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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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랑을 회복하자”(계 2:1-7)
본문의 말씀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주신 권면이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편지를 받 는 일곱 교회는 전 세계를 대표한 교회이며 전 시대의 전 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지금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으로 들 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에베소 교회를 생각할 때에 부정적인 측면에서서만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 면 그들은 처음부터 책망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고, 칭찬을 받을 만한 긍정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는 지금 터키 서부지역인데, 당시에는 소아시아 지역 중에서 중심이 되는 도시였고, 육로와 해로의 교통 요지였습니 다. 그래서 상업이 발달했고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는 매우 죄악(罪惡)이 관영한 도시였습니다. 특히 에베소에 는 아테네 여신을 섬기는 큰 신전이 있었던 우상을 섬기는 대표적 도시였고, 로마 황제 숭배도 강요된 도시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 면 세속 도시의 모습을 다 갖추고 있던 대표적인 도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에베소는 죄도 많았지만 은혜도 많은 곳이었 습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가장 좋은 위치에 있었고, 소아시아 전도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기에 에베소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 을 받은 아주 훌륭한 교회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 3년이나 이곳에 머물면 서 교회를 세웠고 이후에 디모데와 요한이 목회를 하였던 곳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도 이곳에 와서 머물다가 묻힌 곳입니 다. 그러기에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어려운 악조건 가운데서도 아주 당당하게 ①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 였고(2절 중) ② 높은 영적 식별력을 가지고 자칭 “사도”라고 말하지만 거짓 사도인 자들을 정체를 드러내었고(2절 하) ③ 인내 하였고(4절 상) ④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신앙의 정절을 지켰고(4절 중) ⑤ 게으르지 않았고(4절 하) ⑥ 퇴폐적인 비진 리로 성도들을 유혹하는 니골라당을 미워하고 진리를 사랑하였던 교회이었습니다.(6절)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내 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있다”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3절 상)
그런데 이처럼 주님의 칭찬을 받았던 질적으로 좋은 훌륭하였던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이 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까? 그것 은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4절) 에베소 교회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기 시작하 였고, 급기야는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은 칭찬에 대하여 작지만 모든 칭찬 을 다 합하여도 책망 하나가 더 큰 것입니다. 가장 큰 책망은 처음 사랑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사랑도 많았고 믿음도 컸지 만 시간이 갈수록 처음의 것들을 상실하고 변질하였던 것입니다. 행위도 수고도 인내도 부지런함도 다 중요하지만 사랑이 없는 행위 나 수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결점은 사랑이 결여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 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①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식어졌습니다. 초대교회 당시는 종말론적인 사상에 팽배하여 하나님께 대 한 성도들의 열심히 대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심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체되면서 점차 식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② 성도 간 에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가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돕고 소유를 공유할 만큼 우애와 사랑이 깊었지만 교회 에 이단이 등장하고, 이단을 경계하고 색출해 내는 가운데 성도들 사이에는 거리감이 생기고 의심이 생기고 벽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 다. 이것은 교회가 매우 조심해야 할 점입니다. 교회는 순수 신앙을 보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성도들에 불신을 벽을 만들거 나 사랑이 식어져서 서로 나뉘어져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행위와 같습니다. 또한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근 신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얼마든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처럼 주님의 대한 사랑이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몇 해 전에 텔레비전의 공익 광고 중에 “처음과 같이 일하십시다”라는 주제로 광고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많은 생각나게 하 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생활이 처음 예수님을 믿었던 구원의 감격과 감동을 가지고 처음 사랑을 간직할 수 있다 면 우리는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여러분에게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이 있습니까? 구원에 대한 감격함과 감동 이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처음 사랑은 잃어버린 채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처 음 주님을 만날 때에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라고 고백했던 감격함이 우리의 심장 속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까?
