기다리지 않는가”라고 말하였다.
전형적인 속죄신앙을 표현하는 이 한마디의 시사에 우찌무라는 회심했다. 이후 우찌무라는 기독교의 복음은 무자격자인 인간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의해 구원된다는 속죄신앙을 축으로 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속죄신앙은 한편으로는 구원에 있어서 신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그 이외의 어떠한 인간적인 권위로부터도 독립?자유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우찌무라는 인식했다. 따라서 신에게만 의지함으로써 자기 안에서 일하는 신의 섭리와 경륜을 의식하고 어떠한 인간적인 능력이나 원조에 의지하지 않는 자유?독립의 단독자로서 서는 것이 기독교인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신앙에 의거한 독립, 즉 ‘의뢰적 독립’이야말로 기독교의 양보할 수 없는 진리라고 우찌무라는 인식했던 것이다.
우 찌무라의 신앙은 기독교를 단순히 서구적 문명 추구를 위한 교양적 종교나 세계 시민적 취향으로 받아들인 당시 일본의 기독교인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에는 기독교의 본질과 서구적 기독교의 존재양식을 준별하는 ‘탈서구적 기독교’라는 발상이 내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우찌무라는 진정한 기독교인은 타인의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만 구원받는 것이며, 또한 일본인은 서구인과 비교하여 정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열등하지 않고 오히려 독자적인 것을 가졌다는 점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발상은 그의 기독교 이해의 두 번째 특징인 국민적 정체성을 담지한 기독교의 존재양식의 모색으로 이어졌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일본국에 있어서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교회나 외국 선교사에게 의지할 아무런 필요도 없다.……우리들은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여 그것을 일본인 고유의 것으로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외부로부터 이식되는 것이 아니고 내부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우리들의 지론이다..
우찌무라에게 있어서 일본을 구원할 기독교의 복음은 외국 선교사에 의지하지 않고 일본인의 심성 안에서 체득된 것이어야 했다. 따라서 그는 “일본혼이 전능자의 숨결에 접촉한 곳에 그 곳에 일본적 기독교가 있다. 그 기독교는 자유이다. 독립이다. 독창적이다. 생산적이다. 참 기독교는 모두 그런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다. 그가 말하는 ‘일본혼’은 일본문화 전통에 의해 배양?형성된 일본인 심성의 이상상으로서 구체적으로는 무사도를 의미했다.
우찌 무라에게 있어서 무사도적 삶이란 무엇보다도 사리사욕에 좌우되지 않고 청렴결백을 중시하고 정의를 위해 신명을 다 바치는 고상한 윤리적 정신을 의미했다. 우찌무라는 서구인에 의해 ‘불쌍한 이교적인 것’으로 폄하된 무사도는 일본 독자의 국민성으로 세계 역사에 공헌할 보편적인 가치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무사도야말로 일본의 전통문화에 있던 “복음의 이교적 요소”, 즉 일본문화의 복음 전사적(前史的) 의의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무사도에 퓨리턴적 기독교가 접맥됨으로써 성립하는 소위 ‘무사도적 기독교’야말로 일본을 구제한다고 제창하기도 했다.
또한 우찌무라는 신의 섭리가 일본 안에도 있다고 인식하고 1894년 ??지리학고(地理學考)??를 저술하여 세계사 속에서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와 사명에 대해 논하였다. 그는 세계 문명의 조류와 발전 및 일본의 지리적 위치를 탐구하면서 서양문명이 서진(西進)하고 동양문명이 동진(東進)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일본이 동서 양방의 대양을 향해 펼쳐진 지리적 위치를 점하고 있음으로 ‘일본의 천직’은 동서양 양 문명을 매개하는 중보자로서의 세계사적 사명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즉 우찌무라는 동서양 양 문명의 정수가 모이는 일본에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정신적 유산이 창출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만년에 우찌무라는 “불교가 인도에서 멸망한 후에 일본에 있어서 이것을 보존하고 유교가 중국에 있어서 쇠퇴하였으나 후일 일본에 있어서 이것을 선명하게 한 일본인”은 “종교적 민족”이라고 규정하고, 일본인이 “이제 또 서구에서 버려진 기독교를 일본에서 보존?선명하게 부흥시켜 다시 이것을 새로운 형태로 세계에 전파”할 것을 기대했다. 일본에 대한 이러한 우찌무라의 이해는 기독교 전래 이전의 일본문화의 의의를 탐구하고 세계사에서 일본의 사명을 규명하려고 하는 것으로, 복음 실천을 위한 장(場)으로서 일본과, 복음적 가치를 역사 속에서 창출할 내재적 주체로서의 민족이라는 중요한 발상이 함축되어 있었다.
