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함정

장영일 목사(범어교회)


한 때 베스트셀러였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란 책을 기억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감명을 받고서 어떤 결정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먼저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생각해보는 좋은 습관을 갖도록 도와준 책이다. 성경에는 그것을 뒷받침 해주는 여러 구절들이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등 많은 말씀들이 그렇게 하도록 강권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사유의 방법론에는 위험한 함정도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이라면?'의 사유 주체가 겸손히 말씀과 기도에 의존하지 않고 성경의 전통적 이해나 경험에 고정되어 있거나, 어느 특정한 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거나, 혹은 자기의 주체성이 강한 사람이 '예수님이라면?'하고 그 답을 내릴 때, 대체로 매우 편협한 결정을 내리거나 자기 판단에 고집스러울 때가 많다는데 문제가 있다. 자기 생각을 하나의 의견으로 개진하지 않고 진리란 신념으로 타인에게 강요할 때가 많다. 그래서 교회 내에 분쟁까지 유발시킬 때도 있다.
 
예를 들면 가난한 이웃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애정과 관심에 매료된 사람들은 사회 구제와 봉사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교회를 본다. 그런 눈을 갖고 있는 교인은 교회당 건축이나 문화 선교의 행사에 거액의 헌금이 쓰이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고 화를 내며 교회 지도자들에게 항의를 한다. 한 때 해방신학이나 민중 신학이 한국 교회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 때 심심찮게 있었던 모습들이다.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우시는 예수님의 인정에 목말라하는 교인들은 잔치 집에 앉아 웃고 있는 목사들을 '먹사'라고 부르며 비난을 한다.
 
세례자 요한도 그런 함정에 빠졌었다. 자기가 생각했던 메시아는 심판의 주라고 확신했었다(마 3장). 그런데 예수께서 감옥에 갇힌 자기를 위하여 헤롯에게 공의의 심판을 내리지 않고 병 고치며 귀신 쫓아내시고 설교만 하고 다니시니 실망하고선 자기 사람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하고 질문을 던졌었다(마 11:3).
 
우리는 사고의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편협하거나 고집스러운 우리들의 모습과는 달랐다. 어느 자리에 고착되어 이웃과 세계를 보지 않으셨다. 바울 사도도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복음을 위하여 여러 모양이 되어야 한다고(고전 9장) 가르쳤다.


기독신문 (ekd@kid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