이러한 측면에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경계의 말씀임을 기억해야 합니 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양면적인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실존적인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아브라함 이나 다윗이나 모세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위대한 신앙의 조상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장점 과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넘어지고 일어서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서 성숙해 갑니다. 물론 신앙의 성숙을 방해하는 잘못된 행동 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원이로되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때를 따라 잘못된 생활을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잘못하여 삽시다. 그렇다고 잘못한 것 때문에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잘못한 것 때문에 망하지는 않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회개하지 않는 것이 더 문 제인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시는 목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께 대 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생각해야 합니다.(5절 상)
주님께서 본문 5절 상반 절을 통하여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라고 권면하시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처 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잡초가 있으면 꼭지만 따는 것이 아니라 뿌리까지 뽑아야 하듯이 원인을 찾아 야 합니다. 회개할 때에 무작정 회개하는 것 보다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거시적인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 다. 거시적인 교회 공동체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생각이 없는 회개를 한다면 그것은 계속 되풀이 될 것이 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자신이 행하는 바를 인식치 못하는 중에 부패하게 됩니다. 이 때에 유익한 방법은 처음으로 돌이켜 생각하 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의 “생각하라”는 단어는 「현재 능동태 명령법」으로 “계속적으로 생각하라, 계속적으로 염두(念頭) 해 두라” 는 뜻입니다. 즉 끊임없는 자기 성찰(省察)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건강을 끊임없이 돌아보는 사람이 건강할 수 있는 것처 럼 건강한 신앙을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언제부터 이것은 곧 기억 하라는 말입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신앙생활에 감격이 없어지고, 그저 종교 생활만 남았는 지 그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가졌던 그 신앙, 그 감격, 그 믿음, 그 사랑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주님과 밀접하게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서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잃어버림으로써 결국 타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려 면 과거의 아름다운 사랑의 시절을 생각하며 그 때와 현재와의 현격한 차이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향한 열정 이 식어지기 시작한 때를 생각하고 그 원인을 처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재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거의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본 후 에 현재의 모습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내가 왜 이 모양이 되었나!" "전에는 감격이 있었는데 왜 지 금은 감격이 사라졌나!" "전에는 경건의 모양이 있었는데 왜 지금은 없나!"라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원인이 발견될 것 입니다. "아하. 내가 돈을 사랑하다가 이렇게 되었구나. 세상을 사랑하다가, 자식을 사랑하다가, 남편을 사랑하다가 이렇게 되었구 나?" 만약 이러한 요소들이 발견되었다면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탕자가 돼지우리 안에서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는 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이라는 원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가니 전처럼 다 시 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2. 회개해야 합니다.(5절 중)
주님께서 5절 중반 절에서 “회개하라”고 권면하신 것처럼 우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합니 다. 신앙의 성숙은 꼭 회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회개 없이 '첫 사랑'을 회복해 달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마치 '죽은 나 무'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빨리 썩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너무 늦기 전 에 태도와 행위를 즉시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의 “회개(悔改)”라는 단어는 “철저히 마음을 뜯어 고쳐 회개하라, 돌이켜라,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나의 신앙 이 떨어져 버린 그 상태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생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회개하는 것이 교회의 소망입니다. 마음을 돌이키 는 것,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폭적으로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여기에서의 “회개하라”는 “메타노에손”이라는 말은 제1부정과거 능동태 명령법으로 되어 있는데, 회개 를 하되 아주 서서히 점진적으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단번에 곧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성도님! 죄를 떠나시오”라 고 권면하면 “목사님!,제가 차차 정리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 치고 죄를 정리하는 사람을 못 보았습니 다. 즉시 회개하지 못하면 큰 일 납니다. 그래서 어떤 부흥강사 목사님께서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말이라 고 생각되어서 말씀드립니다. “지옥이란 뭐냐? ‘차차’하던 사람이 ‘아차차’하는 것이 지옥이다”
그렇습니다. 회개(悔改)는 단번에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용납하시지 않는 모든 죄에서 단번에 돌아서 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처음에 시작했던 그 자리, 내가 당연히 서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가 없이 는 주님에 대한 참 사랑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후회(後悔)라는 것과 회개(悔改)라는 것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쩌면 회개라는 말을 후회(後悔) 라는 기준에 두고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후회(後悔)는 어떤 일에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서 이런 일에는 이 렇게 하는 것이 아니구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悔改)는 그런 것이 아니라 기본 바탕부터가 잘못 된 것을 뜯어고치고 다 시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민수기서를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한 것은 모두 14번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마 지막 14번째 원망과 불평을 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은 불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놋뱀을 바라보는 자 에게는 뱀이 물지 않고 물려도 죽지 않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놋뱀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놋뱀을 바라보면 생명 을 보전할 수 있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애굽이라는 세상으로 향해 있던 시선(視線)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갖 고 있습니다. 내 마음의 시선이 애굽이라는 곳으로 향해 있는지 가나안이라는 곳으로 향해 있는지 살펴보고 만일에 애굽쪽으로 돌려 져 있다면 가나안 쪽으로 돌리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것이 회개입니다.
