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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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부모가 되려면”(막 10:13-16)
오늘은 어린이날이요, 교회가 지키는 어린이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에 가장 값진 선물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받은 축복 중에 가장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모두가 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자녀라고 답변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시편 127편 3절에도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낳은 것은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종종 딸자식을 둔 부모에게 얼마나 재주가 없으면 딸만 낳느냐고 하기도 하고, 아들만 낳으면 기술이 좋아서 아들을 낳았다고 말을 합니다. 사실 이런 말들은 불신앙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생명을 선택할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자녀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그들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우리처럼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자녀는 결코 부모의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을 맡은 청지기일 뿐입니다. 여기에 부모의 책임과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는 부모들은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온 그 기능과 소질을 발견하여 개발시켜 줌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을 받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가정이라고 하는 곳은 너무나 중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가정은 자녀들의 성격을 형성시켜 주는 학교이기에 부모의 책임 또한 막중함을 느끼게 됩니다. 사회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 대부분이 결손 가정의 자녀라는 데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부모가 신앙으로 바로 서고 우리의 투명한 삶으로 자녀들에게 주님을 보여줄 수 있고, 신앙교육을 할 수 있는 성숙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좋은 부모가 그리 쉬운 간단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녀에 대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에 값을 지불한다고 좋은 부모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한 현상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자식만 귀여워하고 물질을 투자하지 부모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부모님이 계신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들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해야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려와야 합니다.(13-15절)
본문 13절에서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좋은 부모는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부모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부모가 어린아이들을 선생에게 데리고 가서 축복기도를 받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만져주길 원해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에 대해서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이혼문제에 대한 변론」으로 인하여 무척이나 피곤하실 것이라는 생각에서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물리치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어린아이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오는 금하였던 제자들을 향하여 분히 여기시면서 “어린아이들의 내게로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만져주길 바랐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저들의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예수님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그 분의 고상한 인격을 닮고자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저들의 바램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는 말은 요즘 말로 하면 교회로 데리고 왔다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담대하게 말하고자 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자녀들이 교회 나오는데 방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라는 이런 생각을 가진 부모라면 그 부모는 참으로 자식을 죽이는 부모입니다. 자식의 앞날이 망가지기를 기대하는 부모입니다.
아이들이 교회 나와서 떠들어도 괜찮습니다. 아이들이 영적 분위기 속에서 자란다는 그 자체가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은 아이들이 나오는 것을 귀찮게 생각했는데 우리들은 그런 아이들이 교회 안에서 무시를 당하거나 학대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교회 나가는 일에는 적극적으로 도와야 하고, 때로는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교회중심으로 살도록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우리들 가운데 제자들처럼 인간적인 생각을 가지고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께 데려오는 일을 게을리 하는 성도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오는 오는 일을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기뻐해야 합니다.
미국교회나 영국교회에서는 부모가 주일예배 때에 자녀들과 함께 나와 자녀들은 가운데 양쪽에는 부모가 앉아서 예배드리는 행복한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어린 자녀들에게 주일 예배가 얼마나 귀중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가기 앞서 자식들에게 주일예배에 대해서 경건성을 가르치고 함께 예배당엘 나오는데 그렇게 경건하고 조용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예배에 중요성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시간만은 너무도 조용합니다. 교회에 와서 조용히 하라, 시끄럽다 그렇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집에서부터 예배에 중요성에 대해서 철저히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아무쪼록 우리는 자녀들을 교회로 데리고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일학교도 더욱 부흥되고 더욱 발전되고 경건한 주일학교 교육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학교 교육에 마음을 합해야 합니다. 모두가 경건하고 모두가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기도했듯이,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부모된 우리는 자녀들을 주께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경건함을 가르치고 몸소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려 와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 자녀들은 하나님의 구원 대상이고 중생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본문 14절과 15절에서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인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에게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자녀들이 예수님께 데리고 와야 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의 생명의 귀중함을 알아야 깨닫고 그들에게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교회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그들도 분명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요, 중생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들에게도 절대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려와야 합니다.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10:17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하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둘째로, 어린아이들도 얼마든지 은혜를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장을 보면 어린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뜻이 나타나기도 하였고, 삼상 3장을 보니 어린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에스라 시대에는 온 백성이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할 때에 어린 아이들도 나와서 하나님의 성전에 울며 기도하며 죄를 자복하고 심히 통곡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우리들은 어린아이들이 주님께로 오는 것을 금하지 말고 오히려 예수님께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 자녀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양육을 맡기신 인격체요, 결코 나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나의 뜻에 따라 선택하여 받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지정하여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할 때 주신 것이 아니라 약속 25년 만에 주셨으며(창 12:4, 21:1-2, 롬 4:19), 야곱의 아내 라헬에게 잉태치 못하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였으나, 라헬이 자기 남편에게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게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협박할 때 야곱은 라헬에게 놀르 발하여 말하기를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창 30:1-2) 하였습니다. 자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것을 볼 때에 우리들은 우리의 자녀들을 마땅히 예수님께 데리고 와야 합니다.
