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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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으로 부흥하자”(느 8:1-18)
느헤미야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부흥과 개혁”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주전 586년에 바벨론 나라의 포로가 되어 그 나라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다가 주전 538년에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받고 [스룹바벨]과 [에스라]의 인도로 제1,2차에 걸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歸還)하게 되었지만 예루살렘 성전과 성곽만 파괴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도 허물어져 있었습니다. 정말 이들의 영적 상태는 최악의 상태로 피폐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에 학사(學士)겸 제사장인 에스라가 말씀의 부흥회를 통하여 이들의 허물어진 심령을 재건하며 새롭게 회복시켰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재건했다면 에스라는 허물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폐허가 되었던 예루살렘 성에 성전과 적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성곽은 쌓았지만 그 성안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의 재건 없이는 영적인 재건과 부흥이 없이는 그 나라가 건재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풍요한 생활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국민들의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무장이 없이는 나라의 안녕과 번영의 미래가 보장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성도들은 영적인 무장이 되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함께 생각하면서 우리가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말씀에 대한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1,2절)
본문 1절과 2절에서 볼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7월 1일에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남여노소를 막론하고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다 모여서 학사 에스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와서 들려주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과 아울러 그 말씀의 참 뜻을 알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이 참으로 바라는 것은 우리의 삶에 도움을 주는 교양 강좌나 철학적인 가르침이나 시사 해석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 5:6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를 위한 갈증, 생명의 양식에 대한 갈증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갈증을 느낀다는 것은 살아있는 증거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비극은 말씀에 굶주려 있으면서도 굶주린 사실을 모르고 말씀을 구하지 않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므로 덕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는 시119:131에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벽부터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재미있는 예화를 들어가면서 하는 설교가 아니라 율법의 말씀을 그냥 낭독하는데도 그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오정까지 여섯 시간 동안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여섯 시간 동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그들에게 영적 부흥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본문 13절을 보면 그들에게 여섯 시간은 오히려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튿날 다시 모여 학사 에스라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영적인 부흥은 목사 한 사람의 열정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의 열정이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제사장 말씀을 바로 들려주는 제사장 에스라와 아울러 평신도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재건에 열정을 쏟은 총독 느헤미아와 말씀을 사모하는 백성과 족장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과 동시에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부흥은 당연한 것입니다. 유대 역사상 진정한 부흥은 바로 이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회복될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거족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1절)
본문 말씀 8:1에 보니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에스라]에게 율법(律法) 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였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어느 특수층에 속한 몇 사람만이 아니라, 백성들 전체가 거족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3절)
본문 말씀 8:3에 보니까? 새벽부터 오정까지 (새벽 오전 2시 - 해 뜰 때 , 오정 오전 10시 - 오후 3시 ) 길게는 13시동안 , 짧게는 5시간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지루한 줄 모르고 귀를 기울이되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모든 자들이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사모했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로 경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5절)
본문 8:5을 보니까? "에스라가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들이 일어셨다"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고 높이는 경건적인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다는 사실입니다.
넷째로 학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13절)
본문 8:13에 보니까? 여기에서 "율법(律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을 수박 겉핥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속뜻" 곧 "하나님의 말씀 깊은 뜻을 밝히 알지 아니하면 견딜 수 없다"라는 열정적인 연구(硏究)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곤고한 인생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가능합니다. 성경에 보면 경건한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욥 23:12에 보니 욥은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② 시 119:131에 보니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하니이다" (시 119:103),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시 119:97) , " 내가 주의 게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까? 그것은 시 107:9에서 "하나님께서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신다"라고 말씀을 사모하는 자의 영혼을 만족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낙망된 자가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길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어떤 자세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까?
