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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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충만한 사람”(행 6:2-6)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이란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귀한 은총을 받았는데, 그것이 성령의 강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함께 하셨던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로흐만’ 박사는 "성령은 친밀하게 가깝게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놀라움을 일으키고, 기뻐하게 하는 하나님의 현존으로 나타나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성령이 충만하다"든가 "성령의 열매"라든가 "성령의 은사"라든가, 성령의 능력이란 말을 많이 듣습니다. 아마, 교회에서 성령이란 말처럼 자주 듣는 말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성령에 관해 처음으로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① 성령님은 성삼위(聖三位) 중 한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삼위(三位) 중 제3위가 되신 분이십니다. 성령을 성신(聖神)이시라고 합니다.
② 성령님은 믿는 사람과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6) 여기서 보혜사란 영어로 “도와주는 분”(helper)이란 뜻입니다. 성령님은 모든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함께 계십니다.
③ 성령님은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요3:6) 곧 성령님은 우리를 중생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힘으로도 지식으로 명예로도 거듭날 수가 없지만 성령님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④ 성령님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령님은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우리 속에 숨어 있는 죄를 찾아내시고 죄를 죄로 느끼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회개케 하십니다. 전에는 우리가 죄에 종노릇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자유와 참 만족과 참 쉼을 얻습니다.
⑤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6:1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바르게 잘 살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여 주십니다.
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시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성령님은 내 영혼으로 주님을 사모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기를 목마른 사슴이 시냇가를 찾듯이 사모합니다. 성령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사모하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84:10)
⑥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는 생각하기를 물질만 있으면 참 평안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면 물질이 없어도, 건강이 없어도, 명예도 없어도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어주시는 은혜를 통하여 참 평강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영적인 평안이 있는 사람은 모든 역경과 고난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⑦ 성령님은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⑧ 성령님은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고 열매 맺게 하십니다.(고전 12:8-10)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22-23)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회의를 느낄 때에는 “나는 솔직히 성령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만약 내가 성령의 은혜를 받았다면 왜 이렇게 타락하고 타락하는 생활만 하느냐”라고 반문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라면 결코 범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속에 타락한 본성이 있기에 우리는 종종 성령님을 탄식시키며, 근심시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면 결코 성령님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강림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지 아니했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것이 아니라 오순절 때에 마가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의 강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이를 바로 알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초대교회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20:20의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 20:22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때에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이미 성령 강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을 처음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 곧 전도를 능력 있게 감당할 수 있도록 주신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신 역사였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성령의 능력 세례”라는 것입니다. 이것의 단적인 증거가 바로 행 1:8의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기억할 것은 우리에게도 성령의 능력 세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 세례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역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언제 성령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무의식(無意識) 중에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받았다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주라고 신앙고백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2:3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 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받은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아니하면 고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아니하면 마음이 언제나 공허하기 때문에 결국 그러한 인생은 허무주의나 비관주의로 인생을 마무리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한 자는 신앙이 병들거나 도중에 낙오하지 않으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 하나님 앞에 능력 있게 한평생을 쓰임 받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고독하지 않습니다. 결코 내적인 공허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시고(요 14:18)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어주시는 평안함을 맛보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요 14:27)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필요한 것이 많이 있지만 가장 귀한 것은 바로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성령의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날마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고전 12:31) 하나님의 은혜는 사모하는 자에게 역사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지 아니하면 다른 잡동사니로 충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무엇으로든 충만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꽉 찬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화) 제가 새벽기도회에 올 때 보면 그 시간까지 젊은이들이 돌아다닙니다. 몸을 비틀거리며 몰려다닙니다. 이들을 술에 충만하고, 세상에 충만하고, 향락에 충만하고, 쾌락에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이러한 것들로 충만한 사람들은 결국 곧 자기 자신이 공허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생체적으로 밤에 잠을 자야 기운이 찹니다. 밤새 흔들고 마신다고 하더라도 아침이 되면 더 허전해집니다. 밤에는 위가 비어야 건강한데 밤새 먹고 마시면 위가 라 면 충만, 술 충만이 되지요. 비어야 할 때 차고, 차야 할 때 비면 영육이 시드는 법입니다.
