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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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부부”(벧전 3:1-7)
오늘의 부부의 주일로 지키면서 가장의 지킴이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부부생활에 갈등과 아픔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적으로 이혼율이 수위에 올라있는 비참한 지경을 보게 됩니다. 통계청에 의하면 “지난해 우리나라 결혼 부부 30만 명 중 반에 가까운 14만 명의 부부가 이혼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속한 국가 중 2위다. 결혼 건수는 지난해에 비해 1만3000여건이 줄어든 30만 6000건인 반면 이혼건수는 지난해에 비해 1만 여건이 늘어난 14만 5000여건으로 나타났다.
인구 1000명당 이혼건수를 보여주는 조기 이혼율은 1995년 1.5건에서 98년 2.5건으로 대폭 상승한 뒤 2000년까지 같은 수준을 유지하다 지난해 3.0건으로 크게 늘었 났다고 합니다. 이는 OECD국가 중에서 미국(4.2건) 다음으로 높은 것입니다. 지난해에는 영국(2.9건)에 이어 우리나라(2.8건)가 호주와 함께 공동 3위였습니다.
이렇게 이혼율이 급증되는 이유를 몇 가지로 든다면, 한국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인습과 여성의 개인주의의 충돌로 인하여 나타나는 양성(兩性)의 소외 현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권이 신장됨으로 여성들이 직업전선에 나서서 경제적인 능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며, 부부윤리가 붕괴되고 있기 때문이고, 고도화된 산업사회가 많은 사람들을 시간과 조직에 묶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부부간에 대화할 시간이 없고 불행이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현실 앞에 가슴아파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멀리 달나라, 별나라까지 가서 원수를 사랑하지는 못해도 내 옆에 있는 배우자 한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나라의 남성들이 아직도 가부장적 인습의 뿌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남성들이 지식적으로는 남녀평등과 여권존중의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뿌리깊이 몸에 밴 가부장적인 남편의 모습이 무의식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여성의 정신은 개인주의입니다. 최근 이혼이 급증하면서 특히 여성이 주도하는 이혼이 늘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아이와 경제문제로 참고 살던 과거와 달리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하여 이혼을 선택 가능한 대안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개인주의는 기독교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개혁 이전엔 교황권에서 개인이 매몰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의 만인제사장주의와 종교개혁 이후 개인주의가 구체화돼 인간은 자신의 신앙에 의해서, 개인의 자격으로 하나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귀한 존재로 재발견되었습니다.
이런 개인의 재발견이 가정보다 개인을 우선하는 역기능으로 표출됐습니다. 즉, 개인의 고유 가치를 강조한 나머지 가정의 공동체가 소홀해졌습니다. 이것이 소위 아노미현상이라고 말합니다. 남성은 아직도 가부장적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여성은 가정공동체를 소홀히 여기는 세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한국의 사회상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모성애적 사랑을 잃은 아내가 많고 그것을 치유해줄 남편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혼이 급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가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의 신앙의 건강성은 곧 가정의 건강성과 직결됩니다. 부부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처럼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지속시켜 주는 것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본질에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기도를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결정짓는 바로미터(barometer)가 됩니다.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색하고 기도가 살아있으면 역동적인 관계로 살아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건강한 부부가 기도생활을 잘합니다. 그러나 부부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아니하면 기도가 막힙니다. 내가 아무리 믿음이 있다하나 부부사이에 부조화가 있으면 신앙생활의 부조화도 어차피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부관계는 기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 사도는 본문 7절 하반 절을 통하여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막혀 삶이 답답한 남편들은 먼저 부부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영적인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기도가 열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I. 남편은 아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1. 아내를 잘 이해하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7절 상)
본문 7절 상반 절에서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내를 이해하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지식을 따라"라는 말씀은 “사려가 깊어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입장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 높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육적인 필요뿐 아니라 영적인 필요와 감정의 변화까지도 세심하게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결혼초기에는 다 이해하고 다 받아들일 것처럼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내를 이해하는데 무뎌지고 맙니다. 남편의 요구는 즉시 시행되지 않으면 불쾌해 하지만 아내의 요구는 아예 묵살될 때가 많습니다. 아내의 입장에 서서 아내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아내를 이해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어떤 분은 아내 생년월일도 모르는 분이 있습니다. 너무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내를 사랑할 때 '지식을 따라'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아내의 생일, 결혼기념일, 좋아하는 것, 취미 등에 관심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처럼 관심과 노력이 수반되어야 그 사랑이 바로 진짜 사랑입니다.
그리고 '지식을 따라'라는 말은 상식을 존중하고 책임감도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자는 가정의 든든한 기둥이 되고 흔들리지 않는 바람막이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것으로 큰 도움은 주지 못해도 아내에게 든든한 맛 하나는 주어야 합니다.
누가 든든합니까? 잔소리하지 않고 말없이 사랑과 관심을 주는 사람이 든든합니다. 때로 깐깐하게 행동할 필요도 있지만 아내에게만은 절대 깐깐해서는 안됩니다. 부부는 실패를 꼬집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관계입니다. 무엇보다 아내에게 필요한 것은 남편의 사랑과 관심과 위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화) 어느 가정에서 아내의 신앙문제로 크게 부부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남자가 화를 참다못해 '당신 것 모두 가지고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니까 아내는 커다란 가방을 방 한가운데 쫙 열어 놓고 말합니다. "다 필요 없어요. 이 가방에 하나만가지고 갈래요. 당신 어서 가방 속에 들어가세요' 남편이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깊은 책임감이 느껴졌습니다. 자기만 의지하는 사는 아내에게 너무했다 싶어서 곧 남편이 사과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잘 이해해 주고 지혜롭게 사랑해야 합니다. 남편들은 아내가 그 어느 것보다 남편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고,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아내가 있는 곳에 언제나 함께하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7절 중)
본문 7절 중반 절에서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내와 동거하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동거'란 말의 첫 번째 의미는, 신체적인 면을 이야기 합니다. 아내의 성적(性的)인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남편이야말로 이 지상(地上)에서 아내의 성적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인 존재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삶을 나눈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숙집과 가정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숙집은 밥만 먹고 쉬었다 나오면 되지만, 가정은 인생의 가치관과 사상이 나누어집니다. 일방적인 명령과 순종이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대화를 통해 인생의 방향을 점검하는 쌍방통행이 있어야 합니다. 결혼생활의 일방통행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아내와 함께 하려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본문 7절의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라는 말씀은 창세기 2장 24절과 연결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 2:24에 보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공적인 결혼을 위해서는 먼저 남자가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즉 남편은 혼자 살 수 있는 독립심과 용기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지 않으면 진정으로 아내와 동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지 않는 결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모와 같은 집에서 산다고 해도 남편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 우뚝 서야 합니다. 언뜻 보면 부모 품을 떠나는 것은 불효인 것 같고 마음에 아픔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할 지불금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나오는 결혼생활을 위한 수많은 가르침 중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고 하는 교훈을 가장 먼저 가르쳤을까요? 더 좋은 말로, 더 좋은 충고로 결혼에 대한 교훈을 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떠나지 않는 결혼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야 한다는 말씀에는 몇 가지 실제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1) 남자는 결혼한 순간부터 부모의 재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효도가 그때부터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한 순간부터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물론 부모님이 자발적으로 도와주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려는 마음을 가지면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섭섭한 일이 자주 생기고, 형제간에도 의가 상하게 됩니다. 자녀들은 결혼한 순간부터 더 이상 부모님으로부터 받는 삶을 마감하고, 그때부터는 부모님에게 드리는 삶을 시작하면서 그 영역을 넓혀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는 말씀에 함축되어 있는 교훈입니다.
