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교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난 8월 국회에 제출된 한 자료에 의하면 작년 우리나라 전체 자살자 수는 1 만 3005명으로 2002년의 1만 3055명 보다0.38% 감소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빈곤으로 인한 자살자는 731명으로 전년의 600명 보다 21.83% 증가했다. 지난 1998년 IMF 경제위기가 찾아왔을 때 급증했던 빈곤에 의한 자살자들이 그 이후 경제가 안정되면서 점차적으로 감소되어 오다가 2000년 이 후부터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점점 더 국가의 경제가,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서민들의 가계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얘기이다.

가난 때문에 가정불화가 생기고 그래서 자살한 사람도 작년에 977명이었는데 그것은 전년의 842명보다 16.03% 증가된 수치이며 사업에 실패하여 자살한 이들도 역시 426 명으로 전년의 368명보다 15.76%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수치들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정부 를 질타하며 경제정책에 대해서 평가하게 된다. 물론, 국가 경제가 회복되고 경기가 살아나기 위한 좋은 정책들을 찾아야하고 또한 정 부 관계자들에게 시정될 부분을 지적해 줘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을 다 한 것인가? 정부나 경제정책을 질타하는 것만이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 게 요구하는 전부인가? 오늘 우리 주변에서 가난 때문에 이혼하고, 자살하며 고통 중에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 겠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요단강에 세례 받으러 나아온 종교인들에게 외쳤던 세례요한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있다: “(너희가) 속으 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그 말을 듣고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되묻는 그들에게 세례요한은 이 렇게 답변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눅&nbsp3:8∼11) 이 세례요한의 말은 과연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말해주고 있다.

누가복음서의 몇 장 뒤로 넘어가면 삭게오의 회심 사건에 대한 기록이 또 나온다. 삭게오가 예수님을 만나 그를 영접한 후 고 백한 내용은 중생자가 취할 세상에 대한 태도를 드러내준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 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nbsp19:8). 그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 사람도 아브라 함의 자손임이로다!”고 하셨다.

이런 예기들을 꺼내면 어떤 이들은 “교회가 구제기관인가?”라고 묻는다. 물론 구제기관만은 아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아브라함의 자손이 세상에 대해 취할 중요한 태도들 중의 하나는 주변의 어려운 이들을 돌아보는 일이다.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Stott 교수는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두 비유를 비교하면서, 예수님의 관심을 균형있게 이해할 것을 강조했다. 탕자의 비유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바로 그것들이다. 그 비유들을 통해 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 중에는 제멋대로 살아가는 아들들 즉 영적으로 잃어버려진 자녀들만 아니라, 괴한들에 게 희생당하여 사회적으로 버려진 이들의 문제도 포함된다는 것을 말하려했다는 것이다. 전자가 개인의 죄에 대해서 지적해준다면 후자 는 공공의 악을 지적해주는데 이 모두는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함을 말하려했다는 것이다. 

오늘 세례요한이 우리에게 나타나 요단강에서의 메시지를 다시 외친다면 한국교회와 성도들 중에 과연 얼마나 “나는 참 아브라함 의 자손이요”라고 답할 수 있을까? 오늘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신자됨의 의미를 “영적인 측면으로만”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 지? 이 어려운 국가적 시기에 우리는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그리고 삭게오의 신앙고백을 다시 한번 곰곰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 다. 

김광열 교수 / 기독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