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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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를 담은 질그릇”(고후 4:7-11)
인생은 보물찾기와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참된 "보화"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학문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사업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명예와 지위를 통하여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한결같은 고민은 자신들이 참된 보화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집착하면 할수록 더욱 더 공허하고, 고독하기만 할 뿐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현재 추구하는 것들이 참된 보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참된 보화를 찾고자 방황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보화를 찾아 더 이상 방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참된 보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강한 것 같으나 사실 볼품도 없고 견고하지도 못한 참으로 연약한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다 마음의 문(門)을 열고 마음의 숨결을 들어보면 절망의 몸부림이 있고 가슴마다 탄식이 서려 있습니다. 인간은 상한 갈대,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은 존재요, 들의 꽃과 같은 존재입니다(사 42:3, 시 103:13-16) 그러기에 우리는 사단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습니다. 끊임없이 질병과 환난, 시험과 가난, 실패와 공포로부터 쉽게 낙망하고 좌절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은 갈대다. 한 방울의 물, 한 점의 바람에도 죽을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연약한 우리들은 쉽게 열등감(劣等感)에 빠집니다. 인생살이나 신앙생활이나 언제나 열등감(劣等感)이 문제입니다. [열등감](劣等感: 인피어리오러티 필링(inferiority feeling)이란 말을 사전에 찾아보면 "다른 사람에 비하여 자기는 뒤떨어졌다거나 자기에게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만성적인 감정 또는 의식"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열등감이 어디에서 옵니까?
첫째는 신체적인 열등감이 있습니다. 키가 작다 라든지, 다리가 짧다 라든지, 혹은 기형이나 질병으로 생긴 신체적 이상으로부터 오는 열등감입니다.
둘째는 정신적인 열등감이 있습니다. 학교성적이 나쁘다, 운동을 못한다, 미인이 아니다 등입니다.
셋째는 사회적인 열등감이 있습니다. 학력, 인종이나 신분에 의한 차별, 언어 ․빈곤 ․왼손잡이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열등감이 별다른 원인 없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면 이것이 <우울증(憂鬱症)>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열등감을 가진 사람의 성격은 소극적이고 주저주저하며 내성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매우 공격적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 보상을 하려고 합니다. 학력에 대하여 열등감을 가진 사람이 부자가 되어 여봐란 듯이 행동하는 경우나, 학교 성적이 나빠 교사로부터 무시당하는 학생이 범죄행위를 하여 주시의 표적이 되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 보기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받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대부분 열등감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머리가 나쁘다. 자란 환경이 나쁘다. 직업이 좋지 않다. 학력이 없다. 말을 잘하지 못한다. 의지력이 약하다. 몸이 약하다. 집중력이 없다. 등등....[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나폴레옹]이나 [베토벤], [뉴턴], [에디슨], [처칠]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열등감의 덩어리]라고 할 만큼 열등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맥스웰 멀츠]라고 하는 의사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 중 95%는 열등감이라는 질병에 시달린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치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듯이 모든 사람이 열등감의 상처를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모세]도 이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고 (출 4:10) 영적 거장 [바울]도 열등감이 있었습니다.(고후 11:6). 그러나 그들은 그 열등감에 사로 집힌 노예의 삶을 살지는 않았다는 점이 그들을 위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열등의식이 있다면 그 열등의식을 활용하는 방법도 반드시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신비롭게 만드셨습니다. 어떤 종류의 열성을 가지면 다른 능력이 개발되게 창조하셨습니다. 오른팔이 없으면 왼팔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되며, 시력을 잃게 되면 청각이 발달됩니다. 한쪽의 신장이 약해지면 다른 쪽 신장이 더 활발히 움직여 이를 보충하게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신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어딘가에 열성을 가지면 그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려는 마음의 활력이 강하게 작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사람이라면 자신의 관심 속에서 열등감을 몰아내고 강점을 살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카라얀]이<신이 주신 목소리>라고 칭찬했던 소프라노 [조수미]씨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70점이 나왔다고 합니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 조수미 씨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창피해서 얼굴도 들지 못했을까요? 아니면 화를 내고 나갔을까요? 아마 함께 한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웃었을 겁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다시 노래를 부르며 즐겼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노래를 잘하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인데 그깟 노래방 점수 낮은 게 충격일 리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기 안에 확실히 자부할 만한 보배가 있을 때는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우습게 생각해도 별 문제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 7절 말씀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함이라"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의 가치관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가치관은 바로 질그릇이 아니라 보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디에다 인생의 가치를 두고 있습니까? 그릇입니까? 아니면 내용입니까?