2) 남편은 아내와 자기 어머니를 비교하는 일이 절대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비교하면서 판단하면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자꾸 실망하게 됩니다. 남편이 어머니를 높이고 아내는 낮추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반대로 어머니를 낮추고 아내를 높이는 것도 결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남편은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존중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는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3)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는 명령은 남편에 대한 명령이기도 하지만 시어머니에 대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시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며느리의 남편사랑보다 더 숭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숭고할수록 멀리서 지켜보면서 기도해주는 것이 낫습니다. 결코 며느리보다 앞서서 남편의 앞길을 이끌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4)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는 말은 '여자도 부모를 떠나라!'는 말입니다.
툭 하면 친정에 가버리는 아내가 있다면 그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부모도 그런 딸을 감싸 안으려고 하면 그것은 딸의 결혼생활을 망치는 것입니다. 분명히 딸을 사랑하지만 부모는 딸을 확실히 떠나보내야 딸에게 행복합니다. 때로 하나님은 새로운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과거를 끊으라고 하십니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면 탯줄을 끊고 어머니와 자식관계를 새로 만들듯이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으면 부모와 자식관계도 새롭게 설정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떠나 아내와 동거하려는 마음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동거한다는 말은 정신적인 면만 의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이혼의 가장 큰 이유는 성격의 차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성 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은 가볍게 보면 절대로 안됩니다. 때로 정신적으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신앙에서도 영혼과 육신이 함께 가는 일원론적 신앙이 바른 신앙이듯이 부부관계에서도 영혼과 육신이 함께 가는 모습이 바람직한 부부관계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은 성 문제에 대한 해결을 서로에 대한 헌신으로 규정합니다. 헌신이란 무엇입니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남을 위해 배려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 4절 말씀을 보면 남편은 아내의 요구에 따라야 하고, 아내는 남편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는 성경은 부부간의 헌신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와 마음과 생각과 몸으로 동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3. 아내를 존귀하게 여기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7절 하)
본문 7절 하반 절에서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은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내를 존귀하게 여기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을 끝까지 함께 가야 하는 유일한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동반자란 말은 무슨 말입니까? 서로 존중하고 서로 존경하라는 말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해야 하지만 남편은 자기 맘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남편은 아내와 상의하고 아내와 모든 영역을 같이 나누려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나눌 때 그곳에 바로 천국이 펼쳐질 것입니다.
여기에서 '존귀히 여긴다'라는 말의 첫 번째 의미는 아내에게 '명예를 준다'는 뜻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아내에게 명예를 돌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존경 한다'라는 뜻입니다. 마치 제자가 스승을 대할 때 가까우면서도 두려운 마음으로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는 남편들에게 많은 권면을 줍니다. 엡5:25에서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고, 골 3:19에서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고, 살전 4:4에서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고 생각하며 순복했습니다. 그러기에 사라는 국경을 넘나드는 수많은 이사에서 불평 없이 아브라함을 따라주었습니다. 정말 사라는 훌륭한 아내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훌륭한 남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종으로 여기지 않고 일생의 동반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면서도 울지 않았고, 기근을 만나도 울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조카 롯이 잡혔을 때도 울지 않았고 롯과 헤어질 때도 울지 않았습니다. 집안 갈등으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어쩔 수 없는 집에서 내보낼 때도 울지 않았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바쳐야 하는 상황에서도 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37세에 아내 사라가 죽자 노인 아브라함의 눈에서 드디어 눈물이 보였습니다. 그처럼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일생의 동반자로 여기고 아내를 위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진정 동반자로 여길 때 정상적인 아내는 반드시 순복할 것입니다. 아내가 순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면 "왜 성경대로 살지 않느냐?"고 하지 마십시오. 여권이 높아지고 아내의 성격이 못되서 순복하지 않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 경우에 자기를 동반자로 여기고 더 사랑해 달라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아내의 순복을 원한다면 남편은 아내를 동반자로 여겨주어야 합니다.
이런 동반자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부간의 대화를 잘하는 것입니다. 제발 헐뜯는 대화를 하지 마십시오. 오직 칭찬하는 말, 격려하는 말을 하십시오. 좋은 이야기는 천 마디를 해도 좋지만 나쁜 이야기는 한마디만 해도 해가 됩니다.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시간을 의지하시고 마음이 가라앉기를 바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렇지 않고 감정대로 말해버리면 그 사이에 틈이 생기게 됩니다. 문제가 확대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는 아내는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위해서 기도하는 남편은 참으로 적은 것 같습니다. 이제 아내를 위해서, 아내의 신앙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아내에게 돈과 보석과 지위를 주려고 하기보다 기도해주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최선을 다해 이해하고 사랑하고 동반자로 아껴주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하라고 합니까? 그래야 기도가 막히지 않는다고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기도가 막히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그곳이 바로 에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는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입니다. 이는 남편의 보호가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내에 대해 함부로 대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연약하면 쉽게 상처를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할 이유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만 혼자 천국에 가는 것보다 남편과 같이 하나님 앞에 가서 같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나눌 수 있는 모습이 더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남편이 아내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마음이 상하게 되며 기도가 막힙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릴레이션십 , relationship))가 깨어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내 된 성도들은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모습으로 정결한 모습을 갖게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아직도 남편을 주께 인도하지 못한 아내들은 실망치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자신의 올바르고 온유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반사시켜서 주께 인도하기 바랍니다. 남편 되는 분들은 더욱 더 아내를 귀히 여기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여서 가정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천국으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상적인 남편은 아내를 대할 때 새 차를 대하는 것처럼 대합니다. 처음에 차를 구입하면 행여 흠이라도 날까봐 조심하고 늘 신경을 써서 관리합니다. 엔진오일, 냉각수 등을 점검하고 세차하고 하다가 중고가 되면 관리가 소홀해 집니다.
여러분은 아내를 새 차처럼 대합니까? 아니면 중고차처럼 대합니까? 우리는 말 못하는 차라도 내 것이기 때문에 존귀한줄 알고 조심해서 다루는데, 연약한 그릇인 아내를 함부로 대해서야 되겠습니까? 아내를 존중하게 여깁시다.
한 심리학자가 아내의 자존감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많은 부분은 친정에서 어릴 때부터 성장하는 과정에서 형성이 됩니다. 그러나 결혼한 이후에는 남편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괴테는 “지금 아내의 얼굴 모습은 남편의 작품이다”라는 의미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대하느냐?”라는 태도 여하에 따라서 아내의 얼굴에 그늘이 있을 수도 있고, 기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남편의 말 한마디 행동하나 느낌 때문에 아내의 마음에 주름살이 생깁니다. 결혼한 이후에 남편으로 인하여 아내의 자존감이 높아졌습니까? 내 아내는 나 하나 믿고 인생 전체를 맡겼는데 내가 자존감을 높여 주어야 합니다.
