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면서


종교개혁, 그리고 루터와 칼빈   


종교개혁&nbsp486주년을 맞이했다. 알다시피 중세 카톨릭교회의 부패에 감연히 맞서 어거스틴수도회 신부이자 대 학 교수로 활동하던 독일인 마르틴 루터가&nbsp95개 시정조항을 들고 나오면서 종교개혁의 성화가 본격적으로 타오르게 되었 다. 루터는 바티칸이 금서로 지정한 <독일신학>이라는 책을 통해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진리를 확보함으로써 그의 본 가와 다른 행보를 획책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자기가 말한 것처럼 ‘시대의 새벽’에 서 있었던 것이다. 

루터가&nbsp19년여간 활발히 종교개혁운동을 펴고 있던&nbsp1536년,&nbsp27세 난 불란서 의 한 청년지성이 스위스 제네바에 들렸다. 파리대학 학장 취임연설문을 써 준 게 화근이 돼 누이와 피난길에 올랐던 참이었 다. 이 존 칼빈이라는 청년을 제네바 교회의 지도자 화렐이 찾아가 제네바에서 자기들과 힘을 합쳐 종교개혁 하자고 강권하였다. 

종교개혁은 스콜라신학으로 무장한 카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성경에 어긋나 있다는 성찰에서 힘을 얻었다. 르네상스의 여파로 기독 교 안에는 바티칸이 나누어준&nbsp2차문서에 연연하지 않고 원어성경에 근거한 신앙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 의 성경적합적 사고는 기독교를 본래의 모습으로 환원시키자는 외침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가 주목하듯 ‘오직 성경으로!’ 가 종교개혁신앙의 모토다. 

그런데 루터와 칼빈이 똑같이 성경의 바탕 위에 서 있었지만 서로 강조점을 달리하고 있었다. 루터가 구원론에 집중하고 있었다 면 칼빈은 우주론적 관심을 보였다. 루터가 신학에 몰입했다면 칼빈은 인간학적인 데까지 나아갔다. 루터가 교회중심이었던데 반하여 칼 빈은 삶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고 있었다. 루터의 저술은 이것저것 주제에 따라 분산되어 있지만 칼빈은 마치 판결문처럼 일목요연한 체 계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루터와 칼빈 개인의 차이 외에도 그들이 활동했던 무대의 차이도 컸다. 우선 루터와 칼빈은 준비된 배 경이 서로 달랐다. 루터는 속세를 떠나 수도원에 머물면서 신학을 공부했다. 칼빈은 아버지의 출세욕구에 맞춰 일반대학에서 법학을 공 부했다. 하나는 영성의 잣대를, 다른 하나는 세속의 잣대를 준비했던 것이다. 둘 다 인문학을 공부한 것은 그 당시 고등교육의 일반 적 관례였다. 그래서 고전어에 밝았다. 

또 루터는 여러 제후들이 다스리는 정치적 상황에서 종교개혁에 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한계상황에 부딪칠 때가 있었다. 당 시 독일 교회는 교황의 허락을 받은 제후들의 손안에 있었다. 그러나 제네바는 시민들이 민주적 절차에 의해 시의회를 구성하고 행정관 을 선출하였다. 제네바 교회 역시 외부의 간섭이 없는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것들이 비텐베르그의 영웅과 제네바의 개혁가를 선발주자이나 부분적 관심자요, 후발주자이나 전체적인 관심자로 대별시켰다. 하지만 루터 없는 칼빈은 예상키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