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과 신학                                         

배 경 식 교수


인간의 양면성 - 마스크를 쓴 인간-    

 
사&nbsp40:27은 인간의 양면성이 나오는 전형적인 구절이다.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갖는 양면성은 야곱 은 개인을 그리고 이스라엘은 민족을 대표로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창&nbsp32:&nbsp28절에 의 해 이미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으로부터 획득하였다.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이긴 결과 얻은 축복의 이름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동시에 사용된 것은 하나님의 신실성속에 보여지는 인간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고 할 수 있다.
야곱은 과거의 개인 나를 의미한다. 죄와 허물, 거짓과 세상중심적인 물질 추구를 하던 개인 나를 말한다. 이 야곱은 하나 님 앞에 말할 것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어찌하여 말하는가라고 반문하신다.
이스라엘은 변화된 개인 나이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축복 속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한 가지 우리가 주의 깊 게 볼 것은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 과정이다.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 것은 자신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 이다. 성경은 이것을 야곱의 외로운 씨름(창&nbsp33:24)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게 축복하지 아니라면 가게하지 아니 하겠나이다”(창&nbsp23:26)라는 이 말속에서 우리는 축복의 근원이 어느 곳에 있는가라는 반문과 답을 찾을 수 있 다. 
하나님의 축복은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 야곱은 이러한 축복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상에서 하나님을 대 변 하는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으며(창&nbsp27:27) 한 가지의 예언의 부탁도 받았다 (창&nbsp28:1-5).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생육하고 번성하며 여러 족속을 이루는 자손과 땅의 축복을 말한 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아내를 취하라는 명령이었다. 
야곱은 자신의 과거 이름과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을 통해 키엘케골이 말하는 동굴의 우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인간의 과거라 는 둘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평으로 향하는 미래 지향적인 순간을 맞는 것이다. 이를 어거스틴은 과거적인 현재에서 현재적인 현재 로 승화하는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이스라엘에게는 숨겨진 사정과 원통한 일들이 현재라는 사건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다시 과거 적인 현재 즉 인간의 기억 속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영원하신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전능의 하나님(엘 샤다이)을 고백하 는 것이다.
인간의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인간이 드리는 찬양과 기도도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는 것 이외에 다 른 무엇이 되겠는가? 그 이외에 자신의 이기적인 것에 근거한 다른 무엇이 된다면 그것은 포이에르바허(Feuerbacher)가 말 한 “종교란 결국 자신의 이상과 소원을 투영한 현상”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성령 충만이라는 것 역시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빛을 받아 광채 가 난 것처럼 하나님이 내 자신의 빈 공간에서 임재하여 일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인격적인 성령 충만 일 것이다. 
마틴 부버(M.&nbspBuber)는 신앙적인 구도를 “나와 너 그리고 그것”으로 명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인 간을 그리고 너는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그리고 그것은 제3의 신을 그리고 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믿는 신앙의 대상 인 하나님을 그것이 아니라 당신이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세속화된 사고에서 온 매우 인간적인 해석이다. 어 찌 하나님을 대상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언제나 주체적인 분이시다. 자신을 보여 주시기 원하시며 인간 과 깊은 교제를 위해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항상 주체자(Subject)이시다. 
성경을 일관되게 볼 때 “창조와 구원과 종말의 사역”이라고 한다면 각각의 사역에서 하나님은 주체이시지 객체가 된 적이 없 다. 바르트는 이것을 창조의 하나님, 속죄의 하나님 그리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  부버의 삼각구도는 하나님을 나 로 그리고 인간과 자연을 너로 바꾸고 그것은 지금까지 자연을 지칭하는 세속적인 말이었으나 한국적인 표현으로 볼 때 우리라는 말속 에 포함시키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서양의 학문과 예술은 이미 개인주의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인간을 부상시키고 인간의 업적을 찬양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적인 예술 작품들은 자연의 품속에  거하는 인간의 작은 모습들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흔히 서양적인 사고를 가지고 말할 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통해 자연에게 말하고 인간의 구원이 만물의 구원까지 이루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반대로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인간의 최초의 살인인 가인과 아벨의 사건 이후에도 모든 것이 정상적인 것처럼 보였으나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 게 호소하느니라”(창&nbsp4:9)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지적이 있다. 인간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히틀러가 저지 른 유대인 대학살(Holocaust)은 분명 "심연에서 나오는 소리들" (Stimmen&nbspaus&nbspder&nbspTiefe)이었다. 