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사십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인생에 회의를 느끼지 않고 끊임없이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자각해야 됩니다. 우리의 본래 모습이 무엇입니까? 본문 7절의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질그릇의 모습>입니다. 질그릇이란 진흙으로 만든 거친 그릇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질그릇의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는 연약함입니다. 쉽게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잠시라도 누군가가 보호해 주지 않으면 언제 부숴 질지 모르는 한계를 가진 것이 질그릇입니다. 그래서 보호자가 있어야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져 줄 수 있는 보호자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 분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한 시라도 보살핌이 없이는 깨어지고 부숴 지는 자라는 자신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또 다른 질그릇의 특징은 비천합니다. 비천하다는 것은 특별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평범하다는 것이지요. 우리들의 본래 모습이 이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교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본래 모습을 잊고 살아가는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살아가면서 획득한 인간 조건들이 본래의 자기 모습인 줄 착각합니다. 재산, 사회적 지위, 학식 등이 자신의 실제 모습인 줄 압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갖춰지면 자신만만합니다. 그때부터는 자신이 연약하다 비천하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세상이 그렇게 살기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 더욱 슬픕니다. 본래의 자기모습을 잃어버리고 철저히 포장된 자가 대접을 받는 시대라는 사실이 더욱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을 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나 자신의 실체는 질그릇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로 조금만 잘못되어도 금세 피곤하고, 병들고, 늙어지고, 죽고 그렇습니다. 이것저것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닙니다. 시103:14-16 보면 우리를 가리켜 <진토, 더스트(dust)>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마치 풀과 같고 그 영화가 바람이 불면 사라져버리는 들꽃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런 실상을 모르고 그저 지금의 내 모습이 천년만년 계속될 "영원한 내 모습"으로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겸손하게 나 자신의 본래 모습이 연약하고 비천한 질그릇과 같은 존재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교만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할지라도 다 <임시 보관용>이요 <위탁물>일 뿐입니다.
시간 차이일 뿐 언젠가 다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재산도, 지위도, 학식도, 재능도, 젊음도, 건강도, 목숨까지도 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란 가치 없는 생을 살다가 가는 단순한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질그릇 같은 우리 인생의 가치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질그릇에 담긴 내용물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질그릇은 질그릇인데 무엇이 담긴 질그릇이라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같은 그릇이라도 기왕이면 좋은 재질로 만들어진 것이면 좋겠죠. 그러나 그릇의 재질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담겨지느냐가 중요합니다. 즉 <내용물>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비싼 도자기라 할지라도 그 안에 오줌이 들어 있으면 요강이 되고, 쓰레기가 들어 있으면 쓰레기통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질그릇이라도 보물이 담겨지면 보물단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내용물에 최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보배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복음(福音), 즉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인간 조건보다 더 귀중한 것은 우리 가운데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우습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 가벼이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마음에 담은 자답게 사십시오. 그것이 질그릇인 우리의 인생이 빛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비어 있는 질그릇이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재물과, 학식과, 지위에 대한 욕망이 가득 담긴 위장 된 질그릇이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철학, 예수님의 말과 행동, 이 모든 [보배를 담은 질그릇]으로 부끄럽지 않는 삶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 인생을 가장 값지고 귀하게 만드시는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질그릇 속에 참된 보배를 담아 주셨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본문 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보화 되신 예수님은 질그릇과 같은 우리 인생을 사랑하셔서 성령으로 잉태(孕胎)하사 육신의 몸을 입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악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질그릇과 같은 인생일지라도 그 속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10-11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보화를 담고 있는 질그릇 인생은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참된 보화를 담고 있는 질그릇 인생은 어떤 경우에서도 소망을 잊지 않습니다. 참된 보화를 담고 있는 질그릇 인생은 극한 고난(苦難) 중에서도 자족(自足)하며 기뻐합니다. 여러 가지 환난과 어려움을 만나지만 담대하게 극복(克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담긴 이 보화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힘이요, 소망이요, 능력이요, 인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언제든지 하나님의 일꾼답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은자 같으나 죽임을 당치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8:8-10)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질그릇 속에 담겨진 보화가 오늘 이 시간 우리들의 질그릇 속에도 담겨진 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섬기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은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 역사 하십니다. 사도 바울을 인도하던 보혜사 성령은 지금도 이 전에 충만히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참된 보화를 담은 질그릇 인생의 특징은 어떠합니까?