한 편 ‘두 개의 J’에 기초한 우찌무라의 사상은 일본이 기독교를 일본적인 기독교로 구체화하는 주체인 것과 같이 기독교 역시 일본을 정화시키는 주체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찌무라의 기독교 이해의 세 번째 특징은 그의 기독교가 일본의 역사적 현실을 신의 말씀 아래 있는 현실로서 이해하고 예언자적 경고와 항거를 계속하는 예언자적 기독교였다는 점이었다.
우찌무라는 성서의 말씀과 인류의 역사가 지향하는 곳이 일치한다는 확신 아래, 인간의 역사를 성서적 진리의 실험으로서 해석하면서 성서의 말씀을 역사에 대입하여 그 현재를 분석하고 장래를 예언해 가려는 ‘성서의 예언적 연구’를 대단히 중요시했다. 따라서 성서가 증언하는 신의 역사, 경륜의 섭리는 역사 안에서 실현되기 때문에 이것을 역사적 실험에 의해 분명히 하는 것이 그의 성서해석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나아가 우찌무라는 이러한 ‘성서의 예언적 연구’에 의거해 절대주의적 권력체제와 자본주의 경제발전을 추구해 가는 명치일본에 대해 ??만조보(万朝報)??, ??동경독립잡지(東京獨立雜誌)?? 등을 통해 통렬한 사회비판을 전개했다. 우찌무라의 사회비판은 ‘정의’와 ‘평민’이라는 개념에 의거했다. 전쟁과 영토확장은 흥국(興國)이 아니고 망국(亡國)의 길이며 “정의는 국가보다 큰 것으로 국가의 기초를 정의 위에 세우는 나라만이 영원히 번영한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이러한 우찌무라의 사회평론은 그의 역사 이해와 연결되어 있었다. 우찌무라는 1899년 ??흥국사담(興國史談)??을 저술하여 그의 역사관을 피력했다. 그에 의하면 역사는 인류 진보의 기록이고 인류의 발육학이었다. 한 나라가 일어나 한 종류의 문명을 완성하고 그 활력을 다해 인류 진보에 공헌할 수 없게 되면 다른 나라가 일어나 그 문명을 계승해 이것을 보존?개량해 그 국가 특유의 장점을 더 해 다음 국민에게 양도한다는 것이다. 즉 국가의 융성은 진리의 현양에 의해 규정된다고 우찌무라는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관에 서서 우찌무라는 정의 위에 국가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참된 애국자의 책임이고 그 이외의 것을 가지고 나라의 융성을 도모하려는 것은 위선적 애국주의라 하여 준열한 사회 비판을 전개하였다. 또한 우찌무라가 ‘평민’이라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과 자력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자의 칭호이다. 강자의 비호에 의지해 자기를 일으켜 세우려 하지 않고 정부의 위력을 이용해서 부를 만들려고 하지 않고 위계훈장(位階勳章)을 이용해서 그 몸의 천함을 덮으려고 하지 않고, 단지 공평한 경쟁과 자기의 역량만을 가지고 세상에 대처하려고 하는 자”를 의미했다. 즉 우찌무라가 말하는 평민이란 근본적으로 도덕적 종교적 개념으로, 신에 의해 전인격적 변혁을 통해 자유와 독립을 부여받음으로써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는 예언자적 인간이었던 것이다.
우찌무라의 예언자적 특성은 ‘우찌무라 불경사건’에서 잘 보여진다. 1891년 1월 동경제일고등학교 개학식에서 행해진 ‘교육칙어’ 봉독식에서 우찌무라는 종교적 ‘예배’에 해당하는 ‘봉배’는 자신의 신앙적 양심에 위반된다고 생각하여 경례를 하지 않은 채 강단을 내려왔다. 이것이 전국을 들끓게 한 ‘우찌무라 불경사건’인데, 우찌무라에 대한 공격은 우찌무라를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그의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드디어 기독교와 국가의 충돌문제로 발전하였다.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근간으로 근대국가를 확립하려는 일본의 국가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우찌무라는 ‘국적(國敵)’의 박해를 감내해야만 했다.
우찌무라는 권력의 우상화에 대한 예언자적 부정의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15년 후 러일전쟁 개전(開戰)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도 우찌무라는 러일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적하면서 “전쟁의 이익은 강도의 이익으로 검을 가지고 국운(國運)의 전진을 꾀하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다”고 절대적 ‘비전론(非戰論)’을 주창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환영받지 못했으며 그 결과 근무하고 있던 잡지사를 사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우찌무라의 예언자적 사상과 행동은 부국강병을 국시로 하여 근대적인 절대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체제를 확립하려는 근대일본을 대변하여 이윤추구와 대외적 침략까지도 주장하며 탈아론(脫亞論)을 전개했던 후쿠자와(福澤諭吉)와 극명하게 비교되는 것으로 근대 일본사상사에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
우찌무라의 삶은 마치 타원형의 두 극점과 같이 일본과 예수가 진리의 양극으로서 동시에 성립하는 두 개의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 중 어느 하나를 부정하면 그의 사상과 행동의 근원은 붕괴되는 것이었다. 그가 성서의 진리를 스스로의 것으로 하여 예언자적 직관과 통찰을 역사적 상황에 대해 자유롭게 구사하면서도, 그것을 일본의 정신풍토에 이질적인 것으로서 보고 스스로를 문화적 전통의 밖에 두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고유한 방식으로 결합시키고 있었다는 점에 그의 독창성이 있었다.