기독교 심리학자중 30년 동안 결혼 상담만 하신 윌리엄 할리라는 분이 있습니다. 수천 쌍을 상담하고 [남편의 필요, 아내의 필요]라는 책에 결혼생활의 원리에 대해 다섯 가지로 말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원하는 관심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아내는 남편의 애정을 필요로 합니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만을 기대하고 결혼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에베소서5:28에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또한 골로새서3:19에는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원문에 보면 "많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내에 대해 아무리 사랑을 많이 쏟아도 사랑을 다했다고 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는데, 남편들은 애정과 섹스를 구분하지 못고 같은 선상에 놓습니다. 사랑은 곧 ‘섹스다’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아내는 다릅니다. 아내에게는 애정과 섹스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여자에게 있어 애정은 분위기고 섹스는 이벤트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먹고 삽니다. 사랑은 말로 해야 하고, 사려 깊은 행동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신체적인 접촉이 필요합니다. 미국인들은 하루에 평균 4번 포옹합니다. 8번은 좀더 나은 수준이고, 낙심한 자는 12번의 포옹이 필요합니다. 아이에게도 신체적인 접촉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월드 비전 가족지킴이 센타(회장 박종삼 목사)에서 지난 17일 여의도 공원에서 “가족끼리 안아주면 행복해요”라는 캠페인을 전개한 바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든든하고,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려면 안아주는 것을 잘 해 주어야 합니다. 포옹을 통해 가족 간의 사랑을 확인하고 갈등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② 아내는 남편과의 대화를 원합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대상으로 연구했는데 여자아이는 거의 100%가 대화와 관계됩니다. 남자아이들은 60%가 대화에 관계되고 나머지 40%는 대화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넋두리였습니다.
남자는 밖에서 충분한 대화가 이뤄지기 때문에 집에 돌아올 때는 지쳐있지만, 아내는 아이들과의 20%정도의 대화만 가졌을 뿐 80%정도의 대화욕구가 남아 있습니다. 남편이 피곤하더라도 아내와의 대화를 통해 이 욕구를 채워 주어야 합니다. 아내들은 대화가 있어야 속병이 생기지 않습니다.
③ 아내는 남편의 정직하고 열린 마음을 기대합니다.
서로 느끼는 감정과 직면한 문제의식들을 열린 마음으로 대화해서 서로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따라 상대방을 배려하고 함께 대책을 세워 나가는 투명하고 깨끗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비밀이 없고 정직해야 가정이 견고하게 설수 있습니다. 돈 문제도 시댁의 문제에 있어서도 아내에게는 알 권리가 있습니다. 비밀이 있으면 사탄이 틈타 가정이 무너질수 있습니다. 부부가 정직한 관계로 하나 되어 있으면 어떤 사람, 문제, 죄도 틈탈 수 없고 부부사이를 갈라 놓을 수 없습니다.
④ 아내는 남편이 경제적인 후원을 해주기를 원합니다.
디모데전서5:8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자니라"고 하셨습니다. '돌아보지 아니하면'은 '부양할 책임을 감당하지 아니하면'의 뜻입니다. 가정의 경제문제나 자녀교육(子女敎育)문제 등을 아내에게 다 떠넘기고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믿음과 기도가 현실을 외면하는 도피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아내는 경제적인 안정감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⑤ 아내는 가족에 대한 남편의 헌신을 요구합니다.
자녀교육이나 집안을 꾸미는데 있어서 남편의 적극적인 참여와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믿는 아내는 남편이 가정의 영적인 제사장이 되어주기를 기대합니다. 가족을 위해 깨어 기도하며 가정을 말씀위에 든든히 세워주기를 원하는 소원을 품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아름다운교회의 모든 남편들은 성숙한 남편이 되어 아내와 자녀들에게 축복을 안겨주며 허물어져가는 가정들을 세우는 영적인 견인차 역할을 감당하는 주님의 귀한 도구로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II. 아내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정에서 아내의 존재는 막중합니다. 아내 때문에 쓰러져가는 한 가정이 굳게 서기도 하고, 아내 때문에 한 가정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역사이래로 지혜가 가장 충만했던 사람 솔로몬도 성령 충만하지 못한 아내들을 만남으로 그 영광스러운 지혜가 빛이 바랬습니다. 반면에 한 아내의 헌신으로 쓰러져 가는 강정이 다시 일어서고 남편과 아이들이 새로운 힘을 얻어 자부심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정들도 있습니다. 남편이 무너져갈 때 남편을 세우는 일에 가정을 먼저 생각하며 자기 삶과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적으로 최선을 다하는게 아내들입니다. 그렇다면 *아내는 남편을 어떤 자세로 사랑해야 하는가?
1. 남편에게 잘 순복하는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1, 5절)
본문 1절과 5절에서 “남편들에게 순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서5:22에도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내의 상표는 순종입니다. '순종'하면 '맹종, 굴종, 억압'등의 이미지로 그리 좋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와는 달리 순종이 변질이 되어 갑니다. 아내는 가정의 질서를 위해 남편에게 순복해야 합니다. 그때 당시의 유대의 율법이나 헬라법에 의하면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로 집안에 살면서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실이 전파되었습니다.(갈3:28) 기독교로 개종한 많은 여인들이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을 터인데 이런 어려움을 달래기 위해서 베드로는 순종의 미덕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내의 일방적인 순종만을 강조하지 않고 남편에게도 아내에 못지않은 권면을 7절에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도로서 아내의 순종은 일방적인 굴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사랑으로 순종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존경하는 것입니다. (골3:18-19) 그래서 성경은 골 3:18,19절에서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고 말씀하시고 있고, 엡 5:25에서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님께 하듯 해야 합니다. 이런 성경 구절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사랑으로 순종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에 순종하는 미덕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가정을 만드시고 이 가정의 원리를 창조의 원리로 연결을 시켜 주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구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것이고, 남자와 여자는 그 인격성에 있어 동등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역할에 있어서는 다릅니다. 남편을 한 가정의 머리로 세우셨습니다. 집안에 머리가 둘 일수는 없기 때문에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이 모든 것을 잘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순종으로 인하여 남편의 부족한 점들이 보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를 남편의 돕는 배필로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순종해야 합니까?
①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해야합니다.
남편의 명령이나 교회의 명령이 아니라 가정을 세우시고 가정의 행복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남편이 순종할 만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아내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순종의 출발은 명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의 질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남편은 우월하고 아내는 열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본문 7절에도 남편과 아내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3:28에도 "남자나 여자없이 그리스도안에서 다 하나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 잘 되려면 아내가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순종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신성과 능력에 있어 동등하시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종의 형체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2:5-8) 주님은 구원사역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아내된 여러분! 순종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② 믿음이 없는 남편이 구원받게 하기위해서입니다.(1,2절)
마음을 담아 순종하는 것이 믿지 않는 남편을 구원하는 것 뿐 아니라 믿음이 어린 남편의 믿음이 자라게 하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구원의 길로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1절 하반 절에서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신 남편이 있을 때 아내의 올바른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남편을 의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불신 남편이 있다 하더라도 의로운 아내가 남편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으며, 의로운 남편이 불신 아내를 그리스도께 인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그것을 함께 한 남편에게 주어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하게 하였습니다. 아담의 불평은 "하나님이 주어 나와 함께 한 저 여자가 주어 내가 선악과를 먹었나이다" 하므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아내가 남편을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죄인으로 인도할 수도 있고, 의의 길로 인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부부가 같이 믿으면 서로 세워 주고 이끌어 주고 한 쪽이 믿지 않으면 거룩하고 온유한 성품으로 주님께 인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2절에서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고 말씀하고 잇는 것처럼 아내나 남편의 정결한 행위를 봄으로써 마음이 녹아져서 하나님께 나오게 됩니다.