1.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합니다(8절 상)
여기에서 "우겨쌈을 당한다"라는 말은 "즙을 짜기 위해 포도주를 짓누른다"라는 뜻으로 성도가 세상에서 당하는 [극심한 고난(苦難)]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이와 같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환난과 괴로움 때문에 사면을 온통 둘러싸인 채 이를 극복하려고 많은 몸부림을 쳤습니까? 어떤 사람은 슬픔에 싸이기도 합니다. 낭패와 실망에 싸이기도 합니다. 특히 최근에 계속되는 경제대난으로 장래(將來)가 불확실하게 보입니다. 불투명한 미래로 인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평생 직장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3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 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않으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 히 감당케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당당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성도는 온통 죄악으로 둘러싸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 죄악 의 물결이 파도처럼 넘쳐도 죄악의 물결에 싸이지 않는 삶 이것이 올바른 성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일 5:18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들지도 못 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리는 물 속에 잠겼다가 밖으로 나와도 물 한방울 안 묻습니다. 그 이유는 털에 기름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고기는 물 속에 있어도 짠물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죽은 고기 뱃속에 물이 들어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욕의 유혹(誘惑)의 손길이 둘러싸일까 걱정하십니까? 요셉은 질그릇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았기에 보디발의 아내의 달콤한 유혹이 그를 불렀지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하면서 도망을 쳤습니다(창 39:9) 여러분 중에 아직도 이기지 못하는 유혹이 있다고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유흑에 약한 질그릇에 의로운 능력이신 주님의 보화를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능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질그릇 자체로는 장담할 것이 못됩니다. 다만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를 통하여 이길 수가 있습니다. 비록 원수가 우리를 둘러쌀지라도 싸이지 않습니다.
또한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지혜롭고 영특한 다니엘은 왕의 총애를 받습니다. 그를 시기하는 방백들은 다니엘을 없애려는 계략으로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구하거나 사람에게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했습니다. 천하에 이런 엉터리 법령을 만들어 전국에 발표했습니다. 다니엘은 온 나라가 원수들로 둘러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다니엘은 자기 집에 돌아가서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단 6:10) 그 결과 다니엘은 원수들의 우겨쌈을 당하였지만 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창문을 열고 기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때로 실망과 분노가 나의 삶을 둘러싸고 나 자신을 우울증의 포로로 만 들 수 있습니다. 과거로 인한 우울증에 사로잡히면 인생은 여지없이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이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 분이 내게 베푸신 은혜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8:28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노라"고 하였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가 내게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이 세상 친구 없어도 예수는 나의 친구니.."라고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 바울의 이 외침을 또 들어봅시다.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26, 35,37,39)
2.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않습니다(8절 하)
여기의 "답답한 일"이란 말은 "쩔쩔매다, 난처하여 어쩔 줄 모른다"라는 뜻으로서 어떤 일을 택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절망을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방법이나 수단이 전혀 없는 아주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이와 같이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순풍의 돛단배처럼 평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어려움이 있고 앞을 가로막는 때도 있습니다. 길이 아주 암담해 보일 때 부정적 사고 주의자는 자신을 동정하면서 손에는 술병이나 죽음의 약병을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생을 패배의 함정 에 몰아 넣는 것은 답답한 환경에서 너무도 쉽게 절망해 버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잠언 4 :25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놀라운 일을 하려고 하실 때에는 어려운 일로부터 시작합니다. 만일 그가 아주 기적적인 놀라운 일을 하시려고 할 때는 불가능으로부터 시작하십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에서 가나안을 향하는 자유의 행로에 홍해가 가로 막혔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원망하고 이제 죽게 되었다고 낙심천만(落心千萬)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하였습니다(출 1413) 모세는 믿음이 있었기에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께서 행하신기적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보화를 담고 있는 성도라면 어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질그릇 속에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막 9:23에 있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낙심치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선(善)한 일을 했는데도 시험(試驗)이 닥치고 열심히 하나님을 공경하고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생활을 잘 하는데도 환난이 밀어닥칠 때가 답답한 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자기의 육체를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하십니다(갈 6:8-9)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를 못하십니다. 그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삼대 불가능입니다. ① 하나님은 인간을 미워하실 수 없습니다. ②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는 원칙을 어기지 못합니다. ③ 하나님은 거짓말을 못합니다. 하나님은 선(善)을 심는 사람에게서 선(善)을 거두고, 악(惡)을 심은 사람에게서 악(惡)을 반드시 거두게 하십니다. 그런데 선을 심고 환난을 거 두고 정직하게 살았는데, 억울한 일을 당하고, 생선을 달라고 기도하는데 뱀이 나타나고, 떡을 달라고 하였는데 돌이 나타나는 때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그러나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善)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을 가질 때 반드시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자아(自我)의 교만과 고집이 깨어 진 후에 주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낙심(落心)을 이길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12장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 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 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IMF 시절에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던 골프 선수 [박세리] 양이 메이저 리그 때 18번 홀에서 공이호수로 빠지는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신발을 벗고 양발도 던지고 물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위기의 순간에 이처럼 극적으로 러프를 탈출한 뒤 연이은 그림 같은 스윙으로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인터뷰에서 그는 "10%의 가능성만 있어도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쉽게 낙심하고 쉽게 절망하면 되겠습니다.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참된 보화를 담은 성도는 10%가 아니라 100%의 승리를 보장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낙심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낙심은 우리의 희망 꿈 소망 기쁨 을 박살내는 백해무익(百害無益)한 것입니다.