우찌무라가 주장한 무교회주의도 이러한 ‘두 개의 J’라는 사상적 산물이었다. 그는 “제도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언사(言辭)도 아니다. 기독교는 사람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다.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기독교가 만일 이런 것이 아니라면, 늘 있어서 살아있는 그가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영원히 살아있는 그리스도 자신에게 직결하는 ‘의뢰적 독립’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본 우찌무라에게는 신과 인간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중개하려는 모든 인간적 종교제도, 의식 또는 교리나 성직제도는 비판과 저항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각자의 실존적 실험에 의해 스스로의 것으로 체득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누구와 함께 하거나 대신해 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의뢰적 독립’은 그것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정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에 의거해서 우찌무라는 제도적 교회를 인위적이며 기교적인 인간중심주의라고 배격하고,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연합하여 만들어 낸 사랑의 공동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우찌무라는 외국 선교부의 일본지부와 같은 형태를 보인 당시 일본교회의 존재양식을 비판했다. 그는 독일에서 독일교회가 영국에서는 감리교가 출현된 것과 같이 일본에서도 선교사들의 손을 빌리지 않은 고유한 일본교회의 존재양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미술적 간소함을 이상”으로 하는 일본인에게 교회 형식은 가능한 간소한 표현을 취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일본적인 기독교로서의 무교회의 존재형식도 복잡하고 호화로운 형식보다는 간단하고 간소한 형식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즉 그는 기독교를 신앙과 성서만으로 단순화하여 평신도의 성서공부 모임이라는 최소한의 형식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소박한 자연스러움에 맡기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우찌무라의 무교회주의는 명백한 하나의 교회론적 입장으로 설정되어 있으나, 그것은 교회의 특정한 역사적 형태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추상화된 비판적 정신의 표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 함석헌을 비롯한 무교회주의 2세대 지도자들의 우찌무라 계승을 둘러싼 분열은 바로 우찌무라의 무교회주의의 이러한 성격 때문이었다.
이상 우찌무라의 ‘두 개의 J’라는 사상에 대해 검토했는데, 그의 사상이 가지는 한계를 여기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후술할 함석헌과의 사상적 연관 관계를 파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로서, 우찌무라가 취한 행동양식은 국가주의의 한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우찌무라가 그의 비전론을 관철하는 방식을 통해서 잘 나타난다. 그가 비전론을 주장하면서도 소집영장을 받은 비전론자는 병역을 거부하여 타인을 자기 대신 희생시키기보다는 참전하여 비참한 전사(戰死)를 거둬야 한다는 ‘비전론자의 양심적 전사’를 주장하였다. 즉 그는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권력에 대한 구체적인 저항을 동반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참전’한다는 자기 기만적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찌무라의 이러한 모순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계승되었다. 야나이하라(矢內原忠雄)나 이시하라(石原兵衛) 같은 비전론을 관철한 그룹에서조차도 징병거부를 호소하는 등의 정치적 행동으로 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결국 그들 역시 국가와의 충돌을 피해 자신의 평화주의를 순수하게 비정치적인 차원에 제한한다는 ‘애국적 평화주의’의 자기 모순에 빠졌던 것이다.