(예화) 미국의 초기 청교도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람 중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에드워드는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신앙적인 여인과 결혼해서 신혼 초기부터 철저하게 기독교적 원리에 입각해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형성해 갔습니다.
같은 때에 뉴잉글랜드에서 그와 같이 자란 동네 친구였던 「맥스 쥬크」는 신앙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방탕했던 여인과 결합하여 나중에 자신도 신앙을 저버려 그의 사람됨이 점차 잘못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두 사람의 가계(家系)를 추적했습니다.
그들의 후손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에드워드는 오늘날까지 617명의 후손을 두었는데 대학의 총장을 지냈던 사람이 12명, 교수가 75명, 의사가 60명, 성직자가 100명, 군대 장교가 75명, 저술가가 80명, 변호사가 100명, 판사가 30명, 공무원이 80명, 하원의원이 3명, 상원의원이 1명, 미국 의 부통령을 1명 배출 했습니다.
맥스 쥬크는 1292명의 후손을 두었는데 유아로 사망한 사람이 309명, 직업적인 거지가 310명, 불구자가 440명, 매춘 부가 50명, 도둑이 60명, 살인자가 70명,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이 53명이 었습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이 좋은 가정과 그리스도가 떠나버린 가정과의 차이를 여실히 볼 수 있는 좋은 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조나단 에드워드의 후손들처럼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훌륭한 자녀들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려오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늦어서도 결코 교회를 떠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우리 자녀들을 교회로만 인도하는 것은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일성의 경우입니다.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은 기독인만이 입학할 수 있었다는 평양 숭실중학교 출신이다. 이 학교는 1897년 10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에 의해 설립돼 1912년 정식 인가를 받은 기독교학교. 김형직은 이 학교에서 종교부장으로 활동할 만큼 신앙이 독실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모친 강반석도 잘 알려진 대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제단 즉 교회를 의미하는 반석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를 잘 입증헤 주고 있다. 그의 모친은 하리 교회 권사였다.
김일성은 이처럼 독실안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일성은 특히 외조부 강형욱 장로(칠골교회)가 관계하고 있던 창덕소학교에 다녔는데 강반석의 부친 강형욱은 평남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교회와 창덕소학교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한 인물로 전해진다.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강양욱 목사가 바로 강형욱의 육촌동생이다.
김일성은 상하이임시정부의 의정원 원장을 지낸 손정도 목사의 교회에서 어린 시절 신앙생활을 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죽으면서 김일성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중국 지린(吉林)에 있는 나의 친구 손정도 목사를 찾아가면 잘 대해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손목사를 찾았으며 그곳에서 학생부장을 할 정도로 신앙이 좋았다. 그러던 그가 타락하여 결국 타락하여 민족의 적이 되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순교하게 만드는 원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1988년 평양에 봉수 교회를 1992년에 어머니 강반석의 신앙을 기념하는 칠골교회(혹은 반석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죄를 대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에 우리는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려온 후에 해야 할 다음 단계는 무엇입니까?