3.사람으로부터는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으로부터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9절 상)
여기의 "핍박받음"이란 말은 "쫓김을 당함"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이와 같이 사람으로부터는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으로부터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시 27:10)
믿음 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때를 따라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때때로 부모님이나 친척이나 직장에 서 버림받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가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핍박을 받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 5:10,12) 또한 딤후 3:12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아도 예수님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중세기 성자 [크리소스톰]은 [유독시아]라는 왕후(王侯)의핍박을 받아 멀리 추방을 당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를 쫓아내면 엘리야처럼 되어 까마귀가 나를 조석(朝夕)으로 도울 것이요. 바다에 던지면 요나처럼 될 것이요, 돌로 친다면 스데반처럼 될 것이요, 목을 자른다면 세례 요한같이 될 것이요, 매로 친다면 사도 바울같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힘들고, 가족에 핍박을 받는다고 중도에 신앙생활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보화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마치 바닷가에서 조개껍질 주어 들고 좋아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는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가 아니라 진주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두들겨 맞으면서도 나오고 머리 깍아 버리면 수건 덮어쓰고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의로운 자를 불의한 손에 내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성도를 쫓는 무리들의 수중에 넘겨주시지 않으십니다(롬 11:1-2) 그것이 바로 질그릇 안에 보화 복음의 능력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의뢰하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보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으로부터는 핍박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4.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9절 하)
여기의 "거꾸러뜨림"이란 "때려눕힘을 당한다"라는 뜻으로서 핍박이 극에 달하며, 짓밟히고 끌어내어 내침받는 상황을 가리킵니다(행 149)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아무리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맞아 쓰러져도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일어나도록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망했다고탄식하는 분이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넘어진 사람이 있습니까? 일어나십시요. 망하지 않았습니다. 성도의 특색은 실패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칠전팔기로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 2416에서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기상은 넘어질 때마다 벌떡벌떡 일어나는데 있습니다. [로버트 브라우닝]은 그의 에필로그에서 "용감한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주님과 하나님을 향하여 등을 돌리지 않고 가슴을 펴고 전진하는 사람입니다. 캄캄한 구름이 걷칠 것을 의심치 않으며 자기가 신봉하는 정의가 곤경에 처해도 악이 승리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고 넘어지면 일어서고 패하여도 다시 잘 싸우고 깨어나기 위해 잠드는 사람입니다"라고 강조합니다. 또한 [로버트 슐러] 목사는 "망했다고 생각할 때 더욱 매달려라. 세월이 지나면 그들의 암담했던 시절(時節)을 되돌아보고 이렇게 말한다. 처칠이 전쟁의 때를 회고하여 말한 것처럼 그때가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시절(時節)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 4:11-13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能力)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말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의 고백입니까? 그리스도인은 거꾸러뜨려도 깨질지언정 질그릇은 그 속에 담긴 무한한 주님의 능력이 이기게 하십니다. 성도는 록다운(Knock Down)될지언정 록아웃(Knock out)은 안 됩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거꾸러지고 죽음이 온다 해도 망한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을 증거 하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승리했습니다. 사도들도 예수를 믿음으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서 서신 것 을 보느니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당당하게 말하면서 순교하였습니다(행7:56) 그의 질그릇은 깨지 고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그의 영혼은 망하지 않고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있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로 아나니"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고후 5:1)
(예화) 초대 교회에 황제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극악무도한 죄인들과 같이 있도록 감방에 집어넣어라" 이때 신하가 다시 고개를 혼들었습니다. "황제님! 그건 안됩니다. 그 사람은 전도할 기회가 왔다고 더 좋아할 것입니다. 얼마 있지 않아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모조리 크리스챤이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상한 힘이 있어서 살인강도도 회개시켜서 그에게 상급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굶겨라" 이에 신하는 말합니다. "굶기면 금식 기도에 들어가 삼층 천에 올라가는 신비한 입신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놈을 내 어 목을 쳐라" 또 신하가 말합니다. "황제님, 저들의 제일 큰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하면서도 얼굴에 광채가 나고 입에는 이렇게 찬송이 나온 답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라고 찬송할 것입니다"고 말하자. 황제는 "그러면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탄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놈들은 왜 이렇단 말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신하는 답하기를 "그 속에 영원한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모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연약한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빚으시고 장중에 보호해 주시는 질그릇이요,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보배를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비록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때를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결코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환난은 잠깐이나 그 영광은 영원 영원할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높이 드러날 것을 믿습니다. 