특히 남편은 아내의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내의 순종하는 자세를 통해 그 마음이 열리게 됩니다. 물론 순종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기도가 뒷받침 되어야 하고,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내 인생은 순종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은혜 받는 만큼 순종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정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순종의 전선에 이상이 없어야 합니다. 내 남편을 순종하고 내 가정을 세우겠다는 처음의 열망이 계속해서 꽃피우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 아내들이 순종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니까 가정이 흔들리게 됩니다. 아내의 행동은 무언의 설교가 됩니다. 삶을 통해 순종을 보여줄 때 남편이 감동을 받고 그 마음이 열려 주님 앞으로 한걸음 가까이 나아올 수 있게 됩니다.
2. 내면의 미(美)를 가꾸는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3,4절)
본문 3절에서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내면의 미를 가꾸는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외모에 신경을 무척이나 씁니다. 주름살이 하나라도 늘면 놀라워하면서 괜한 걱정을 합니다. 그러나 신자 된 아내는 겉을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본문 4절에서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진정한 단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복음의 신발을 신고, 의의 흉배와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믿음의 방패와 말씀과 성령의 검을 갖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5절에서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라고 하면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주라 칭하였다는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 종들이 주인에게 순종해야 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순종을 예를 든 것처럼 사도 베드로도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예를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순종하였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내 된 성도는 이와 같이 남편에게 순종하는 미덕이 있어야 하고, 남편을 거룩과 정결함으로 주께 인도하는 아내가 되어야 하며, 겉치장이 아닌 마음의 온유와 정결로 치장하는 의롭고 거룩한 옷을 입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신앙이 있든 없든 할 것 없이 여성들은 머리를 꾸미고 패물(貝物)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이 삶의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고 사는 여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 여성은 이러한 수준에서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역류(逆流)해서 우리는 내 속에 영성과 교양미를 가져야 합니다. '온유함'은 다스려지는 상태, 절제하는 상태를 말하고, '안정'은 시끄럽지 않은 것, 말을 다스릴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복(福)도 말로 불러들이고 화(禍)도 말로 불러들인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언어생활은 중요합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비어있는 사람을 가리켜 솔로몬은 잠언11:22에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교양미가 없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자녀들과 남편들이 흔들리는 이유들 중 하나가 여성들의 가치관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믿는 여성이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바탕 해서 자기를 가꾸지 않는데 있습니다. 남편들과 자녀들을 살리는 길은 아내들이 내면을 잘 가꾸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 값진 것입니다. 바라기는 아름다운교회의 모든 여성도님들은 하나님 앞에서 인격을 연마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3. 남편을 황제처럼 대접하는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6절)
본문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내된 여러분은 남편을 황제처럼 대접해야 합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상전으로 모셔 복종한 것처럼 해야 아내는 왕비로 대접을 받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공주 신드롬을 가지고 있지만 남편을 먼저 왕으로 대우하는 황금율을 지키지 않습니다.
(예화) 하루는 도도하기로 유명한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 앨버트 공과 말다툼을 했는데 남편이 화가 나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빅토리아 여왕도 화가나 뒤 쫓아가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안에서 남편이 '누구요?' 하자 '대영제국의 왕이요'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몇 번을 해도 문을 열어주지 않자 고민하다가 깨달은바가 있어 다시 문을 두드렸습니다. 남편이 '누구요?'하자 '당신 아내입니다'라고 하니까 남편이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남편 앞에서 군림하지 마세요. 남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거절당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것이 남편들의 속성입니다. 남편들은 인정과 신뢰를 받기를 원하고 감사의 표현을 원합니다. 남성은 여성으로부터 찬미의 대상이 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떤 아내들은 자기가 마치 남편을 변화시키는 은사가 있는 것처럼 잔소리를 하지만 남편은 다툼과 말로 변화되는 게 아니라 아내의 존경과 신뢰를 통해서 변화됩니다.
솔로몬은 잠언 21:9에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고 했고, 잠언21:19에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체험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솔로몬은 출발은 아름답게 했지만 그의 가정은 신앙이 없고 인격이 다듬어지지 않은 아내들로 인하여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비로소 집안이 평안하지 않으면 자신의 지혜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왜 수많은 가정이 진통을 겪습니까?
그것은 남편과 아내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대로 가정을 설계하고 가정의 행복을 원하시는 주의 뜻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감정과 생각에 따라 가정을 운영하기 때문에 가정에 깊은 상처들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18:22에 "아내는 얻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는 남편의 고백이 있습니다. 잠언19:14에는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고 했습니다. 현숙(賢淑)한 아내의 존재가 그만큼 존귀하고 역할이 큽니다.
우리 아름다운교회는 모든 남편들이 나중에 주님을 만나게 될 때 '하나님 저에게 이런 좋은 아내를 주셔서 저희 가정이 든든히 서고 지상에서부터 천국을 경험하며 살게 하신 것을 무엇보다 감사합니다'는 고백을 다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IMF 이후 경제 대난의 시대를 맞아 많은 남편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아내로써 격려하고 도와주고 끝까지 신뢰해서 남편으로 하여금 '역시 이 지상에서 내 아내가 최고구나!'하는 마음으로 자부심을 느끼고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부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행복을 부부가 함께 만들어가야 합니다.
오늘날 부부들은 돈을 만드는데 열심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불철주야 뜁니다. 그러나 부부간의 행복을 만들기 위해서는 별로 노력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는 노력을 안 해도 됩니다.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사랑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부부간의 사이에 있어서 행복은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선물을 하십시오. 부부간에 꽃다발을 선물 한다든지, 사랑의 글을 쓰는 등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이십시오. 자신은 사랑의 표현을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사랑만 요구한다면 어떻게 사랑을 받겠습니까? 부부간에는 조건적입니다. 많이 받으려고 하지 말고 많이 주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준만큼 돌아옵니다. 계속해서 아끼고 사랑하십시오.
2. 대화를 깊이 해야 합니다.
이 사회가 얼마나 바쁜지 일에 서로 간 대화의 기회를 빼앗겼습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바쁘고 피곤합니다. 그러니 부부간에 대화가 없습니다. 오늘날 부부의 문제는 대화가 없어서 생기는 것입니다. 같이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웃는 것 같고 편안한 것 같지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없습니다.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늘 노력해야 합니다.
3. 사랑을 감정으로만이 아니라 액션과 의지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마지막 때가 되니까 강하게 부부에게 역사합니다. 부부만 갈라놓으면 사탄의 손에 넘어가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주안에서 하나 되고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지금 내가 만나서 사는 배우자가 내게는 가장 적합한 사람임을 믿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고 사랑하게 될 때에 행복한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행복한 부부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에는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지만 서로 노력하고 수고하여 희생을 감내 할 때에 행복한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4. 상대방의 장점을 보되 단점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장점을 보고 칭찬해 주고 인정해 주되 단점은 말하지 마십시오. 행복한 부부와 불행한 부부의 차이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 부족한 것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부족한 것을 보완해 주고 허물을 덮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부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배우자의 허물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용납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좋은 점은 누구나 사랑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허물이 있을지라도 다 받아주고 용납을 해 주어야 행복한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용납하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것은 용서라는 과정입니다. 서로 실수하고 잘못해도 용서하고 또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단점을 덮어두며 장점을 인정해 주고 칭찬을 해 주어야 행복한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5. 사랑과 희생과 봉사를 해야 합니다. 결혼은 너와 나의 관계이지 너와 그것과의 관계이거나 나와 그것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내가 양보하고 희생함으로 서로 서로 칭찬해 주고 격려해 줄 때에 행복한 부부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배우자를 지배하기 위해서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배우자를 섬기고 받들고 사랑하기 위해서 결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잘못된 생각이 있다면 생각을 바꾸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므로 행복한 부부의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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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부부의 주일로 지키면서 가장의 지킴이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부부생활에 갈등과 아픔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적으로 이혼율이 수위에 올라있는 비참한 지경을 보게 됩니다. 통계청에 의하면 “지난해 우리나라 결혼 부부 30만 명 중 반에 가까운 14만 명의 부부가 이혼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속한 국가 중 2위다. 결혼 건수는 지난해에 비해 1만3000여건이 줄어든 30만 6000건인 반면 이혼건수는 지난해에 비해 1만 여건이 늘어난 14만 5000여건으로 나타났다.