2.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축복 받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16절)
본문 16절에서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자녀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축복을 받도록 하게 하는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쁜 사역에서도 저들을 안아주고, 안수기도도 해 주시고, 축복도 해주셨습니다. 여기서 “저들은 안았다는 것”라는 것은 사랑하신 표현이요, 저들을 보호하시겠다는 표현입니다. 저들은 내 것이라는 주님의 소유의 싸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수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구별을 의미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안수기도를 받고 축복을 받은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는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지 않지만 아마 이들은 훌륭하게 성장하여 예수님을 위해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저들을 축복하고, 저들에게 교회의 의미와 예수님의 마음을 말없이 심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자녀교육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쾌락과 방종을 좇는 아이들 뒤에는 부모의 책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돈 몇 푼 주어서 오락하게 하고 간식 먹게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것은 부모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는 인간을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이는 참된 교육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족보가 좋은 맹견이 집안에 있어도 훈련되지 못한 맹견은 집에서 보신용으로 기르는 똥개나 다름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되어지지 않으면 인간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인성 교육이 참으로 귀하고 금. 은. 보화보다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사람들은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다고 했습니다. 어린 자식을 그 어떤 구경을 시키고 관광을 시키고 학원교육에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녀들을 교회로 하나님께로 데리고 오는 것처럼 귀한 교육이 없다고 봅니다. 세상 교육 열 번보다 하나님께로 한번 데리고 나오는 것은 더 큰 교육이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아이들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식들을 그리고 저 많은 아이들을 주님께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어린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데리고 와야 합니다. 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말고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께로 함께 오십시오, 집에서 경건한 삶을 자녀와 함께 가지십시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요 너와 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요 거룩한 곳이요 경건해야 함을 가르치고 자녀와 함께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딤전 4:6에서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자녀들을 말씀으로 양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여건과 환경이 보장된 가정일지라도 행복은 보장되지 못합니다. 수 많은 재산을 부모로부터 물려받고 아무리 지식을 많이 얻는다 해도 행복만은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행복을 확고하게 보장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신앙밖에 없습니다. 신앙이 중심이 되어 있는 가정은 그 어떤 환난이나 역경이 닥쳐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에게 수많은 재산을 물려주지 못해도, 좋은 학벌을 가질 수 있는 공부를 시키지 못해도, 오직 신앙의 유산만은 반드시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들이 말씀으로 살고, 찬송과 기도로써 본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부모에게서 잘못된 자식이 나오지 않습니다. 신앙을 중심으로 사는 부모에게는 방탕 하는 자녀가 나오지 않습니다. 설령 일시적으로 잘못된 길로 간 자식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데리고 함께 주일예배에 공공예배에 참석하시고 영과 진리로 에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디모데는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기도로써 초대교회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예화) 죤 웨슬리가 영국의 명문대학인 옥스포드 대학을 나오고 훌륭한 목사가 되기까지는 웨슬리가 어렸을 때부터 그의 어머니 [수산나]가 자녀들을 모아놓고 성경을 가르치며 히브리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등 기독교적인 가정교육을 철저히 시켰다는데 있습니다.
(예화) 어떤 아이가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어느 큰 성전에 갔습니다. 그때 사제가 옆에 있어서 아버지가 '우리 아이에게 안수 한번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사제는 아이에게 안수를 해주었고 그 아이가 자라서 세계의 유명한 신학자가 되었는데 그 이름이 「윌리엄 바클레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여러분의 아이들에게 축복을 주는 장소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는 것을 배우고, 예수님을 섬기며,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더 좋은 교과서는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에게 지혜를 주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딤후3:15-17).
(예화) 미국의 대통령 중의 한사람인 아브라함 링컨은 정식으로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가난하게 성장하면서 믿음이 좋은 어머니에게서 신앙을 배웠는데 그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네게 줄 것은 이 성경 한 권밖에 없다'고 하면서 이 성경을 잘 읽으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성경을 가까이 했고, 마침내 미국의 대통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 할 의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먹는 것과 입는 것을 해결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부모가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신6:6-7). 그리고 자녀들을 위해서 항상 기도하는 자세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신 6:7-9에서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보다 중요한 요구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에게 있어서 최우선으로 두어야 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와 권위에 의해서 뒷받침되어집니다.
좋은 부모는 자녀들로 하여금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가 있고,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귀한 책이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길에 행할 때 즉 여행 중일 때에도 가르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누웠을 때에도, 일어날 때에도 이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손목에 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행동의 지침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미간에 붙이라고 했는데 미간은 인간의 지성과 사고를 상징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사고와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을 안심하고 맡길 만한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세상 교육은 벌써부터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인격 형성은 접어 두고 점수만 받아 내는 기형적인 교육으로 기울었습니다.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남을 짓밟고 죽여야 하는 무서운 경쟁 사회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망 앞에선 우리에게 오늘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아 들으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살 길이 있음을 알리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기에 인생의 모든 축복이 있음을 알리는 하나님의 자비의 음성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때 인생의 최대 행복이 있음을 알리는 소망의 음성입니다. 그래서 잠 22:6에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부모라면 우리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축복된 길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의 자녀들이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행할 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면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엘리 제사장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불량자였습니다.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삼상 2:11)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고기를 삶을 때에 갈고리로 고기를 꺼내서 먹기도 하고(삼상 212-17),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기도 했습니다.(삼상 2:22-23) 왜 이러한 결과가 낳았습니까? 엘리 제사장은 어려서부터 마땅히 행할 것을 자기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바르게 지도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삼상 2:25 하반 절에서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엘리 제사장도 자녀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는 흔적은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을 꾸준하게 지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간에 어려서부터 우리의 자녀들을 꾸준히 신앙으로 양육하되 주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쳐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생각들이 바뀌어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엡 6:4에서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바로 지금이 부모된 우리들이 우리의 자녀들을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때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부모된 우리로서는 자녀를 어떤 기계나 동물처럼 다루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자녀들도 비록 나이가 어릴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인격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과잉 요구, 비인격적인 요구들은 삼가야 할 부분입니다. 자녀 양육에 있어서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의 잘못에 마땅히 징계를 해야 하지만 분노를 일으키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롬10:19,골3:21).
