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이 없다는 것]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모두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여러분은 중보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불신의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 중보자로 서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윤리와 그 양식으로 둘러싸인 
그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셔야 됩니다.
율법을 통과해 들어가셔야 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우리의 절망, 
희망 없음으로 그들과 만나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 그들을 만나는 자는 
그 양들을 목자에게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잡아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오늘날 여러분이 갖고 있는 신앙들을 점검해 보십시오.
그 점검의 맨 밑바닥이 자랑이면 틀린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렇게 이야기되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먼저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나를 아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름을 각각 불러낸다.'
그가 오셔서 우리를 찾아 내시고 불러 내시고 
그가 인도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갖는 공통된 감격은 
'하나님께서 과연 불쌍히 여기셨구나'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찾아 오셨도다.'
이것이 기독교의 감격들이요 승리의 외침입니다.

그러므로 기독인들에게는 절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 결론입니다. 왜요? 절망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는 포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포기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신자란 원래 전무의 희망상태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심으로 이제 한 걸음
내디딘 사람들입니다.
좌절할 것이 없습니다. 
옛날보다 한 걸음 더 나가 있습니다.

좌절이 왜 있습니까? 시작이&nbsp0(zero)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아닌 것 때문에 너무나 많은 심령들을 상하게 하고
훔쳐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nbsp0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은 자들을
단호하게 이렇게 부릅니다.

'눈 먼 인도자'라고...
'너희가 소경인데도 소경이 아니라고 하는구나?'라는
날카로운 지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조심하셔야 됩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이 실수를 했고 
현실에 있어서도 신자들이 이러한 실수를 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습니다.


('요한복음강해'/박영선목사/도서출판 엠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