① 본문 5절에서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서 책을 펴니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일어나서 들었습니다. 성경에서 [기립은 존경과 경의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② 또한 6절에 보면 에스라가 [하나님을 송축할 때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했습니다. [아멘]은 진리에 대한 동의를 뜻합니다.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③ 뿐만 아니라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씀의 권위는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그 말씀하신 대로 역사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말씀의 인격 앞에 머리를 숙여 경배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두고 말하기를 '그 사람은 믿는데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못 믿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줄 압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인격은 하는 말의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으면 그 사람의 인격 또한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진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약속을 변개시키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진리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 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시면 하나님의 말씀 또한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 앞에 한번도 무릎 꿇어 본적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말씀에 대한 복종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믿는데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못 믿는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여기에 모였습니까? 우리가 왜 여기 모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좋은 강의나 도덕적이 교훈이나 철학적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시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마틴 루터를 비롯하여 종교이나 부흥운동의 출발은 바로 이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대로 돌아가는데 시작된 것입니다. 말씀의 권세는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키며 우리의 심령을 변화 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을 깨뜨리며 굴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영적인 부흥인 것입니다.
3. 말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①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7,8절)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있으면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 중에 깨달음이 큰 은혜인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사 에스라가 토라 곧 말씀을 읽을 때에 그 말씀을 듣고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진리에 대한 각성과 깨달음이 있은 곳에 교회의 부흥이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② 애통하며 슬퍼하며 근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9절)
첫째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느 8:9, 9:1-3 상)
9절에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울었다고 하였고, 9:1-2, 3절 상반 절 말씀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한 자마다 그의 양심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는 회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① 요시야 왕도 그러하였습니다.(왕하 2311) ② 오순절 날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습니다.(행 2:37)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히 4:12 -1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조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으로서 우리의 죽은 생명을 살리는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렘 23:29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려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불이고, 방망이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선생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말씀이 우리를 고발하고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한 나를 책망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주님 앞에 눈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눈물은 우리의 어두운 영혼의 창을 닦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자신의 때문에 눈물을 흘리거나 그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를 권고하십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기쁨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12,17절)
본문 12절과 17절에서 "크게 즐거워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쁨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쁨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뜻을 인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에 오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지는 데서 얻어지는 기쁨과 환희의 역사는 경험한 자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참된 위로와 소망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에 즐거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바라고 믿고 의지할 때 힘을 얻을 수 있으며 용기와 소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바라볼 때는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능력을 의지함으로서 가지게 되는 기쁨이야말로 성도의 참된 힘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말씀을 더 밝히 알고자하는 욕구가 일어났습니다.(13절)
하나님의 말씀은 알면 알수록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더 깊이 알고자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으로서 나기 때문에 말씀을 더 깊이 알수록 믿음도 그만큼 더 커갈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생활의 개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한 그들은 과거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고, 따라서 어긋난 생활들을 말씀에 맞게 생활의 개혁을 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① 이방인과의 잡혼(雜婚)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10:30) ②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즉 술틀을 밟고, 곡식 단을 운반하고, 식물을 서로 상매(霜梅)하고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10:31) ③ 안식년을 거룩히 지키기로 결단하였습니다. (10:31- 6년 동안 일하고 1년 동안 쉬던 해 -레 25:5) ④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하였습니다.(10:35) 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기를 결단하였습니다.(10:37 -39)
다섯째로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었습니다.(14-18절)