3.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합니다.(5절 하)
주님께서 5절 하반 절을 통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권면하신 것처럼 우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는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처음대로 복구하라는 것입니다. 처음대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음 사랑을 회복하 기 위해서는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열매가 따라야 합니다. 잘못된 자리에서 머물고 있으면서 회개했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회개는 말이 아니라 행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잃어 버렸다」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모든 계명 중에 첫째 되 는 것이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막 12:30,31). 사랑은 모든 신앙생활의 동기가 되는 것이요 사랑은 모든 신 앙 생활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고전 13:13) 여러분은 고전 13장의 말씀을 다시 언급하지 않아 도 사랑의 중요성을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랑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사랑에서부터 출발되어지지 아니하면 그 어떤 신앙생활도 의미가 없 습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그 어떤 신앙생활도 인정받을 수 없습 니다. 사실 에베소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았던 긍정적인 면들은 사랑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은 사랑이 없이도 얼마든지 습관적으로 의무감으로 책임감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생활은 인정받는 신앙이 되지 못합니 다. 우리가 처음 행위를 잊어버리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자기만족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날 교회에 가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견뎌 합니다. 그래서 주일을 고박 꼬박 지킵니다. 십일조를 않아 면 꼭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얼마나 귀한 신앙입니까? 주일에 빠지지 않고 십일조 하는 신앙, 그러나 만약 사랑이 결여되 어 있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것이 요즘의 시간 예약이 되는 가전제품처럼 자동입니다. 교회 가는 날, 교회가는 시간, 주보 순서를 자동적으로 따라 합니다. 과연 이런 사람의 예배가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드리는 예배가 되겠습니까?
셋째로 책임감 때문에 신앙 생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직, 교사, 찬양대, 각 부서의 임원이라는 책임 때문에 열심히 봉사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충성 속에 사랑이 있습니까? 사랑 없는 행위는 형식(型式)과 의식이라는 껍데기만 남깁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가 있을 리 없고 힘써 신앙생활을 하지만 우리에게 남는 것은 피곤뿐입니다. 사랑 이 없는 인내는 짜증만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런 인내는 화목하게 하는 힘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예배, 지루할 뿐입니 다. 설교도 찬송도 길게만 느껴질 뿐입니다. 사랑이 없는 봉사, 지겨울 뿐입니다. 예배니 인내니 봉사니 충성이니..얼마나 중요 한 신앙행위들 입니까?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신앙 행위가 될 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겉보기에는 그럴듯해 도 그 안에 들어가 보면 형식과 원망과 피곤과 짜증과 불평 뿐이요 피차의 저주와 정죄와 아집과 교만만 남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 분은 과연 사랑이 있습니까? 이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처음 행위는 어떠했습니까? 내가 처음 주님을 만나 고백하던 때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에는 “예수님 한분으로 만족합니다. 다시는 욕심부리지 않겠습니다. 죽도록 잘 섬기겠습니다.”라고 고백하였 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다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변함 이 없습니까? 한결같습니까? 혹시라도 감정적이지는 않았습니까? 시종일관(始終一貫)한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 까? 이제 다시금 처음 행위를 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왜 훌륭한 에베소 교회가 어떻게 하다가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습니까? 에베소 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사도 바울 이 목회 했었고 그 후임으로 디모데, 아볼로, 사도 요한을 목회자로 두었었기에 가장 복음적인 교육을 받으며 훈련된 교회였음에도 불 구하고 왜 이렇게 가장 소중한 사랑을 상실했습니까?