또 한 우찌무라는 일본의 현실에 대해 엄격한 예언자적 비판으로 임했으나, 식민지 조선문제에 대해서는 인간적 동정 이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 하였다. 우찌무라는 조선의 독립문제에 대하여 “영국의 스코틀랜드와 같이 되면 좋지 않은가”라는 견해를 피력하여 함석헌과 조선 무교회주의자들을 적지 않게 실망시켰다. 함석헌의 기대와 달리 우찌무라의 예언자적 사회비평이 조선독립을 지지하는 데까지 확대되지 못한 데에도 역시 일본에 대한 그의 강한 애착이 원인이었다. 그에게 있어 일본의 현실은 예언자적 비판의 대상이었으나, 일본 그 자체는 예언자적 비판의 틀 밖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식민지 문제에 대한 그의 둔감성은 일본에 대한 그의 강한 애착과 더불어 그의 역사관이 서구 중심적 문명사관으로부터 제약받고 있었다는 측면이 강하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진보를 진리의 현양, 즉 “자유의 발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규정한 우찌무라의 역사관은 그의 예언자적 사회 평론과 일맥상통하는 측면도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의 서구 우월주의적 담론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우찌무라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국 민의 진보, 퇴보 혹은 융성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그 향유하는 자유의 많고 적음에 의해 결정되는 문제이다. 역사적 인종 가운데 자유의 관념에 가장 결여되어 있는 것은 트라니안(Tranian) 인종 즉 황인종이다. 그들은 왕자 있는 것은 알아도 자기 있는 것은 모르고, 그들은 복종하는 것은 알아도 자립하는 것은 모른다. 충효는 그들의 유일한 도덕이고, 그들은 연장자에게 의지하는 것은 있어도 사람들이 서로를 믿고 사회를 조직하는 방법은 알지 못 한다. 그들 사회에 있어서 개인은 단위(Unit)가 아니라 분자(Atom)이다. 자주자립한 하나의 개인이 아니고 무의식의 물체이다. 황인종에게 왕은 만유(萬有)이며 백성은 허무이다.……이들 국가는 인간의 군집체에 머물러 의사를 갖춘 개인의 조직인 유기체에 이르지 못하였다. 황인종의 다수는 20세기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거의 이러한 수준에 있는 것이다.……몽고인, 만주인, 그리고 조선인, 중국인 등 그 외관적인 문명은 무엇이라 하더라도 그 기본적인 인생관에 있어서 그들은 역시 바빌론 문명 이전의 황인종으로, 그들은 역사적으로 가장 열등한 사람들로 거의 자유의 맹아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다.
우찌무라는 황인종은 자유의 관념이 결핍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물의 이기를 볼 줄은 알아도 그 이치를 투시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사상, 과학, 예술, 권리 등 ‘순수 진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파악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열등인종이라고 규정했다. 반면 자유라는 것은 셈 인종에 의해 비로소 파악되고 그것을 제도로 만들어 사회적 공유물로 만든 것은 아리아 인종으로 이들의 출현에 의해 현대사라는 것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현대 서구문명의 기원은 아리아인이 양성한 자주독립의 관념, 준법정신, 형이상학적 경향 등을 발달시킨 것이라고 인식했다.
우찌무라에게 있어서 중국과 더불어 조선은 퇴행적 문명의 대명사로서, 그 특징은 오직 고대문명을 현재까지 보존해 오고 있다는 점에 있을 뿐이라고 인식했다. 또한 “인도에 있어서 영국정부는 결코 완전한 것은 아니나 그러나 인도인 종래의 정부에 비하면 한층 휴머니즘적인 것이라고 말해야만 하고, 북아시아에 있어서 러시아의 정치, 베트남에서의 프랑스의 정치도 동일하다”고 하여 서구의 제국주의적 통치를 용인했다.
이러한 우찌무라의 생각의 배경에는 서구 제국주의적 세계 통치를 생물학적 우등성의 결과로서의 우월한 정신문명에 근거한 것이라고 정당화하려는 서구 우월주의적 인종주의가 있었다. 사이드(E. Said)가 지적한 대로 서구가 초월적인 위치에서 자신들의 문화적 정치적 규범 안에 비서구를 봉쇄하려는 전형적인 서구 우월주의적 담론이었다. 이러한 담론에서 아시아인에게는 자율성, 형이상학적 이성과 추상적 사고능력, 그리고 도덕성이 결핍된 열성(劣性) 이미지의 인간 타입이 고유한 인종학적 본질로서 부여되어, 아시아는 유럽의 ‘진보’에 대비되는 ‘정체’ 사회로서 ‘재표상(re-presentation)’되었던 것이다.
우찌무라 에게 있어서도 일본을 현실적으로 상대화시킬 타자란 서구였다. 거만한 서구 여행자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일본의 고유한 심성과 사명, 그리고 명치유신에 의해 봉건제로부터 입헌군주제로 변화하여 서구와 동일한 ‘자유평등의 정신’을 구현한 일본인의 능력을 다름 아닌 서구인에게 알리는 것이 그의 대외인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의 타자 인식에서도 항상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일본’과 ‘서구’와의 관계였던 것이다.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인식이 결여된 서구지향의 한 축만으로 그의 타자 인식이 구성되어 있는 한, 그의 ‘두개의 J’라는 사상조차도 서구 우월주의적 담론이라는 당시의 ‘지적(知的) 제국주의’의 큰 틀에 함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우찌무라의 사상으로부터 함석헌은 어떠한 영향을 받고 그의 사상을 주체적으로 전개해 나갔는가를 고찰해 보자.
