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폭력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 정 혁 현


"요즘의 한국 영화 속에서는 폭력이 흘러 넘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쉬리>에 이어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조폭마누라>, <신라의 달밤>, <무사>, <공공의 적> 등등에 이르기까지 텍스트는 칼과 총에 난자된 육체에서 흐르는 피로 물들어 있다. 더욱이 이런 영화들은 한결같이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흥행 신기록을 수립하고 있다. 이런 현상들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대개 대중매체에 대한 청소년 또는 관객 일반의 '모방효과'를 들먹인다. '모방효과'란 대중문화 텍스트의 폭력장면이 새로운 폭력행위를 가르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미 학습된 폭력행위를 유발시킬 수도 있다는 매스미디어 심리학과 관련된 개념이다. 실제로 TV 뉴스와 신문들은 조직폭력배를 미화하는 최근의 영화들 때문에 미래의 '직업'으로 조직폭력배를 지원하는 청소년들이 늘어났으며, 이러한 세태를 반영하듯 인터넷에는 깡패를 모집하는 폭력조직의 인터넷 사이트의 조회수가 급증했다는 사실까지 전하는 판국이다.

문제를 표면적으로 본다면, 영화와 대중문화 속에 넘치는 폭력과 섹스 장면은 사회적으로 만연된 폭력과 음란문화의 주범인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사회적으로 강력한 폭력, 또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대한민국의 검찰과 경찰은 만화방을 뒤져 조직폭력배를 미화하거나, 성적자극을 유발하는 작품들을 찾아내서는 만화가게에 벌금을 물린다, 만화작가를 구속한다면서 법석을 떠는 일이 다반사이다. 물론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마치 폭력과 음란의 근거지처럼 규정된 대중문화를 쥐잡듯이 솎아내도 사회적인 폭력과 음란지수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이쯤 되면, 사회적인 폭력의 수원지는 대중문화가 아니라 다른 어느 지점이며, 그야말로 폭력 없는 세상, 건강한 성문화 속에서 살고자 한다면 바로 그 '어떤' 지점을 탐색해야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 넘치는 폭력은 사회적인 폭력과 어떤 관계를 맺고있는 것일까? 물론 폭력적인 영화가 소위 모방효과를 일으켜, 특정한 폭력행위를 유발하게 한다는 점은 일정한 사실성이 있다. 그러나 폭력적인 영화는 이와 반대로 '카타르시스 효과' , 대리만족 효과가 있어 폭력 욕구를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해소하기도 한다는 주장 또한 제한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폭력적인 영화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도대체 영화가 무엇이기에 이 바쁘고 살기 어려운 세상에 사람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며, 웃고 울며, 감동하고 분노하게 하는가? 음란한 영화와 폭력적인 영화는 음란한 사회, 폭력적인 사회와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가? 만일 우리가 건강한 성생활(금욕주의가 아니라)이 가능한 비폭력적인 사회를 원한다면, 그와 같은 운동의 과녁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영화 텍스트에 사용되는 이미지와 사운드가 어떤 방식으로 의미를 만들어 내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영화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거치면서 매우 복잡한 의미까지 전달할 수 있는 일정한 언어체계를 만들어 냈다. 소위 '영화언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글은 영화 언어에 관한 장황한 설명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영화언어란 특정한 시대와 사회가 이미지와 사운드를 이해하는 방식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관객들은 따로 영화 언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충분히 영화를 보고 즐길 수 있다. 단지 자신이 왜 신나고, 즐거워하는지, 왜 눈물 흘리고 감동 받는지를 분석적으로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한편 영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텍스트의 의미구성을 분석할 수 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또한 일종의 사회문화적 제도로서 영화가 갖는 성격을 파악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영화가 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항이 음란 폭력 영화를 이해하는 관건이기도 하다.