에베소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을 때에는 교회가 창립된지 4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그런 데 이 40년이라는 세월이 에베소 교회에 사랑을 빼앗아 버리고 타성만 남게 했던 것입니다.에베소 교회에게는 전통 만 자랑했지 처음 사랑은 상실한 채 습관과 형식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40년만 되면 다 이렇다는 말 은 아닙니다. 역사와 전통을 주님을 사랑하는 일보다 우선할 때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에베소 교회는 당시 소아시아 의 많은 교회가 여기에서 개척하여 나갔기에 소아시아의 모체와도 같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명성이 자자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러 나 이 명성만을 유지하려고 하다 보니 주님께 대한 감사와 감격과 사랑은 사라진 채 무거운 책임감만 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에베 소 교회에 사랑을 잃게 한 이유들이요 형식과 껍데기만 남게 한 이유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에베소 교회에게 지적하신 이 모습들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 살펴봅시다. 이 가운데는 신앙생 활 시작한 지 얼마 안된 분도 있을 것이고 수 십년 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된 신앙 연륜이 여러분을 어떻게 만들었습 니까?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굳건한 신앙의 골격 위에 세워 놓았습니까? 아니면 주님에 대한 사랑은 빠져 버린 채 형식과 습관 만 남게 했습니까?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신앙이 아니라 자동 예약된 기계처럼 습관적으로 자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신앙이 아닌지 생 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구원에 대한 감사 감격을 이기지 못해 주님의 교회를 내 몸처럼 사랑하 는 충성을 보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책임감과 의무감과 싫은 소리 듣기 싫어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충성하고 있습니까?
오랜 전통과 경륜을 가지고 있는 교회라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전통과 경륜 과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형식화되어 버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제라도 즉시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신 앙 연륜이 오래지 않아도 그 속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주위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 은 지 얼마 안되는 사람도 열심히 충성합니다. 그들은 성경의 순서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주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셨다 는 사실과 마땅히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본문 5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 럼 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② 회개해야 합니다 ③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 해야 합니까? 주님은 만약 우리가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신다고 경고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만 약 우리교회가 에베소 교회처럼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향한 사명과 기대를 다른 교회에게 부탁하실 것입니다. 우 리 교회는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체적인 교회가 있든 없든 간에 참된 교회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에베소 교회는 페허가 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주 후 262년에 다이아나 신전과 에베소의 전 시가는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갈대가 무성한 늪지대로 남아 있습 니다. 성서 고고학자들이 발굴해서 관광용 도시로만 남아 있습니다. 이 도시의 입구에는 사도행전의 역사를 기록했던 누가의 무덤만 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화려했던 에베소가 페허의 도시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요한계시록의 경고 가 응답되었습니다.우주적 교회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역 교회는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데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 다. 지역 교회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할 때 존재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할 때 주님은 그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경 고하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옮기리라”(5절)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이 회복되지 않는 공동체, 진리가 진리로 서 인정될 수 있는 그 바탕을 상실해 버린 공동체! 그런데 공동체는 이미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자격을 잃어버린 공동체입니다. 주님 은 다른 공동체를 찾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권면은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음성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 약 우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끝까지 참고 이기면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7절)과는 말씀과 같이 영생복락의 축 복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7절). 우리는 영적인 이해력을 가진 귀가 있어야 합 니다. 이기는 자 즉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과 실을 주어 먹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참 믿음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 다. 우리 교회는 에베소 교회처럼 진리에 대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가르치고 살려는 몸부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 조심해야 할 것은 처음 사랑입니다. 우리는 에베소 교회의 권면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믿음을 다시금 성찰해 보고 새롭게 믿음 을 회복하되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진리를 다 잃어버린 것 이 됩니다. 