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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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청지기”(벧전 4:7-11)
핸드릭 크래머가 “교회의 본질은 헌신이다.”라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구원받은 성도라면 마땅히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헌신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그것도 “선한 청지기로서 헌신을 한다.”는 것은 더더욱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헌신을 하지 않자니 제대로 하니 힘들고, 헌신을 제대로 하자니 역부족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성도라면 힘이 들고 어려워도 헌신합니다. 비록 제대로 하지 못할지언정 헌신하는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게 주신 은혜가 너무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은혜를 받은 성도라면 “나는 하나님의 청지기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청지기 의식이 없이는 바른 헌신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선한 청지기로서 헌신할 할 때에 그 헌신은 참으로 아름다운 헌신이 되고, 보람 있는 헌신이 되고, 자랑스런 헌신이 됩니다. 지금은 한국 교회가 더 많이 헌신해야 할 때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이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우리의 희망이요, 우리의 살길입니다. 정부도 헌신해야 삽니다. 기업도 헌신해야 삽니다. 근로자들도 헌신해야 삽니다. 공무원들도 삽니다. 교회도 헌신해야 삽니다. 성도들도 헌신해야 삽니다. 헌신하지 아니하는 삶은 이 시대에 도태 당하고 말 것입니다.
헌신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기업이 사는 길, 나라가 번영하는 길, 개인의 신앙이 올라가는 길, 개인의 삶이 풍성하고 행복하게 누릴 수 있는 길, 그것은 무엇이냐? 헌신입니다. 그러므로 헌신은 자기 삶의 부가가치를 덧붙이는 것과 같습니다. 같은 물건도 서비스 정신으로 만들 때 더 부가가치가 형성되어서 더 잘 소비자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또 좋은 가치를 받아요. 더 좋은 가격에 판매할 수 있고, 또 성장할 수 있고,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청지기의 자세를 가지고 헌신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상급 받을 수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헌신하는 삶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자손이 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 37:26에서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 을 받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의 말씀은 참으로 선교헌신예배를 드리는 모두에게 많은 도전을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한 청지기는 때를 분별할 줄 압니다. 본문 7절 상반 절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라고 말씀하고 지금은 종말 중에서도 말세입니다. 선한 청지기라면 지금은 종말 의식을 갖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일해야 합니다. 밤이 되면 일할 수 없습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되면 일을 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인류의 종말뿐만 아니라 개인의 종말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일할 수 있을 때에 일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선한 청지기로 헌신하는 자만이 사도 요한이 계 2220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은 그리 간단한 고백이 아닙니다. 종말 의식을 가지고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사는 자만이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한 청지기다운 헌신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문의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기도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7절)
본문 7절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선한 청지로서 헌신하려면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헌신하는 일에는 힘쓰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헌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수 있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남은 때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또한 그를 섬기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헌신하게 되면 교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자기 경험대로, 자기 지혜대로 헌신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보면 신본주의적인 헌신이 아니라 인본주의적인 헌신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따라서 기도 없이 헌신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여기에서 "정신을 차린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건전한 정신을 갖추다"(막 515) 또한 "근신하여"이란 말은 "술 취하지 않는다."(벧전 113,8:8)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중언부언하지 마땅히 영적으로 긴장한 가운데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 때인 지금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초스피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보십시오. 정말 정신없이 변화하고 있고, 할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할 일은 많은데 무슨 일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지막 때에 베드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기도하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무엇이 정말로 가치 있는 일인지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할 때 이 땅에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대개 기도할 때 문제에 대한 문제해결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사실상 우리가 기도해야 할 더욱 중요한 이유는 문제해결보다는 '삶의 목적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힘들 때에도 기도가 필요하지만, 바쁠 때에도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쁜 때에는 마음이 분주해서 오히려 기도를 안합니다. 아닙니다. 그때야말로 더욱 기도가 필요한 때이고,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종교개혁이 점차 확산되면서 너무 바쁘니까 잠자는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잠자는 시간이 여섯 시간에서 세시간까지 점점 줄어드니까 그는 "정말 바쁘다! 그래서 더욱 기도해야겠다."라고 말하고 더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바쁘다고 여길수록 더 기도 시간을 내야 합니다. 냉철히 생각하면 가장 바쁜 때가 가장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우리의 신앙생활 및 교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 중요한 것을 빼 놓고 다른 무엇을 한다면 신앙의 균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기도교다." 기도가 없는 신앙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신앙으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기도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면 여러 가지 기적을 목격하게 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 중의 하나가 기도하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이 할 일 많은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때에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를 당한 성도는 헌신하는 힘을 쓰되,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고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써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함께 사역하는 여러 동역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엡 6:18)
그렇다면 첫째로,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해야 합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처럼 "나라에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인 것을 기도하는 가운데 늘 깨닫고 확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이처럼 썩어질 육신의 것이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둘째로, 왜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까?