인구 1000명당 이혼건수를 보여주는 조기 이혼율은 1995년 1.5건에서 98년 2.5건으로 대폭 상승한 뒤 2000년까지 같은 수준을 유지하다 지난해 3.0건으로 크게 늘었 났다고 합니다. 이는 OECD국가 중에서 미국(4.2건) 다음으로 높은 것입니다. 지난해에는 영국(2.9건)에 이어 우리나라(2.8건)가 호주와 함께 공동 3위였습니다.
이렇게 이혼율이 급증되는 이유를 몇 가지로 든다면, 한국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인습과 여성의 개인주의의 충돌로 인하여 나타나는 양성(兩性)의 소외 현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권이 신장됨으로 여성들이 직업전선에 나서서 경제적인 능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며, 부부윤리가 붕괴되고 있기 때문이고, 고도화된 산업사회가 많은 사람들을 시간과 조직에 묶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부부간에 대화할 시간이 없고 불행이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현실 앞에 가슴아파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멀리 달나라, 별나라까지 가서 원수를 사랑하지는 못해도 내 옆에 있는 배우자 한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나라의 남성들이 아직도 가부장적 인습의 뿌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남성들이 지식적으로는 남녀평등과 여권존중의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뿌리깊이 몸에 밴 가부장적인 남편의 모습이 무의식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여성의 정신은 개인주의입니다. 최근 이혼이 급증하면서 특히 여성이 주도하는 이혼이 늘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아이와 경제문제로 참고 살던 과거와 달리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하여 이혼을 선택 가능한 대안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개인주의는 기독교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개혁 이전엔 교황권에서 개인이 매몰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의 만인제사장주의와 종교개혁 이후 개인주의가 구체화돼 인간은 자신의 신앙에 의해서, 개인의 자격으로 하나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귀한 존재로 재발견되었습니다.
이런 개인의 재발견이 가정보다 개인을 우선하는 역기능으로 표출됐습니다. 즉, 개인의 고유 가치를 강조한 나머지 가정의 공동체가 소홀해졌습니다. 이것이 소위 아노미현상이라고 말합니다. 남성은 아직도 가부장적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여성은 가정공동체를 소홀히 여기는 세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한국의 사회상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모성애적 사랑을 잃은 아내가 많고 그것을 치유해줄 남편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혼이 급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가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의 신앙의 건강성은 곧 가정의 건강성과 직결됩니다. 부부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처럼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지속시켜 주는 것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본질에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기도를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결정짓는 바로미터(barometer)가 됩니다.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색하고 기도가 살아있으면 역동적인 관계로 살아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건강한 부부가 기도생활을 잘합니다. 그러나 부부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아니하면 기도가 막힙니다. 내가 아무리 믿음이 있다하나 부부사이에 부조화가 있으면 신앙생활의 부조화도 어차피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부관계는 기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 사도는 본문 7절 하반 절을 통하여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막혀 삶이 답답한 남편들은 먼저 부부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영적인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기도가 열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I. 남편은 아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1. 아내를 잘 이해하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7절 상)
본문 7절 상반 절에서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내를 이해하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지식을 따라"라는 말씀은 “사려가 깊어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입장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 높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육적인 필요뿐 아니라 영적인 필요와 감정의 변화까지도 세심하게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결혼초기에는 다 이해하고 다 받아들일 것처럼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내를 이해하는데 무뎌지고 맙니다. 남편의 요구는 즉시 시행되지 않으면 불쾌해 하지만 아내의 요구는 아예 묵살될 때가 많습니다. 아내의 입장에 서서 아내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아내를 이해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어떤 분은 아내 생년월일도 모르는 분이 있습니다. 너무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내를 사랑할 때 '지식을 따라'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아내의 생일, 결혼기념일, 좋아하는 것, 취미 등에 관심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처럼 관심과 노력이 수반되어야 그 사랑이 바로 진짜 사랑입니다.
그리고 '지식을 따라'라는 말은 상식을 존중하고 책임감도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자는 가정의 든든한 기둥이 되고 흔들리지 않는 바람막이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것으로 큰 도움은 주지 못해도 아내에게 든든한 맛 하나는 주어야 합니다.
누가 든든합니까? 잔소리하지 않고 말없이 사랑과 관심을 주는 사람이 든든합니다. 때로 깐깐하게 행동할 필요도 있지만 아내에게만은 절대 깐깐해서는 안됩니다. 부부는 실패를 꼬집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관계입니다. 무엇보다 아내에게 필요한 것은 남편의 사랑과 관심과 위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화) 어느 가정에서 아내의 신앙문제로 크게 부부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남자가 화를 참다못해 '당신 것 모두 가지고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니까 아내는 커다란 가방을 방 한가운데 쫙 열어 놓고 말합니다. "다 필요 없어요. 이 가방에 하나만가지고 갈래요. 당신 어서 가방 속에 들어가세요' 남편이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깊은 책임감이 느껴졌습니다. 자기만 의지하는 사는 아내에게 너무했다 싶어서 곧 남편이 사과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잘 이해해 주고 지혜롭게 사랑해야 합니다. 남편들은 아내가 그 어느 것보다 남편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고,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아내가 있는 곳에 언제나 함께하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7절 중)
본문 7절 중반 절에서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내와 동거하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동거'란 말의 첫 번째 의미는, 신체적인 면을 이야기 합니다. 아내의 성적(性的)인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남편이야말로 이 지상(地上)에서 아내의 성적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인 존재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삶을 나눈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숙집과 가정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숙집은 밥만 먹고 쉬었다 나오면 되지만, 가정은 인생의 가치관과 사상이 나누어집니다. 일방적인 명령과 순종이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대화를 통해 인생의 방향을 점검하는 쌍방통행이 있어야 합니다. 결혼생활의 일방통행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아내와 함께 하려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본문 7절의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라는 말씀은 창세기 2장 24절과 연결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 2:24에 보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공적인 결혼을 위해서는 먼저 남자가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즉 남편은 혼자 살 수 있는 독립심과 용기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지 않으면 진정으로 아내와 동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지 않는 결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모와 같은 집에서 산다고 해도 남편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 우뚝 서야 합니다. 언뜻 보면 부모 품을 떠나는 것은 불효인 것 같고 마음에 아픔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할 지불금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나오는 결혼생활을 위한 수많은 가르침 중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고 하는 교훈을 가장 먼저 가르쳤을까요? 더 좋은 말로, 더 좋은 충고로 결혼에 대한 교훈을 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떠나지 않는 결혼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야 한다는 말씀에는 몇 가지 실제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1) 남자는 결혼한 순간부터 부모의 재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효도가 그때부터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한 순간부터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물론 부모님이 자발적으로 도와주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려는 마음을 가지면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섭섭한 일이 자주 생기고, 형제간에도 의가 상하게 됩니다. 자녀들은 결혼한 순간부터 더 이상 부모님으로부터 받는 삶을 마감하고, 그때부터는 부모님에게 드리는 삶을 시작하면서 그 영역을 넓혀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는 말씀에 함축되어 있는 교훈입니다.