사랑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통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지금도 주님은 오늘 의 교회들이 진리를 지키기를 바라고 계시고, 또한 처음 사랑도 잃지 않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마음에 합한 소망 교회와 성도 들이 되도록 우리 모두 경성하고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위해 힘을 다하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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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말씀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주신 권면이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편지를 받 는 일곱 교회는 전 세계를 대표한 교회이며 전 시대의 전 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지금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으로 들 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에베소 교회를 생각할 때에 부정적인 측면에서서만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 면 그들은 처음부터 책망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고, 칭찬을 받을 만한 긍정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는 지금 터키 서부지역인데, 당시에는 소아시아 지역 중에서 중심이 되는 도시였고, 육로와 해로의 교통 요지였습니 다. 그래서 상업이 발달했고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는 매우 죄악(罪惡)이 관영한 도시였습니다. 특히 에베소에 는 아테네 여신을 섬기는 큰 신전이 있었던 우상을 섬기는 대표적 도시였고, 로마 황제 숭배도 강요된 도시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 면 세속 도시의 모습을 다 갖추고 있던 대표적인 도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에베소는 죄도 많았지만 은혜도 많은 곳이었 습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가장 좋은 위치에 있었고, 소아시아 전도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기에 에베소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 을 받은 아주 훌륭한 교회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 3년이나 이곳에 머물면 서 교회를 세웠고 이후에 디모데와 요한이 목회를 하였던 곳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도 이곳에 와서 머물다가 묻힌 곳입니 다. 그러기에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어려운 악조건 가운데서도 아주 당당하게 ①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 였고(2절 중) ② 높은 영적 식별력을 가지고 자칭 “사도”라고 말하지만 거짓 사도인 자들을 정체를 드러내었고(2절 하) ③ 인내 하였고(4절 상) ④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신앙의 정절을 지켰고(4절 중) ⑤ 게으르지 않았고(4절 하) ⑥ 퇴폐적인 비진 리로 성도들을 유혹하는 니골라당을 미워하고 진리를 사랑하였던 교회이었습니다.(6절)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내 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있다”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3절 상)
그런데 이처럼 주님의 칭찬을 받았던 질적으로 좋은 훌륭하였던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이 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까? 그것 은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4절) 에베소 교회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기 시작하 였고, 급기야는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은 칭찬에 대하여 작지만 모든 칭찬 을 다 합하여도 책망 하나가 더 큰 것입니다. 가장 큰 책망은 처음 사랑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사랑도 많았고 믿음도 컸지 만 시간이 갈수록 처음의 것들을 상실하고 변질하였던 것입니다. 행위도 수고도 인내도 부지런함도 다 중요하지만 사랑이 없는 행위 나 수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결점은 사랑이 결여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 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①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식어졌습니다. 초대교회 당시는 종말론적인 사상에 팽배하여 하나님께 대 한 성도들의 열심히 대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심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체되면서 점차 식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② 성도 간 에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가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돕고 소유를 공유할 만큼 우애와 사랑이 깊었지만 교회 에 이단이 등장하고, 이단을 경계하고 색출해 내는 가운데 성도들 사이에는 거리감이 생기고 의심이 생기고 벽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 다. 이것은 교회가 매우 조심해야 할 점입니다. 교회는 순수 신앙을 보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성도들에 불신을 벽을 만들거 나 사랑이 식어져서 서로 나뉘어져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행위와 같습니다. 또한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근 신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얼마든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처럼 주님의 대한 사랑이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몇 해 전에 텔레비전의 공익 광고 중에 “처음과 같이 일하십시다”라는 주제로 광고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많은 생각나게 하 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생활이 처음 예수님을 믿었던 구원의 감격과 감동을 가지고 처음 사랑을 간직할 수 있다 면 우리는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여러분에게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이 있습니까? 구원에 대한 감격함과 감동 이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처음 사랑은 잃어버린 채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처 음 주님을 만날 때에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라고 고백했던 감격함이 우리의 심장 속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까?