질그릇 속에 보화를 가진 사람들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참된 보화를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성경에 약속하신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祝願)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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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보물찾기와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참된 "보화"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학문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사업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명예와 지위를 통하여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한결같은 고민은 자신들이 참된 보화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집착하면 할수록 더욱 더 공허하고, 고독하기만 할 뿐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현재 추구하는 것들이 참된 보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참된 보화를 찾고자 방황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보화를 찾아 더 이상 방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참된 보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강한 것 같으나 사실 볼품도 없고 견고하지도 못한 참으로 연약한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다 마음의 문(門)을 열고 마음의 숨결을 들어보면 절망의 몸부림이 있고 가슴마다 탄식이 서려 있습니다. 인간은 상한 갈대,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은 존재요, 들의 꽃과 같은 존재입니다(사 42:3, 시 103:13-16) 그러기에 우리는 사단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습니다. 끊임없이 질병과 환난, 시험과 가난, 실패와 공포로부터 쉽게 낙망하고 좌절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은 갈대다. 한 방울의 물, 한 점의 바람에도 죽을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연약한 우리들은 쉽게 열등감(劣等感)에 빠집니다. 인생살이나 신앙생활이나 언제나 열등감(劣等感)이 문제입니다. [열등감](劣等感: 인피어리오러티 필링(inferiority feeling)이란 말을 사전에 찾아보면 "다른 사람에 비하여 자기는 뒤떨어졌다거나 자기에게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만성적인 감정 또는 의식"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열등감이 어디에서 옵니까?
첫째는 신체적인 열등감이 있습니다. 키가 작다 라든지, 다리가 짧다 라든지, 혹은 기형이나 질병으로 생긴 신체적 이상으로부터 오는 열등감입니다.
둘째는 정신적인 열등감이 있습니다. 학교성적이 나쁘다, 운동을 못한다, 미인이 아니다 등입니다.
셋째는 사회적인 열등감이 있습니다. 학력, 인종이나 신분에 의한 차별, 언어 ․빈곤 ․왼손잡이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열등감이 별다른 원인 없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면 이것이 <우울증(憂鬱症)>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열등감을 가진 사람의 성격은 소극적이고 주저주저하며 내성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매우 공격적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 보상을 하려고 합니다. 학력에 대하여 열등감을 가진 사람이 부자가 되어 여봐란 듯이 행동하는 경우나, 학교 성적이 나빠 교사로부터 무시당하는 학생이 범죄행위를 하여 주시의 표적이 되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 보기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받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대부분 열등감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머리가 나쁘다. 자란 환경이 나쁘다. 직업이 좋지 않다. 학력이 없다. 말을 잘하지 못한다. 의지력이 약하다. 몸이 약하다. 집중력이 없다. 등등....[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나폴레옹]이나 [베토벤], [뉴턴], [에디슨], [처칠]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열등감의 덩어리]라고 할 만큼 열등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맥스웰 멀츠]라고 하는 의사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 중 95%는 열등감이라는 질병에 시달린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치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듯이 모든 사람이 열등감의 상처를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모세]도 이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고 (출 4:10) 영적 거장 [바울]도 열등감이 있었습니다.(고후 11:6). 그러나 그들은 그 열등감에 사로 집힌 노예의 삶을 살지는 않았다는 점이 그들을 위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열등의식이 있다면 그 열등의식을 활용하는 방법도 반드시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신비롭게 만드셨습니다. 어떤 종류의 열성을 가지면 다른 능력이 개발되게 창조하셨습니다. 오른팔이 없으면 왼팔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되며, 시력을 잃게 되면 청각이 발달됩니다. 한쪽의 신장이 약해지면 다른 쪽 신장이 더 활발히 움직여 이를 보충하게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신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어딘가에 열성을 가지면 그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려는 마음의 활력이 강하게 작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사람이라면 자신의 관심 속에서 열등감을 몰아내고 강점을 살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카라얀]이<신이 주신 목소리>라고 칭찬했던 소프라노 [조수미]씨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70점이 나왔다고 합니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 조수미 씨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창피해서 얼굴도 들지 못했을까요? 아니면 화를 내고 나갔을까요? 아마 함께 한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웃었을 겁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다시 노래를 부르며 즐겼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노래를 잘하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인데 그깟 노래방 점수 낮은 게 충격일 리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기 안에 확실히 자부할 만한 보배가 있을 때는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우습게 생각해도 별 문제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 7절 말씀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함이라"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의 가치관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가치관은 바로 질그릇이 아니라 보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디에다 인생의 가치를 두고 있습니까? 