영화는 19세기 말에 탄생해서 20세기를 '영화의 세기'로 만들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21세기인 오늘날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 영화의 시대는 소위 자본주의가 전지구적인 차원으로 발전한 시기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성격 자체가 산업자본주의에서 소비자본주의로 변모한 역사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거창한 말을 하는 이유는 영화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매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영화의 성격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어긋나는 점이 있었다면 영화가 대중문화의 꽃으로서 오늘날과 같은 영향력을 갖지는 못했을 것이다. 영화는 동영상을 포착하는 첨단의 광학기술을 사용하는 기계적 예술인 동시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제작비가 소비되는 '중공업'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영화를 예술인 동시에 산업으로 이해할 때, 영화가 갖는 독특한 양가성이 드러난다. 아무리 뛰어난 영감과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는 예술가라 할지라도, 그가 '영화' 예술가라면 자신의 작품을 구매력 있는 상품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이 시대의 모든 예술이 그러하지만 영화는 특히 자유롭게 개인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매체가 아니다. 영화를 구매력 있는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서 제작자는 쉬지 않고 대중의 동향을 파악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영화 속에는 대중들의 관심과 소망이 반영된다. 영화가 집단적인 예술이라는 사실은 단지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감독과 배우를 위시한 여러 명의 스텝이 동원된다는 점만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한 편이 구매력 있는 상품으로 제작되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당대 대중들의 관심과 소망에 귀기울이며, 어떤 방식으로든 이를 영화적으로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영화는 진정 집단적이며 사회적인 예술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영화는 사회를 매개하며 반영한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사회를 재현(representation)한다. 하지만 만일 영화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영화에 그다지 열광하지 않을 것이다. '재현'이라는 말은 어떤 것을 표현하는 과정에 일정한 굴절이 있음을 암시하는 개념이다. 한편의 영화는 비록 그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할지라도, 현실 그 자체보다는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에 개입되는 다양한 형태의 욕망을 드러낸다. 영화는 현실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어떤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사회의 이상적인 가치, 또는 억압되어있는 은밀한 욕망을 드러낸다. 때문에 영화 속에서 전개되는 현실은 비현실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영화 속의 비현실은 영화 밖의, 관객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다. 만일 거울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한다면, 표면에 약간의 왜곡이 있는 거울을 생각하라.

영화는 환상이지만 매우 사실적인 환상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양가적인 심리상태에서 영화 속의 세계를 사실적인 것으로 체험한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나도 영화 속의 세계가 현실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있어. 그렇지만..." 만일 영화가 사실적이지 않다면 환상을 현실인 것처럼 체험하고 싶어하는 관객들을 매혹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는 일종의 실험실과 같은 것이다. 영화라는 실험실에서는 현실에서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을 대표하는 (욕망의 기표가 되는) 다양한 개성의 주인공들이 서로 경합하면서 그러한 욕망의 정당성과 가능성들을 가늠한다. 영화 속에서는 언제나 현재 우리의 삶을 조직, 통제하고 있는 법, 도덕, 이념, 가치 등등의 질서가 느슨하게 풀어진다. 그리하며 억압된 것들이 귀환한다. 성적인 욕망과 폭력적인 본능이 이러한 것들이다. 이리하여 영화 속의 세계는 꿈과 환상의 세계가 된다. 이와 같이 영화가 현실을 대체하는 가상현실이며, 현실의 질서 너머에 있을 수도 있는 다른 질서를 향한 욕망의 장소라는 점에서, 기존체제(status quo)의 시각으로 볼 때 본질적으로 위험하며 불온한 것이기도 하다.

폭력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영화에 대해 위와 같은 시각을 확보하고 나면, 영화 속의 폭력을 폭력 그 자체로 보기보다는 다른 어떤 것의 재현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앞에서는 영화를 '실험실'이라는 은유를 사용해서 이해해 보았지만, 여기서는 '증후(symptom)'라는 개념을 도입해보자.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무조건 두통약을 먹어서는 안 된다. 배탈이 난 증후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얼굴에 작은 화농성 돌기들이 생긴다고 해서 덮어놓고 피부연고제를 처방하는 의사는 돌팔이다. 그것은 소장이나 대장의 이상 증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의 텍스트에 나타난 음란과 폭력에 대한 돌팔이 처방은 검열이다. 이는 영화를 위시한 대중문화의 텍스트들이 사회적인 음란과 폭력의 수원지라고 오인해서 나타나는 대응책이다. 영화나 만화 혹은 뮤직비디오의 표면에 드러나는 폭력을 삭제하기만 하면 사회도 만사쾌조일 것이라는 아둔하고 단순한 생각이다. 물론 적당한 대증요법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대증요법을 근원적인 치료라고 강변하는 태도는 오히려 근원 자체를 은폐하고 온존시키는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영화는 사회를 매개, 반영, 재현한다. 거울을 깨뜨린다고 해서 못생긴 내 얼굴이 고쳐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최근의 한국영화에 넘치는 폭력은 무엇을 재현하는 것일까? 물론 그것은 폭력적인 한국사회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가 '군사독재체제'도 아닌데 폭력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폭력을 주먹질이나 칼질 또는 총질과 같이 물리적이며 신체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행위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폭력을 거의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선 수많은 폭력의 양태들을 나열해 보는 것으로 폭력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다의적인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폭력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기준으로 해서는 가정폭력, 학교폭력, 직장폭력, 군대폭력 등등 수 없는 분류가 가능하다. 또한 폭력의 성격에 따라 주먹질, 칼질, 총질 등을 지칭하는 물리적인 폭력과 물리적인 차원과 정신적인 차원이 복합된(물론 모든 폭력은 물리적인 피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성폭력, 그리고 보다 정신적인 폭력인 언어폭력 등등이 있다. 나아가 폭력의 범주에 따라 독점과 착취를 재생산하는 경제적 폭력, 차별과 배제에 의해 구성되는 문화적 폭력, 굴종과 억압을 강요하는 정치적 폭력 등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폭력을 온존하고 재생산하는 폭력이 있는데,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상징적 폭력'(violence symbolique)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모든 형태의 폭력을 폭력적인 것으로 간파하지 못하게 만들고, 이와 같은 인지적 오인이나 집단적 믿음을 일종의 메카니즘화 하여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폭력적인 질서를 개선하지 못하게 하며 오히려 정당화하는 문화적인 관습과 이를 공식화하는 집단적인 의식(cult)이 관련된다.