①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살전 5:2)
우리가 깨어있지 아니하면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데 (벧전 5:8) 그 마귀에게 삼키움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②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께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의미하신 시험(試驗)이란 공포심에 사로잡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위험한 때에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올바른 지혜의 깨닫음입니다.
③ 쾌락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눅 21:36에서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우리가 쾌락주의로 인하여 마음이 우둔해지지 않도록(눅 21:34) 깨어 있으라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쾌락주의자는 마음이 마비되어 하나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2. 사랑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8절)
본문 8절에서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헌신하되 사랑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 말세가 가까우면 사회는 물론이요 교회도 극도의 이기심(利己心)에 빠져 사랑이 식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때가 되면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하셨습니다(마 24:12)
그러기에 헌신할 때에 할 때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헌신은 자기만족을 위한 헌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헌신은 삭막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헌신을 할 때에 진지함과 열심의 헌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랑의 헌신을 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의 "열심으로"이란 말은 열성적으로 뿐만 아니라 지구력(持久力)을 가지고 오래 동안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를 당한 성도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새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요 13:34)
그런데 참으로 중요한 것은 말과 혀로만 사랑을 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요일 3:18) 또한 그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하며(벧전 1:22),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벧전 4:8) 뿐만 아니라 이것과 함께 수반해야 되어야 할 것은 사랑을 구하는 자는 형제의 허물 곧 죄를 덮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허물을 가리 우는데(잠 10:12), 그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은 사랑을 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잠 17:9) 때문에 성도는 모든 일들을 사랑으로 행할 수 있어야 하며(고전 16:14), 심지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할 수 있어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갈 5:13) 그렇습니다. 사랑이 있는 것에는 사람이 잘못해도 문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이 없는 곳에는 잘하여도 불평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헌신을 하되 사랑하면서 헌신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의 첫 단계는 바로 '허다한 죄와 허물을 덮는 것'입니다. 그처럼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줄 때 진정한 용서와 사랑이 싹트게 됩니다.
우리는 다 부족한 사람이고 모자라는 사람이고 실수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허물을 덮어주고 적절한 때에 용서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세가 될수록 사랑이 메말라져 간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열심으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사랑에 빚진 자들이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빚지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므로 되도록 빚을 지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빚을 많이 지어도 좋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이 구절에는 두 가지의 핵심 메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져서는 좋지 않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사랑의 빚은 예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빚은 많이 질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많이 꾸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사랑을 주고받는 것을 대단히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특히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첫째, 사랑하면 죄와 허물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결국 행복입니다.
둘째, 사랑하면 인생의 짐이 덜어집니다. 짐이 없어지진 않지만 덜어집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며 지는 짐은 짐이 아니고 오히려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기대야 하고, 짐을 지우려면 먼저 사랑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 받는 존재가 아닌 상태에서 짐을 지우면 남이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 받는 존재가 된 상태에서 짐을 지우면 그것은 기쁨이 됩니다. 우리는 주위에 평화와 기쁨과 즐거움을 전해주는 사람들이 되어서 남에게 부담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남에게 사랑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나의 짐을 지면서도 오히려 기뻐하며 짐을 질 것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짐을 지우는 존재가 아닌 사랑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남이 기쁨으로 나의 짐을 지고자 하는 그런 은혜를 입게 됩니다.
셋째, 사랑하면 악을 기억하지 못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무작정 기억력이 좋은 것이 축복은 아닙니다. 선한 일, 감사한 일은 잘 기억하고 악한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하면 신기하게도 악한 일이 대한 기억력은 감퇴하고 선한 일에 대한 기억력은 더욱 좋아집니다. 이런 선한 기억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마지막 때에 더욱 사랑이 넘치는 삶을 통해 주위에 밝음과 기쁨과 즐거움을 전하는 사랑의 용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원망 없이 대접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9절)
본문 9절에서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헌신하되 서로 원망없이 대접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헌신할 때는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은 헌신이 아닙니다.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도 헌신이 아닙니다. 칭찬 받으려고 하는 것도 헌신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은혜의 공동체를 육성하는데, 공헌하는 모든 종류의 활동과 기능은 헌신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헌신함으로써 성도됨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으며, 또 교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헌신할 때 "우리는 교회의 한 일원이다."라는 지체의식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또 헌신할 때 "나는 성도가 되었다. 헌신할 때 교인이었다."라는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헌신을 하되 종의 자세로 하라는 것입니다. 종은 자만하거나 우쭐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자세로 헌신할 때는 다투거나 원망할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종이 되어서 교회에서도 헌신할 때 종의 자세로, 사회에 나가서 헌신할 때도 종의 자세로, 그러므로 종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헌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헌신은 예수님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또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심정으로 헌신을 해야 합니까? 요 1313-14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심정을 가지고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 대접하는 마음을 가지고 헌신을 해야 합니다. 헌신은 바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발을 씻겨 주는 자세로 낮은 자리에 서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 고 그들을 섬기고, 헌신해야 합니다. 이렇게 헌신하면 결코 거기에 원망이나 불평도 없을 것입니다. 서로의 허물에 대해서 악평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없는 사람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있는 자에게 헌신하는 것은 아부가 될 수 있지만, 없는 자에게 헌신하는 것은 진정한 희생정신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장애자,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눌린 자들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대접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대접할 수 있습니까?