그릇입니까? 아니면 내용입니까?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사십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인생에 회의를 느끼지 않고 끊임없이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자각해야 됩니다. 우리의 본래 모습이 무엇입니까? 본문 7절의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질그릇의 모습>입니다. 질그릇이란 진흙으로 만든 거친 그릇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질그릇의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는 연약함입니다. 쉽게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잠시라도 누군가가 보호해 주지 않으면 언제 부숴 질지 모르는 한계를 가진 것이 질그릇입니다. 그래서 보호자가 있어야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져 줄 수 있는 보호자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 분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한 시라도 보살핌이 없이는 깨어지고 부숴 지는 자라는 자신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또 다른 질그릇의 특징은 비천합니다. 비천하다는 것은 특별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평범하다는 것이지요. 우리들의 본래 모습이 이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교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본래 모습을 잊고 살아가는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살아가면서 획득한 인간 조건들이 본래의 자기 모습인 줄 착각합니다. 재산, 사회적 지위, 학식 등이 자신의 실제 모습인 줄 압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갖춰지면 자신만만합니다. 그때부터는 자신이 연약하다 비천하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세상이 그렇게 살기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 더욱 슬픕니다. 본래의 자기모습을 잃어버리고 철저히 포장된 자가 대접을 받는 시대라는 사실이 더욱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을 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나 자신의 실체는 질그릇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로 조금만 잘못되어도 금세 피곤하고, 병들고, 늙어지고, 죽고 그렇습니다. 이것저것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닙니다. 시103:14-16 보면 우리를 가리켜 <진토, 더스트(dust)>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마치 풀과 같고 그 영화가 바람이 불면 사라져버리는 들꽃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런 실상을 모르고 그저 지금의 내 모습이 천년만년 계속될 "영원한 내 모습"으로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겸손하게 나 자신의 본래 모습이 연약하고 비천한 질그릇과 같은 존재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교만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할지라도 다 <임시 보관용>이요 <위탁물>일 뿐입니다.
시간 차이일 뿐 언젠가 다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재산도, 지위도, 학식도, 재능도, 젊음도, 건강도, 목숨까지도 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란 가치 없는 생을 살다가 가는 단순한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질그릇 같은 우리 인생의 가치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질그릇에 담긴 내용물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질그릇은 질그릇인데 무엇이 담긴 질그릇이라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같은 그릇이라도 기왕이면 좋은 재질로 만들어진 것이면 좋겠죠. 그러나 그릇의 재질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담겨지느냐가 중요합니다. 즉 <내용물>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비싼 도자기라 할지라도 그 안에 오줌이 들어 있으면 요강이 되고, 쓰레기가 들어 있으면 쓰레기통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질그릇이라도 보물이 담겨지면 보물단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내용물에 최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보배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복음(福音), 즉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인간 조건보다 더 귀중한 것은 우리 가운데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우습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 가벼이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마음에 담은 자답게 사십시오. 그것이 질그릇인 우리의 인생이 빛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비어 있는 질그릇이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재물과, 학식과, 지위에 대한 욕망이 가득 담긴 위장 된 질그릇이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철학, 예수님의 말과 행동, 이 모든 [보배를 담은 질그릇]으로 부끄럽지 않는 삶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 인생을 가장 값지고 귀하게 만드시는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질그릇 속에 참된 보배를 담아 주셨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본문 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보화 되신 예수님은 질그릇과 같은 우리 인생을 사랑하셔서 성령으로 잉태(孕胎)하사 육신의 몸을 입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악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질그릇과 같은 인생일지라도 그 속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10-11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보화를 담고 있는 질그릇 인생은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참된 보화를 담고 있는 질그릇 인생은 어떤 경우에서도 소망을 잊지 않습니다. 참된 보화를 담고 있는 질그릇 인생은 극한 고난(苦難) 중에서도 자족(自足)하며 기뻐합니다. 여러 가지 환난과 어려움을 만나지만 담대하게 극복(克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담긴 이 보화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힘이요, 소망이요, 능력이요, 인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언제든지 하나님의 일꾼답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은자 같으나 죽임을 당치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8:8-10)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질그릇 속에 담겨진 보화가 오늘 이 시간 우리들의 질그릇 속에도 담겨진 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섬기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은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 역사 하십니다. 사도 바울을 인도하던 보혜사 성령은 지금도 이 전에 충만히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참된 보화를 담은 질그릇 인생의 특징은 어떠합니까?