3. 함석헌의 우찌무라 사상 이해와 그 계승 양식
함 석헌은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 학생 대열의 선두에 서서 이 사건에 참여했다. 이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난 후, 그는 다니던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그만두고 고향 용암포로 돌아와 분노와 울분의 2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학업을 계속하려는 욕구가 생긴 함석헌은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의 본산이라고 평판이 높았던 오산학교에 1921년 편입학했다. 그는 이승훈, 유영모 등을 구심점으로 하여 기독교 신앙과 조국애를 병존시키고 있었던 오산학교의 학풍을 통해 기독교 신앙과 민족애를 키워 나갔다.
그러나 동경 유학을 하면서 함석헌은 기독교 신앙이 과연 조국을 식민지 상태에서 구원할 수 있을까 하는 깊은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조선사회는 3.1 독립운동의 실패를 계기로 막연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조선의 현상과 미래의 전망을 보다 과학적으로 설명해 줄 새로운 사상적 틀을 요구하였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일본 등을 통해 맑스주의가 도입되었다.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계몽적 민족주의자들이 ‘우승열패(優勝劣敗)’라는 이론적 틀에 자승자박되어 총독부와 타협?변절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맑스주의는 조선사회의 새로운 지도적 사회사상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함석헌이 유학한 동경고등사범학교의 조선인 유학생 50명 중 대부분이 맑스주의의 추종자가 되었고 기독교 신앙을 가진 학생들은 소수자로 소외되는 분위기였다. 함석헌이 우찌무라를 만났을 때는 ‘과연 조국을 식민지 상태에서 구원할 힘을 가진 사상은 기독교인가 공산주의인가’를 고뇌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함석헌은 1924년 가을 우찌무라의 ‘에레미야서 강의’를 들으면서 조국을 구원할 힘은 기독교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예언자는 절대자의 위임을 받은 자로서 진리 파지(把持)에 의한 용기에 근거해 최후의 악의 근본에까지 돌격하는 사람으로서 눈앞의 성과에 좌우되는 나약함이 없다고 그는 인식했다. 또한 예언자의 애국은 편파적인 국수주의가 아니라 “영원의 진리, 보편적 정의”에 동포를 이끄는 애국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함석헌은 우찌무라의 예언자적 실존에서 조국과 기독교 신앙을 결합시킬 방법을 발견하고 이것이야말로 조국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이 발견 앞에서 그는 “지금부터 어떠한 사태, 어떠한 변동이 있어도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고 신 앞에서 맹세했다”고 한다. 이 점은 함석헌을 우찌무라에게 인도한 그의 평생의 동료 김교신에게도 동일하였던 바, 김교신은 무엇보다도 우찌무라를 일본의 “예언자”로 보았고 그의 ‘예언자적 실존’이라는 애국의 방법에 매료되었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함석헌 과 김교신은 이러한 확신에서 자신들과 모든 조선인들을 예언자적 실존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계몽적 목적으로 1927년 ??성서조선??이라는 신앙 동인지를 창간했다. 즉 성서라는 보편적 진리를 조선이라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장(場)에서 받아들이고(Bible and Korea), 성서의 진리를 조선의 문화와 역사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사상적 원점으로 세우는 것(Bible to Korea)에 의해, 조선을 신의 세계 질서를 대망하며 증거하는 존재(Korea on the Bible)로 형성시켜 가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두 개의 J’에의 헌신이라는 우찌무라의 사상과 행동에 촉발되어 조국과 기독교 신앙을 예언을 통해 총합하려는 시도였다.
함석헌과 김교신이 우찌무라의 무교회주의를 수용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그들은 우찌무라가 주장한 ‘의뢰적 독립’, 즉 신과 자신을 직접 연결함으로써 자신을 세상에 대해 자유하고 독립한 자아로 세우는 것이 기독교의 근간이며 예언자의 기본적인 소양이라고 보았다. 이 자유?독립의 정신은 형식에 가둬질 수 없는 것으로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형식이 아닌 정신이라고 보았다. 교회의 제도나 의식, 그리고 성직자는 있어도 이 정신이 없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고 천박한 종교적 ‘도락(道樂)’에 불과한 것이라고 인식했다. 즉 신 앞에 선 자유?독립의 단독자로서 스스로를 정립하는 이 절대적 책임과 의무를 중개하여 대신해 주겠다는 모든 교회제도와 조직을 교회주의적인 우상으로서 배격한 것이었다.
따라서 함석헌과 김교신은 성서와 신앙만으로 간소화된 무교회의 집회 방식을 수용했다. 여기에는 조선인으로서 민족적 자각을 가지고 신과 스스로를 직결하려는 ‘의뢰적 독립’보다는 서구적 의식과 제도 속에서 졸고 있었던 당시의 조선 기독교의 대세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대결이 내포되어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무교회주의 사상에 있어서 교회론은 사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인” 부차적인 것이었다. 오히려 무교회주의 정신의 핵심은 기독교 복음의 진리, 다시 말해 자유?독립의 비판적 항거의 정신을 체득하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들의 무교회주의 이해는 그들이 우찌무라 사후 그를 어떻게 계승해 갈 것인가를 둘러싼 무교회주의 2세대 지도자 들 사이에 일어난 분열상에 대한 태도에서도 명백히 나타났다.