지금 우리 속에 담배연기가 충만하고, 술이 충만하고, 욕심이 충만하고, 음란이 충만해 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돌아와 보니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습니다. 이 귀신은 나가서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사람의 형편은 이전보다 더 악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 청소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것은 예수의 피 밖에 없습니다. 성령으로 씻어야 귀신이 안 들어옵니다. 바리새인은 그 입에 악독이 가득 했습니다. 외식과 불법이 가득 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했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은 그들은 죽은 사람의 뼈와 모 든 더러운 것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초대교회의 처음 시험을 가져왔던 아나니아에게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였느냐"라고 책망합니다. 아나니아는 충만하지 말아야 할 사단으로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성령을 속였습니다. 충만하지 말아야 할 것이 충만하면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충만’이라는 단어에 유의를 해야 합니다.
바울 서신 특히 옥중서신에는 ‘충만’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타납니다. 바울의 충만의 사상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어의 뜻은 "채우다", "성취하다" 또는 "완성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충만 또는 완성 또는 성취를 포함한 시간적 수적 전체를 의미를 말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는 만물에 충만하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충만은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구절은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충만 그 자체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가능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충만한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1.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지혜도 충만합니다.(3절)
본문에 2절 이하에 보니 사도들은 교회가 크게 부흥하자 일을 분담하여 사역하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서 사도들을 도울 수 있는 동역자 7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 기준에 첫 번째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지만 지혜가 충만하지 않으면 안 되고, 지혜가 충만하지만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령과 지혜는 동시적으로 충만해야 하고 동시적으로 충만해집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거룩한 상식을 갖춘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뱀같이 지혜롭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아니하면 분별력, 통찰력이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결국 무례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아니한 지식은 자기 자기도 모르게 강퍅함과 교만함으로 변해져서 자꾸만 다른 성도들을 적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별의 지혜를 소유하기에 때문에 공동체를 위하여 사랑하고, 온유하며, 슬기로우며, 조화를 이릅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여기에서 “지혜(知慧)”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살아가는 기술'이란 뜻입니다. 지혜는 묵상하는 삶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죽어 가는 기술로 가득해집니다. 진정한 삶의 기술은 성경에서 얻을 수 있으며, 참 지혜는 성경에서 성령을 통하여 공급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 5:15-18에서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하지 아니하면 어리석은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의 “어리석다”(absurd))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귀머거리'라는 뜻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사람은 지혜에 귀가 밝습니다. 야고보서 3:17에는 "오직 위로부터 난 지 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거짓에는 비고, 열매에는 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모세를 통하여 성막을 지을 때에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이 일을 맡 깁니다. 출애굽기 31:3에는 “하나님의 신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일하게 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의 부모인 엘리사벳과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하였습니다. 성경은 세례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합니다. 로마서 1:29에는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 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라고 합니다. 악독이 충만하면 지혜의 자리는 없습니다.
2.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칭찬을 듣습니다.(3절)
본문 3절 중반 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칭찬을 듣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것은 칭찬 듣는 조건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칭찬의 대상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면서 칭찬 듣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에서 비난의 대상이 될 때가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칭찬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고 첫 순 교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칭찬의 대상이었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았고 사도들을 쫓아냈습니다. 사도행전 13:52에는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고 합니다. 핍박을 받았지만 성령이 충만합니다. 성령 충만은 어떤 조건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충만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칭찬 듣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술 취하지 않는 생활”을 합니다. (엡 5:18)
안디옥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받았고 칭찬을 들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면 그 결과는 칭찬입니다. 사도행전 11:24에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 가 주께 더하더라"고 합니다. 그는 착한 사람이며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또한 디모데도 형제들에게 칭찬 받은 자라고 합니다. 사울의 눈을 뜨게 하였던 아나니아도 다메섹의 유대인들에게 칭찬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리고 작은 일에 최선을 다 하지 못한 사람을 책망하십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리고 바울 은 빌립보서 4:8에서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칭찬 받을만 해야 합니다. 칭찬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칭찬 듣는 것은 더 좋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칭찬을 듣게 합니다.
3.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신실하게 감당합니다.(3절)
본문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지혜가 충만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신실하게 감당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한 사람을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야 합니다.