본문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원망 없이 대접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대접을 하긴 하는데 자기를 높이면서 대접을 합니다. 그런 경우는 대개 사심을 가지고 대접하는 경우입니다. 나중에 그런 대접은 꼭 원망과 불평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원망 없이 서로 대접하려면 교만한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해도 하나님이 싫어하면 문제가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의 문제에 대해 항상 자신을 가다듬고 성찰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적인 사람이 되기보다 성실한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저도 가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성공적인 목회자가 되지 말게 하시고 성실한 목회자가 되게 하소서.' 왜냐하면 성공하면 제일 걸리기 쉬운 병이 '교만의 병'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간증을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은혜를 받았다는 말 중에 교만이 비쭉 나와 있습니다. 그처럼 은혜를 오해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은혜 받은 자에게 있는 가장 결정적인 덕목이 겸손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 교만의 병에 걸린 사람에게 어떤 분은 "영혼의 에이즈"라는 병명을 붙입니다. 그 병은 정말 고치기 힘든 아주 심각하고 난처한 질병이라는 말입니다. 본인도 은혜 받은 경험이 있고 말씀도 꽤 아니까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다 안다!"라고 하면서 어느 누구의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원리를 생각하지 않고, 리더십의 원리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받은 은혜를 다 쏟아 부어 버립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이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더욱 더 겸손해야 합니다. 은혜 받았다고 "어떻게 설교를 저런 식으로 해!"라고 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볼 때 부모에게서 부족한 점이 한두 개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은 자식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자식의 도리입니다.
4. 받은 은사대로 헌신해야 합니다.(10절)
본문 10절에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헌신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받은 은사대로 헌신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봉 사를 할 수는 없습니다. 헌신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것이 잘 되려면 은사의 적합한지를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받은 은사대로 헌신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헌신하는 일 가운데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고, 하찮은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본주의적인 생각입니다. 모든 은사는 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다 중요한 일입니다. 다만 기능과 역할이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자기 받은 은사대로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은사대로 일하면 모두가 다 즐겁습니다. 그리고 효율적이고 능률적입니다. 은사대로 헌신하면 자기 자신도 즐거울 뿐만 아니라 헌신하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도 즐겁습니다. 모두가 행복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사대로 헌신하지 아니하면, 헌신하는 사람들이 막 짜증이 납니다. 아주 지긋지긋해 합니다. 하기도 싫습니다. 헌신을 받는 사람은 오히려 더 답답합니다. 차라리 그냥 지나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은사대로 헌신하라”는 것은 헌신하는 일에 협력하며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헌신에는 상호간의 협력이 중요합니다. “이 일은 나만 헌신해야 돼. 누구도 손대면 안돼”라고 생각하면서 헌신하면 다른 사람에게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도 아니할 뿐만 아니라 결국 그 일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되면 “엘리야 컴프렉스”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자기 자기만이 바알 신과 아세라 목상에 절하지 않고 자기만 살아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위협함을 받았을 때 외로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니다. 너 말고도 바알 신에 절하지 아니한 자, 아세라 목상에 절하지 아니한 자 7,000명이 있다." 그
우리 헌신하는 사람들이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헌신은 상호간에 협력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2:19-21에서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하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헌신할 “지체는 많다”고 했습니다. 영국 속담에 "한 사람이 못을 박으면 다른 한 사람은 그곳에 못을 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받은 은사대로 해야 합니다. 헌신은 상호간에 협력하면서 해야 합니다. 모두가 다 연합하고 협력할 때, 하나님을 더 많이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절대로 필요 없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인정해주고 도와줄 때,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누리면서 감사하면서 주님께 영광 돌리면서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자기 은혜, 자기 은사를 가지고 남을 비교하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약을 남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은사를 잘못 남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은사가 남을 판단하는 재료가 아닌 서로 봉사하는 재료로 사용될 때 그 은사는 진정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하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자기 중심주의가 팽배해서 자기가 높아지는 때입니다. 이런 때 겸손함으로 서로 대접하고, 서로 봉사하는 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5. 성령의 힘으로 헌신해야 합니다.(11절 상)
본문 11절 상반절에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헌신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의 힘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헌신은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경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오직 성령의 힘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헌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몸이 약하든지, 그 일이 힘에 벅차든지, 자신이 없기 때문에 헌신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평생을 한결같이 헌신하려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또 헌신은 희생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희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값없는 희생에 참여하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몇 날이 못되어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한다.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는다. 권능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서 내가 산 것처럼 너희도 살 수 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헌신하면서 힘들게 헌신하는 사람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지식과 지혜와 경험을 가지고 헌신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의 일은 그렇게 해도 조금은 감당할지 모를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꼭 문제가 생깁니다.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이 헌신하는 일은 주님과는 상관없는 헌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함 받아서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고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6.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11절 하)