이러한 측면에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경계의 말씀임을 기억해야 합니 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양면적인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실존적인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아브라함 이나 다윗이나 모세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위대한 신앙의 조상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장점 과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넘어지고 일어서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서 성숙해 갑니다. 물론 신앙의 성숙을 방해하는 잘못된 행동 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원이로되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때를 따라 잘못된 생활을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잘못하여 삽시다. 그렇다고 잘못한 것 때문에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잘못한 것 때문에 망하지는 않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회개하지 않는 것이 더 문 제인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시는 목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께 대 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생각해야 합니다.(5절 상)
주님께서 본문 5절 상반 절을 통하여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라고 권면하시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처 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잡초가 있으면 꼭지만 따는 것이 아니라 뿌리까지 뽑아야 하듯이 원인을 찾아 야 합니다. 회개할 때에 무작정 회개하는 것 보다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거시적인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 다. 거시적인 교회 공동체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생각이 없는 회개를 한다면 그것은 계속 되풀이 될 것이 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자신이 행하는 바를 인식치 못하는 중에 부패하게 됩니다. 이 때에 유익한 방법은 처음으로 돌이켜 생각하 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의 “생각하라”는 단어는 「현재 능동태 명령법」으로 “계속적으로 생각하라, 계속적으로 염두(念頭) 해 두라” 는 뜻입니다. 즉 끊임없는 자기 성찰(省察)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건강을 끊임없이 돌아보는 사람이 건강할 수 있는 것처 럼 건강한 신앙을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언제부터 이것은 곧 기억 하라는 말입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신앙생활에 감격이 없어지고, 그저 종교 생활만 남았는 지 그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가졌던 그 신앙, 그 감격, 그 믿음, 그 사랑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주님과 밀접하게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서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잃어버림으로써 결국 타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려 면 과거의 아름다운 사랑의 시절을 생각하며 그 때와 현재와의 현격한 차이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향한 열정 이 식어지기 시작한 때를 생각하고 그 원인을 처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재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거의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본 후 에 현재의 모습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내가 왜 이 모양이 되었나!" "전에는 감격이 있었는데 왜 지 금은 감격이 사라졌나!" "전에는 경건의 모양이 있었는데 왜 지금은 없나!"라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원인이 발견될 것 입니다. "아하. 내가 돈을 사랑하다가 이렇게 되었구나. 세상을 사랑하다가, 자식을 사랑하다가, 남편을 사랑하다가 이렇게 되었구 나?" 만약 이러한 요소들이 발견되었다면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탕자가 돼지우리 안에서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는 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이라는 원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가니 전처럼 다 시 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2. 회개해야 합니다.(5절 중)
주님께서 5절 중반 절에서 “회개하라”고 권면하신 것처럼 우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합니 다. 신앙의 성숙은 꼭 회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회개 없이 '첫 사랑'을 회복해 달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마치 '죽은 나 무'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빨리 썩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너무 늦기 전 에 태도와 행위를 즉시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의 “회개(悔改)”라는 단어는 “철저히 마음을 뜯어 고쳐 회개하라, 돌이켜라,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나의 신앙 이 떨어져 버린 그 상태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생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회개하는 것이 교회의 소망입니다. 마음을 돌이키 는 것,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폭적으로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여기에서의 “회개하라”는 “메타노에손”이라는 말은 제1부정과거 능동태 명령법으로 되어 있는데, 회개 를 하되 아주 서서히 점진적으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단번에 곧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성도님! 죄를 떠나시오”라 고 권면하면 “목사님!,제가 차차 정리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 치고 죄를 정리하는 사람을 못 보았습니 다. 즉시 회개하지 못하면 큰 일 납니다. 그래서 어떤 부흥강사 목사님께서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말이라 고 생각되어서 말씀드립니다. “지옥이란 뭐냐? ‘차차’하던 사람이 ‘아차차’하는 것이 지옥이다”
그렇습니다. 회개(悔改)는 단번에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용납하시지 않는 모든 죄에서 단번에 돌아서 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처음에 시작했던 그 자리, 내가 당연히 서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가 없이 는 주님에 대한 참 사랑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후회(後悔)라는 것과 회개(悔改)라는 것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쩌면 회개라는 말을 후회(後悔) 라는 기준에 두고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후회(後悔)는 어떤 일에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서 이런 일에는 이 렇게 하는 것이 아니구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悔改)는 그런 것이 아니라 기본 바탕부터가 잘못 된 것을 뜯어고치고 다 시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민수기서를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한 것은 모두 14번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마 지막 14번째 원망과 불평을 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은 불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놋뱀을 바라보는 자 에게는 뱀이 물지 않고 물려도 죽지 않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놋뱀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놋뱀을 바라보면 생명 을 보전할 수 있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애굽이라는 세상으로 향해 있던 시선(視線)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갖 고 있습니다. 내 마음의 시선이 애굽이라는 곳으로 향해 있는지 가나안이라는 곳으로 향해 있는지 살펴보고 만일에 애굽쪽으로 돌려 져 있다면 가나안 쪽으로 돌리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것이 회개입니다.