교회 일꾼의 자격은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교회 일꾼에게 필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지식도 필요하고, 재물도 필요하고, 건강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들은 필수조건은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필수 조건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 에게 이끌리셨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공생애의 시작에 중요한 조건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성령에게 이끌립니다. 성령 충만해서 성령에게 이끌려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습니다. 성령의 인도와 마귀의 시험은 같은 맥락입니다.
초대 교회의 제자들은 다 성령 충만함 받고 성령 말하게 하심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했 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전도의 조건이며 교회 설립의 조건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 여 설교하고 전도하였습니다. 온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 니다. 성령이 충만한 다메섹의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안수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보내 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행 9:17) 이 때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였습니다.
성경은 온통 성령의 충만을 교회의 일꾼 의 자격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일꾼의 자격은 철저하게 영성과 도덕성입니다. 성령 충만과 칭찬 듣는 깨끗한 삶을 강조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1절에는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일하는 사람은 일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을 만드는 사람은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분이 "인생은 테니스 경기와 같다. 당신은 서브를(섬김을) 잘 하지 않고는 이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서브를 잘 해야 합니다. 인생은 잘 섬겨야 합니다. 서브하는 볼 은 성령입니다. 성령으로 서브하십시오. 성령으로 섬기십시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영적 전쟁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 배후 세력인 보이지 않는 공중 권세 잡은 자와의 싸움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 6:12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ꡓ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싸움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성령의 충만은 영적 싸움에서만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생활 속에서 마땅히 나타내야 할 믿음의 큰 역사입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는 탐욕과 방탕과 위선과 악독이 충만한 바리새인 시몬 집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발을 닦았습니다. 향유 냄 새가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지금 세상은 성령을 거스리는 것으로 충만합니다. 온갖 악독이 충만한 세상입니다. 바로 이런 세상에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으로 세상에 성령이 충만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가면 성령의 냄새로 충만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충만하면 세상이 충만합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내 잔이 넘치나 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성령의 잔이 충만하여 넘쳐서 세상을 적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이 바다 덮음 같은 성령의 내 속에서 충만하고 온 세계에 충만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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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이란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귀한 은총을 받았는데, 그것이 성령의 강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함께 하셨던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로흐만’ 박사는 "성령은 친밀하게 가깝게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놀라움을 일으키고, 기뻐하게 하는 하나님의 현존으로 나타나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성령이 충만하다"든가 "성령의 열매"라든가 "성령의 은사"라든가, 성령의 능력이란 말을 많이 듣습니다. 아마, 교회에서 성령이란 말처럼 자주 듣는 말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성령에 관해 처음으로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① 성령님은 성삼위(聖三位) 중 한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삼위(三位) 중 제3위가 되신 분이십니다. 성령을 성신(聖神)이시라고 합니다.
② 성령님은 믿는 사람과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6) 여기서 보혜사란 영어로 “도와주는 분”(helper)이란 뜻입니다. 성령님은 모든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함께 계십니다.
③ 성령님은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요3:6) 곧 성령님은 우리를 중생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힘으로도 지식으로 명예로도 거듭날 수가 없지만 성령님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④ 성령님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령님은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우리 속에 숨어 있는 죄를 찾아내시고 죄를 죄로 느끼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회개케 하십니다. 전에는 우리가 죄에 종노릇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자유와 참 만족과 참 쉼을 얻습니다.
⑤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6:1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바르게 잘 살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여 주십니다.