이것은 곧 부모가 사랑의 징계를 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채찍과 꾸지람이 없으면 자녀들이 부모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잠13:24,22:15,잠29:15). 그러나 책망 속에서 부모의 화풀이 식의 꾸지람은 오히려 자식에게 분노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마땅히 믿음의 부모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여기 '교양'은 자녀에게 본을 보여 자녀를 인도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의 행동으로 자녀를 훈련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훈계'는 '권면', '경고','교훈'의 뜻으로 말로서 자녀를 훈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훈계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의 감정에 따라 비슷한 일을 어떤 때는 혼내고, 어떤 때는 칭찬하고 하면 아이들의 가치관이 혼란스럽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의 모습이 결코 모범되지 못하면 결코 바른 양육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삼상 4:18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엘리 제사장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다는 말을 듣고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삼상 2:32)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엘리 제사장이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는 말씀을 볼 때에 그는 결코 부지런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녀들을 말로만 양육할 것이 아니라 행동에 본을 보이는 가운데 전인격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시겠습니까? 우리나라 부모들은 근시안적이라서 자녀들이 명문대학만 가면 다 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교육은 짐승을 만드는 일이지, 그를 참인간으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진정 내 자녀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인지를 깨닫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자녀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를 내 욕심대로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양육하는 좋은 부모들이 됩시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어린아이에게 위협과 공포와 두려움을 심어주어 그들을 기회주의자로 만들지 말고, 자기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내놓을 수 있도록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들을 가르칩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 준 자녀를 위해 웁시다. 우리의 자녀를 위해 기도합시다. ① 기도의 어머니 한나가 있었기에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② 눈물의 기도로 밥을 대신한 어머니 모니카가 있었기에 성 어거스틴이 한 시대에 빛을 발했습니다. ③ 믿음으로 키운 요게벳이 있었기에 모세가 출애굽 운동의 기수로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④ 디모데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신앙교육에 의하여 훌륭한 목회자로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딤후 1:5)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중심 내용은 무엇입니까?
① 우리 신앙의 대상인 예수님을 바로 가르쳐 예수님을 향하여 신앙 고백을 하여 영생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② 십계명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 들여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③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
④ 영적 성장을 위하여 각종 예배 제도를 가르쳐 영적으로 풍부한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⑤ 바른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늘 말씀을 읽고 상고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두란노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아버지 학교는 우리에게 신선한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학교]란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는 주제 하에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대리자로 가정에 세워 주신 지도자이며, 제사장이며, 목자임을 가르쳐서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권위를 회복시키고, 가정에서 아버지의 구체적인 사명과 역할에 대해서 가르침으로써, 성경적 가정을 세우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권면 하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가정이 깨어져 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가정이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할 때, 교회는 영향력을 잃고, 교회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할 때, 사회는 타락합니다. 깨어져 가는 가정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가정의 회복을 위해 아버지들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이제는 많은 아버지들을 가정으로부터 내 몰았던 한국적 남성 문화의 잘못된 유산을 과감히 정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아버지 입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라는 슬로건 아래 하나님께서는 아버지 학교를 개설토록 허락하셨습니다. 아버지 회복을 통해 , 가정이 회복되고, 교회가 강화 될 것이며, 이 나라 이민족이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적인 아버지가 되고자 결단하며, 이를 실천 할 수 있도록 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의 일꾼이 되도록 도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화려한 문화는 아이들을 현혹하기에 충분합니다. 아이들이 탈선하기 좋은 환경이 부모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미 세상교육은 자녀를 참인간을 만드는데 포기한지 오래입니다. 단순히 지식만 주입시키는 창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진정 깨어있는 성도라면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의 품안에서 살도록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예수님의 축복을 받으며 살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모든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의 자녀들을 예수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축복을 받도록 지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어린이 주일을 맞아 내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기를 다짐하는 좋은 부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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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린이날이요, 교회가 지키는 어린이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에 가장 값진 선물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받은 축복 중에 가장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모두가 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자녀라고 답변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시편 127편 3절에도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낳은 것은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종종 딸자식을 둔 부모에게 얼마나 재주가 없으면 딸만 낳느냐고 하기도 하고, 아들만 낳으면 기술이 좋아서 아들을 낳았다고 말을 합니다. 사실 이런 말들은 불신앙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생명을 선택할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자녀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그들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우리처럼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자녀는 결코 부모의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을 맡은 청지기일 뿐입니다. 