본문 11절 하반 절에서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헌신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모든 일에는 끝과 마무리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헌신을 열심히 잘 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서 자만하거나 자화자찬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자기만 자랑하려고 하면, 자기만 드러내려고 하면, 이것 은 잘못된 헌신입니다. 우리의 헌신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능력 받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0: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하는 것도 청지기의 자세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청지기 의식이 있는 교인들이 많을수록 교회는 부흥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에 가면 교인들이 서로 싸웁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를 드러 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생기는 가장 무서운 마귀 두 마리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섭섭 마귀입니다. 이 마귀는 참여하지 않으면 생기는 마귀입니다. 참여 안 하면 갈등이 생기고, 불평이 생기고, 섭섭함이 생깁니다. 천성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참여하지 않다 보면 누구나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무서운 마귀는 삐딱 마귀입니다. 이 삐딱 마귀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귀를 물리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청지기 의식을 가지면 됩니다. 말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면 절대로 이런 마귀들은 틈타지 않습니다.
이렇게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마지막 때의 삶을 아름답게 살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11절 말씀 후반부를 한번 보십시오.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우리가 청지기 의식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 관심을 가지지 마시고 살아있을 때에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삶을 펼쳐야 하겠습니다.
동물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집밖에 있는 야생동물입니다. 이것들은 대체적으로 해가 됩니다. 또 하나는 집안에 있는 동물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주인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런데 집안에 있는 대표적인 것으로 소와 돼지가 있습니다. 이 두 동물은 주인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유익을 주는 방법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소는 살아서도 주인을 위해 일하고 죽어서도 주인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살아서는 밭 갈고 짐 나르고, 죽어서는 가죽으로 구두를 만들게 하고, 설렁탕, 곰탕, 꼬리탕, 도가니탕의 재료가 되어서 뼈까지 다 줍니다. 그러나 돼지는 살아서는 별로 유익을 못 주고 밥만 먹고 잠만 자고 살만 찌고 있다가, 죽은 다음에 비로소 유익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기만 하지만 하나님께 하나도 영광을 못 돌리고 겨우 천국에만 들어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성도님들은 살아서도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죽어서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만날 날이 가까운 이 때에 이제는 그냥 성도라는 이름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헌신하되 하나님께 늘 감사하면서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헌신할 곳을 주시고, 일할 곳을 주시고, 일할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생명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달란트를 주시고, 같이 헌신할 수 있는 팀을 주시고, 지도자를 주시고, 헌신할 처소를 주신 것, 이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에 헌신하더라도, 성가대 헌신을 하든지, 교회학교 교사로 헌신을 하든지, 아니면 성전을 안내하고 우리 성도님들을 정말로 편하게 안내하고 헌신을 하든지, 아니면 밖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더우나 추우나 차량헌신을 하든지, 그 헌신할 수 있는 믿음, 헌신할 수 있는 건강, 헌신할 수 있는 자리가 있는 것 감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헌신했으므로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또 헌신한 것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면 영원한 천국에서 상급 받고 면류관 받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 헌신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지금은 추수할 것이 많이 있으나 추수할 일꾼이 적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헌신생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헌신해야 합니까? ① 기도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 ② 사랑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 ③ 원망 없이 대접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 ④ 받은 은사대로 헌신해야 합니다. ⑤ 성령의 능력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⑥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지금은 헌신의 시대입니다. 서비스 시대입니다. 개인도, 가정도, 기업도, 국가도, 사회도, 교회도 헌신, 서비스, 헌신이 있는 삶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도태당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살아남아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님을 영화롭게 하며, 주께 영광을 돌리며 살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여 주님 앞에 귀한 상급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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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릭 크래머가 “교회의 본질은 헌신이다.”라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구원받은 성도라면 마땅히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헌신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그것도 “선한 청지기로서 헌신을 한다.”는 것은 더더욱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헌신을 하지 않자니 제대로 하니 힘들고, 헌신을 제대로 하자니 역부족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성도라면 힘이 들고 어려워도 헌신합니다. 비록 제대로 하지 못할지언정 헌신하는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게 주신 은혜가 너무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은혜를 받은 성도라면 “나는 하나님의 청지기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청지기 의식이 없이는 바른 헌신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선한 청지기로서 헌신할 할 때에 그 헌신은 참으로 아름다운 헌신이 되고, 보람 있는 헌신이 되고, 자랑스런 헌신이 됩니다. 지금은 한국 교회가 더 많이 헌신해야 할 때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이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우리의 희망이요, 우리의 살길입니다. 정부도 헌신해야 삽니다. 기업도 헌신해야 삽니다. 근로자들도 헌신해야 삽니다. 공무원들도 삽니다. 교회도 헌신해야 삽니다. 성도들도 헌신해야 삽니다. 헌신하지 아니하는 삶은 이 시대에 도태 당하고 말 것입니다.