 

극복해야 할 폭력의 양상들

 

폭력을 이와 같이 이해할 때, 한국 사회의 폭력적인 양상이 드러난다. 근본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한반도의 사회적 성격을 구성한 첫 시발이 되는 근대 초기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화 자체가 폭력의 원형이었다. 한반도의 자생적인 근대화의 맹아는 일본에 의해 제거되었으며 대신 일본에 의해 '식민지적인 근대화'가 강요되었다. 해방이후 이러한 식민지적 근대성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회복하려는 시도는 점령지역 관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친일파를 보호하였던 미국에 의해 또 다시 좌절되었다. 식민지적 근대성이 온존된 상태에서 신식민지적 근대성이 다시 이식된 것이다. 이러한 좌절은 현대사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5.16, 5.18 등의 숫자들은 그러한 시점을 지시한다. 최근에 신자유주의적인 세계체제 재편과정에서 한국에 발생한 IMF 사태 역시 그러한 맥락 속에 놓인다. 종합해서 말하면 오늘날의 한반도에 있어서 폭력적인 상황은 일종의 유산이며, 또한 우리가 물려받아 현재적으로 재생산하는 존재조건이다. 한편 폭력은 생산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가 만일 폭력적인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조건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고 단지 노예적으로 적응하려 한다면 역사는 정지하고 우리의 삶은 최악의 수레바퀴를 순환하는 저주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고, 삶의 주권을 회복시키기 위해 반성하고 대화할 수 있다면 우리는 폭력적인 상황에 맞서 보다 비폭력적인 삶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사회의 합리적인 성찰을 가로막는 가장 핵심적인 폭력적 이데올로기를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50년 넘는 분단 상황은 남북 양측을 이념적인 절름발이로 만들었는데, 남한 사회에서 이는 반공 이데올로기로 나타난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남한측 장성 표장군은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들만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바로 "빨갱이와 빨갱이 아닌 사람들"이다. 사회주의 붕괴 원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체제 경쟁에서 자본주의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보다 유연하게 사회주의의 장점을 받아들어 자본주의의 문제를 수정하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대체로 동의한다. 사회주의는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향한 위대한 실험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식적인 인식이 남한 사회에서는 아직도 통하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절대악이라는 꽉 막힌 생각 속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를 수정하여 보다 인간적인 사회체제를 만들려는 어떤 노력도 체포, 구금, 고문, 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실상 자본주의 정신 자체를 부정하는 자기 모순이며, 반성적 성찰을 불가능하게 하는 야만적인 사고, 즉 극단적인 폭력이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전투적이며 이분법적인 배타주의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사회 구성원들을 일률적으로 아군과 적군으로 보는 태도가 그것이다. 한국 교회 일각에서 모든 타종교를 사탄의 종교라 규정하고, 이를 모두 쓸어버려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는 전투적인 대결주의 경향은 그 명징한 실례 중의 하나이다.