여기에 부모의 책임과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는 부모들은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온 그 기능과 소질을 발견하여 개발시켜 줌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을 받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가정이라고 하는 곳은 너무나 중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가정은 자녀들의 성격을 형성시켜 주는 학교이기에 부모의 책임 또한 막중함을 느끼게 됩니다. 사회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 대부분이 결손 가정의 자녀라는 데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부모가 신앙으로 바로 서고 우리의 투명한 삶으로 자녀들에게 주님을 보여줄 수 있고, 신앙교육을 할 수 있는 성숙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좋은 부모가 그리 쉬운 간단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녀에 대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에 값을 지불한다고 좋은 부모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한 현상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자식만 귀여워하고 물질을 투자하지 부모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부모님이 계신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들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해야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려와야 합니다.(13-15절)
본문 13절에서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좋은 부모는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부모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부모가 어린아이들을 선생에게 데리고 가서 축복기도를 받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만져주길 원해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에 대해서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이혼문제에 대한 변론」으로 인하여 무척이나 피곤하실 것이라는 생각에서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물리치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어린아이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오는 금하였던 제자들을 향하여 분히 여기시면서 “어린아이들의 내게로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만져주길 바랐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저들의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예수님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그 분의 고상한 인격을 닮고자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저들의 바램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는 말은 요즘 말로 하면 교회로 데리고 왔다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담대하게 말하고자 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자녀들이 교회 나오는데 방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라는 이런 생각을 가진 부모라면 그 부모는 참으로 자식을 죽이는 부모입니다. 자식의 앞날이 망가지기를 기대하는 부모입니다.
아이들이 교회 나와서 떠들어도 괜찮습니다. 아이들이 영적 분위기 속에서 자란다는 그 자체가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은 아이들이 나오는 것을 귀찮게 생각했는데 우리들은 그런 아이들이 교회 안에서 무시를 당하거나 학대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교회 나가는 일에는 적극적으로 도와야 하고, 때로는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교회중심으로 살도록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우리들 가운데 제자들처럼 인간적인 생각을 가지고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께 데려오는 일을 게을리 하는 성도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오는 오는 일을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기뻐해야 합니다.
미국교회나 영국교회에서는 부모가 주일예배 때에 자녀들과 함께 나와 자녀들은 가운데 양쪽에는 부모가 앉아서 예배드리는 행복한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어린 자녀들에게 주일 예배가 얼마나 귀중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가기 앞서 자식들에게 주일예배에 대해서 경건성을 가르치고 함께 예배당엘 나오는데 그렇게 경건하고 조용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예배에 중요성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시간만은 너무도 조용합니다. 교회에 와서 조용히 하라, 시끄럽다 그렇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집에서부터 예배에 중요성에 대해서 철저히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아무쪼록 우리는 자녀들을 교회로 데리고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일학교도 더욱 부흥되고 더욱 발전되고 경건한 주일학교 교육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학교 교육에 마음을 합해야 합니다. 모두가 경건하고 모두가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기도했듯이,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부모된 우리는 자녀들을 주께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경건함을 가르치고 몸소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려 와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 자녀들은 하나님의 구원 대상이고 중생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본문 14절과 15절에서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인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에게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자녀들이 예수님께 데리고 와야 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의 생명의 귀중함을 알아야 깨닫고 그들에게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교회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그들도 분명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요, 중생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들에게도 절대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려와야 합니다.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10:17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하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둘째로, 어린아이들도 얼마든지 은혜를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장을 보면 어린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뜻이 나타나기도 하였고, 삼상 3장을 보니 어린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에스라 시대에는 온 백성이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할 때에 어린 아이들도 나와서 하나님의 성전에 울며 기도하며 죄를 자복하고 심히 통곡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우리들은 어린아이들이 주님께로 오는 것을 금하지 말고 오히려 예수님께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 자녀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양육을 맡기신 인격체요, 결코 나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나의 뜻에 따라 선택하여 받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지정하여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할 때 주신 것이 아니라 약속 25년 만에 주셨으며(창 12:4, 21:1-2, 롬 4:19), 야곱의 아내 라헬에게 잉태치 못하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였으나, 라헬이 자기 남편에게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게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협박할 때 야곱은 라헬에게 놀르 발하여 말하기를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창 30:1-2) 하였습니다. 자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것을 볼 때에 우리들은 우리의 자녀들을 마땅히 예수님께 데리고 와야 합니다.