1.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합니다(8절 상)
여기에서 "우겨쌈을 당한다"라는 말은 "즙을 짜기 위해 포도주를 짓누른다"라는 뜻으로 성도가 세상에서 당하는 [극심한 고난(苦難)]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이와 같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환난과 괴로움 때문에 사면을 온통 둘러싸인 채 이를 극복하려고 많은 몸부림을 쳤습니까? 어떤 사람은 슬픔에 싸이기도 합니다. 낭패와 실망에 싸이기도 합니다. 특히 최근에 계속되는 경제대난으로 장래(將來)가 불확실하게 보입니다. 불투명한 미래로 인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평생 직장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3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 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않으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 히 감당케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당당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성도는 온통 죄악으로 둘러싸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 죄악 의 물결이 파도처럼 넘쳐도 죄악의 물결에 싸이지 않는 삶 이것이 올바른 성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일 5:18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들지도 못 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리는 물 속에 잠겼다가 밖으로 나와도 물 한방울 안 묻습니다. 그 이유는 털에 기름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고기는 물 속에 있어도 짠물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죽은 고기 뱃속에 물이 들어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욕의 유혹(誘惑)의 손길이 둘러싸일까 걱정하십니까? 요셉은 질그릇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았기에 보디발의 아내의 달콤한 유혹이 그를 불렀지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하면서 도망을 쳤습니다(창 39:9) 여러분 중에 아직도 이기지 못하는 유혹이 있다고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유흑에 약한 질그릇에 의로운 능력이신 주님의 보화를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능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질그릇 자체로는 장담할 것이 못됩니다. 다만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를 통하여 이길 수가 있습니다. 비록 원수가 우리를 둘러쌀지라도 싸이지 않습니다.
또한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지혜롭고 영특한 다니엘은 왕의 총애를 받습니다. 그를 시기하는 방백들은 다니엘을 없애려는 계략으로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구하거나 사람에게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했습니다. 천하에 이런 엉터리 법령을 만들어 전국에 발표했습니다. 다니엘은 온 나라가 원수들로 둘러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다니엘은 자기 집에 돌아가서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단 6:10) 그 결과 다니엘은 원수들의 우겨쌈을 당하였지만 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창문을 열고 기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때로 실망과 분노가 나의 삶을 둘러싸고 나 자신을 우울증의 포로로 만 들 수 있습니다. 과거로 인한 우울증에 사로잡히면 인생은 여지없이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이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 분이 내게 베푸신 은혜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8:28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노라"고 하였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가 내게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이 세상 친구 없어도 예수는 나의 친구니.."라고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 바울의 이 외침을 또 들어봅시다.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26, 35,37,39)
2.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않습니다(8절 하)
여기의 "답답한 일"이란 말은 "쩔쩔매다, 난처하여 어쩔 줄 모른다"라는 뜻으로서 어떤 일을 택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절망을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방법이나 수단이 전혀 없는 아주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이와 같이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순풍의 돛단배처럼 평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어려움이 있고 앞을 가로막는 때도 있습니다. 길이 아주 암담해 보일 때 부정적 사고 주의자는 자신을 동정하면서 손에는 술병이나 죽음의 약병을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생을 패배의 함정 에 몰아 넣는 것은 답답한 환경에서 너무도 쉽게 절망해 버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잠언 4 :25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놀라운 일을 하려고 하실 때에는 어려운 일로부터 시작합니다. 만일 그가 아주 기적적인 놀라운 일을 하시려고 할 때는 불가능으로부터 시작하십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에서 가나안을 향하는 자유의 행로에 홍해가 가로 막혔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원망하고 이제 죽게 되었다고 낙심천만(落心千萬)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하였습니다(출 1413) 모세는 믿음이 있었기에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께서 행하신기적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보화를 담고 있는 성도라면 어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질그릇 속에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막 9:23에 있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낙심치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선(善)한 일을 했는데도 시험(試驗)이 닥치고 열심히 하나님을 공경하고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생활을 잘 하는데도 환난이 밀어닥칠 때가 답답한 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자기의 육체를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하십니다(갈 6:8-9)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를 못하십니다. 그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삼대 불가능입니다. ① 하나님은 인간을 미워하실 수 없습니다. ②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는 원칙을 어기지 못합니다. ③ 하나님은 거짓말을 못합니다. 하나님은 선(善)을 심는 사람에게서 선(善)을 거두고, 악(惡)을 심은 사람에게서 악(惡)을 반드시 거두게 하십니다. 그런데 선을 심고 환난을 거 두고 정직하게 살았는데, 억울한 일을 당하고, 생선을 달라고 기도하는데 뱀이 나타나고, 떡을 달라고 하였는데 돌이 나타나는 때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그러나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善)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을 가질 때 반드시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자아(自我)의 교만과 고집이 깨어 진 후에 주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낙심(落心)을 이길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12장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 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 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IMF 시절에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던 골프 선수 [박세리] 양이 메이저 리그 때 18번 홀에서 공이호수로 빠지는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신발을 벗고 양발도 던지고 물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위기의 순간에 이처럼 극적으로 러프를 탈출한 뒤 연이은 그림 같은 스윙으로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인터뷰에서 그는 "10%의 가능성만 있어도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쉽게 낙심하고 쉽게 절망하면 되겠습니다.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참된 보화를 담은 성도는 10%가 아니라 100%의 승리를 보장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낙심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낙심은 우리의 희망 꿈 소망 기쁨 을 박살내는 백해무익(百害無益)한 것입니다.