우찌무라 사후 무교회주의자들은 그의 무교회주의를 교회론과 관련된 하나의 교파적 주장인가 혹은 기독교 전반에 관련된 정신인가를 둘러싸고 대립했다. 또한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치닫는 전쟁상황에 대해, 복음만 주장하며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해 방관할 것인가, 아니면 복음과 예언을 병행하여 침략전쟁에 대해 비판?저항할 인가를 놓고 전자와 후자의 입장은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이러한 무교회 2세대 내의 갈등에 대해 김교신과 함석헌은 예언과 분리된 우찌무라의 무교회주의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무교회주의란 무엇보다도 “그 시대의 나라 움직임에 대응해 모든 진리의 적에게 대항하여 새롭게 선전포고하는 정신”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그들을 움직인 진정한 동인은 무교회주의의 전도사가 되어 기성교회와 대적하며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민족에 대해 예언자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강열한 사명의식이었다. 그들은 우찌무라가 ‘이집트를 열애한 이집트의 예언자’였다면 자신들은 그와 ‘시대와 처지가 다르다’는 것을 이미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이스라엘의 예언자와 같이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고 있던 조선민족을 위로하며 그들이 망각하고 있는 조선역사의 세계사적 의의와 사명을 해명해야 한다는 주체적 자각이 있었던 것이다.
지리 교사로서 김교신이 ??조선지리소고??를 쓴 것은 이 때문이었다. 1934년 집필한 이 논문에서 김교신은 조선의 위치와 정치적 운명과의 관계를 역사라는 틀 속에서 설명하려고 노력하며, 조선반도의 위치를 “넉넉히 한 살림을 지지할 만한 강산이요, 넉넉히 인류의 역사에 큰 공헌을 제공할 활무대”라고 논하고 “동양의 범백(凡百) 고난도 이 땅에 집중되었거니와 동양에서 산출하여야 할 바 무슨 고상한 사상, 동반구의 반만년의 총량을 대용광로에 다려낸 액키스는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보리라”고 전망했다. 이러한 그의 이해는 당시 일제의 ‘반도정체론’에 대항해서 청소년들에게 국토 사랑과 더불어 희망적인 미래상을 제시하려는 목적에서였다. 한편 역사 교사로서 함석헌은 조선역사가 내포하고 있던 세계사 속에서의 사명을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4. 함석헌의 역사철학: 창조적 수고자(受苦者)로서의 조선의 사명
함 석헌은 조선역사의 사명을 규명하여 어린 학생들의 “젊은 가슴에 영광스러운 조국의 역사를 안겨줄” 의도로 조선사 연구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가 막상 발견한 조선의 역사상은 굴욕과 좌절 그리고 실패의 연속인 고난의 역사였다. 여기에서 그는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 갈 것인가 하는 사관의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사색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맹목적 운명과 예측할 수 없는 유전(流轉)과 무자비한 자연정복과 단순한 물질 혹은 기계력에 의한 역사”로 보는 관점으로는, 조선역사의 고난은 ‘열등’의 증거이며, 또한 조선의 미래 역시 ‘암흑’으로밖에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함석헌은 고난이라는 사실이 갖는 의미를 반전시킬 수 있는 해석을 제공할 사관을 정립해야만 했다.
여기에서 함석헌은 “헤매이는 한 영혼을 사랑하기를 헤매이지 않는 아흔 아홉보다 더 사랑하는 것인 즉, 그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내버릴리가 없는” 신의 사랑이 인류 역사의 동인이고 따라서 인류사의 목적은 전 인류의 구원이라고 보는 “은혜의 섭리”에 대한 그의 신앙에 의지하며 자신의 사관을 정립하려 하였다. 이러한 사색 속에서 집필된 일련의 역사 연구가 ?역사에 나타난 신의 섭리,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사?, ?히브리서 강의? 등이었다.
함석헌은 역사를 만물의 창조에까지 소급하여 논하고 있다. 그는 창세기와 더불어 요한복음을 텍스트로 창조를 설명하면서, 우주는 “신의 로고스가 자기를 포기하고 그 영원 무궁의 자리에서 내려와 만물 속에 거함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신이 스스로를 기꺼이 포기하고 한정했기 때문에 만물이 탄생한 것이라 보았다. 즉 우주는 신의 로고스의 죽음에 의해 탄생된 것으로 이것은 자기 포기라는 고통을 수반한 신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함석헌은 파악했던 것이다.