2) 남편은 아내와 자기 어머니를 비교하는 일이 절대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비교하면서 판단하면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자꾸 실망하게 됩니다. 남편이 어머니를 높이고 아내는 낮추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반대로 어머니를 낮추고 아내를 높이는 것도 결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남편은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존중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는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3)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는 명령은 남편에 대한 명령이기도 하지만 시어머니에 대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시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며느리의 남편사랑보다 더 숭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숭고할수록 멀리서 지켜보면서 기도해주는 것이 낫습니다. 결코 며느리보다 앞서서 남편의 앞길을 이끌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4)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는 말은 '여자도 부모를 떠나라!'는 말입니다.
툭 하면 친정에 가버리는 아내가 있다면 그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부모도 그런 딸을 감싸 안으려고 하면 그것은 딸의 결혼생활을 망치는 것입니다. 분명히 딸을 사랑하지만 부모는 딸을 확실히 떠나보내야 딸에게 행복합니다. 때로 하나님은 새로운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과거를 끊으라고 하십니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면 탯줄을 끊고 어머니와 자식관계를 새로 만들듯이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으면 부모와 자식관계도 새롭게 설정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떠나 아내와 동거하려는 마음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동거한다는 말은 정신적인 면만 의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이혼의 가장 큰 이유는 성격의 차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성 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은 가볍게 보면 절대로 안됩니다. 때로 정신적으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신앙에서도 영혼과 육신이 함께 가는 일원론적 신앙이 바른 신앙이듯이 부부관계에서도 영혼과 육신이 함께 가는 모습이 바람직한 부부관계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은 성 문제에 대한 해결을 서로에 대한 헌신으로 규정합니다. 헌신이란 무엇입니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남을 위해 배려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 4절 말씀을 보면 남편은 아내의 요구에 따라야 하고, 아내는 남편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는 성경은 부부간의 헌신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와 마음과 생각과 몸으로 동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3. 아내를 존귀하게 여기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7절 하)
본문 7절 하반 절에서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은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내를 존귀하게 여기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을 끝까지 함께 가야 하는 유일한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동반자란 말은 무슨 말입니까? 서로 존중하고 서로 존경하라는 말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해야 하지만 남편은 자기 맘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남편은 아내와 상의하고 아내와 모든 영역을 같이 나누려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나눌 때 그곳에 바로 천국이 펼쳐질 것입니다.
여기에서 '존귀히 여긴다'라는 말의 첫 번째 의미는 아내에게 '명예를 준다'는 뜻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아내에게 명예를 돌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존경 한다'라는 뜻입니다. 마치 제자가 스승을 대할 때 가까우면서도 두려운 마음으로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는 남편들에게 많은 권면을 줍니다. 엡5:25에서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고, 골 3:19에서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고, 살전 4:4에서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고 생각하며 순복했습니다. 그러기에 사라는 국경을 넘나드는 수많은 이사에서 불평 없이 아브라함을 따라주었습니다. 정말 사라는 훌륭한 아내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훌륭한 남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종으로 여기지 않고 일생의 동반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면서도 울지 않았고, 기근을 만나도 울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조카 롯이 잡혔을 때도 울지 않았고 롯과 헤어질 때도 울지 않았습니다. 집안 갈등으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어쩔 수 없는 집에서 내보낼 때도 울지 않았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바쳐야 하는 상황에서도 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37세에 아내 사라가 죽자 노인 아브라함의 눈에서 드디어 눈물이 보였습니다. 그처럼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일생의 동반자로 여기고 아내를 위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진정 동반자로 여길 때 정상적인 아내는 반드시 순복할 것입니다. 아내가 순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면 "왜 성경대로 살지 않느냐?"고 하지 마십시오. 여권이 높아지고 아내의 성격이 못되서 순복하지 않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 경우에 자기를 동반자로 여기고 더 사랑해 달라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아내의 순복을 원한다면 남편은 아내를 동반자로 여겨주어야 합니다.
이런 동반자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부간의 대화를 잘하는 것입니다. 제발 헐뜯는 대화를 하지 마십시오. 오직 칭찬하는 말, 격려하는 말을 하십시오. 좋은 이야기는 천 마디를 해도 좋지만 나쁜 이야기는 한마디만 해도 해가 됩니다.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시간을 의지하시고 마음이 가라앉기를 바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렇지 않고 감정대로 말해버리면 그 사이에 틈이 생기게 됩니다. 문제가 확대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는 아내는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위해서 기도하는 남편은 참으로 적은 것 같습니다. 이제 아내를 위해서, 아내의 신앙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아내에게 돈과 보석과 지위를 주려고 하기보다 기도해주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최선을 다해 이해하고 사랑하고 동반자로 아껴주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하라고 합니까? 그래야 기도가 막히지 않는다고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기도가 막히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그곳이 바로 에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는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입니다. 이는 남편의 보호가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내에 대해 함부로 대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연약하면 쉽게 상처를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할 이유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만 혼자 천국에 가는 것보다 남편과 같이 하나님 앞에 가서 같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나눌 수 있는 모습이 더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남편이 아내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마음이 상하게 되며 기도가 막힙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릴레이션십 , relationship))가 깨어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내 된 성도들은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모습으로 정결한 모습을 갖게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아직도 남편을 주께 인도하지 못한 아내들은 실망치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자신의 올바르고 온유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반사시켜서 주께 인도하기 바랍니다. 남편 되는 분들은 더욱 더 아내를 귀히 여기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여서 가정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천국으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상적인 남편은 아내를 대할 때 새 차를 대하는 것처럼 대합니다. 처음에 차를 구입하면 행여 흠이라도 날까봐 조심하고 늘 신경을 써서 관리합니다. 엔진오일, 냉각수 등을 점검하고 세차하고 하다가 중고가 되면 관리가 소홀해 집니다.
여러분은 아내를 새 차처럼 대합니까? 아니면 중고차처럼 대합니까? 우리는 말 못하는 차라도 내 것이기 때문에 존귀한줄 알고 조심해서 다루는데, 연약한 그릇인 아내를 함부로 대해서야 되겠습니까? 아내를 존중하게 여깁시다.
한 심리학자가 아내의 자존감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많은 부분은 친정에서 어릴 때부터 성장하는 과정에서 형성이 됩니다. 그러나 결혼한 이후에는 남편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괴테는 “지금 아내의 얼굴 모습은 남편의 작품이다”라는 의미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대하느냐?”라는 태도 여하에 따라서 아내의 얼굴에 그늘이 있을 수도 있고, 기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남편의 말 한마디 행동하나 느낌 때문에 아내의 마음에 주름살이 생깁니다. 결혼한 이후에 남편으로 인하여 아내의 자존감이 높아졌습니까? 내 아내는 나 하나 믿고 인생 전체를 맡겼는데 내가 자존감을 높여 주어야 합니다.