3.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합니다.(5절 하)
주님께서 5절 하반 절을 통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권면하신 것처럼 우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는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처음대로 복구하라는 것입니다. 처음대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음 사랑을 회복하 기 위해서는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열매가 따라야 합니다. 잘못된 자리에서 머물고 있으면서 회개했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회개는 말이 아니라 행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잃어 버렸다」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모든 계명 중에 첫째 되 는 것이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막 12:30,31). 사랑은 모든 신앙생활의 동기가 되는 것이요 사랑은 모든 신 앙 생활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고전 13:13) 여러분은 고전 13장의 말씀을 다시 언급하지 않아 도 사랑의 중요성을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랑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사랑에서부터 출발되어지지 아니하면 그 어떤 신앙생활도 의미가 없 습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그 어떤 신앙생활도 인정받을 수 없습 니다. 사실 에베소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았던 긍정적인 면들은 사랑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은 사랑이 없이도 얼마든지 습관적으로 의무감으로 책임감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생활은 인정받는 신앙이 되지 못합니 다. 우리가 처음 행위를 잊어버리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자기만족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날 교회에 가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견뎌 합니다. 그래서 주일을 고박 꼬박 지킵니다. 십일조를 않아 면 꼭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얼마나 귀한 신앙입니까? 주일에 빠지지 않고 십일조 하는 신앙, 그러나 만약 사랑이 결여되 어 있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것이 요즘의 시간 예약이 되는 가전제품처럼 자동입니다. 교회 가는 날, 교회가는 시간, 주보 순서를 자동적으로 따라 합니다. 과연 이런 사람의 예배가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드리는 예배가 되겠습니까?
셋째로 책임감 때문에 신앙 생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직, 교사, 찬양대, 각 부서의 임원이라는 책임 때문에 열심히 봉사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충성 속에 사랑이 있습니까? 사랑 없는 행위는 형식(型式)과 의식이라는 껍데기만 남깁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가 있을 리 없고 힘써 신앙생활을 하지만 우리에게 남는 것은 피곤뿐입니다. 사랑 이 없는 인내는 짜증만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런 인내는 화목하게 하는 힘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예배, 지루할 뿐입니 다. 설교도 찬송도 길게만 느껴질 뿐입니다. 사랑이 없는 봉사, 지겨울 뿐입니다. 예배니 인내니 봉사니 충성이니..얼마나 중요 한 신앙행위들 입니까?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신앙 행위가 될 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겉보기에는 그럴듯해 도 그 안에 들어가 보면 형식과 원망과 피곤과 짜증과 불평 뿐이요 피차의 저주와 정죄와 아집과 교만만 남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 분은 과연 사랑이 있습니까? 이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처음 행위는 어떠했습니까? 내가 처음 주님을 만나 고백하던 때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에는 “예수님 한분으로 만족합니다. 다시는 욕심부리지 않겠습니다. 죽도록 잘 섬기겠습니다.”라고 고백하였 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다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변함 이 없습니까? 한결같습니까? 혹시라도 감정적이지는 않았습니까? 시종일관(始終一貫)한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 까? 이제 다시금 처음 행위를 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왜 훌륭한 에베소 교회가 어떻게 하다가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습니까? 에베소 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사도 바울 이 목회 했었고 그 후임으로 디모데, 아볼로, 사도 요한을 목회자로 두었었기에 가장 복음적인 교육을 받으며 훈련된 교회였음에도 불 구하고 왜 이렇게 가장 소중한 사랑을 상실했습니까?