헌신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기업이 사는 길, 나라가 번영하는 길, 개인의 신앙이 올라가는 길, 개인의 삶이 풍성하고 행복하게 누릴 수 있는 길, 그것은 무엇이냐? 헌신입니다. 그러므로 헌신은 자기 삶의 부가가치를 덧붙이는 것과 같습니다. 같은 물건도 서비스 정신으로 만들 때 더 부가가치가 형성되어서 더 잘 소비자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또 좋은 가치를 받아요. 더 좋은 가격에 판매할 수 있고, 또 성장할 수 있고,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청지기의 자세를 가지고 헌신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상급 받을 수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헌신하는 삶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자손이 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 37:26에서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 을 받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의 말씀은 참으로 선교헌신예배를 드리는 모두에게 많은 도전을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한 청지기는 때를 분별할 줄 압니다. 본문 7절 상반 절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라고 말씀하고 지금은 종말 중에서도 말세입니다. 선한 청지기라면 지금은 종말 의식을 갖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일해야 합니다. 밤이 되면 일할 수 없습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되면 일을 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인류의 종말뿐만 아니라 개인의 종말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일할 수 있을 때에 일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선한 청지기로 헌신하는 자만이 사도 요한이 계 2220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은 그리 간단한 고백이 아닙니다. 종말 의식을 가지고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사는 자만이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한 청지기다운 헌신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문의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기도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7절)
본문 7절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선한 청지로서 헌신하려면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헌신하는 일에는 힘쓰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헌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수 있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남은 때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또한 그를 섬기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헌신하게 되면 교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자기 경험대로, 자기 지혜대로 헌신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보면 신본주의적인 헌신이 아니라 인본주의적인 헌신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따라서 기도 없이 헌신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여기에서 "정신을 차린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건전한 정신을 갖추다"(막 515) 또한 "근신하여"이란 말은 "술 취하지 않는다."(벧전 113,8:8)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중언부언하지 마땅히 영적으로 긴장한 가운데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 때인 지금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초스피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보십시오. 정말 정신없이 변화하고 있고, 할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할 일은 많은데 무슨 일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지막 때에 베드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기도하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무엇이 정말로 가치 있는 일인지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할 때 이 땅에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대개 기도할 때 문제에 대한 문제해결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사실상 우리가 기도해야 할 더욱 중요한 이유는 문제해결보다는 '삶의 목적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힘들 때에도 기도가 필요하지만, 바쁠 때에도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쁜 때에는 마음이 분주해서 오히려 기도를 안합니다. 아닙니다. 그때야말로 더욱 기도가 필요한 때이고,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종교개혁이 점차 확산되면서 너무 바쁘니까 잠자는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잠자는 시간이 여섯 시간에서 세시간까지 점점 줄어드니까 그는 "정말 바쁘다! 그래서 더욱 기도해야겠다."라고 말하고 더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바쁘다고 여길수록 더 기도 시간을 내야 합니다. 냉철히 생각하면 가장 바쁜 때가 가장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우리의 신앙생활 및 교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 중요한 것을 빼 놓고 다른 무엇을 한다면 신앙의 균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기도교다." 기도가 없는 신앙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신앙으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기도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면 여러 가지 기적을 목격하게 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 중의 하나가 기도하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이 할 일 많은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때에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를 당한 성도는 헌신하는 힘을 쓰되,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고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써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함께 사역하는 여러 동역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엡 6:18)
그렇다면 첫째로,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해야 합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처럼 "나라에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인 것을 기도하는 가운데 늘 깨닫고 확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이처럼 썩어질 육신의 것이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둘째로, 왜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까?