산타야나(J.&nbspSantayana)가 말한 “역사를 되새기지 않는 자는 그것을 다시 반복하며 살도록 얽매어 있 다” (The&nbspone&nbspwho&nbspdoes&nbspnot&nbspremember&nbsphistory&nbspis&nbspbound&nbspto&nbsplive&nbspthrough&nbspit&nbspagain) 라는 말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저지른 인간의 실수와 죄악을 반성케 하는 좋은 교훈이 되고 있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과거&nbsp1960년대부터&nbsp80년대까지 군사정부가 저지른 만행과 잘못들은 이 루 말할 수 없다.&nbsp196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이 시작된 이후 경제성장을 제일로 하는 성장주의는&nbsp5개 년 경제 성장계획과 무역수지 달성이라는 목표를 정해 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국내외적으로 저지른 인권유린과 말살, 군사정부의 확 고한 토대 구축 등 나아가서는 삼선개헌과 총통제에 의한 영구집권의 계획까지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야기 들이다. 그 당시 에 생겨난 말들이 지금도 우리사회에 매우 부정적으로 만 들리는 인권운동과 산업선교 그리고 노조결성과 투쟁, 정경유착 이라는 단어들 이다. 그것과 때를 맞추어 독일이나 일본, 미국, 카나다에 값싼 노동력 수출과 심지어 월남에는 군인들을 외국에 보내어 목숨을 담보 로 한 것 등은 저개발 도상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결국 광주민주항쟁을 일으키게 한 도화선이 되었으며 자국의 군인들이 양민을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만행을 저지름 을써 민주화의 과정에서 오점을 찍었으며 한동안 이 사건은 아예 침묵과 금기의 사건이 되어버려 남은 가족들이 겪은 고충과 시련은 이 루 말할 수 없다. 
흔히들 유럽인들이 보는 한국인들은 한마디로 표현해서 타협과 중재가 약한 더 심하게 표현하면 화합이 불가능한 사람들이라고 한 다. 지금도 한국사회에서는 거의 날마다 데모와 노동쟁의가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된 배후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습득과 연습이 총체적 으로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서구사회에서 민주주의는 피와 땀과 죽음을 통해 얻어낸 산물이라고 볼때 민주주의를 수립하기위 한 연습의 과정은 지금 우리에게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  
남북통일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그 동안 독일 교회가 중재하여 여러번 남북교회의 대표들이 만나 회의를 하였 다.&nbsp1997년 라이프찌히에서의 교회의 날 행사의 일환으로 남북교회의 대표들이 만나 회의를 했다고 독일 교회는 알 고 있다. 당시&nbspKNCC회장인 박모목사는 미국에서 올 예정이었으나 안개 때문에 비행기가 뜨지 않아 오지 않았다고 했 으며 북한에서 온 대표들은 형식적으로 북한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필자가 선교를 주제로 하는 대화를 한 결과로 재확인되 었다.  남북한 교회의 선교의 참여와 협조에 대한 필자의 요청에 김모북한 대표는 동문서답을 하였다.
결국&nbsp1997년 대화는 한국의 기장 목사님들 몇 분과 한국의 정부를 비판하는 반미적인 성향을 갖는 북한의 정치 기독교인들 몇 분과의 대화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진전이 없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금번 제31회 개신교가 주최한 독일 교회연합 교회의 날 선교대회에서 마련된 민족의 통일예배와 세미나는 몇 분의 뜻있는 사람 들의 강의와 선교 정책을 듣는 선에서 끝이 났다. 한국에서 간 신학생들은 청취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금번 선교대회의 “너희가 하나님의 축복이어야 하리라” 는 총 주제는 설교나 성경 공부 그리고 모든 문화적인 행사 등에서 이지적인 독일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하는 상황에 까지 이른 것은&nbsp21세기 의 시대정신이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하였다. 
과거 독일이라는 장에서의 기독교는 서독을 대표로하는 자본주의적인 교회와 동독을 대표로하는 사회주의 체제하에서의 교회가 대등 한 관계를 가지고 협조하고 통일을 이루어 내는 물꼬를 텄다. 이것을 아직도 극한적 대립상황에 처해있는 북한과 한국에 적용한다는 것 은 시기상조라는 판단이 앞선다. 
한국교회를 대표로하는 단체는 한국교회 협의회(KNCC)만이 아니다. 물론 독일의 과거 상황과 비교하여 보면서 독일의 고백교 회와 상응하는 단체는&nbspKNCC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통일정책에 있어서는 다양한 목소리를 청취하는 것 이 더 바람직하다. 
한반도에서 미군 철수만 하더라도 극좌파적인 성향을 갖는 사람들은 북한의 선동적인 영향을 받아 무조건 미군이 철수되어야 한다 고 말한다. 그러나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상황에 비추어볼 때 미군의 철수는 공산화에 도움이 될지언정 한국의 진정한 민주화에 도움 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한국은 아직 민주화의 과정에 있는 나라이다. 아직도 가정과 학교에서는 유교적인 틀 안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학생들에 게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제한을 해야 하는 극단의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예를 들면 한국은 인터넷의 강국이다. 어느 곳에서나 젊 은 청소년들에게 모든 정보의 수집이 열려있다. 그러나 젊은 청소년들의 영혼을 더럽히는 부정적인 스팸메일들이 금지되면서도 제공되 는 모순 속에 빠져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의 강국인 한국의 각 가정마다 자녀교육에 있어서 게임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제한하는 것 보다는 성취감을 유발하는 프로 그램을 제작 할 수 있도록 동기 부여를 해 주면서 출구를 열어 준다면 더 나은 것들이 나 올수도 있다.    
학생들의 창의적인 것을 위해 과거의 교육이 제한을 받으며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하에 한국이 갖던 사제지간의 법도가 무너져 내리면서 학생들의 실력이 저하되어간다면 이를 되돌려 놓는 작업이 시급함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국의 사회는 분명 오늘이 있기까지 유교적 가부장적인 교육과 무속적인 종교의 영향아래에서 발전해 왔다. 기독교는 이것 을 잘 활용하였으며 미래의 사회에서 한국이 한국적인 것을 회복하고 찾으려면 이를 새롭게 개선하여 적용해야 할 것이다.