(예화) 미국의 초기 청교도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람 중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에드워드는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신앙적인 여인과 결혼해서 신혼 초기부터 철저하게 기독교적 원리에 입각해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형성해 갔습니다.
같은 때에 뉴잉글랜드에서 그와 같이 자란 동네 친구였던 「맥스 쥬크」는 신앙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방탕했던 여인과 결합하여 나중에 자신도 신앙을 저버려 그의 사람됨이 점차 잘못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두 사람의 가계(家系)를 추적했습니다.
그들의 후손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에드워드는 오늘날까지 617명의 후손을 두었는데 대학의 총장을 지냈던 사람이 12명, 교수가 75명, 의사가 60명, 성직자가 100명, 군대 장교가 75명, 저술가가 80명, 변호사가 100명, 판사가 30명, 공무원이 80명, 하원의원이 3명, 상원의원이 1명, 미국 의 부통령을 1명 배출 했습니다.
맥스 쥬크는 1292명의 후손을 두었는데 유아로 사망한 사람이 309명, 직업적인 거지가 310명, 불구자가 440명, 매춘 부가 50명, 도둑이 60명, 살인자가 70명,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이 53명이 었습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이 좋은 가정과 그리스도가 떠나버린 가정과의 차이를 여실히 볼 수 있는 좋은 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조나단 에드워드의 후손들처럼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훌륭한 자녀들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려오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늦어서도 결코 교회를 떠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우리 자녀들을 교회로만 인도하는 것은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일성의 경우입니다.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은 기독인만이 입학할 수 있었다는 평양 숭실중학교 출신이다. 이 학교는 1897년 10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에 의해 설립돼 1912년 정식 인가를 받은 기독교학교. 김형직은 이 학교에서 종교부장으로 활동할 만큼 신앙이 독실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모친 강반석도 잘 알려진 대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제단 즉 교회를 의미하는 반석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를 잘 입증헤 주고 있다. 그의 모친은 하리 교회 권사였다.
김일성은 이처럼 독실안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일성은 특히 외조부 강형욱 장로(칠골교회)가 관계하고 있던 창덕소학교에 다녔는데 강반석의 부친 강형욱은 평남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교회와 창덕소학교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한 인물로 전해진다.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강양욱 목사가 바로 강형욱의 육촌동생이다.
김일성은 상하이임시정부의 의정원 원장을 지낸 손정도 목사의 교회에서 어린 시절 신앙생활을 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죽으면서 김일성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중국 지린(吉林)에 있는 나의 친구 손정도 목사를 찾아가면 잘 대해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손목사를 찾았으며 그곳에서 학생부장을 할 정도로 신앙이 좋았다. 그러던 그가 타락하여 결국 타락하여 민족의 적이 되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순교하게 만드는 원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1988년 평양에 봉수 교회를 1992년에 어머니 강반석의 신앙을 기념하는 칠골교회(혹은 반석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죄를 대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에 우리는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려온 후에 해야 할 다음 단계는 무엇입니까?