본문 14-1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들은 말씀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즉 생활 의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율법을 읽다가 칠월에는 나팔절과 초막절을 지켜야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율법 외에 다른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아도 기록된 말씀이 이미 하나님의 음성인줄 알고 그 명령에 따라 초막절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한 그들은 과거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고, 따라서 어긋난 생활들을 말씀에 맞게 생활의 개혁을 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① 이방인과의 잡혼(雜婚)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10:30) ②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즉 술틀을 밟고, 곡식 단을 운반하고, 식물을 서로 상매(霜梅)하고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10:31) ③ 안식년을 거룩히 지키기로 결단하였습니다. (10:31- 6년 동안 일하고 1년 동안 쉬던 해 -레 25:5) ④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하였습니다.(10:35) 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기를 결단하였습니다.(10:37 -39)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따라 사는 생활에는 큰 기쁨이 있습니다.(17절)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그 말씀대로 살아 드림으로 얻는 기쁨을 체험하지 못하고 맛보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 이후에 처음으로 맛보는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말씀 중심이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큰 즐거움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결단이 새롭게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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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부흥과 개혁”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주전 586년에 바벨론 나라의 포로가 되어 그 나라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다가 주전 538년에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받고 [스룹바벨]과 [에스라]의 인도로 제1,2차에 걸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歸還)하게 되었지만 예루살렘 성전과 성곽만 파괴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도 허물어져 있었습니다. 정말 이들의 영적 상태는 최악의 상태로 피폐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에 학사(學士)겸 제사장인 에스라가 말씀의 부흥회를 통하여 이들의 허물어진 심령을 재건하며 새롭게 회복시켰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재건했다면 에스라는 허물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폐허가 되었던 예루살렘 성에 성전과 적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성곽은 쌓았지만 그 성안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의 재건 없이는 영적인 재건과 부흥이 없이는 그 나라가 건재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풍요한 생활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국민들의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무장이 없이는 나라의 안녕과 번영의 미래가 보장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성도들은 영적인 무장이 되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함께 생각하면서 우리가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말씀에 대한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1,2절)
본문 1절과 2절에서 볼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7월 1일에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남여노소를 막론하고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다 모여서 학사 에스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와서 들려주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과 아울러 그 말씀의 참 뜻을 알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이 참으로 바라는 것은 우리의 삶에 도움을 주는 교양 강좌나 철학적인 가르침이나 시사 해석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 5:6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를 위한 갈증, 생명의 양식에 대한 갈증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갈증을 느낀다는 것은 살아있는 증거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비극은 말씀에 굶주려 있으면서도 굶주린 사실을 모르고 말씀을 구하지 않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므로 덕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시편기자는 시119:131에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벽부터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재미있는 예화를 들어가면서 하는 설교가 아니라 율법의 말씀을 그냥 낭독하는데도 그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오정까지 여섯 시간 동안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여섯 시간 동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그들에게 영적 부흥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본문 13절을 보면 그들에게 여섯 시간은 오히려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튿날 다시 모여 학사 에스라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영적인 부흥은 목사 한 사람의 열정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의 열정이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제사장 말씀을 바로 들려주는 제사장 에스라와 아울러 평신도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재건에 열정을 쏟은 총독 느헤미아와 말씀을 사모하는 백성과 족장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과 동시에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부흥은 당연한 것입니다. 유대 역사상 진정한 부흥은 바로 이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회복될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거족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1절)
본문 말씀 8:1에 보니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에스라]에게 율법(律法) 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였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어느 특수층에 속한 몇 사람만이 아니라, 백성들 전체가 거족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3절)
본문 말씀 8:3에 보니까? 새벽부터 오정까지 (새벽 오전 2시 - 해 뜰 때 , 오정 오전 10시 - 오후 3시 ) 길게는 13시동안 , 짧게는 5시간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지루한 줄 모르고 귀를 기울이되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모든 자들이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사모했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로 경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5절)
본문 8:5을 보니까? "에스라가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들이 일어셨다"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고 높이는 경건적인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다는 사실입니다.
넷째로 학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13절)
본문 8:13에 보니까? 여기에서 "율법(律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을 수박 겉핥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속뜻" 곧 "하나님의 말씀 깊은 뜻을 밝히 알지 아니하면 견딜 수 없다"라는 열정적인 연구(硏究)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곤고한 인생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가능합니다. 성경에 보면 경건한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욥 23:12에 보니 욥은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② 시 119:131에 보니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하니이다" (시 119:103),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시 119:97) , " 내가 주의 게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까? 그것은 시 107:9에서 "하나님께서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신다"라고 말씀을 사모하는 자의 영혼을 만족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낙망된 자가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길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어떤 자세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까?