①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살전 5:2)
우리가 깨어있지 아니하면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데 (벧전 5:8) 그 마귀에게 삼키움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②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께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의미하신 시험(試驗)이란 공포심에 사로잡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위험한 때에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올바른 지혜의 깨닫음입니다.
③ 쾌락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눅 21:36에서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우리가 쾌락주의로 인하여 마음이 우둔해지지 않도록(눅 21:34) 깨어 있으라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쾌락주의자는 마음이 마비되어 하나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2. 사랑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8절)
본문 8절에서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헌신하되 사랑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 말세가 가까우면 사회는 물론이요 교회도 극도의 이기심(利己心)에 빠져 사랑이 식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때가 되면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하셨습니다(마 24:12)
그러기에 헌신할 때에 할 때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헌신은 자기만족을 위한 헌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헌신은 삭막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헌신을 할 때에 진지함과 열심의 헌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랑의 헌신을 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의 "열심으로"이란 말은 열성적으로 뿐만 아니라 지구력(持久力)을 가지고 오래 동안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를 당한 성도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새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요 13:34)
그런데 참으로 중요한 것은 말과 혀로만 사랑을 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요일 3:18) 또한 그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하며(벧전 1:22),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벧전 4:8) 뿐만 아니라 이것과 함께 수반해야 되어야 할 것은 사랑을 구하는 자는 형제의 허물 곧 죄를 덮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허물을 가리 우는데(잠 10:12), 그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은 사랑을 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잠 17:9) 때문에 성도는 모든 일들을 사랑으로 행할 수 있어야 하며(고전 16:14), 심지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할 수 있어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갈 5:13) 그렇습니다. 사랑이 있는 것에는 사람이 잘못해도 문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이 없는 곳에는 잘하여도 불평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헌신을 하되 사랑하면서 헌신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의 첫 단계는 바로 '허다한 죄와 허물을 덮는 것'입니다. 그처럼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줄 때 진정한 용서와 사랑이 싹트게 됩니다.
우리는 다 부족한 사람이고 모자라는 사람이고 실수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허물을 덮어주고 적절한 때에 용서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세가 될수록 사랑이 메말라져 간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열심으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사랑에 빚진 자들이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빚지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므로 되도록 빚을 지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빚을 많이 지어도 좋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이 구절에는 두 가지의 핵심 메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져서는 좋지 않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사랑의 빚은 예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빚은 많이 질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많이 꾸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사랑을 주고받는 것을 대단히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특히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첫째, 사랑하면 죄와 허물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결국 행복입니다.
둘째, 사랑하면 인생의 짐이 덜어집니다. 짐이 없어지진 않지만 덜어집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며 지는 짐은 짐이 아니고 오히려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기대야 하고, 짐을 지우려면 먼저 사랑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 받는 존재가 아닌 상태에서 짐을 지우면 남이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 받는 존재가 된 상태에서 짐을 지우면 그것은 기쁨이 됩니다. 우리는 주위에 평화와 기쁨과 즐거움을 전해주는 사람들이 되어서 남에게 부담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남에게 사랑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나의 짐을 지면서도 오히려 기뻐하며 짐을 질 것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짐을 지우는 존재가 아닌 사랑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남이 기쁨으로 나의 짐을 지고자 하는 그런 은혜를 입게 됩니다.
셋째, 사랑하면 악을 기억하지 못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무작정 기억력이 좋은 것이 축복은 아닙니다. 선한 일, 감사한 일은 잘 기억하고 악한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하면 신기하게도 악한 일이 대한 기억력은 감퇴하고 선한 일에 대한 기억력은 더욱 좋아집니다. 이런 선한 기억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마지막 때에 더욱 사랑이 넘치는 삶을 통해 주위에 밝음과 기쁨과 즐거움을 전하는 사랑의 용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원망 없이 대접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9절)
본문 9절에서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헌신하되 서로 원망없이 대접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헌신할 때는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은 헌신이 아닙니다.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도 헌신이 아닙니다. 칭찬 받으려고 하는 것도 헌신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은혜의 공동체를 육성하는데, 공헌하는 모든 종류의 활동과 기능은 헌신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헌신함으로써 성도됨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으며, 또 교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헌신할 때 "우리는 교회의 한 일원이다."라는 지체의식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또 헌신할 때 "나는 성도가 되었다. 헌신할 때 교인이었다."라는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헌신을 하되 종의 자세로 하라는 것입니다. 종은 자만하거나 우쭐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자세로 헌신할 때는 다투거나 원망할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종이 되어서 교회에서도 헌신할 때 종의 자세로, 사회에 나가서 헌신할 때도 종의 자세로, 그러므로 종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헌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헌신은 예수님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또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심정으로 헌신을 해야 합니까? 요 1313-14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심정을 가지고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 대접하는 마음을 가지고 헌신을 해야 합니다. 헌신은 바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발을 씻겨 주는 자세로 낮은 자리에 서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 고 그들을 섬기고, 헌신해야 합니다. 이렇게 헌신하면 결코 거기에 원망이나 불평도 없을 것입니다. 서로의 허물에 대해서 악평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없는 사람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있는 자에게 헌신하는 것은 아부가 될 수 있지만, 없는 자에게 헌신하는 것은 진정한 희생정신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장애자,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눌린 자들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대접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대접할 수 있습니까?