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시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성령님은 내 영혼으로 주님을 사모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기를 목마른 사슴이 시냇가를 찾듯이 사모합니다. 성령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사모하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84:10)
⑥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는 생각하기를 물질만 있으면 참 평안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면 물질이 없어도, 건강이 없어도, 명예도 없어도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어주시는 은혜를 통하여 참 평강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영적인 평안이 있는 사람은 모든 역경과 고난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⑦ 성령님은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⑧ 성령님은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고 열매 맺게 하십니다.(고전 12:8-10)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22-23)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회의를 느낄 때에는 “나는 솔직히 성령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만약 내가 성령의 은혜를 받았다면 왜 이렇게 타락하고 타락하는 생활만 하느냐”라고 반문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라면 결코 범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속에 타락한 본성이 있기에 우리는 종종 성령님을 탄식시키며, 근심시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면 결코 성령님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강림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지 아니했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것이 아니라 오순절 때에 마가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의 강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이를 바로 알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초대교회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20:20의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 20:22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때에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이미 성령 강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을 처음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 곧 전도를 능력 있게 감당할 수 있도록 주신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신 역사였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성령의 능력 세례”라는 것입니다. 이것의 단적인 증거가 바로 행 1:8의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기억할 것은 우리에게도 성령의 능력 세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 세례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역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언제 성령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무의식(無意識) 중에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받았다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주라고 신앙고백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2:3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 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받은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아니하면 고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아니하면 마음이 언제나 공허하기 때문에 결국 그러한 인생은 허무주의나 비관주의로 인생을 마무리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한 자는 신앙이 병들거나 도중에 낙오하지 않으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 하나님 앞에 능력 있게 한평생을 쓰임 받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고독하지 않습니다. 결코 내적인 공허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시고(요 14:18)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어주시는 평안함을 맛보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요 14:27)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필요한 것이 많이 있지만 가장 귀한 것은 바로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성령의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날마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고전 12:31) 하나님의 은혜는 사모하는 자에게 역사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지 아니하면 다른 잡동사니로 충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무엇으로든 충만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꽉 찬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화) 제가 새벽기도회에 올 때 보면 그 시간까지 젊은이들이 돌아다닙니다. 몸을 비틀거리며 몰려다닙니다. 이들을 술에 충만하고, 세상에 충만하고, 향락에 충만하고, 쾌락에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이러한 것들로 충만한 사람들은 결국 곧 자기 자신이 공허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생체적으로 밤에 잠을 자야 기운이 찹니다. 밤새 흔들고 마신다고 하더라도 아침이 되면 더 허전해집니다. 밤에는 위가 비어야 건강한데 밤새 먹고 마시면 위가 라 면 충만, 술 충만이 되지요. 비어야 할 때 차고, 차야 할 때 비면 영육이 시드는 법입니다.
지금 우리 속에 담배연기가 충만하고, 술이 충만하고, 욕심이 충만하고, 음란이 충만해 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돌아와 보니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습니다. 이 귀신은 나가서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사람의 형편은 이전보다 더 악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 청소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것은 예수의 피 밖에 없습니다. 성령으로 씻어야 귀신이 안 들어옵니다. 바리새인은 그 입에 악독이 가득 했습니다. 외식과 불법이 가득 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했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은 그들은 죽은 사람의 뼈와 모 든 더러운 것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초대교회의 처음 시험을 가져왔던 아나니아에게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였느냐"라고 책망합니다. 아나니아는 충만하지 말아야 할 사단으로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성령을 속였습니다. 충만하지 말아야 할 것이 충만하면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충만’이라는 단어에 유의를 해야 합니다.
바울 서신 특히 옥중서신에는 ‘충만’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타납니다. 바울의 충만의 사상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어의 뜻은 "채우다", "성취하다" 또는 "완성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충만 또는 완성 또는 성취를 포함한 시간적 수적 전체를 의미를 말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는 만물에 충만하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충만은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구절은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충만 그 자체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가능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충만한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1.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지혜도 충만합니다.(3절)
본문에 2절 이하에 보니 사도들은 교회가 크게 부흥하자 일을 분담하여 사역하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서 사도들을 도울 수 있는 동역자 7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 기준에 첫 번째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지만 지혜가 충만하지 않으면 안 되고, 지혜가 충만하지만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령과 지혜는 동시적으로 충만해야 하고 동시적으로 충만해집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거룩한 상식을 갖춘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뱀같이 지혜롭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아니하면 분별력, 통찰력이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결국 무례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아니한 지식은 자기 자기도 모르게 강퍅함과 교만함으로 변해져서 자꾸만 다른 성도들을 적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별의 지혜를 소유하기에 때문에 공동체를 위하여 사랑하고, 온유하며, 슬기로우며, 조화를 이릅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여기에서 “지혜(知慧)”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살아가는 기술'이란 뜻입니다. 지혜는 묵상하는 삶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죽어 가는 기술로 가득해집니다. 진정한 삶의 기술은 성경에서 얻을 수 있으며, 참 지혜는 성경에서 성령을 통하여 공급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 5:15-18에서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하지 아니하면 어리석은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의 “어리석다”(absurd))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귀머거리'라는 뜻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사람은 지혜에 귀가 밝습니다. 야고보서 3:17에는 "오직 위로부터 난 지 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거짓에는 비고, 열매에는 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모세를 통하여 성막을 지을 때에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이 일을 맡 깁니다. 출애굽기 31:3에는 “하나님의 신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일하게 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의 부모인 엘리사벳과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하였습니다. 성경은 세례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합니다. 로마서 1:29에는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 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라고 합니다. 악독이 충만하면 지혜의 자리는 없습니다.