① 본문 5절에서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서 책을 펴니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일어나서 들었습니다. 성경에서 [기립은 존경과 경의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② 또한 6절에 보면 에스라가 [하나님을 송축할 때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했습니다. [아멘]은 진리에 대한 동의를 뜻합니다.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③ 뿐만 아니라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씀의 권위는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그 말씀하신 대로 역사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말씀의 인격 앞에 머리를 숙여 경배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두고 말하기를 '그 사람은 믿는데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못 믿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줄 압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인격은 하는 말의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으면 그 사람의 인격 또한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진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약속을 변개시키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진리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 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시면 하나님의 말씀 또한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 앞에 한번도 무릎 꿇어 본적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말씀에 대한 복종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믿는데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못 믿는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여기에 모였습니까? 우리가 왜 여기 모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좋은 강의나 도덕적이 교훈이나 철학적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시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마틴 루터를 비롯하여 종교이나 부흥운동의 출발은 바로 이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대로 돌아가는데 시작된 것입니다. 말씀의 권세는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키며 우리의 심령을 변화 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을 깨뜨리며 굴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영적인 부흥인 것입니다.
3. 말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①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7,8절)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있으면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 중에 깨달음이 큰 은혜인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사 에스라가 토라 곧 말씀을 읽을 때에 그 말씀을 듣고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진리에 대한 각성과 깨달음이 있은 곳에 교회의 부흥이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② 애통하며 슬퍼하며 근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9절)
첫째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느 8:9, 9:1-3 상)
9절에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울었다고 하였고, 9:1-2, 3절 상반 절 말씀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한 자마다 그의 양심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는 회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① 요시야 왕도 그러하였습니다.(왕하 2311) ② 오순절 날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습니다.(행 2:37)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히 4:12 -1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조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으로서 우리의 죽은 생명을 살리는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렘 23:29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려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불이고, 방망이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선생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말씀이 우리를 고발하고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한 나를 책망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주님 앞에 눈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눈물은 우리의 어두운 영혼의 창을 닦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자신의 때문에 눈물을 흘리거나 그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를 권고하십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기쁨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12,17절)
본문 12절과 17절에서 "크게 즐거워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쁨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쁨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뜻을 인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에 오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지는 데서 얻어지는 기쁨과 환희의 역사는 경험한 자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참된 위로와 소망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에 즐거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바라고 믿고 의지할 때 힘을 얻을 수 있으며 용기와 소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바라볼 때는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능력을 의지함으로서 가지게 되는 기쁨이야말로 성도의 참된 힘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말씀을 더 밝히 알고자하는 욕구가 일어났습니다.(13절)
하나님의 말씀은 알면 알수록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더 깊이 알고자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으로서 나기 때문에 말씀을 더 깊이 알수록 믿음도 그만큼 더 커갈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생활의 개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한 그들은 과거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고, 따라서 어긋난 생활들을 말씀에 맞게 생활의 개혁을 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① 이방인과의 잡혼(雜婚)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10:30) ②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즉 술틀을 밟고, 곡식 단을 운반하고, 식물을 서로 상매(霜梅)하고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10:31) ③ 안식년을 거룩히 지키기로 결단하였습니다. (10:31- 6년 동안 일하고 1년 동안 쉬던 해 -레 25:5) ④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하였습니다.(10:35) 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기를 결단하였습니다.(10:37 -39)
다섯째로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었습니다.(14-18절)
본문 14-1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들은 말씀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즉 생활 의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율법을 읽다가 칠월에는 나팔절과 초막절을 지켜야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율법 외에 다른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아도 기록된 말씀이 이미 하나님의 음성인줄 알고 그 명령에 따라 초막절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한 그들은 과거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고, 따라서 어긋난 생활들을 말씀에 맞게 생활의 개혁을 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① 이방인과의 잡혼(雜婚)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10:30) ②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즉 술틀을 밟고, 곡식 단을 운반하고, 식물을 서로 상매(霜梅)하고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10:31) ③ 안식년을 거룩히 지키기로 결단하였습니다. (10:31- 6년 동안 일하고 1년 동안 쉬던 해 -레 25:5) ④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하였습니다.(10:35) 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기를 결단하였습니다.(10:37 -39)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따라 사는 생활에는 큰 기쁨이 있습니다.(17절)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그 말씀대로 살아 드림으로 얻는 기쁨을 체험하지 못하고 맛보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 이후에 처음으로 맛보는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말씀 중심이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큰 즐거움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결단이 새롭게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