본문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원망 없이 대접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대접을 하긴 하는데 자기를 높이면서 대접을 합니다. 그런 경우는 대개 사심을 가지고 대접하는 경우입니다. 나중에 그런 대접은 꼭 원망과 불평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원망 없이 서로 대접하려면 교만한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해도 하나님이 싫어하면 문제가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의 문제에 대해 항상 자신을 가다듬고 성찰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적인 사람이 되기보다 성실한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저도 가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성공적인 목회자가 되지 말게 하시고 성실한 목회자가 되게 하소서.' 왜냐하면 성공하면 제일 걸리기 쉬운 병이 '교만의 병'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간증을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은혜를 받았다는 말 중에 교만이 비쭉 나와 있습니다. 그처럼 은혜를 오해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은혜 받은 자에게 있는 가장 결정적인 덕목이 겸손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 교만의 병에 걸린 사람에게 어떤 분은 "영혼의 에이즈"라는 병명을 붙입니다. 그 병은 정말 고치기 힘든 아주 심각하고 난처한 질병이라는 말입니다. 본인도 은혜 받은 경험이 있고 말씀도 꽤 아니까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다 안다!"라고 하면서 어느 누구의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원리를 생각하지 않고, 리더십의 원리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받은 은혜를 다 쏟아 부어 버립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이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더욱 더 겸손해야 합니다. 은혜 받았다고 "어떻게 설교를 저런 식으로 해!"라고 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볼 때 부모에게서 부족한 점이 한두 개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은 자식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자식의 도리입니다.
4. 받은 은사대로 헌신해야 합니다.(10절)
본문 10절에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헌신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받은 은사대로 헌신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봉 사를 할 수는 없습니다. 헌신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것이 잘 되려면 은사의 적합한지를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받은 은사대로 헌신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헌신하는 일 가운데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고, 하찮은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본주의적인 생각입니다. 모든 은사는 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다 중요한 일입니다. 다만 기능과 역할이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자기 받은 은사대로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은사대로 일하면 모두가 다 즐겁습니다. 그리고 효율적이고 능률적입니다. 은사대로 헌신하면 자기 자신도 즐거울 뿐만 아니라 헌신하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도 즐겁습니다. 모두가 행복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사대로 헌신하지 아니하면, 헌신하는 사람들이 막 짜증이 납니다. 아주 지긋지긋해 합니다. 하기도 싫습니다. 헌신을 받는 사람은 오히려 더 답답합니다. 차라리 그냥 지나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은사대로 헌신하라”는 것은 헌신하는 일에 협력하며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헌신에는 상호간의 협력이 중요합니다. “이 일은 나만 헌신해야 돼. 누구도 손대면 안돼”라고 생각하면서 헌신하면 다른 사람에게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도 아니할 뿐만 아니라 결국 그 일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되면 “엘리야 컴프렉스”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자기 자기만이 바알 신과 아세라 목상에 절하지 않고 자기만 살아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위협함을 받았을 때 외로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니다. 너 말고도 바알 신에 절하지 아니한 자, 아세라 목상에 절하지 아니한 자 7,000명이 있다." 그
우리 헌신하는 사람들이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헌신은 상호간에 협력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2:19-21에서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하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헌신할 “지체는 많다”고 했습니다. 영국 속담에 "한 사람이 못을 박으면 다른 한 사람은 그곳에 못을 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받은 은사대로 해야 합니다. 헌신은 상호간에 협력하면서 해야 합니다. 모두가 다 연합하고 협력할 때, 하나님을 더 많이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절대로 필요 없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인정해주고 도와줄 때,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누리면서 감사하면서 주님께 영광 돌리면서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자기 은혜, 자기 은사를 가지고 남을 비교하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약을 남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은사를 잘못 남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은사가 남을 판단하는 재료가 아닌 서로 봉사하는 재료로 사용될 때 그 은사는 진정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하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자기 중심주의가 팽배해서 자기가 높아지는 때입니다. 이런 때 겸손함으로 서로 대접하고, 서로 봉사하는 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5. 성령의 힘으로 헌신해야 합니다.(11절 상)