기독교 심리학자중 30년 동안 결혼 상담만 하신 윌리엄 할리라는 분이 있습니다. 수천 쌍을 상담하고 [남편의 필요, 아내의 필요]라는 책에 결혼생활의 원리에 대해 다섯 가지로 말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원하는 관심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아내는 남편의 애정을 필요로 합니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만을 기대하고 결혼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에베소서5:28에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또한 골로새서3:19에는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원문에 보면 "많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내에 대해 아무리 사랑을 많이 쏟아도 사랑을 다했다고 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는데, 남편들은 애정과 섹스를 구분하지 못고 같은 선상에 놓습니다. 사랑은 곧 ‘섹스다’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아내는 다릅니다. 아내에게는 애정과 섹스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여자에게 있어 애정은 분위기고 섹스는 이벤트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먹고 삽니다. 사랑은 말로 해야 하고, 사려 깊은 행동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신체적인 접촉이 필요합니다. 미국인들은 하루에 평균 4번 포옹합니다. 8번은 좀더 나은 수준이고, 낙심한 자는 12번의 포옹이 필요합니다. 아이에게도 신체적인 접촉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월드 비전 가족지킴이 센타(회장 박종삼 목사)에서 지난 17일 여의도 공원에서 “가족끼리 안아주면 행복해요”라는 캠페인을 전개한 바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든든하고,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려면 안아주는 것을 잘 해 주어야 합니다. 포옹을 통해 가족 간의 사랑을 확인하고 갈등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② 아내는 남편과의 대화를 원합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대상으로 연구했는데 여자아이는 거의 100%가 대화와 관계됩니다. 남자아이들은 60%가 대화에 관계되고 나머지 40%는 대화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넋두리였습니다.
남자는 밖에서 충분한 대화가 이뤄지기 때문에 집에 돌아올 때는 지쳐있지만, 아내는 아이들과의 20%정도의 대화만 가졌을 뿐 80%정도의 대화욕구가 남아 있습니다. 남편이 피곤하더라도 아내와의 대화를 통해 이 욕구를 채워 주어야 합니다. 아내들은 대화가 있어야 속병이 생기지 않습니다.
③ 아내는 남편의 정직하고 열린 마음을 기대합니다.
서로 느끼는 감정과 직면한 문제의식들을 열린 마음으로 대화해서 서로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따라 상대방을 배려하고 함께 대책을 세워 나가는 투명하고 깨끗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비밀이 없고 정직해야 가정이 견고하게 설수 있습니다. 돈 문제도 시댁의 문제에 있어서도 아내에게는 알 권리가 있습니다. 비밀이 있으면 사탄이 틈타 가정이 무너질수 있습니다. 부부가 정직한 관계로 하나 되어 있으면 어떤 사람, 문제, 죄도 틈탈 수 없고 부부사이를 갈라 놓을 수 없습니다.
④ 아내는 남편이 경제적인 후원을 해주기를 원합니다.
디모데전서5:8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자니라"고 하셨습니다. '돌아보지 아니하면'은 '부양할 책임을 감당하지 아니하면'의 뜻입니다. 가정의 경제문제나 자녀교육(子女敎育)문제 등을 아내에게 다 떠넘기고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믿음과 기도가 현실을 외면하는 도피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아내는 경제적인 안정감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⑤ 아내는 가족에 대한 남편의 헌신을 요구합니다.
자녀교육이나 집안을 꾸미는데 있어서 남편의 적극적인 참여와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믿는 아내는 남편이 가정의 영적인 제사장이 되어주기를 기대합니다. 가족을 위해 깨어 기도하며 가정을 말씀위에 든든히 세워주기를 원하는 소원을 품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아름다운교회의 모든 남편들은 성숙한 남편이 되어 아내와 자녀들에게 축복을 안겨주며 허물어져가는 가정들을 세우는 영적인 견인차 역할을 감당하는 주님의 귀한 도구로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II. 아내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정에서 아내의 존재는 막중합니다. 아내 때문에 쓰러져가는 한 가정이 굳게 서기도 하고, 아내 때문에 한 가정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역사이래로 지혜가 가장 충만했던 사람 솔로몬도 성령 충만하지 못한 아내들을 만남으로 그 영광스러운 지혜가 빛이 바랬습니다. 반면에 한 아내의 헌신으로 쓰러져 가는 강정이 다시 일어서고 남편과 아이들이 새로운 힘을 얻어 자부심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정들도 있습니다. 남편이 무너져갈 때 남편을 세우는 일에 가정을 먼저 생각하며 자기 삶과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적으로 최선을 다하는게 아내들입니다. 그렇다면 *아내는 남편을 어떤 자세로 사랑해야 하는가?
1. 남편에게 잘 순복하는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1, 5절)
본문 1절과 5절에서 “남편들에게 순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서5:22에도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내의 상표는 순종입니다. '순종'하면 '맹종, 굴종, 억압'등의 이미지로 그리 좋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와는 달리 순종이 변질이 되어 갑니다. 아내는 가정의 질서를 위해 남편에게 순복해야 합니다. 그때 당시의 유대의 율법이나 헬라법에 의하면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로 집안에 살면서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실이 전파되었습니다.(갈3:28) 기독교로 개종한 많은 여인들이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을 터인데 이런 어려움을 달래기 위해서 베드로는 순종의 미덕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내의 일방적인 순종만을 강조하지 않고 남편에게도 아내에 못지않은 권면을 7절에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도로서 아내의 순종은 일방적인 굴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사랑으로 순종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존경하는 것입니다. (골3:18-19) 그래서 성경은 골 3:18,19절에서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고 말씀하시고 있고, 엡 5:25에서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님께 하듯 해야 합니다. 이런 성경 구절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사랑으로 순종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에 순종하는 미덕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가정을 만드시고 이 가정의 원리를 창조의 원리로 연결을 시켜 주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구분해서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것이고, 남자와 여자는 그 인격성에 있어 동등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역할에 있어서는 다릅니다. 남편을 한 가정의 머리로 세우셨습니다. 집안에 머리가 둘 일수는 없기 때문에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이 모든 것을 잘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순종으로 인하여 남편의 부족한 점들이 보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를 남편의 돕는 배필로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순종해야 합니까?
①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해야합니다.
남편의 명령이나 교회의 명령이 아니라 가정을 세우시고 가정의 행복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남편이 순종할 만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아내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순종의 출발은 명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의 질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남편은 우월하고 아내는 열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본문 7절에도 남편과 아내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3:28에도 "남자나 여자없이 그리스도안에서 다 하나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 잘 되려면 아내가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순종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신성과 능력에 있어 동등하시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종의 형체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2:5-8) 주님은 구원사역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아내된 여러분! 순종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② 믿음이 없는 남편이 구원받게 하기위해서입니다.(1,2절)
마음을 담아 순종하는 것이 믿지 않는 남편을 구원하는 것 뿐 아니라 믿음이 어린 남편의 믿음이 자라게 하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구원의 길로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1절 하반 절에서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신 남편이 있을 때 아내의 올바른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남편을 의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불신 남편이 있다 하더라도 의로운 아내가 남편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으며, 의로운 남편이 불신 아내를 그리스도께 인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그것을 함께 한 남편에게 주어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하게 하였습니다. 아담의 불평은 "하나님이 주어 나와 함께 한 저 여자가 주어 내가 선악과를 먹었나이다" 하므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아내가 남편을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죄인으로 인도할 수도 있고, 의의 길로 인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부부가 같이 믿으면 서로 세워 주고 이끌어 주고 한 쪽이 믿지 않으면 거룩하고 온유한 성품으로 주님께 인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2절에서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고 말씀하고 잇는 것처럼 아내나 남편의 정결한 행위를 봄으로써 마음이 녹아져서 하나님께 나오게 됩니다.
