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현대적 재조명   

해마다&nbsp12월이 되면 세계 여러 나라에 구세군의 종소리와 흥겨운 캐럴송이 울려 퍼진다. 이렇듯 크리스마스 는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고 사랑과 평화가 온누리에 가득하기를 기원하는 ‘전 세계인의 축제’이지만, 나라와 민족에 따라 크리스마 스를 맞이하는 모습은 조금씩 다르다. 예수가 태어난 성지 베들레헴에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수많은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말구유 광장 을 비롯한 시가지에서 캐럴을 부르고 폭죽을 터뜨리며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한다. 

베들레헴만큼이나 세계의 눈길을 끄는 곳은 핀란드 북쪽에 자리한 작은 도시인 로바니에미다. 마음씨 좋은 산타클로스가 살고 있어 ‘산타 마을’이라 불리는 로바니에미에는 크리스마스를 산타클로스와 함께 보내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전야에 촛불을 켜고 행운을 기원하며 ‘크리스마스 장작’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장작을 벽난로에 집어던지는 독특한 풍습이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산타가 흰 말을 타고 온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한여름에 크리스마스를 맞는 남반구는 어떨까. 아르헨티나의 경우 크리스마스를 ‘나비다드(Navidad)’라고 한다. 그리 고 산타 대신 ‘빠빠 노엘’이 선물을 주며 온가족이 모여 파티를 열고 사과주를 마시며 소원을 빈다. 이밖에도 미국 켄터키 주에서 는 선물을 가득 실은 ‘산타클로스 열자’ 가 운행되고, 필리핀에서는&nbsp12월&nbsp16일 새벽에 ‘환희의 종 소리’가 교회마다 울려 퍼지는 동시에 크리스마스 축제가 시작된다.

“성탄절이 세계적 명절이 되었다”는 것은 가슴 뿌듯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한편 마음이 착찹함을 금할 수 없는 알맹이 없 는 것은 장식, 곧 본질을 잃어버린 축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성탄 때 교회당에서는&nbsp6m의 대형 전나무로 오 색찬란한 트리를 장식하여 교회당 밖에 세웠을 뿐만 아니라 교회당 넓은 정원에 있는 각각의 나무마다 안개등을 총총히 달아 서&nbsp12월&nbsp24일 저녁을 밝혔다. 온 교인들이 좋아하고 주위 동네사람들도 구경하느라고 야단법석이었 다. 이날 성탄축하식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다리를 저는 불쌍한 사람이 새끼 양 한 마리를 안고 찾아와서 구경을 하려 하였다. 말쑥 하게 차려 입은 신사 한분이 그 사람을 냉정하게 교회당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주위의 교인들도 둘러 서 있었지만 어느 누 구도 불쌍한 사람을 동정하는 자가 없었다. 결국 불쌍한 사람은 새끼양과 함께 쫓겨나야 했다. 그런데 그 시간부터 교회당 종 탑 맨 꼭대기에 장식한 별등의 불이 꺼진 것이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유 없이 그 성탄 별등에서는 끝내 성탄절이 지나갈 때까지 불 빛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성탄절의 본질적 의미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세계에서 일어날 영적평화(눅2:14)와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평화를 내다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본질적인 것이 퇴색된 오늘의 성탄축제는 사실상 세속화된 것이 아닐 수 없다.

한때 우리사회에 “크리스마스 베이비”라는 용어가 생겨날 정도로 성탄절은 유흥퇴폐문화의 확산으로 인한 성적 범죄의 기회로 전 락해 버리기도 했다. 성탄절의 기본정신이 바로 전달되고 확산되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타난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의 목적과 의미를 되새겨 야 한다. 그분이 왜 오셨는가?

첫째, 자기의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마1:20).

둘째,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다(눅2:14).

셋째, 당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죄인들을 섬기기 위해 오셨다(막10:45).

넷째, 인간을 사랑하사 친히 당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 이 사건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막10:45, 눅2:14, 요3:16).

크리스마스는 단순히 즐김만을 위한 날이 아니다.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신 날인만큼 우리는 우리의 죄를 위해 오신 예수그리스도 에 대해 더 생각해보고 우리의 사명을 더욱더 되새겨야 할 것이다. 참으로 이번 성탄절은 먹고 즐기는 것에서 뛰어넘어 ‘이웃들과 함 께 하는’ 하얀 성탄절(white&nbspChristmas)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독신문 / 정용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