또한 함석헌은 만물이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띄는 것은 신이 그 자신의 무한성을 표현한 것이지만 이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하나’를 예상한다고 보았다. 진화의 과정은 복잡화인 동시에 신이라는 일자(一者)를 향해 가는 통일의 노력이기 때문에 따라서 다양한 만물은 창조이래 ‘하나의 개체’였다고 함석헌은 인식했다. 이러한 만물의 진화 과정은 결국 신의 아가페에서 “흘러나오는 과정이고 또 거기로 흘러 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신의 사랑은 만물의 연원이고 동시에 만물의 귀착점이라고 그는 파악했다. 이렇게 함석헌은 역사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신의 아가페 안에서 만물은 독자성과 다양성을 유지하면서도 결코 분리되어 있는 개체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함석헌은 우주의 모든 현상이 신의 아가페를 발하는 것이지만 “자연보다 이 음성을 발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진보란 물질의 향상이 아니라 가치의 실현을 의미하며 따라서 현재의 인류 현상은 타락?후퇴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큰 견지에서 보면 인류사는 신을 향하는 진보의 걸음이며 신을 알아 가는 지식이 자라는 역사요 도덕적 성장의 역사라고 함석헌은 파악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러한 도덕적 성장의 역사 과정은 결코 기계적인 신적 법칙을 통해 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였다. 자신과 같이 생명 역시 스스로의 자유로 아가페에 이르기를 원하는 신은 다만 생명의 종자를 심을 뿐이고 만물에게 자유를 위임하였다고 보고 함석헌은 역사는 생명이 스스로 자라 신의 아가페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봄으로써 역사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중요한 동인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한편 함석헌은 인류 역사에서 도덕적 성장을 답지할 역사 단위는 하나의 영웅이나 계급과 같은 것이 아니라 민족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함석헌에 있어서 민족이란 그 자체가 자기 완결적일 수는 없고 세계와 우주라는 질서 속에 통일되어 있는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었다. 즉 민족이란 신의 아가페를 배워가는 세계사의 도상(途上)에서 각 민족의 도덕적 완성의 의무를 구국적으로 책임지우는 단위로서만 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민족의 자기 주장은 동시에 세계의 일원으로 무엇을 통해 세계에 공헌할 것인가라는 의식에 의해 자기 한정되어야 하고, 세계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배타적인 ‘민족심’이며 가장 큰 죄악은 집단적 배타주의와 이기주의라고 함석헌은 지적함으로써 모든 국가주의를 종식시킬 것을 역설했다.
이러한 인류사의 큰 틀 속에서 함석헌은 조선사를 논한다. 그는 조선의 역사에 대해 인(仁)이라는 좋은 바탕을 가지고 출발했으나 점진적으로 자기를 잃어버리는 퇴락의 역사라고 보았다. 그 과정에서 사육신(死六臣)이나 임경업 등 의인(義人)이 없지 않았으나, 이상(理想)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유와 독립을 잃어버려 이제 독립을 잃은 자로서의 고난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이 져야할 고난까지 연약한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민족의 고난이 최절정기에 이르는 식민지 상태의 지금이야말로 조선 민족의 예언자로서 함석헌은 민족사의 고난이 ‘무용한 방황이 아니라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했다. 여기에서 그의 독특한 역사 철학인 ‘고난 사관’이 전개된다.
함석헌의 고난에 대한 이해의 전거는 무엇보다도 예수의 고난이었다. 죽음이 없는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집행했고 이로써 예수는 인간에게 신의 아들이 되는 길을 열었으나 신의 아들인 그가 왜 죽음이란 고난의 길을 통해 인간 구원을 이룰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이 함석헌의 고난 이해의 출발이었다. 함석헌은 고난이란 신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그 본래적 모습을 자기 안에 획득해 가는 고유한 방식으로 “영이 물질에 대하여, 양심이 욕(慾)에 대하여 생명이 죽음에 대하여 항쟁하는 일”에서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즉 고난은 인간을 정화시켜 진리를 향해 성장시키는 원리인 것이었다. 따라서 고난을 스스로 기꺼이 지는 수고자(受苦者)만이 신의 아가페에 귀착하여 참 자유에 이를 수 있다고 함석헌은 이해했다.
이런 의미에서 함석헌에 있어 고난은 힘없는 자에게 쏟아지는 저주스러운 피해나 죄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사랑을 완성하여 자유에 이르게 하는 ‘창조적 수고(受苦)’였다. 여기에서 함석헌은 “영이요 의요 진리”의 나라인 장차 올 ‘신의 나라’는 이러한 창조적 수고자들에 의해서만 도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 민족은 현재의 민족의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여 세계가 신음하는 제국주의의 악을 정화시킴으로써 장차 도래할 도덕적으로 완성되는 새로운 세계의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고난은 거룩한 자기 희생을 통해 역사를 창조해 가는 것임으로 역사의 진정한 동인이고, 따라서 창조적 수고자만이 역사의 진정한 주체라는 역사 철학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고난 속의 조선 민족과 함께 나누려고 한 그의 역사 철학이었으나, 동시에 그가 도달한 새로운 자아상이기도 했다. 우찌무라에게 촉발되어 예언자적 자아상을 추구했던 함석헌은 조선의 세계사적 사명을 탐색하면서 ‘창조적 수고자’라는 새로운 자아상에 도달한 것이었다.