2.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축복 받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16절)
본문 16절에서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자녀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축복을 받도록 하게 하는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쁜 사역에서도 저들을 안아주고, 안수기도도 해 주시고, 축복도 해주셨습니다. 여기서 “저들은 안았다는 것”라는 것은 사랑하신 표현이요, 저들을 보호하시겠다는 표현입니다. 저들은 내 것이라는 주님의 소유의 싸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수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구별을 의미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안수기도를 받고 축복을 받은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는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지 않지만 아마 이들은 훌륭하게 성장하여 예수님을 위해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저들을 축복하고, 저들에게 교회의 의미와 예수님의 마음을 말없이 심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자녀교육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쾌락과 방종을 좇는 아이들 뒤에는 부모의 책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돈 몇 푼 주어서 오락하게 하고 간식 먹게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것은 부모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는 인간을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이는 참된 교육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족보가 좋은 맹견이 집안에 있어도 훈련되지 못한 맹견은 집에서 보신용으로 기르는 똥개나 다름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되어지지 않으면 인간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인성 교육이 참으로 귀하고 금. 은. 보화보다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사람들은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다고 했습니다. 어린 자식을 그 어떤 구경을 시키고 관광을 시키고 학원교육에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녀들을 교회로 하나님께로 데리고 오는 것처럼 귀한 교육이 없다고 봅니다. 세상 교육 열 번보다 하나님께로 한번 데리고 나오는 것은 더 큰 교육이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아이들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식들을 그리고 저 많은 아이들을 주님께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어린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데리고 와야 합니다. 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말고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께로 함께 오십시오, 집에서 경건한 삶을 자녀와 함께 가지십시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요 너와 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요 거룩한 곳이요 경건해야 함을 가르치고 자녀와 함께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딤전 4:6에서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자녀들을 말씀으로 양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여건과 환경이 보장된 가정일지라도 행복은 보장되지 못합니다. 수 많은 재산을 부모로부터 물려받고 아무리 지식을 많이 얻는다 해도 행복만은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행복을 확고하게 보장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신앙밖에 없습니다. 신앙이 중심이 되어 있는 가정은 그 어떤 환난이나 역경이 닥쳐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에게 수많은 재산을 물려주지 못해도, 좋은 학벌을 가질 수 있는 공부를 시키지 못해도, 오직 신앙의 유산만은 반드시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들이 말씀으로 살고, 찬송과 기도로써 본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부모에게서 잘못된 자식이 나오지 않습니다. 신앙을 중심으로 사는 부모에게는 방탕 하는 자녀가 나오지 않습니다. 설령 일시적으로 잘못된 길로 간 자식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데리고 함께 주일예배에 공공예배에 참석하시고 영과 진리로 에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디모데는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기도로써 초대교회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예화) 죤 웨슬리가 영국의 명문대학인 옥스포드 대학을 나오고 훌륭한 목사가 되기까지는 웨슬리가 어렸을 때부터 그의 어머니 [수산나]가 자녀들을 모아놓고 성경을 가르치며 히브리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등 기독교적인 가정교육을 철저히 시켰다는데 있습니다.
(예화) 어떤 아이가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어느 큰 성전에 갔습니다. 그때 사제가 옆에 있어서 아버지가 '우리 아이에게 안수 한번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사제는 아이에게 안수를 해주었고 그 아이가 자라서 세계의 유명한 신학자가 되었는데 그 이름이 「윌리엄 바클레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여러분의 아이들에게 축복을 주는 장소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는 것을 배우고, 예수님을 섬기며,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더 좋은 교과서는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에게 지혜를 주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딤후3:15-17).
(예화) 미국의 대통령 중의 한사람인 아브라함 링컨은 정식으로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가난하게 성장하면서 믿음이 좋은 어머니에게서 신앙을 배웠는데 그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네게 줄 것은 이 성경 한 권밖에 없다'고 하면서 이 성경을 잘 읽으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성경을 가까이 했고, 마침내 미국의 대통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 할 의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먹는 것과 입는 것을 해결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부모가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신6:6-7). 그리고 자녀들을 위해서 항상 기도하는 자세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신 6:7-9에서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보다 중요한 요구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에게 있어서 최우선으로 두어야 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와 권위에 의해서 뒷받침되어집니다.
좋은 부모는 자녀들로 하여금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가 있고,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귀한 책이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길에 행할 때 즉 여행 중일 때에도 가르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누웠을 때에도, 일어날 때에도 이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손목에 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행동의 지침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미간에 붙이라고 했는데 미간은 인간의 지성과 사고를 상징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사고와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을 안심하고 맡길 만한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세상 교육은 벌써부터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인격 형성은 접어 두고 점수만 받아 내는 기형적인 교육으로 기울었습니다.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남을 짓밟고 죽여야 하는 무서운 경쟁 사회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망 앞에선 우리에게 오늘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아 들으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살 길이 있음을 알리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기에 인생의 모든 축복이 있음을 알리는 하나님의 자비의 음성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때 인생의 최대 행복이 있음을 알리는 소망의 음성입니다. 그래서 잠 22:6에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부모라면 우리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축복된 길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의 자녀들이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행할 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면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엘리 제사장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불량자였습니다.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삼상 2:11)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고기를 삶을 때에 갈고리로 고기를 꺼내서 먹기도 하고(삼상 212-17),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기도 했습니다.(삼상 2:22-23) 왜 이러한 결과가 낳았습니까? 엘리 제사장은 어려서부터 마땅히 행할 것을 자기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바르게 지도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삼상 2:25 하반 절에서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엘리 제사장도 자녀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는 흔적은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을 꾸준하게 지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간에 어려서부터 우리의 자녀들을 꾸준히 신앙으로 양육하되 주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쳐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생각들이 바뀌어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엡 6:4에서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바로 지금이 부모된 우리들이 우리의 자녀들을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때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부모된 우리로서는 자녀를 어떤 기계나 동물처럼 다루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자녀들도 비록 나이가 어릴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인격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과잉 요구, 비인격적인 요구들은 삼가야 할 부분입니다. 자녀 양육에 있어서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의 잘못에 마땅히 징계를 해야 하지만 분노를 일으키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롬10:19,골3:21).