3.사람으로부터는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으로부터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9절 상)
여기의 "핍박받음"이란 말은 "쫓김을 당함"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이와 같이 사람으로부터는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으로부터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시 27:10)
믿음 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때를 따라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때때로 부모님이나 친척이나 직장에 서 버림받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가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핍박을 받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 5:10,12) 또한 딤후 3:12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아도 예수님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중세기 성자 [크리소스톰]은 [유독시아]라는 왕후(王侯)의핍박을 받아 멀리 추방을 당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를 쫓아내면 엘리야처럼 되어 까마귀가 나를 조석(朝夕)으로 도울 것이요. 바다에 던지면 요나처럼 될 것이요, 돌로 친다면 스데반처럼 될 것이요, 목을 자른다면 세례 요한같이 될 것이요, 매로 친다면 사도 바울같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힘들고, 가족에 핍박을 받는다고 중도에 신앙생활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보화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마치 바닷가에서 조개껍질 주어 들고 좋아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는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가 아니라 진주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두들겨 맞으면서도 나오고 머리 깍아 버리면 수건 덮어쓰고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의로운 자를 불의한 손에 내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성도를 쫓는 무리들의 수중에 넘겨주시지 않으십니다(롬 11:1-2) 그것이 바로 질그릇 안에 보화 복음의 능력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의뢰하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보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으로부터는 핍박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4.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9절 하)
여기의 "거꾸러뜨림"이란 "때려눕힘을 당한다"라는 뜻으로서 핍박이 극에 달하며, 짓밟히고 끌어내어 내침받는 상황을 가리킵니다(행 149)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아무리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맞아 쓰러져도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일어나도록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망했다고탄식하는 분이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넘어진 사람이 있습니까? 일어나십시요. 망하지 않았습니다. 성도의 특색은 실패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칠전팔기로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 2416에서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기상은 넘어질 때마다 벌떡벌떡 일어나는데 있습니다. [로버트 브라우닝]은 그의 에필로그에서 "용감한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주님과 하나님을 향하여 등을 돌리지 않고 가슴을 펴고 전진하는 사람입니다. 캄캄한 구름이 걷칠 것을 의심치 않으며 자기가 신봉하는 정의가 곤경에 처해도 악이 승리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고 넘어지면 일어서고 패하여도 다시 잘 싸우고 깨어나기 위해 잠드는 사람입니다"라고 강조합니다. 또한 [로버트 슐러] 목사는 "망했다고 생각할 때 더욱 매달려라. 세월이 지나면 그들의 암담했던 시절(時節)을 되돌아보고 이렇게 말한다. 처칠이 전쟁의 때를 회고하여 말한 것처럼 그때가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시절(時節)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 4:11-13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能力)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말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의 고백입니까? 그리스도인은 거꾸러뜨려도 깨질지언정 질그릇은 그 속에 담긴 무한한 주님의 능력이 이기게 하십니다. 성도는 록다운(Knock Down)될지언정 록아웃(Knock out)은 안 됩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거꾸러지고 죽음이 온다 해도 망한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을 증거 하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승리했습니다. 사도들도 예수를 믿음으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서 서신 것 을 보느니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당당하게 말하면서 순교하였습니다(행7:56) 그의 질그릇은 깨지 고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그의 영혼은 망하지 않고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있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로 아나니"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고후 5:1)
(예화) 초대 교회에 황제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극악무도한 죄인들과 같이 있도록 감방에 집어넣어라" 이때 신하가 다시 고개를 혼들었습니다. "황제님! 그건 안됩니다. 그 사람은 전도할 기회가 왔다고 더 좋아할 것입니다. 얼마 있지 않아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모조리 크리스챤이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상한 힘이 있어서 살인강도도 회개시켜서 그에게 상급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굶겨라" 이에 신하는 말합니다. "굶기면 금식 기도에 들어가 삼층 천에 올라가는 신비한 입신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놈을 내 어 목을 쳐라" 또 신하가 말합니다. "황제님, 저들의 제일 큰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하면서도 얼굴에 광채가 나고 입에는 이렇게 찬송이 나온 답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라고 찬송할 것입니다"고 말하자. 황제는 "그러면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탄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놈들은 왜 이렇단 말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신하는 답하기를 "그 속에 영원한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모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연약한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빚으시고 장중에 보호해 주시는 질그릇이요,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보배를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비록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때를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결코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환난은 잠깐이나 그 영광은 영원 영원할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높이 드러날 것을 믿습니다. 질그릇 속에 보화를 가진 사람들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참된 보화를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성경에 약속하신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祝願)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