2.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칭찬을 듣습니다.(3절)
본문 3절 중반 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칭찬을 듣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것은 칭찬 듣는 조건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칭찬의 대상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면서 칭찬 듣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에서 비난의 대상이 될 때가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칭찬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고 첫 순 교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칭찬의 대상이었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았고 사도들을 쫓아냈습니다. 사도행전 13:52에는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고 합니다. 핍박을 받았지만 성령이 충만합니다. 성령 충만은 어떤 조건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충만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칭찬 듣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술 취하지 않는 생활”을 합니다. (엡 5:18)
안디옥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받았고 칭찬을 들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면 그 결과는 칭찬입니다. 사도행전 11:24에는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 가 주께 더하더라"고 합니다. 그는 착한 사람이며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또한 디모데도 형제들에게 칭찬 받은 자라고 합니다. 사울의 눈을 뜨게 하였던 아나니아도 다메섹의 유대인들에게 칭찬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리고 작은 일에 최선을 다 하지 못한 사람을 책망하십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리고 바울 은 빌립보서 4:8에서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칭찬 받을만 해야 합니다. 칭찬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칭찬 듣는 것은 더 좋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칭찬을 듣게 합니다.
3.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신실하게 감당합니다.(3절)
본문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지혜가 충만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신실하게 감당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한 사람을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야 합니다.
교회 일꾼의 자격은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교회 일꾼에게 필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지식도 필요하고, 재물도 필요하고, 건강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들은 필수조건은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필수 조건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 에게 이끌리셨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공생애의 시작에 중요한 조건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성령에게 이끌립니다. 성령 충만해서 성령에게 이끌려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습니다. 성령의 인도와 마귀의 시험은 같은 맥락입니다.
초대 교회의 제자들은 다 성령 충만함 받고 성령 말하게 하심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했 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전도의 조건이며 교회 설립의 조건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 여 설교하고 전도하였습니다. 온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 니다. 성령이 충만한 다메섹의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안수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보내 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행 9:17) 이 때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였습니다.
성경은 온통 성령의 충만을 교회의 일꾼 의 자격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일꾼의 자격은 철저하게 영성과 도덕성입니다. 성령 충만과 칭찬 듣는 깨끗한 삶을 강조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1절에는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일하는 사람은 일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을 만드는 사람은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분이 "인생은 테니스 경기와 같다. 당신은 서브를(섬김을) 잘 하지 않고는 이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서브를 잘 해야 합니다. 인생은 잘 섬겨야 합니다. 서브하는 볼 은 성령입니다. 성령으로 서브하십시오. 성령으로 섬기십시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영적 전쟁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 배후 세력인 보이지 않는 공중 권세 잡은 자와의 싸움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 6:12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ꡓ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싸움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성령의 충만은 영적 싸움에서만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생활 속에서 마땅히 나타내야 할 믿음의 큰 역사입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는 탐욕과 방탕과 위선과 악독이 충만한 바리새인 시몬 집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발을 닦았습니다. 향유 냄 새가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지금 세상은 성령을 거스리는 것으로 충만합니다. 온갖 악독이 충만한 세상입니다. 바로 이런 세상에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으로 세상에 성령이 충만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가면 성령의 냄새로 충만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충만하면 세상이 충만합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내 잔이 넘치나 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성령의 잔이 충만하여 넘쳐서 세상을 적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이 바다 덮음 같은 성령의 내 속에서 충만하고 온 세계에 충만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