남한 사회에 폭력을 흘러 넘치게 하는 두 번째 수원지는 역시 극단적인 배금주의, 혹은 물신숭배이다. 배금주의가 폭력적인 이유는 경제적인 가치가 인간의 삶을 위해 견지되어야 할 수많은 다양한 가치들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공부하는 이유도, 운동을 하는 이유도, 인간관계를 맺는 이유도, 심지어는 하느님을 믿는 이유도 오직 하나,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도대체 삶의 질을 위해 돈이 필요한 건지, 돈을 위해 삶이 필요한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경제적인 가치는 제한된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적대를 유발할 수밖에 없다. 더 많은 돈을 소유한 사람이 더 많은 권력을 가지며, 더 많은 명예와 더 숭고한 인격적인 가치까지 소유하게 되는 사회에서, '선의의 경쟁'이란 그 이전투구와 같은 실상을 가리는 허구적인 수사일 뿐이다. 돈이 다른 모든 가치를 지배하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능수능란하게 경쟁자를 밟고, 동업자를 후리며, 피고용인들을 착취하는 폭력 행위가 일종의 능력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배금주의와 물신숭배에서 교회도 결코 자유롭지 않은데, 예를 들면 목회자의 능력이 오로지 그가 '소유'하고 있는 교회의 규모를 통해 가늠되는 세태가 그것이다. 하느님의 은혜가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가 이해하는 바와 같이 물질적으로 가시화된 경우는 교회사 전체를 통틀어도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세 번째는 전근대적인 연고주의이다. 연고주의는 학연, 혈연, 지연에 대한 이상 집착을 가리킨다. 학연이나 지연, 또는 혈연이나 출신 지역은 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일종의 운명적인 소여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연고주의에 빠진 사회에서 개인의 신념에 의한 자유로운 정치적 결정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될 수 없다. 남한 사회에서 연고주의의 극단적 폐해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지역주의이다. 한국의 정당들은 정치적 신념의 결사체들이기 보다는 전근대적인 지역주의에 바탕하는 일종의 봉건 영주체제의 행태를 연출한다. 시원에 대한 환상적인 허구에 기대는 연고주의는 그 자체로 퇴행적인 것이며, 개인의 사고와 행위를 봉건적인 관계에 결박시킨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물론 한국 교회 역시 이와 같은 연고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교단과 교파간의 분열이 대개 신학적인 합리성을 결여하고 비이성적인 집단주의의 양태를 보이는 것, 교회연합운동에서도 운동의 명분과 신학적인 정당성을 기준으로 능력있는 인물이 배치되지 않고 교단 안배에 급급하는 것 등이 그 실례이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이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주의이다. 이 문제는 연고주의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보다 분명하게 성차별주의적인 성격을 갖는다. 차이, '다름'의 문제가 우열, '잘나고 못남'을 가르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이 역시 야만적이며 비합리적인 사고이다. 심각한 것은 교회가 이러한 종류의 폭력의 온상이라는 사실이다. 교회구성원의 절대 다수가 여성임에도 한국교회의 여성 지도력은 절대 빈곤하다. 더욱이 한국교회는 이와 같은 폭력적인 양상을 성경구절로 정당화, 합리화할 분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시대적인 해석 자체를 봉쇄한다는 점에서 상징폭력의 주체이기도 하다.

 

문화사회, 평화공동체를 향하여

이상으로 한국 사회에 만연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배태하는 수원지와 같은 몇 가지 폭력성들을 지적해보았다. 물론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지적할 수 있겠으나 가장 중심적인 것들만을 최소한으로 추려본 것이다. 이와 같은 폭력성들은 개인의 자유로운 양심과 그에 따른 다양한 차원의 선택, 그리고 개인의 능력에 걸맞은 평가 등을 이념적인 근거로 하는 근대성의 전개를 왜곡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그리고 불필요한 불행과 폭력을 야기한다. 근대적으로 구성된 욕망이 다양한 전근대적인 폭력에 의해 억압당하는 상황에서, 적절한 경로를 따라 분출하지 못하는 욕망은 공격적인 성향을 갖기 마련이다. 최근의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에 넘치는 폭력장면들은 바로 이와 같이 폭력적인 사회 속에서 억압된 관객의 욕망에 소구하는 것이다. 억압된 것들이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과잉된 폭력의 이미지들을 통해 귀환하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는 욕구불만의 폭력은 항상 대체용 희생물을 찾으며 결국은 찾아낸다고 주장한다. 희생양이란 욕망을 유발한 대상이 정복/쟁취 불가능할 때, 폭력이 그 대상을 대체한 것이다. 그렇다면 스크린 속에서 흥건한 피와 함께 처참하게 죽어 가는 주인공들은 가상세계의 희생양들이다. 우리는 영화관람이 한 시대의 문제가 만드는 트라우마를 확인하고 치유하는 일종의 대중적 제의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물론 가상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공격성의 해소가 현실의 폭력을 온존시키는 효과를 유발한다고 볼 때 이러한 행태는 어느 정도 퇴행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운동의 과녁을 현실 그 자체의 폭력성에 두지 않고 오로지 스크린 상의 폭력에 두는 태도는 더욱 퇴행적이며 위험한 것이다. 폭력적인 현실에는 눈감은 채 스크린 상의 폭력만 삭제한다면, 분출할 출구를 찾지 못하는 폭력성은 더욱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속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도덕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 대중문화 텍스트 상에서 음란과 폭력을 삭제하기 위해 전개되는 문화운동은 본질적으로 반문화적이며 폭력적인 것이다.

나는 글의 서두에서 영화 속의 폭력이 갖는 폭력 유발효과와 대체효과를 함께 지적하였다. 그리스도교 문화운동이 문화사회 속의 평화공동체로서의 정체를 구현하려 한다면, 궁극적으로 현실 자체의 폭력성을 겨냥하면서 스크린 상의 폭력이 지니는 양가적인 효과를 적절하게 조율하는 '문화적인' 안목부터 배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