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누드 파문   

세계 만방에 한국의 평화주의적 독립 의지를 드높였던&nbsp3·1절을 앞에 두고 의욕적인 프로젝트가 사회에 큰 파장 을 불러 일으켰다. 이른바 위안부 누드 파문이다. 파문이 일어난 것은 단순히 누드라는 선정적인 얄팍한 상업주의의 결과이기 때문만 은 아니다. 그것은 민족적 아픔을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위안부 할머니들과 이 할머니들을 지원하며 함께 활동하는 단체들이 참다 못해 전면에 나섰다. 민족적 아픔을 팔아 돈을 벌려 는 얄팍한 선정적 상업주의에 분노를 표한 것이다. 사죄의 제스처가 있어 사그러드는 듯했지만 곧바로 그 진정성이 의심받는 행동들 이 이어지자 반대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다. 결국 필름 원본을 불태움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을 놓고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선정적 상술이 패배했으니 잘 된 일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이 주는 더 심원한 의미를 발견하고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행동에 적용해야 한다. 

그동안 대중문화 종사자들이 선정적 상업주의를 가지고 여러 사회적 이슈를 이용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 예는 이미지를 위한 기업 광고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장애인 돕기라든지, 시민 예절이라든지, 환경을 위한다든지 또 는 애국을 자극한다든지 등 예들이 수없이 많다. 아마 위안부 누드 기획도 그런 흐름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비슷한 것 들을 용인한 사회에서 위안부 누드 기획은 왜 먹혀들지 않았을까? 여기서 우리는 시대의 무의식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시대의 무의식은 건드리지 않는 한 사회적 표면 아래로 잠재되어 있다. 위안부 누드집이&nbsp3·1절에 맞추어 민족 적 아픔을 내세워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발상을 해낸 것은 뛰어난 기획력일 수 있다.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의 가치관을 좇는 사 람들에게 그런 발상은 매우 기발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시대의 무의식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할머니들과 그들과 함 께 오랫 동안 피눈물나는 투쟁을 해온 사람들의 존재가 하나의 시대의 무의식으로 잡고 있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은 그들 의 큰 실수였다. 아니 이제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위안부 할머니들을 두 번 죽이는 돈에 민족적 아픔을 파는 문화적 매국노의 반역이 었다. 

이번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깨달아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시대의 무의식을 읽지 못하고 섣부른 행동을 할 때 돌팔매질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을 지키기 위한 믿음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우주적 구원사 차원의 안목을 갖지 못하고 인간적 공로주의 차원의 죄를 끌어안는 댓가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문화 행위에서 절박하게 요구되는 것은 시대의 무의식을 파악하여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잘 적용하는 경건의 능력이다. 

박양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