에베소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을 때에는 교회가 창립된지 4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그런 데 이 40년이라는 세월이 에베소 교회에 사랑을 빼앗아 버리고 타성만 남게 했던 것입니다.에베소 교회에게는 전통 만 자랑했지 처음 사랑은 상실한 채 습관과 형식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40년만 되면 다 이렇다는 말 은 아닙니다. 역사와 전통을 주님을 사랑하는 일보다 우선할 때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에베소 교회는 당시 소아시아 의 많은 교회가 여기에서 개척하여 나갔기에 소아시아의 모체와도 같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명성이 자자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러 나 이 명성만을 유지하려고 하다 보니 주님께 대한 감사와 감격과 사랑은 사라진 채 무거운 책임감만 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에베 소 교회에 사랑을 잃게 한 이유들이요 형식과 껍데기만 남게 한 이유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에베소 교회에게 지적하신 이 모습들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 살펴봅시다. 이 가운데는 신앙생 활 시작한 지 얼마 안된 분도 있을 것이고 수 십년 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된 신앙 연륜이 여러분을 어떻게 만들었습 니까?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굳건한 신앙의 골격 위에 세워 놓았습니까? 아니면 주님에 대한 사랑은 빠져 버린 채 형식과 습관 만 남게 했습니까?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신앙이 아니라 자동 예약된 기계처럼 습관적으로 자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신앙이 아닌지 생 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구원에 대한 감사 감격을 이기지 못해 주님의 교회를 내 몸처럼 사랑하 는 충성을 보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책임감과 의무감과 싫은 소리 듣기 싫어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충성하고 있습니까?
오랜 전통과 경륜을 가지고 있는 교회라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전통과 경륜 과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형식화되어 버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제라도 즉시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신 앙 연륜이 오래지 않아도 그 속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주위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 은 지 얼마 안되는 사람도 열심히 충성합니다. 그들은 성경의 순서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주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셨다 는 사실과 마땅히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본문 5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 럼 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② 회개해야 합니다 ③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 해야 합니까? 주님은 만약 우리가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신다고 경고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만 약 우리교회가 에베소 교회처럼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향한 사명과 기대를 다른 교회에게 부탁하실 것입니다. 우 리 교회는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체적인 교회가 있든 없든 간에 참된 교회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에베소 교회는 페허가 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주 후 262년에 다이아나 신전과 에베소의 전 시가는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갈대가 무성한 늪지대로 남아 있습 니다. 성서 고고학자들이 발굴해서 관광용 도시로만 남아 있습니다. 이 도시의 입구에는 사도행전의 역사를 기록했던 누가의 무덤만 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화려했던 에베소가 페허의 도시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요한계시록의 경고 가 응답되었습니다.우주적 교회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역 교회는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데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 다. 지역 교회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할 때 존재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할 때 주님은 그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경 고하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옮기리라”(5절)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이 회복되지 않는 공동체, 진리가 진리로 서 인정될 수 있는 그 바탕을 상실해 버린 공동체! 그런데 공동체는 이미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자격을 잃어버린 공동체입니다. 주님 은 다른 공동체를 찾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권면은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음성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 약 우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끝까지 참고 이기면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7절)과는 말씀과 같이 영생복락의 축 복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7절). 우리는 영적인 이해력을 가진 귀가 있어야 합 니다. 이기는 자 즉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과 실을 주어 먹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참 믿음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 다. 우리 교회는 에베소 교회처럼 진리에 대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가르치고 살려는 몸부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 조심해야 할 것은 처음 사랑입니다. 우리는 에베소 교회의 권면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믿음을 다시금 성찰해 보고 새롭게 믿음 을 회복하되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진리를 다 잃어버린 것 이 됩니다. 사랑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통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지금도 주님은 오늘 의 교회들이 진리를 지키기를 바라고 계시고, 또한 처음 사랑도 잃지 않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마음에 합한 소망 교회와 성도 들이 되도록 우리 모두 경성하고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위해 힘을 다하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