본문 11절 상반절에서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헌신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의 힘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헌신은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경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오직 성령의 힘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헌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몸이 약하든지, 그 일이 힘에 벅차든지, 자신이 없기 때문에 헌신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평생을 한결같이 헌신하려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또 헌신은 희생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희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값없는 희생에 참여하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몇 날이 못되어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한다.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는다. 권능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서 내가 산 것처럼 너희도 살 수 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헌신하면서 힘들게 헌신하는 사람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지식과 지혜와 경험을 가지고 헌신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의 일은 그렇게 해도 조금은 감당할지 모를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꼭 문제가 생깁니다.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이 헌신하는 일은 주님과는 상관없는 헌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함 받아서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고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6.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11절 하)
본문 11절 하반 절에서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헌신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모든 일에는 끝과 마무리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헌신을 열심히 잘 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서 자만하거나 자화자찬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자기만 자랑하려고 하면, 자기만 드러내려고 하면, 이것 은 잘못된 헌신입니다. 우리의 헌신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능력 받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0: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하는 것도 청지기의 자세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청지기 의식이 있는 교인들이 많을수록 교회는 부흥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에 가면 교인들이 서로 싸웁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를 드러 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생기는 가장 무서운 마귀 두 마리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섭섭 마귀입니다. 이 마귀는 참여하지 않으면 생기는 마귀입니다. 참여 안 하면 갈등이 생기고, 불평이 생기고, 섭섭함이 생깁니다. 천성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참여하지 않다 보면 누구나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무서운 마귀는 삐딱 마귀입니다. 이 삐딱 마귀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귀를 물리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청지기 의식을 가지면 됩니다. 말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면 절대로 이런 마귀들은 틈타지 않습니다.
이렇게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마지막 때의 삶을 아름답게 살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11절 말씀 후반부를 한번 보십시오.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우리가 청지기 의식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 관심을 가지지 마시고 살아있을 때에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삶을 펼쳐야 하겠습니다.
동물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집밖에 있는 야생동물입니다. 이것들은 대체적으로 해가 됩니다. 또 하나는 집안에 있는 동물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주인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런데 집안에 있는 대표적인 것으로 소와 돼지가 있습니다. 이 두 동물은 주인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유익을 주는 방법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소는 살아서도 주인을 위해 일하고 죽어서도 주인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살아서는 밭 갈고 짐 나르고, 죽어서는 가죽으로 구두를 만들게 하고, 설렁탕, 곰탕, 꼬리탕, 도가니탕의 재료가 되어서 뼈까지 다 줍니다. 그러나 돼지는 살아서는 별로 유익을 못 주고 밥만 먹고 잠만 자고 살만 찌고 있다가, 죽은 다음에 비로소 유익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기만 하지만 하나님께 하나도 영광을 못 돌리고 겨우 천국에만 들어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성도님들은 살아서도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죽어서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만날 날이 가까운 이 때에 이제는 그냥 성도라는 이름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헌신하되 하나님께 늘 감사하면서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헌신할 곳을 주시고, 일할 곳을 주시고, 일할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생명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달란트를 주시고, 같이 헌신할 수 있는 팀을 주시고, 지도자를 주시고, 헌신할 처소를 주신 것, 이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에 헌신하더라도, 성가대 헌신을 하든지, 교회학교 교사로 헌신을 하든지, 아니면 성전을 안내하고 우리 성도님들을 정말로 편하게 안내하고 헌신을 하든지, 아니면 밖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더우나 추우나 차량헌신을 하든지, 그 헌신할 수 있는 믿음, 헌신할 수 있는 건강, 헌신할 수 있는 자리가 있는 것 감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헌신했으므로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또 헌신한 것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면 영원한 천국에서 상급 받고 면류관 받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 헌신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지금은 추수할 것이 많이 있으나 추수할 일꾼이 적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헌신생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헌신해야 합니까? ① 기도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 ② 사랑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 ③ 원망 없이 대접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 ④ 받은 은사대로 헌신해야 합니다. ⑤ 성령의 능력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⑥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지금은 헌신의 시대입니다. 서비스 시대입니다. 개인도, 가정도, 기업도, 국가도, 사회도, 교회도 헌신, 서비스, 헌신이 있는 삶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도태당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살아남아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님을 영화롭게 하며, 주께 영광을 돌리며 살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여 주님 앞에 귀한 상급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