특히 남편은 아내의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내의 순종하는 자세를 통해 그 마음이 열리게 됩니다. 물론 순종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기도가 뒷받침 되어야 하고,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내 인생은 순종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은혜 받는 만큼 순종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정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순종의 전선에 이상이 없어야 합니다. 내 남편을 순종하고 내 가정을 세우겠다는 처음의 열망이 계속해서 꽃피우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 아내들이 순종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니까 가정이 흔들리게 됩니다. 아내의 행동은 무언의 설교가 됩니다. 삶을 통해 순종을 보여줄 때 남편이 감동을 받고 그 마음이 열려 주님 앞으로 한걸음 가까이 나아올 수 있게 됩니다.
2. 내면의 미(美)를 가꾸는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3,4절)
본문 3절에서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내면의 미를 가꾸는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외모에 신경을 무척이나 씁니다. 주름살이 하나라도 늘면 놀라워하면서 괜한 걱정을 합니다. 그러나 신자 된 아내는 겉을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본문 4절에서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진정한 단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복음의 신발을 신고, 의의 흉배와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믿음의 방패와 말씀과 성령의 검을 갖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5절에서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라고 하면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주라 칭하였다는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 종들이 주인에게 순종해야 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순종을 예를 든 것처럼 사도 베드로도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예를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순종하였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내 된 성도는 이와 같이 남편에게 순종하는 미덕이 있어야 하고, 남편을 거룩과 정결함으로 주께 인도하는 아내가 되어야 하며, 겉치장이 아닌 마음의 온유와 정결로 치장하는 의롭고 거룩한 옷을 입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신앙이 있든 없든 할 것 없이 여성들은 머리를 꾸미고 패물(貝物)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이 삶의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고 사는 여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 여성은 이러한 수준에서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역류(逆流)해서 우리는 내 속에 영성과 교양미를 가져야 합니다. '온유함'은 다스려지는 상태, 절제하는 상태를 말하고, '안정'은 시끄럽지 않은 것, 말을 다스릴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복(福)도 말로 불러들이고 화(禍)도 말로 불러들인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언어생활은 중요합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비어있는 사람을 가리켜 솔로몬은 잠언11:22에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교양미가 없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자녀들과 남편들이 흔들리는 이유들 중 하나가 여성들의 가치관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믿는 여성이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바탕 해서 자기를 가꾸지 않는데 있습니다. 남편들과 자녀들을 살리는 길은 아내들이 내면을 잘 가꾸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 값진 것입니다. 바라기는 아름다운교회의 모든 여성도님들은 하나님 앞에서 인격을 연마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3. 남편을 황제처럼 대접하는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6절)
본문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내된 여러분은 남편을 황제처럼 대접해야 합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상전으로 모셔 복종한 것처럼 해야 아내는 왕비로 대접을 받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공주 신드롬을 가지고 있지만 남편을 먼저 왕으로 대우하는 황금율을 지키지 않습니다.
(예화) 하루는 도도하기로 유명한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 앨버트 공과 말다툼을 했는데 남편이 화가 나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빅토리아 여왕도 화가나 뒤 쫓아가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안에서 남편이 '누구요?' 하자 '대영제국의 왕이요'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몇 번을 해도 문을 열어주지 않자 고민하다가 깨달은바가 있어 다시 문을 두드렸습니다. 남편이 '누구요?'하자 '당신 아내입니다'라고 하니까 남편이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남편 앞에서 군림하지 마세요. 남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거절당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것이 남편들의 속성입니다. 남편들은 인정과 신뢰를 받기를 원하고 감사의 표현을 원합니다. 남성은 여성으로부터 찬미의 대상이 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떤 아내들은 자기가 마치 남편을 변화시키는 은사가 있는 것처럼 잔소리를 하지만 남편은 다툼과 말로 변화되는 게 아니라 아내의 존경과 신뢰를 통해서 변화됩니다.
솔로몬은 잠언 21:9에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고 했고, 잠언21:19에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체험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솔로몬은 출발은 아름답게 했지만 그의 가정은 신앙이 없고 인격이 다듬어지지 않은 아내들로 인하여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비로소 집안이 평안하지 않으면 자신의 지혜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왜 수많은 가정이 진통을 겪습니까?
그것은 남편과 아내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대로 가정을 설계하고 가정의 행복을 원하시는 주의 뜻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감정과 생각에 따라 가정을 운영하기 때문에 가정에 깊은 상처들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18:22에 "아내는 얻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는 남편의 고백이 있습니다. 잠언19:14에는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고 했습니다. 현숙(賢淑)한 아내의 존재가 그만큼 존귀하고 역할이 큽니다.
우리 아름다운교회는 모든 남편들이 나중에 주님을 만나게 될 때 '하나님 저에게 이런 좋은 아내를 주셔서 저희 가정이 든든히 서고 지상에서부터 천국을 경험하며 살게 하신 것을 무엇보다 감사합니다'는 고백을 다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IMF 이후 경제 대난의 시대를 맞아 많은 남편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아내로써 격려하고 도와주고 끝까지 신뢰해서 남편으로 하여금 '역시 이 지상에서 내 아내가 최고구나!'하는 마음으로 자부심을 느끼고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부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행복을 부부가 함께 만들어가야 합니다.
오늘날 부부들은 돈을 만드는데 열심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불철주야 뜁니다. 그러나 부부간의 행복을 만들기 위해서는 별로 노력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는 노력을 안 해도 됩니다.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사랑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부부간의 사이에 있어서 행복은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선물을 하십시오. 부부간에 꽃다발을 선물 한다든지, 사랑의 글을 쓰는 등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이십시오. 자신은 사랑의 표현을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사랑만 요구한다면 어떻게 사랑을 받겠습니까? 부부간에는 조건적입니다. 많이 받으려고 하지 말고 많이 주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준만큼 돌아옵니다. 계속해서 아끼고 사랑하십시오.
2. 대화를 깊이 해야 합니다.
이 사회가 얼마나 바쁜지 일에 서로 간 대화의 기회를 빼앗겼습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바쁘고 피곤합니다. 그러니 부부간에 대화가 없습니다. 오늘날 부부의 문제는 대화가 없어서 생기는 것입니다. 같이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웃는 것 같고 편안한 것 같지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없습니다.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늘 노력해야 합니다.
3. 사랑을 감정으로만이 아니라 액션과 의지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마지막 때가 되니까 강하게 부부에게 역사합니다. 부부만 갈라놓으면 사탄의 손에 넘어가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주안에서 하나 되고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지금 내가 만나서 사는 배우자가 내게는 가장 적합한 사람임을 믿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고 사랑하게 될 때에 행복한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행복한 부부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에는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지만 서로 노력하고 수고하여 희생을 감내 할 때에 행복한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4. 상대방의 장점을 보되 단점을 보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장점을 보고 칭찬해 주고 인정해 주되 단점은 말하지 마십시오. 행복한 부부와 불행한 부부의 차이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 부족한 것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부족한 것을 보완해 주고 허물을 덮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부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배우자의 허물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용납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좋은 점은 누구나 사랑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허물이 있을지라도 다 받아주고 용납을 해 주어야 행복한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용납하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것은 용서라는 과정입니다. 서로 실수하고 잘못해도 용서하고 또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단점을 덮어두며 장점을 인정해 주고 칭찬을 해 주어야 행복한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5. 사랑과 희생과 봉사를 해야 합니다. 결혼은 너와 나의 관계이지 너와 그것과의 관계이거나 나와 그것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내가 양보하고 희생함으로 서로 서로 칭찬해 주고 격려해 줄 때에 행복한 부부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배우자를 지배하기 위해서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배우자를 섬기고 받들고 사랑하기 위해서 결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잘못된 생각이 있다면 생각을 바꾸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므로 행복한 부부의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