이것은 곧 부모가 사랑의 징계를 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채찍과 꾸지람이 없으면 자녀들이 부모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잠13:24,22:15,잠29:15). 그러나 책망 속에서 부모의 화풀이 식의 꾸지람은 오히려 자식에게 분노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마땅히 믿음의 부모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여기 '교양'은 자녀에게 본을 보여 자녀를 인도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의 행동으로 자녀를 훈련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훈계'는 '권면', '경고','교훈'의 뜻으로 말로서 자녀를 훈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훈계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의 감정에 따라 비슷한 일을 어떤 때는 혼내고, 어떤 때는 칭찬하고 하면 아이들의 가치관이 혼란스럽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의 모습이 결코 모범되지 못하면 결코 바른 양육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삼상 4:18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엘리 제사장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다는 말을 듣고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삼상 2:32)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엘리 제사장이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는 말씀을 볼 때에 그는 결코 부지런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녀들을 말로만 양육할 것이 아니라 행동에 본을 보이는 가운데 전인격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시겠습니까? 우리나라 부모들은 근시안적이라서 자녀들이 명문대학만 가면 다 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교육은 짐승을 만드는 일이지, 그를 참인간으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진정 내 자녀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인지를 깨닫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자녀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를 내 욕심대로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양육하는 좋은 부모들이 됩시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어린아이에게 위협과 공포와 두려움을 심어주어 그들을 기회주의자로 만들지 말고, 자기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내놓을 수 있도록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들을 가르칩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 준 자녀를 위해 웁시다. 우리의 자녀를 위해 기도합시다. ① 기도의 어머니 한나가 있었기에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② 눈물의 기도로 밥을 대신한 어머니 모니카가 있었기에 성 어거스틴이 한 시대에 빛을 발했습니다. ③ 믿음으로 키운 요게벳이 있었기에 모세가 출애굽 운동의 기수로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④ 디모데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신앙교육에 의하여 훌륭한 목회자로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딤후 1:5)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중심 내용은 무엇입니까?
① 우리 신앙의 대상인 예수님을 바로 가르쳐 예수님을 향하여 신앙 고백을 하여 영생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② 십계명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 들여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③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
④ 영적 성장을 위하여 각종 예배 제도를 가르쳐 영적으로 풍부한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⑤ 바른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늘 말씀을 읽고 상고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두란노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아버지 학교는 우리에게 신선한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학교]란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는 주제 하에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대리자로 가정에 세워 주신 지도자이며, 제사장이며, 목자임을 가르쳐서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권위를 회복시키고, 가정에서 아버지의 구체적인 사명과 역할에 대해서 가르침으로써, 성경적 가정을 세우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권면 하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가정이 깨어져 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가정이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할 때, 교회는 영향력을 잃고, 교회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할 때, 사회는 타락합니다. 깨어져 가는 가정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가정의 회복을 위해 아버지들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이제는 많은 아버지들을 가정으로부터 내 몰았던 한국적 남성 문화의 잘못된 유산을 과감히 정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아버지 입니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라는 슬로건 아래 하나님께서는 아버지 학교를 개설토록 허락하셨습니다. 아버지 회복을 통해 , 가정이 회복되고, 교회가 강화 될 것이며, 이 나라 이민족이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적인 아버지가 되고자 결단하며, 이를 실천 할 수 있도록 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의 일꾼이 되도록 도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화려한 문화는 아이들을 현혹하기에 충분합니다. 아이들이 탈선하기 좋은 환경이 부모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미 세상교육은 자녀를 참인간을 만드는데 포기한지 오래입니다. 단순히 지식만 주입시키는 창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진정 깨어있는 성도라면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의 품안에서 살도록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예수님의 축복을 받으며 살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모든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의 자녀들을 예수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축복을 받도록 지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어린이 주일을 맞아 내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기를 다짐하는 좋은 부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