5. 결론을 대신하여
민족과 기독교를 각각의 주체로 보고 기독교가 민족을 정화시키는 것과 같이 민족 역시 기독교를 조선적인 것으로 구체화하는 주체로 보고 양자를 예언을 통해 결합해 가려는 함석헌의 신앙은 우찌무라의 ‘두개의 J’에 대한 헌신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따라서 함석헌은 우찌무라의 사상에서 기독교의 본질인 복음에 일본인으로서의 자신을 직결하려는 민족적 정체성을 담지한 주체적이며 예언자적 신앙의 자세 역시 계승하였다. 함석헌에 있어서 이러한 우찌무라의 사상적 영향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서구의 압도적인 지적 물리적 헤게모니 아래 국가라는 최소한의 물리적 기반마저 와해된 식민지 상황에서 기독교에 입신한 조선 기독교인들이 대체적으로 민족에 대한 자연적 향토적 애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민족적 정체성이 매우 취약하였음을 고려하면, 함석헌의 기독교 이해의 큰 틀을 우찌무라의 사상적 감화 아래 놓여졌음을 알 수 있다.
그 러나 예언자적 자아상을 가지고 식민지 지식인인 그가 조선사의 천직을 해병하기 위해 사색을 거듭한 결과 그는 고난의 역사 철학에 귀착하게 되었다. 즉 고난은 거룩한 자기 희생을 통해 역사를 창조해 가는 것임으로 역사의 진정한 동인이고, 따라서 창조적 수고자만이 역사의 진정한 주체라는 역사 철학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 철학은 조선 민족에게 제시하려고 한 민족의 세계사적 천직이었으나, 동시에 그 자신의 새로운 자아상이기도 했다.
이러한 함석헌과 우찌무라의 사상적 차이는 그들이 처한 상황의 차이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하겠다. 비서구 지역에서 유일하게 산업화에 성공한 후발 제국주의 국가 일본에 대하여 우찌무라는 정의에 의거한 도덕적 국가가 될 것과 서구에 대한 열등 의식으로부터 해방되어 일본의 정신 문명에 자긍심을 가질 것을 요청하는 ‘예언’을 하였다. 이에 반해 함석헌의 경우 피식민지 조선이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예언자적 비판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세계사의 억압을 다른 자에게 더 이상 이전(移轉)할 수 없는 밑자리에 선 식민지민으로서 그가 진정으로 새 역사를 일구어 가기 위해서는 고난을 끌어안는 길이외의 다른 돌파구는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찌무라와는 다른 역사 철학과 자아상이 요청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그는 더 이상 역사 연구를 진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조선사의 역사적 ‘사실’은 더 이상 학계의 참고가 되지 못 하고 있다. 그러나 몇 번의 증보를 통해 더욱 구체화된 그의 역사 철학은 한국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면서 그 영향력을 더욱 확대해 가고 있다. 그 이유는 역사를 고난받는 다수의 기층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려는 그의 해석이 갖는 보편성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분명 함석헌은 우찌무라를 탈피하였다. 이에 대해 함석헌 자신은 “우러러보는 십자가보다는 짊어져 보려는 십자가 쪽”으로 십자가에 대한 해석을 우찌무라와 달리 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동시에 그는 이러한 자신의 우찌무라 계승 양식은 그의 사상의 본질을 충실히 계승한 결과였음으로 자신 안에 우찌무라는 영원히 살아있다고 고백한 것이었다. 정신의 영원성이라는 것은 단조한 불변의 영원성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인 생명의 영원성이지 않으면 안 된다. 늘 깨어 있는 정신을위해서는 낡은 전통 안에서 잠자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매개로 해서 언제나 그 원리를 새롭게 주체적으로 포착하는, 즉 전통의 창조적 지속이라는 계승 양식이 필요한 것이다. 함석헌은 우찌무라의 ‘의뢰적 독립’ 이란 사상적 본질을 식민지 조선인의 상황에서 주체적으로 포착하여 계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에게 있어서 남은 사상적 과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의뢰적 독립’에는 아무래도 소홀히 되었던 사랑의 공동성이나 연대 의식의 문제와 ‘창조적 수고’를 종교적 초월적 급진주의에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 어떠한 정치적 행동 양식으로 구체화해 갈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고 하겠다. 이 부분에 대한 그의 사색의 전개 과정과 그 사상에 대한 분석은 다음의 연구 과제로 남기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